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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사는 법/행 6:8-15
최근에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우리는 보통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습니다. 그저 스쳐 지나갑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서울을 다녀왔는데, 올라갈 때는 기차를 타고 내려올 때는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역전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또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얼마나 우리나라가 복잡한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가끔 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구석에서 관찰하곤 하는데, 사람들의 모양은 제각각이었습니다. 먼저 입은 옷, 머리가 다 다릅니다. 옛날에는 다 까만 머리였는데, 요즘 우리나라에는 돌연변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노랑머리에, 아주 멋있는 파란머리도 나왔습니다. 신발도 얼마나 다양한지 모릅니다. 굽도 높낮이가 다르고, 저보다 훨씬 키가 작은 여학생들이 제 구두보다 더 큰 구두를 질질 끌고 다닙니다. 핸드백, 장신구, 무엇 하나 정말 다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구석에서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때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정말 기쁜 표정의 얼굴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 얼굴만 봐도 "아, 저 사람은 굉장히 마음에 평화가 있구나! 기쁨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환한 얼굴, 또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의 평강을 갖다줄 정도의 기쁜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 초조하고 짜증스러워하며 뭔가 분노가 섞인 듯한 눈빛이었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 얘기할 것 없이 당신 자신에게 한번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정말 마음 깊이에서 평화를 느껴본 때가 언제입니까?
"아! 너무 평안하다!"하는 샘솟듯 기쁨이 일어나서 견딜 수 없었던 그 평화를 맛보았던 때가 언제입니까?
아니, 당신의 삶 가운데 그런 때가 있기는 하셨습니까?
성경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기쁨과 평안을 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당연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오늘 스데반과 같아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1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
우리 믿는 사람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당신은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천사의 얼굴은 어떤 얼굴입니까?
잘생긴 얼굴일까요?
피부가 하얀 너무너무 부드러운 얼굴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중 부드러운 피부를 갖기를 원하면 아마 열심히 마사지를 받으면 개선될 것입니다. 저도 며칠 이것을 해봤는데, 그 정성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수십 번을 문지르는데 팔이 아파요. 저는 못하겠더군요.
유명한 배우 브룩 쉴즈를 보고, 우리가 그녀를 미인이라고 할지는 몰라도 '천사의 얼굴과 같다'라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탤런트들을 보고 미남, 혹은 잘생겼다고는 할지 몰라도 천사의 얼굴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천사의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요?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평안을 주는 얼굴입니다.
즉, 마음의 평안이 어찌나 큰지 그 기쁨이 얼굴에까지 배인 사람, 그 평안이 얼굴에 나타나는 사람을 성경은 천사의 얼굴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스데반이 그러했다고 성경은 증거해 주십니다.
얼굴에 대한 에피소드를 가장 많이 남긴 사람이 아마 에이브라함 링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것은 에이브라함 링컨의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조차도 지금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에이브라함 링컨이 미남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아직도 씨름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남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전혀 아니다, 추남에 가깝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에이브라함 링컨이 자기의 못난 외모를 감추기 위해서 구레나룻 수염을 길렀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에이브라함 링컨 얼굴에서 구레나룻 수염을 컴퓨터로 싹 지워보니까 그는 굉장히 추남에 가까운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에이브라함 링컨을 미남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그 얼굴이 잘 생겨서가 아니라, 그 얼굴에 마음의 평안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좀 추남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의 국회 이야기를 하나 읽어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하루는 에이브라함 링컨이 국회에서 연설을 합니다. 그랬더니 그 맞은편 당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당신은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요!" 라고 소리쳤습니다.
이것은 미국 사회에서 굉장한 욕입니다. 어떻게 감히 연설을 하고 있는데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라고 합니까?
그러나 그때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굉장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여보시오! 내가 만약 얼굴이 두 개라면 왜 하필 이 중요한 자리에 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소!" 그의 이 말로 온 국회에 폭소가 터졌다는 것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분명히 잘 생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얼굴에 관해서 수많은 얘기를 남겼는데, 그 중 우리가 잘 아는 얘기가 '얼굴 책임론'입니다. 사람이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는 줄곧 주장해 왔습니다. 이것은 무슨 얘기입니까? 얼굴이 잘 생기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성형 수술을 하라, 화장을 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링컨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품고 있는 자기의 생각들은 세월이 오래오래 지날수록 자신의 얼굴에 나타난다고 믿었던 겁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초등학교 때 배웠던 큰 바위 얼굴을 아시지요?
