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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秦始皇) 영정(嬴政)은 동방(東方)의 이족(夷族)
天命玄鳥(천명현조), 東方民族(동방민족)의 조종(祖宗) 신(神) 〔2편〕
○ 제1편에서 「동방(東方)」에 대한 여러 설명(說明)들을 알아보았다. 또한 산해경(山海經) 주석(註釋)편에 있는 「東 方 殷 民 族 傳 說 中 之 祖 宗 神」이란 내용(內容)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이 문제(問題)에 대해 산해경(山海經) 주석자(註釋者)들의 의도(意圖)를 좀 알아볼 필요(必要)가 있지 않을까 한다.
우선(于先)
○ 우리 카페는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중원(中原) 대륙(大陸)에 있었다.」는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를 주장(主張)하며, 그 논거(論據)를 하나하나 제시(提示), 설명(說明)하고 있다.
「동방(東方)은, 조선(朝鮮)의 고향(故鄕)이며, 조선(朝鮮)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로부터 중원(中原) 대륙(大陸)과 반도(半島)를 거쳐, 열도(列島)까지를 아우르며, 그 중심지(中心地)는, 신주(神州) 곧 중원(中原)이다.」
조선(朝鮮)은 : 인종(人種)으로 보면, 황인종(黃人種)이 주류(主流)를 이뤘으며, 지배층(支配層)들 역시(亦是) 황인종(黃人種)이었다. 간혹(間或) 고지도(古地圖)라는 것을 근거(根據)로 하여 백인(白人)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들이 떠돈다. 그러나 근거(根據)로 하는 고지도(古地圖)의 출처(出處)도 불명확(不明確)하며, 검증(檢證)이 전혀 되지 않은 것들이다.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동구라파(東歐羅巴)등지(等地)는,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변방(邊方)지대(地帶)였음이 확실(確實)하다. 이것은 고전(古典)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종족(種族)·부족(部族)·나라(國)·자연환경(自然環境)·특이지형(特異地形)등등으로 확인(確認)되고 있다고 본다.
○ 위에서 설명(說明)한 영역(領域)들이,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통치력(統治力)이 미치는 곳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 카페에 게재(揭載)된 많은 필자(筆者)의 글은, 대부분(大部分) 이 영역(領域) 내(內)로 한정(限定)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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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해경(山海經) 해외서경(海外西經) 편 ‘원가(袁珂)’의 주석(註釋)에서 : 《舜與伯益蓋皆東方殷民族傳說中之祖宗神,亦即詩玄鳥所謂「天命玄鳥, 降而生商」之玄鳥,即燕子之化身. : 순(舜)과 백익(伯益) 모두는 동방(東方) 은(殷)민족의 전설(傳說)중의 조종(祖宗) 신(神)이다. 또한 시(詩) 현조(玄鳥)에서 말하는 소위 ”하늘의 명을 받은 현조(玄鳥)가 하강하여(내려와) 상(商)이 태어났다고 하였는데, 현조(玄鳥)는 곧 연자(燕子)의 화신(化身)이다.》라고 하였다. 【조종(祖宗)이란 : 군주(君主)의 조상(祖上)】
위 글에서 :「순(舜)과 백익(伯益) 모두는 동방(東方) 은(殷)민족의 전설(傳說)중의 조종(祖宗) 신(神)이다.」하고 하였는데, 「순(舜)임금은 오제(五帝)중의 한 분이고, 백익(伯益)의 후손(後孫)이 진시황(秦始皇) 영 정(嬴 政)이다.」 이들 모두가 동방(東方) ‘은(殷) 민족(民族)의 선조(先祖)’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황제(始皇帝) 정(政)도, 동방(東方) 이족(夷族) 출신(出身)」이란 얘기다. 필자(筆者)는 여기서, 고전(古典)에 의거(依據)해 역사(歷史)해설(解說)을 하는 것 일뿐, 사적(私的)인 주장(主張)은 없다.
