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적인 전출-6
UN군 함포사격과 공군력이 강화도를 떠났는데 연합군이 보병위주의 조중군(朝中軍)보다 숫자적으로는 적지만 좋은 전쟁장비와 기계무기를 사용한다고 생각할 때 육지에서는 득세를 하지만 아무래도 서해에는 섬이 많아 탱크나 대포가 부족하고 주저항선(主抵抗線)이 길어지니 인해(人海)전술이 도서지방을 차지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박격포탄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산너머 적군을 죽일수가 있는데 비해서 탱크포는 직사포가 된다.
미군들이 후퇴 시 버린 장비들을 그들이 사용했는데 그들의 장비중 50%에 해당 된다고 하며 그 당시 너무 추운 날은 인민군의 박격포는 구멍이 오그라져 70%는 포탄을 장진 할 수가 없었단다.
예를 들어 내가 많이 보아온 조중군의 기본화기인 소제장총(Musin-Nagant)은 총열이 길어서 비록 단발일지라도 명중률이 높은 반면 미제 M-1총은 길이는 약간 더 짧을지라도 8연발이 된다.
구전에 한국군이 연발총이 더 좋다하니 인민군은 비록 단발일지라도 필살(必殺)이 더 좋다고 받아 쳤단다.
이 소련제 모시나간총의 실탄은 미제의 M1탄피보다 약간 더 크게 만들어 그들은 전리품으로 얻은 M1총알을 사용할 수 있지만 아군은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총에 사용하는 탄피는 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세계적으로 모두 질긴 놋쇠로 만드는데 단 소제 장총 탄피는 가장 흔하고 값싼 시우쇠(연철)로 만든 후 구리로 코팅을 했는데 깨어지지 않는 것은 얇은 쇠를 김밥처럼 두 겹으로 말았기에 더 질기게 되어 파열이 되지 않는다.
모든 금속들을 섞으면 더 강해지고 녹는점이 낮다.
구리와 아연을 섞으면 놋쇠가 되는데 강도는 더 높고 잘 녹으니 용접봉으로 사용한다.
결국 소련은 값싼 재료로 비싼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아버님께서 처음 사셨던 총은 옆으로 쌍대(영어로 side by side라 부르고 아래위로 쌍대이면 over and under라고 부른다)인데 영국산 이었다.
엽총은 가벼울수록 명중률이 더 높지만 총구가 얇으면 찢어지니 이것역시 얇은 철판을 두 겹으로 말아서 만든 것이 되며 방아쇠가 2개이어서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사용하는데 오른쪽 총구가 약간 더 위로 향하게 만든 것은 꿩을 쏠 때 왼쪽총구를 먼저 검지를 사용하여 복치기로 초격을 쏘고 난 후면 다른 꿩은 이미 날아서 더 멀리 난후이니(가운데 손가락을 사용)두 번 째 총알은 약간 더 공중으로 날아야(포물선의 원리)하기 때문이며 날치기의 재격은 위쪽을 겨냥하지 않고 탕탕 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조그맣게 수류탄이 그려진 이 총은 총열에 문신을 그려서 고급은 될지라도 총열이 얇아서 한국인 체질에는 적합하지만 수 천 발을 쏘니 얇은 총구는 강한 폭발 압력 때문에 약간씩 늘어나 구멍이 커지게 되어 총알이 흩어지니 명중률이 떨어지니 팔고 결국 일본산 총으로 바뀌게 된다.
소제의 모젤권총은 총열이 미군이나 한국군이 사용하는 미국제 45구경(총열이 짧아 근거리용이니 단지 호신용에 불과하다 총구의 직경은 45/100인치, 개의 뒷다리같이 생겨서 개다리라고 불렀다)보다 더 길어서 명중률이 높은데 예로 권총은 총열이 길수록 명중률이 높아지니 올림픽게임에서는 총열 길이가 기관부를 계산에 넣지 않은 6인치(약 15cm)를 넘는 것은 사용이 금지 되니 내가 소유한 2정의 경쟁시합[compete]용 10연발, 5연발 권총들은 모두 총열의 길이가 6인치를 초과하지 않는다.
한국군은 소위부터 장교라 부르고, 권총이 지급되는데 전장 이라면 적군과의 거리가 최소한 몇 십 미터는 되니 8발 권총으로 움직이는 상대방을 무력화시키기 전에 먼저 당하고 만다고 보아야 된다.
그리고 한국전쟁당시에는 군인들이 먹은 것이 없어서 대변을 3일에 한번 볼 정도이었다는데 미국제 권총이나 M1총은 기진한 상태의 한국군에게는 너무도 무겁게 느껴져서 적당치 않았을 것이다.