옛날 한 동네의 바위산에 너무나 인격적으로 생긴 사람 모양의 바위가 있었어요. 그 동네에 한 가지 전설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언젠가 위대한 큰바위 얼굴을 닮은 인물이 나타날 것으로 믿고 사람들은 기다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학을 떠났습니다.
하루는 한 부자가 돌아왔어요.
"야, 저 사람이야말로 정말 큰바위 얼굴이다! 전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부자가 그 동네에 와서 한 달을 넘기지 못한 때, 그의 삶을 본 사람들은 다 실망해서 아니라고 합니다. 또 얼마 있다가 정치가가 찾아왔습니다. 저 사람인가보다 했는데 그도 역시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유명한 사람 가운데는 한 사람도 큰바위 얼굴을 닮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농사를 지으며 유학도 못 가고 그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던 사람, 늘 저녁이 되면 큰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명상에 잠겼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이 지나가다 보니까 바로 그 사람이 큰바위 얼굴과 너무나 똑같은 겁니다. 그날 저녁에도 명상을 하고 앉아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보니까 바로 그가 큰바위 얼굴인 겁니다. 지금 그의 얼굴 생김새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늘 명상하고 자기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때, 그의 표정이 넉넉하고 평안하게 바뀌어 있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얼굴이어야 합니까?
천사의 얼굴이 되어야 합니다.
미남미녀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화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쌍꺼풀 수술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하신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
코를 높일 필요가 있나요?
그렇게 하지 않고도 사람들에게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미인 이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보거든 빛을 발견하게 하라! 주 예수의 빛이 너희의 얼굴에서 나타나 천사의 얼굴과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너희의 얼굴에서 다른 사람들이 발견토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스데반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 되는 몇 가지 방법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화장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십니까? 미용실에 가서 얼마나 많은 돈을 들이십니까? 그러나 이 설교를 잘 들으시면 여러분은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효과를 얻으실 줄 믿습니다. 스데반의 삶에서 어떻게 우리의 평안이 얼굴에까지 미칠 수 있는가? 본문은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1. 부름 받은 삶을 살아라
어떻게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가? 먼저 부름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라는 미국의 유명한 신학가는 목회자이면서 IVF총재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했는데, 하나는 쫓기는 삶이요, 또 다른 하나는 부름받은 삶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중 하나의 삶을 산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먼저 쫓기는 삶은 어떤 삶인가? 환경을 지배하기보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그래서 늘 바쁘고, 늘 분주하고, 늘 할 일이 많습니다. 해도 해도 일에 끝이 없고, 가져도 가져도 욕심에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신기루를 쫓아 삽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이마에는 늘 '불만족'이라고 쓰여있는 겁니다. 과거에 비해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갔어요. 과거에 비해 생활이 정말 좋아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늘 쫓깁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쫓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의 삶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왜 사는지를 아는 삶, 부름받은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은 삶의 방향이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쫓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 땅에 보내셨는가를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에 나를 통해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가를 알고 그 일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부름 받은 삶입니다.
예수님도 삶을 똑같이 두 가지로 나누셨는데, 마태복음 6장에서 염려하며 사는 삶과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분류해 주셨습니다. 염려하며 사는 사람들의 목적은 이 땅의 의식주가 전부입니다. 왜 염려하는가? 이 땅의 의식주를 가지기 위해서, 더 좋은 옷을 사기 위해, 더 넓은 아파트를 사기 위해서입니다. 내 사업이 망하면 어떡할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매일매일 근심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근심'이라고 쓰여있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의 의식주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19평에 사는가, 50평에 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에 정신을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가기에, 환경에 관계없이 환경을 지배하며 평안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데반의 삶을 관찰해보면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의 삶은 결코 평탄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이 교회 안에서 맡은 일을 아시지요? 교회 안에 분쟁이 생겼어요. 남자들의 분쟁이 아니라 여자들인 과부들의 분쟁이었어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여 선교부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하면 되도록 안 끼이려고 합니다. 제가 능력이 없거든요. 집에서 마누라 하나 제대로 못 다루는데 어떻게 여자들을 다루겠습니까?