➊ 순(舜)임금 :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 우순(虞舜) :《虞舜者,名曰重華.重華父曰瞽叟,瞽叟父曰橋牛,橋牛父曰句望,句望父曰敬康,敬康父曰窮蟬,窮蟬父曰帝顓頊,顓頊父曰昌意:以至舜七世矣.中略. : 우순(虞舜)은, 이름이 중화(重華)이다. 중화(重華)의 아버지(父)는 고수(瞽瞍)이고, 고수(瞽瞍)의 아버지(父)는 교우(橋牛)이고, 교우(橋牛)의 아버지(父)는 구망(九望)이다. 구망(九望)의 아버지(父)는 경강(敬康)이고, 경강(敬康)의 아버지(父)는 궁선(窮蟬)이고, 궁선(窮蟬)의 아버지(父)는 제(帝) 전욱(顓頊)이다. 전욱(顓頊)의 아버지(父)는 창의(昌意)다. : 이로부터 순(舜)은 7세손(世孫)이다.》라고 하였으며,
《黃帝立四妃,象后妃四星.皇甫謐云:元妃西陵氏女,曰累祖,生昌意. : 황제(黃帝)는 네 명의 왕비(王妃)를 두었다. 황보밀(皇甫謐)이 이르기를 : 원비(元妃)는 서릉씨(西陵氏)의 여식(女息)으로, 누조(累祖)인데, 창의(昌意)를 낳았다.》 고 하였다.
➠ 곧 창의(昌意)의 아버지(父)는 황제헌원(黃帝軒轅)씨이고, 원비(元妃)라고 하였으니, 현재(現在)의 상식(常識)으로 보면, 본처(本妻) 소생(所生)이 바로 “창의(昌意)”이고, 이 분은 “순(舜)”임금의 8 대조(代祖)가 되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觀心)있게 봐야 하는 것이 위의 ➠ 구절(句節)인데, ‘21세기(世紀) 역사해설(歷史解說)’에서 : 대륙(大陸) 땅 일만(一萬)리를 통치(統治)하고 있는 중국(中國)은,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를 시조(始祖)라고 받들어 모시고 있는데, 이러한 근거(根據)로, 증거(證據)로, 고증(考證)으로, 「고전(古典)의 기록(記錄)과 유물유적(遺物遺蹟)」을 앞세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言及), 설명(說明)한 것처럼 고전(古典)의 원문(原文)이나, 그 원문(原文)을 주석(注釋)한 내용(內容)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즉(卽)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제왕(帝王)과 그들의 후손(後孫)들은 모두가 동방(東方)의 이족(夷族)이다.」라고 말이다. 이걸 어떻게 판단(判斷)하고, 이해(理解)할 것인지는, 각자(各自)의 몫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무슨 헛소린가? 할 테지만, 태양(太陽)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다.
➨ 조선사(朝鮮史)에서, 또는 일부(一部)에서 말하는「환단고기(桓檀古記)의 1,565년의 신시배달국 및 환국(桓國) 3,300년, 고조선(古朝鮮) 47대 2,070년」등과 어떤 관계(關係)가 있는지는, 앞으로 우리가 밝혀야 할 과제라고 본다.
○ 시황제(始皇帝)의 진(秦)나라와 ‘진한(秦韓)=진한(辰韓)’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關係)이고, 신라(新羅)와도 직접적(直接的)인 연관(聯關)이 있다. 분명(分明)한 것은 위에서 설명(說明)하듯이, 모두가 「동방(東方)의 이족(夷族)」이란 사실(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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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백익(伯益) : 사기 오제본기 : 우순(虞舜) 주석(註釋) : 《契音薛,殷之祖也.伯夷,齊太公之祖也.倕音垂,亦作垂,內言之官也.益,伯翳也.即秦,趙之祖. : 契의 음(音)은 설(薛)이고, 은(殷)의 조상이다. 백이(伯夷)는, 제(齊) 태공(太公)의 조상(祖上)이다. 수(倕)의 음(音)은 수(垂)고, 내언(內言)의 벼슬이다. 익(益 : 伯益)은, 백예(伯翳)이다. 곧 진(秦)나라와 조(趙)나라의 조상(祖上)이다.》라고 하였다.
