[ 모전자전 부전자전 ]
부산시 부산진구 전포1동 XXX번지 내가 태어나서 20년간 살았던 주소이다.
초등학교 시절 그 당시는 도시와 시골의 별차이가 없었든 듯하다.
비만 오면 진흙탕인 도로 때문에 장화는 운동화보다 우선하는 필수품이었고
고무신 신고 다니는 아이들이 운동화 신고 다니는 아이들보다 많았던 시절,
도시락 반찬에 계란 넣어갈 정도이면 부잣집으로 취급 받았던 시절이었다.
추운 겨울날 알미늄 도시락을 교실 안 난로 위에 얹어놓으면 맨 밑의 도시락은 누룽밥이 되던 시절이었다.
우리집은 길다란 골목의 맨 끝 집인 덕분에 난 골목집 아이로 불리웠다.
우리집은 아래채가 별도로 있는 기왓집이었다.
아래채는 세를 주고 마당도 있고 화단도 있는 요즘 같으면 중산층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밤이면 천장은 쥐들에게 세를 주었는지 밤 새도록 우당탕 하는 소리에 잠을 설칠 때가 많았다.
세 사람이 누우면 더 이상 여유가 없는 방이지만 방이 셋에다가 넓은 마루까지 있었다.
마루가 요즘의 거실 일 테다. 마당은 잔디 내지는 흙을 밟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시멘팅을 하였다.
그 당시는 신발에 흙을 묻히는 자연보다는 편리함이 우선하는 가치였나 보다.
그 마당 한구석에 차지한 수돗가에서 나의 아픈 기억이 시작된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 밤 수돗 가에 모여앉은 아래채 아줌마랑 동네사람들과
담소하던 어머니는 느닷없이 날더러 학교에서 배운 노래 한곡 뽑아 보라신다.
내 딴엔 정성을 다하여 “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구슬프게 불러대었지만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야야, 니는 와 그래 노래를 그리 못하노! " 하는 말씀에 그만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고 그 후로는 어머니는 내 노래를 들을 수 없었다.
원래 음치였는지 그때의 충격 때문에 후천적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노래는 나와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는 인식이 그 후 음악시간을 괴롭게 했으며
대학시절 MT에서는 남들 노래 부를 때면 슬그머니 빠져나와
빨리 끝나기만 기다려야 하는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직장에서도 회식 때는 왜 꼭 노래방에 가야 하는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18번을 하나 만들긴 했으나 남이 꼭 시키지 않으면 내가 먼저 부른 적은 없다.
몇 번의 경험으로 내가 부르고 나면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는 것이 나에 대한
배려라는 것을 알기에 이 또한 직접적인 핀잔 보다 더 힘겹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형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입사 3년차 일 때 회사 전체 체육대회를 하고 행운권 추첨을
하여 대상에 당첨되었는데 그 당시로 고가인 50만원 상당의 비디오 레코더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대상을 받으면 전 직원 앞에 노래를 해야 하는 관행이 있는걸 아는지라
행운권을 없앨까 하는 순간도 잠깐, 물욕에 눈이 어두워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가 상을 받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상을 하는 사장님의 주문이 " 노래 한 곡 하고 가져가야지" 하는 바람에
전 직원 앞에서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을 부르고 말았고 앞 소절만 듣고는 분위기를 파악한
사회자의 재치로 시간관계상 그만하라는 고마운 말씀은 평생을 두고 갚지 못할 은혜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 음치의 재능이 대 물림이 되는지 둘째 딸이 노래에 자신 없어 한다.
첫째는 엄마를 닮아 노래를 잘하는 것 같은데, 둘째는 내가 애정을 가지고 들어보아도 나를 닮은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할 수 없다. 누군가가 대신 해 줄 것이고 나름대로 소화시키길 바랄 뿐이다.
<이용욱님이 단체 카톡에 쓴 글을 허락없이 올리는 점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