교회에 이미 수많은 당파가 생기고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스데반이 뛰어들었으니 그가 당하는 고통이 보통이었을까요? 거기다 돈 문제까지 걸렸습니다. 그는 아마 수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았을 겁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주님께서 맡기신 소명의식을 따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지 않은 말, 하지 않은 일로 스데반을 모함하기 시작합니다. 본문에 보니 공회 앞에 데려다 놓고 그를 욕합니다. 결국 그의 마지막은 어떠했습니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남의 얘기로 읽지 마시고 여러분이 한번 그 현장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갈고 씩씩거리며 돌을 몇 개씩 집어들었어요. 양손에 돌을 하나씩 쥐고 있습니다. 거기에 그 사람의 겉옷을 벗겨놓고 땅에 세웁니다.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던지자 수많은 돌들이 쏟아져서 그의 머리가 깨지고 눈이 터집니다. 그 공회의 현장, 수많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모함하며 재판하는 자리에 있었던 그를 두고 오늘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았더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더라."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스데반이 환경이 좋았습니까? 스데반에게는 고통과 고난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이렇게 평안하게 만들었을까요? 소명입니다. 내가 비록 이 땅에서는 고통과 모함을 받아도, 비난받고 돌에 맞아도, 나를 통해서 지금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그 의식이 스데반의 얼굴을 그 고통 가운데서도 천사의 얼굴로 만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일을 앞두고 있을 때는 괴롭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을 이루어 나가고 성취할 때는 얼마나 기쁩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토요일 밤이면 참 괴롭습니다. 잠이 잘 안 와요. 빨리 자고 일어나서 말씀을 묵상해야 되니까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잘 안 와요. 소파에서 새벽 3시 가까이 앉아 있는데 집사람이 나왔어요. "여보, 자야지!" 잠이 안 온다고 했더니 "내가 재워줄게!"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잠을 못 자다가 저에게도 기쁜 시간이 다가옵니다. 언제인가 하면, 설교를 마치고 난 주일 오후에는 날아갈 것 같아요.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의 삶이 이 정도일진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과 거룩한 소명을 날마다 이루며 살아갈 때 그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것은 환경이 막지 못합니다. 고통이 막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난 것입니다.
천사의 얼굴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땅의 신기루와 같은 의식주, 마시면 다시 목말라질 그 헛된 물을 쫓아 살지 마시고 영원한 생명수, 하나님이 주신 사명, 한번 마시면 우리의 배에서 강같이 샘 솟아나 우리를 다시는 목마르게 하지 않을 그 넉넉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하며 소명을 따라 살아갈 때, 쫓기는 삶이 아니라 부름받은 삶을 살아갈 때, 우리 마음에 기쁨이 회복될 줄 믿습니다. 또한 우리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천사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 먼저 부름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2.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라
성령 충만한 삶이라고 하면 굉장히 오해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고등학교에 다닐 때 "주님, 저에게 성령을 주시기는 주시되 충만하지는 말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어요. 왜냐하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보니까 다들 좀 이상하더라고요. 비정상이에요. 목소리부터 틀립니다. 역전에 가서 지나가는 사람 귀에다 대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하면서 그들은 소리지릅니다. 식당에 사람들이 많은데 열댓 명 와 가지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악을 쓰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멘!" 하고서는 그들,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이 먹으려고 눈이 시뻘겋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저는 '성령 충만을 받아서는 안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문제입니까?
본문을 보면 재미있는 단어가 계속 나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그들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또 10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이것은 스데반의 인격을 설명할 때 늘 따라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는 성령 충만했는데, 성령 충만할 뿐만 아니라 지혜가 충만했다고 얘기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성령 충만 = 비정상'이 아니라 '성령 충만 = 지혜 충만'이라는 겁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소리를 일부러 망가뜨리지 아니하고 정상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다음, 성령 충만 받은 자들의 할 일을 무엇이라고 얘기합니까? 기도원에 들어가라고 얘기합니까? 상식에 벗어난 일을 하라고 얘기합니까? 여기에 나오는 계명은 너무 간단합니다. "아내들아 남편을 존경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해라. 자녀들아 부모를 공경해라. 부모들아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 말라. 종들아, 상전들아..."