백익(伯益)은 곧 백예(伯翳)·백예(柏翳)·백예(伯鷖) 또는 대비(大費)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일명 익(益)이라고 한다. 진(秦)나라 시황(始皇) 정(政)의 조상(祖上)이며, 산해경(山海經)의 저자(著者)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 중국인물사전 / 백익[伯益, Bó Yì] : 백예(伯翳, 柏翳, 伯鷖), 대비(大費) : 고대 전설상의 인물 백익(伯益)은 백예(伯翳, 柏翳, 伯鷖), 대비(大費)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새들과 이야기한다고 하여 백충장군(百蟲將軍), 우물 파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해서 정신(井神)으로도 불린다. 우 임금 밑에서 치수를 도와 그 공으로 영(嬴)씨 성을 하사받아 영씨 성 제후의 조상이 되었다. 대표적인 후예로는, 말을 잘 몰았던 주(周) 목왕 때의 조보와 진시황(秦始皇) 영정이 있다. 그는 죽은 후 산둥성 천태산(天台山)에 묻혔다는 설이 있다.
백익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집을 건축하고 우물을 판 인물로 알려져 있다. 부족 연맹장, 구주목(九州牧)을 지냈으며, 순임금의 명령으로 풀과 나무, 짐승과 새를 관장하는 관직인 우(虞)가 되었다. 우임금이 하나라를 세운 뒤에는 재상으로 봉직했다. 우임금이 죽기 전에 그에게 임금 자리를 선양하려 하자 백익은 우임금의 아들 계에게 양보하고 기산의 남쪽에 숨어 살았다. 일설에는 왕위를 다투다가 계에게 살해되었다고도 한다.
백익은 우임금에게 모든 일을 두루 살피고 앞날을 내다보며 정치를 할 것을 충고했다. 아울러 법과 제도를 어기지 말 것과 지나친 향락을 조심하라고 권했다. 중국에서 가장 처음이고 유일한 동방의 제왕 제준(帝俊)의 계통을 기록한 『산해경(山海經)』을 백익이 지었다는 설이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익 [伯益, Bó Yì]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인용(引用) / 끝.〉
㉯ 중국역대인명사전 / 백익[伯益] : 고대 전설상의 인물. 일명 익(益)이다. 백예(伯翳) 또는 백예(柏翳)라고도 한다. 순(舜)임금의 명령으로 우(虞)가 되어 초목조수(草木鳥獸)를 관장했다. 또 우(禹)임금 밑에서 치수를 도와 영(嬴)씨 성을 하사받았다. 영씨 성을 가진 제후(諸侯)의 조상이 되었다. 우임금이 하(夏)나라를 세운 뒤에는 재상으로 봉직했다. 우임금이 그를 선양(禪讓)할 사람으로 지목하자 우임금의 아들 계(啓)에게 양보하고 기산(箕山)의 남쪽에 숨어 살았다. 일설에는 왕위를 다투다가 계에게 살해되었다고도 한다. 우물 파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해서 정신(井神)으로 불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익 [伯益]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이회문화사) / 〈인용(引用) / 끝.〉
➠ 이러한 인물(人物)들이 「동방(東方) 은(殷)나라의 신(神)」으로 일컬어졌다면, 이들 모두는 동방(東方)의 이족(夷族)이란 뜻이다.
