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5.26.) 말씀 / 계시록 2: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주님의 편지는 눈물로 읽어야 할 사랑의 편지입니다. 때론 칭찬을 때론 무서운 책망과 경고도 하시지만 그것도 모두가 사랑입니다(계 3:19). 주님이 소아시아 교회들 중에 가장 먼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신 것은 그만큼 에베소 교회를 사랑하셨고 그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심각하고도 아주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의 편지는 곧 오늘날 열심히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주님은 이 편지를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잃어버린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계시록 2장 1절로 주님은 편지의 서두를 시작합니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언제나 “주님이 하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主)로 바로 세워지는 것, 이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영적 질서입니다. 이 질서가 세워질 때 교회는 바로 서게 되고 이 질서가 무너지면 교회와 성도의 신앙도 무너집니다. 에베소 교회도 처음의 시작은 잘 된 교회였습니다. 계시록 2장 2-3절로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에베소 교회는 주님을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하였습니다. 에베소 지역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전도를 하고, 심방을 하고, 성전을 건축하고, 부지런히 봉사하며 주를 섬겼습니다. 이단과 대적하여 싸워 거짓을 드러내었고 교회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인내로 신앙을 지켰습니다. 또한 외적으로도 크게 성장하고 부흥하였습니다. 그들의 행위와 수고를 보면 어느 하나도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에베소 교회를 주님은 책망하십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그동안 주를 위해 수고하고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그 마음에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칭찬 들을 많은 일들을 하고서도 결과적으로는 이런 책망을 들은 이유는 초심을 잃어버리고 처음 것을 끝까지 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교회가 커지고 제도화 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에베소 교회는 주님을 위해서 여러가지 사업을 확장시키는 일에 분주하면서 점점 주님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대신 주변의 여러가지 것들을 사랑하고, 주님과의 교제보다 주님의 일들로 분주하고 바빠졌던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사랑에서 빗나가기 시작했고 사업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실상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일을 하지만 정작 예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놓친 것입니다. 행위를 요구하는 모든 계명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행위 이전의 관계입니다. 아무리 주님이 많은 수고와 일들을 해도 처음 사랑을 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주님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신 6:5).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첫째 되는 계명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도 주님과 사랑의 관계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2)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그렇게 많은 정열을 쏟아부으면서도 막상 가장 귀중한 것을 소흘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은 일이나 형식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할 것입니다. 이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빗나가고 결국 성취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펄벅이 쓴 『대지』라는 소설을 보면 왕릉이라는 주인공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농사를 짓는데 매해 흉년이 들고, 죽도록 농사를 지어놓으면 홍수가 나서 쓸어버리고 때로는 황충 떼가 와서 모두 갉아 먹어버립니다. 하는 수 없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서 손수레 하나를 구해 장사를 합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고 땀을 흘리며 그날그날 부부가 함께 고생을 하지만 그 생활을 매우 행복해 합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해 후에 그들은 돈을 많이 벌어 고향으로 내려와서 땅을 사고 큰 집을 사고 잘 살며 머슴을 부리게 되자 남편이 눈 길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하루는 첩을 하나 데리고 들어와서는 부인을 부엌으로 내보내고 첩을 안방에 앉혀 놓습니다. 밥을 먹을 때가 되면 이 부인은 밥상을 안방으로 들여놓고는 자신은 부엌에 앉아 그곳에서 밥을 먹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 때가 좋았는데,” 사랑의 관계는 신앙생활뿐 아니라 모든 삶의 기본입니다. 처음 사랑은 신앙의 첫 단추와 같다. 첫 단추를 잘 못 끼우면 그 다음 단추들은 줄줄이 다 잘못 끼워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장 먼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하시면서 교회와 우리 신앙에 있어서 ‘처음 사랑’ 문제를 다루신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가지라! 처음 사랑이 무얼까요? 어떻게 하면 이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처음 사랑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성숙하거나 온전한 사랑은 아닙니다. 처음 사랑은 풋사랑일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불완전한 사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전부인 사랑입니다. 다른 것은 잘 몰라도 예수님 한 분만 알고 사랑하던 사랑 그것이 전부 였던 그런 사랑이 초심의 처음 사랑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만 저도 그런 초심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대학 1학년 때 나도 주님에 대한 첫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찬송도 아는 것이 별로 없고 교회에서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 것인지 형식도 몰랐습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닮아갈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알려면 나도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아보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시장에 가서 대못 하나를 사가지고 대학 뒷산에 올라가서 예수님처럼 소나무에 손을 얹고 대못을 박아보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고 우수운 행동 이었지만 “주님”하고 기도만 해도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다른 형식들은 몰라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주님의 길을 가고자 목자가 되고, 학생들과 더불어 날마다 성전에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고, 1:1 성경공부를 하고, Q.T를 하고, 소감을 발표하고, 전도도하고, 여름 수양회, 리더 수양회, 선교사 파송, 성전 건축하는 일 등을 주도하며 주의 일에 올린하였습니다. 여름 수양회를 하다가 한 명의 형제가 순교하는 사건도 일어났고, 공동생활 중 모금을 하다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몇 사람이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 그런데 그런 열심은 점점 경쟁으로 바뀌었고 양들에 대한 사랑은 판단과 정죄 요구로 변하고, 자신이 주의 일을 하고, 자기가 영광을 취하기도 하면서 주님을 문밖에 방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흔들리지 않을 것같은 선교단체에 개혁 사건을 겪으면서 교회도 양들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사모도 제 곁을 떠나고 저는 막막한 환경 속에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 때 곁에 끝까지 남은 사람은 재중 명남 정미 집사님입니다. 그런데 앚ㅜ가난해지고 미약해지고 다 내려놓자 다시 주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주님이 하시는 것이야. 