성령 충만한 것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관계가 원활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상한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옛날에 사귀던 친구들이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들이 지긋지긋하다고 손을 내젓는 것이 아닙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상사와 종업원, 친구, 성도, 어떠한 관계이든 그 관계 속에 원활한 물이 흘러서 원만하게 되는 것이 성령 충만의 증거인 줄 믿습니다.
왜 우리의 마음이 불편합니까?
언제 가장 괴롭습니까?
우리 인간은 관계가 틀어질 때 괴롭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졌습니다. 내가 죄를 범했는데 회개하지 않았어요. 은밀한 죄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하고, 그것이 내 얼굴에 나타나는 겁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다 있다 해도 집안에 싸움이 있어 보십시오. 편치 않습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육식을 먹고 다투는 것보다 채식을 먹고 차라리 초가집에 사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관계가 틀어져 보십시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와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나빠져 있다면 그곳은 지옥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성령 충만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 제1의 증거는 '관계의 충만'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성령 충만해 있는가, 아닌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방언을 하는가 예언을 하는가 그런 것을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관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원활하다면 여러분은 지금 성령 충만 받고 있는 겁니다.
기독교는 수양의 종교가 아닙니다. 내 힘과 내 수련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율법주의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거듭나는 겁니다.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내 영이 죽어 있었는데,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 내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령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었던 내 속의 영을 새롭게 잉태시켜 주는 겁니다. 잉태!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연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잉태된 줄 아십니까? 예수님은 남자 없이 태어나셨어요. 누가 마리아의 몸에 잉태시켰습니까? 성령 하나님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는 바로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잉태되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너무나 신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지금 내 안에 계시다고요.
그러면 성령 충만은 무엇인가? 내 안에 계신 그 생명, 그 인격자, 그 하나님에게 내가 온전히 굴복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왜 그렇게 불안해야 합니까? 왜 그렇게 찡그리고 삽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성령님께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생을 성령님께 길들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의 생각을 주장하게 하시고, 성령님이 여러분의 말을 주장하게 하시고, 성령님이 여러분의 돈 쓰는 것을 주장하게 하시고, 성령님이 여러분의 생활 구석구석을 주장하게 해 보십시오. 거기에 놀라운 평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미 체험해 보았잖아요? 쾌락을 쫓아갑니다. 때로 보지 말라는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일을 할 때 느껴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고 나서는 더 허무합니다. 마음이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어요. 감옥에 있는 죄인들에게 다 물어보십시오. 죄 지을 때만 약간의 기쁨이 있지, 죄 짓고 나서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님께 순복해서 한번 살아보십시오. 화내고 싶을 때 성령님이 입을 다물게 하시면 입을 다무세요. 복수하고 싶을 때 성령님이 그만두라고 하시면 멈추어 보세요. 거기에 놀라운 기쁨이 생겨날 줄 믿습니다.
코리 텐붐 여사를 아십니까?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수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의 언니는 자기가 보는 앞에서 독일군에게 사살되었습니다. 그녀가 복음을 전하러 다니던 어느 날,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다 마치고 나서 인사를 하는데, 그의 눈앞에서 놀라운 한 사람을 발견하고 코리 텐붐 여사는 몸이 굳어져 버렸어요. 독일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나오다가 거기에서 자기 언니를 잔인하게 학살한 독일 군인을 본 것입니다. 그는 코리 텐붐을 알지 못했어요. 자기가 죽인 여자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그저 걸어나온 것입니다. 말씀에 축복이 되었다고 인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 안됩니다. 저 인간만은 제가 악수할 수 없습니다.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다가옵니다
. 한 사람씩 악수하는데 진땀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속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서하라!" 그는 일기에 또 이렇게 썼습니다. "주님, 도저히 못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내가 지금 너에게 요구하는 것은 네가 용서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라!" 명령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이 명령임을 깨닫고 마침내 그 사람이 앞에 왔을 때에 그녀는 악수를 했고, 그를 껴안아 주었어요. 그때 놀라운 마음이 생겼는데,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용서가 그의 심장을 껴안는 그 순간, 봄눈 녹듯이 녹아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순종이 중요하다. 용서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순종의 삶이 우리를 성령 충만하게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무엇 때문에 불편하십니까? 혹시 하나님 앞에, 성령님의 음성 앞에 순종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하여 성령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순종할 때, 우리의 마음에 다시 기쁨과 평안이 찾아올 줄 믿습니다.