나도 훈련소에서는1936년식 M-1총을 지급받았는데 먹은것이 없으니 너무도 무겁게 느껴져서 구보를 할적에 총의 목을 잡을 힘이 없었기에 손을 편 상태로 손바닥으로 개머리판의 바닥을 손바닥으로 받치니 멀리서보면 총의 높이는 마찬가지이니 뒤를 따르는 조교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부대에 배치를 받은 곳은 야전수송부이니 가벼운 카르빈이 지급되었다.
M-1 Carbine 총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의 10개회사에 하청을 주어 약 6백 만정을 만들었단다.
전쟁 중 인민군이 전리품으로 획득한 미국의 말린(Marlin)회사 제품 칼빈 총을 메고 다니는 것을 내가 본적이 있는데 우리 집에도 이 회사에서 나온 모양이 다른 13연발의 반자동 소구경 소총이 2정 있다.
지금 만드는 M-3 Carbine 총은 옛날것과 같지만 단 적외선 망원경이 장착 된 것이 다르다.
‘이남도 내 나라요 이북도 내 땅인데 삼팔선 웬말이냐 꼴을 베는 아헤야’
라고 남북통일을 갈망하는 가요도 있다.
한국은 그 당시 38선을 기준으로 남한은 이남(以南), 북한은 이북(以北)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북한은 북반부(北半部), 또는 북조선, 남조선이라 한다.
한국전쟁이 유엔군과의 전쟁이라지만 실은 미국과의 전쟁이며 15개국의 다른 나라들이 미국만큼만 적극성을 띄었다면 압록강 이남을 짧은 기간에 적은생명의 희생으로 복구했으리라는 생각인데 미국이 한국전에 보낸 젊은이는 3년 동안 131만9천 명이고 국군을 그 당시는 국방군(國防軍), 군인을 도우는 노무자를 일제 때부터 사용해온 보국대(報國隊)라고 부르는데(사망 41만5천명)중국과 이북은 백만이 넘어 젊은 층의 반이 전사했단다.
남한에도 그 당시에는 현역으로 군인을 모집하는 징집과 포탄을 운반하고 밥을 지어서 군인들에게 배식을 하는 노무자나 예비역을 필요로 할 때에 사용하는 소집이 있었는데 남한의 국토가 얼마 남지 않은 경주부근의 일선에서는 가마니에 작대기 2개를 끼워서 만든 단가에다가 밥을 나르는 군속이 강을 건널적에 미군의 오폭하여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사람이 한달에 한번씩 부부가 모여서 댄스를 하는 계군에 있었다.
중국은 순서가 식의주(食衣住)가되지만 조선의 양반들은 권위를 의식해서 만든 단어는 의식주가 되는데 옷의 먼저이고 집과 밥은 다음으로 중요한 필수품이지만 그래도 중요하니 “집짓기 밥짓기”라는 말이 생겨난 것 같다.
내가 소년 때 본 인민군은 대게 비싼 철모를 착용하지 않고 천으로 된 모자와 군복에 굵은실로 그물모양의 수를 놓아서 풀을 꽂았는데 항공기가 나타났을 경우 엎드리면 보호색이 된다.
그들은 완전삭발을 했는데 만약 달이 없는 그믐밤에 육박전이 벌어져서 서로 뒤섞이게 되면 왼손으로 머리를 만져보고 적군인지 아군인지 식별을 한 후 오른손에 쥔 대검(帶劍; 찬칼)으로 찌른다는 무용담도 들어 본적이 있다.
육박전이 벌어지면 대검으로 찌르는 시간 보다 총을 쏘는 시간이 더 빠른데 총알이 바닥나면 칼로 대신해야 한단다.
머리카락이 길면 육박전 때 적의 손에 잡히기 쉽고 간수하기가 쉬우니 군인의 머리카락은 짧은 것을 원칙으로 한단다.
미군의 머리카락도 짧은데 이라크전이 벌어졌을 때는 불법체류자라도 입대를 하면 일년후에는 시민권을 주었다는데 지금은 불경기 때문에 모병사무소에 직업군인 신청자가 많아져서 이제도가 없어졌다.
내가 어릴 때 대해본 인민군들은 얼마나 상냥했는지 남여노소를 불문하고 보는 사람마다 동무라고 불러서 호감이 생겼는데 인민군 룰에 그들이 부녀자 성폭행을하면 사형이니 일단 안심은 됐다.
전열이 흩어져 명령 없는 후퇴와 패주를 하는 인민군은 육로를 피하고 산의 능선을 이용했는데 이때만 하더라도 우리 동내는 간선도로로부터 떨어져 있으며 신작로가 없고 소로가 있을 뿐이고 인민군들이 오지 않아 미국비행기의 폭격을 맞은 집은 없었다.
첫댓글 옛 전쟁시절 이야기가 생생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디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