주님이 하시면 할 수 있어, 주님이하십니다. 주님께 영광! 재중 집사님 한 사람 붙들고 기도하고 공장 예배를 드리고, 중국 유학생들을 섬기며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지 한 사람을 목표로! 재중 집사님은 공장을 시작할 때 간판을 ‘주영정공’으로 하고, 고로고는 누어있는 십자가로 만들고 매달 직원들과 예배를 드렸고 그 예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10여년간 중국유학생들을 도울 수 있었고, 새학기 20명씩 몰려오는 학생들을 성경공부로 도우며 매학기 50만원씩 장학금을 주며 세례를 받도록 돕고, 전국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적극 돕고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몇 사람 되지 않는 가운데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이 하시니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재중 집사님 헌신적인 믿음과 헌신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꼬투리로 하나님은 우주적 교회의 역사르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이 하십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과 믿음이고, 주님은 일하신다! 저는 지난 일을 돌아보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본질을 붙들고 살아가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적은 무리 적은 수 이지만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면서 목회 중에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 사랑. 사랑이 회복되면 그 다음에는 주님이 다 하십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신앙은 이렇게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사랑의 본질은 우리가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시지 않고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고, 공부를 잘해서 영광을 드러내고, 성공해서 기쁨을 드리기 전 사랑할 조건이 하나도 없는 나라는 존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순수하게 주님만 바라는 사랑, 주님만을 요구하는 사랑,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무 조건 없이 주님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충성과 헌신과 봉사와 모든 일들은 그 다음입니다. 사랑하면 주님의 일도 열심히 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랑하면 기도의 열정, 전도의 열심, 희생적 섬김과 봉사의 마음도 살아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을 거꾸로 하려고 합니다. 나의 충성과 열심을 보임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을 입증 해 보이려고 합니다. “주님, 제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 주님이 아시지요? 아무리 주님의 일이라 할지라도 주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먼저일 수는 없습니다. 또 구태여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하는 일들을 통해 주님께 대한 사랑을 입증해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다 아십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에 목마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힘써야 할 일은 처음 사랑을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이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언제나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사랑이 너무나 잘 변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사랑한다고 고백하다가 한 번은 원망을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사랑이 불평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랑이 변질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메말라지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것, 기도하는 것, 전도하는 것, 식사당번, 청소하는 것,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들이 사랑이 식으면 다 형식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피곤하고 지치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한다고 하지만 자기 의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자체가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신앙은 무너지고 맙니다. 에베소 교회가 그렇게 많은 일을 했고, 참고 견디었고, 게으르지 않았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신앙의 가장 큰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생각해보라고 하십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계 2:5)
공동번역은 어디서 빗나갔는지를 생각하여 뉘우치라고 합니다. 언제? 왜? 어떻게 빗나갔는가? 질병도 만성화된 상태에서는 치료하기가 어렵지만 그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알게되면 쉽게 치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정확한 자기 분석과 진술이 있다면 쉽게 회복될 수 있습니다. 때론 세상에서의 편안한 삶, 부요한 삶이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식게 만들 수 있고, 세상의 유혹이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식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두려움이 주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생활의 염려와 근심이 우리로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눅 21:34). 더 나아가 주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닌 주변의 여러가지 일들이 문제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속히 주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주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십자가도 우상이 되고 주님의 사역 역시도 탐욕이 되고, 교회 성장도 탐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속히 잡다한 주변의 일에서 돌아서서 정말 중요한 주님 존재를 사랑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 존재를 사랑하는 자는 어떤 어려운 상황도 포기치 않고 끝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b)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이것이 주님이 제시하시는 신앙회복의 해결책입니다. 우리는 많은 일을 하고자 할수록 더욱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이 언제나 제일이어야 하고, 늘 우리 삶의 첫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겸손히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은 죽고 주님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 사랑 외에 그 어떤 것도 신앙의 첫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자식이든, 성도들이든, 거룩한 성전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만이 신앙의 첫 자리, 사랑의 맨 앞자리에 계셔서 사랑의 관계가 바르게 세워지면 모든 것도 바르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큰 사명을 주시고 떠시기 전에 갈릴리 바다가에서 만나 베드로에게 양을 치라고 하시지않고 먼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고 물으신 것입니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셨지만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돌이켜 처음 사랑을 갖게 된다면 이긴 자가 된다고 확신시켜주십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가 되면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스스로는 달라질 수 없지만 주님이 하시면 된다. 첫 자리에 주님 사랑을 회복하고, 이기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처음 사랑을 마음과 삶의 첫 자리에 두고 이 땅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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