3. 은혜에 잠긴 생활을 하라
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사도행전 6,7장을 읽으면서 참 재미있는 것은 스데반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충만하다'는 단어는 '흘러 넘친다'는 뜻입니다. 컵에 물이 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부어서 물이 철철 넘치는 겁니다. 시냇물에 가뭄이 들어 물이 졸졸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흘러 넘치는 겁니다. 스데반은 흘러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섯 가지를 얘기했는데, 지혜와 믿음이 흘러 넘쳤고, 성령과 권능이 흘러 넘쳤고, 이제 은혜가 그에게 충만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알기는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은혜가 그의 삶에 졸졸 흐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그에게 쏟아 부어졌던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그가 날마다 발견했던지 그의 삶 속에 은혜가 충만했다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상처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입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며 살아갑니다. 때로 내가 잘못한 상처를 남에게 준 그것이 나에게 또 상처가 됩니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받은 말 한마디의 상처, 남모르게 지은 죄 때문에 얼룩진 내 마음의 상처, 이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상처를 우리는 지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처들이 우리의 얼굴을 어둡게 한다는 겁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기쁨과 평안을 빼앗아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으로 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치유 가능하다고 얘기합니다.
저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어느 해에 동해 바닷가를 갔습니다. 매해 여름 휴가 때 저는 설악산을 갑니다. 요즘은 보통 콘도에서 지내는데, 그때에는 미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민박을 했어요. 울진을 넘어서 한 30분 정도 가면 작은 어촌이 있었는데, 집이 몇 채가 되지 않았어요. 8월 말에 제가 갔을 때는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그 어촌이 얼마나 평화로웠던지요. 그 날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바닷가에 나가서 두 아들과 모래성을 쌓았습니다. 성을 멋있게 만들고, 사람 모형도 만들고... 모래로 몇 시간 많은 것들을 조각하고는 피곤해서 돌아와 잤어요. 그러다 새벽에 잠이 깨었어요. 제가 새벽에 그 바닷가를 다시 걸어나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놀라운 것을 보았어요. 아이들과 높이 쌓아 놓았던 그것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두 없어져버린 겁니다. 거기에 누가 빗자루 질을 했다 해도 그렇게 곱게 했을까요? 너무나 깨끗한, 발자국 하나 없는 모래가 거기에 펼쳐져 있었어요.
제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했어요. '아, 그렇구나! 이 파도가 수많은 모래의 얼룩들을 한꺼번에 씻어가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의 수많은 때와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겠구나!'
우리들 마음에 어릴 때 받은 많은 상처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이유, 삶을 살아가면서 몰래 지은 죄로 인한 두려움과 염려가 그대로 얼룩으로 남아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파도를 만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놀랍습니까?
파도가 그 많은 것을 깨끗이 씻어갈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좁은 마음속의 얼룩을 지우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달은 히브리기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을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여러분, 우리가 기쁘게 살지 못하는 이유, 평안을 갖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에 내 자신을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마음속에 은혜의 파도를 보내십니다. 그 파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안기만 한다면, 여러분이 평생을 씨름하던 그 상처와 그 흔적이 하룻밤 사이에 깨끗하게 씻겨질 줄 믿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무엇이 상처로 남아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평안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까?
남편이 계속해서 심겨준 과거의 상처입니까?
자녀로 인한 상처입니까?
남몰래 지은 죄입니까?
과거에 심각하게 범했던 죄악과 실수 때문에 고민하고 계신가요?
오늘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은혜의 파도 앞에 여러분의 가슴을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과거에 범한 실수가 아무리 중대하다 할지라도
오늘 하룻밤 사이에 여러분이 은혜의 파도 앞에 맡기기만 하신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영혼을 정결케 하실 줄 믿습니다.
눈보다 희게 하시며 주홍 같은 죄라도 양털보다 희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세상은 천사 같은 얼굴을 기다립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에 한 사람이 날마다 천사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이 옵니다. 사업이 흔들립니다. 짜증나는 일이 생깁니다. 몸이 힘듭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이깁니다. 부름받은 삶을 살기에, 성령 충만함으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살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의 몸을 던지기에 늘 얼굴이 빛납니다. 그 얼굴에 주 예수의 빛이 저 태양보다 더 빛납니다.
오늘 당신이 이런 사람이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출 처| 박정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