㉰ 海外西經 本文 : 《滅 蒙 鳥 在 結 匈 國 北, 為 鳥 青, 赤 尾. : 멸몽조(滅蒙鳥)는 결흉국(結匈國)의 북(北)쪽에 있는데, 그 새(鳥)는 푸르고, 꼬리는 붉다.》고 하였는데, 그 주석(注釋)에서 말하기를,
《注釋 : 珂案:海內西經云:孟鳥在貊國東北,其鳥文赤,黃,青,東鄉.中略. : 원가(袁珂) : 해내서경(海內西經)에서 이르기를 : 맹조(孟鳥)는 맥국(貊國)동북(東北)쪽에 있는데, 그 새(鳥)는 붉은, 누런, 푸른, 무늬를 가졌다. 동향(東鄕)이다. 중략(中略).》
《史記秦本紀云:秦之先,帝顓頊之苗裔孫,曰女脩. : 사기(史記)진본기(秦本紀)에서 이르기를 : 진(秦)의 선조(先祖)는, 제(帝) 전욱(顓頊)의 묘예(苗裔) 자손인데, 여수(女脩)라고 한다. 女脩織,玄鳥隕卵,女脩吞之,生子大業.大業取少典之子曰女華.女華生大費,與禹平水土,已成,帝賜玄珪. : 여수(女脩)가 베 짜기를 하고 있는데, 현조(玄鳥)의 알이 떨어져, 여수(女脩)가 그것을 삼키고, 아들 대업(大業)이 태어났다. 대업(大業)은 소전(少典)의 여식 여화(女華)를 얻어, 여화(女華)는 대비(大費)를 낳고, 우(禹)의 수토(水土)를 평정(平定)하여, 이루니, 제(帝)가 현규(玄珪)라는 이름을 주었다. 禹受曰:非予能成,亦大費為輔.帝舜曰:咨,爾費,贊禹功,其賜皁游,爾後嗣將大出,乃妻之姚姓之玉女. : 우(禹)가 받아드리며 이르기를, 홀로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비(大費)가 도왔습니다하니, 순(舜)임금이 말하기를 : 묻노니, 너 비(費)는, 우(禹)를 도와서 공을 이루었으므로, 조유(皁遊)를 내리니, 너의 후사(後嗣 : 후손)는 크게 일어날 것이다. 이에 요(姚)성(姓)의 옥녀(玉女)를 아내로 주었다. 大費拜受,佐舜調馴鳥獸,鳥獸多馴服.是為柏翳.伯益.舜賜姓嬴氏. : 대비(大費)는 절하며 받아들이고, 순(舜)임금을 보좌하여 조수(鳥獸 : 새와 짐승)를 조련하였는데, 많은 조수(鳥獸 : 새와 짐승)를 길들여 복종케 하였다. 백예(柏翳)이고, 백익(伯益)이다. 순(舜)임금이 영씨(嬴氏) 성(姓)을 내렸다. 大費生子二人,一曰大廉,實鳥俗氏;二曰若木,實費氏.大廉玄孫曰孟戲,仲衍,鳥身人言. : 대비(大費)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하나는 대렴(大廉)이고, 조속씨(鳥俗氏)이다 ; 둘째는 약목(若木)이고, 비씨(費氏)이다. 대렴(大廉)의 현손(玄孫)에 맹희(孟戱), 중연(仲衍)은, 몸은 새인데, 사람의 말을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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➌〈天命玄鳥(천명현조), 東方民族(동방민족)의 조종(祖宗) 신(神)이다.〉 산해경(山海經) 海外西經 本文 :〈滅 蒙 鳥 在 結 匈 國 北, 為 鳥 青, 赤 尾.〉의 주석(注釋)
《太平御覽 卷九一五引括地圖云:孟虧人首鳥身,其先為虞氏馴百獸,夏后之末世,民始食卵,孟虧去之,鳳凰隨與止於此. : 태평어람(太平御覽) 915 괄지도(括地圖)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 맹휴(孟虧)는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새(鳥)인데, 그 선조(先祖) 우씨(虞氏)는 백수(百獸)를 길들였다. 하후(夏后)의 시대가 끝날 무렵, 백성들이 처음으로 알을 먹어, 맹휴(孟虧)가 떠나버리고, 봉황(鳳凰)을 따랐던 것도 이 때문에 멈추게 되었다. 山多竹,長千仞,鳳凰食竹實,孟虧食木食.去九疑萬八千里.孟虧即秦本紀之孟戲也.博物志(外國)又作孟舒. : 산(山)에 대나무가 많고, 길이가 천인【千仞 : 천 길이라는 뜻으로, 산이 썩 높거나 깊은 것을 말한다. 1인(仞) : 7-8척(尺)이다.】인데, 봉황(鳳凰)은 죽(竹 : 대)을 먹는다. 맹휴(孟虧)도 나무를 먹었다. 맹휴(孟虧)는 곧 진본기(秦本紀)의 맹희(孟戱)이다. 박물지(博物志)(외국(外國)에는 또 맹서(孟舒)이다. 云:「孟舒國民,人首鳥身,其先主為霅氏訓百禽.夏后之世,始食卵.孟舒去之,鳳皇隨焉」戲,虧,舒均一音之轉. : 이르기를 : 맹서국(孟舒國)의 백성들은,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새인데, 그 선조(先祖) 삽씨(霅氏)가 백금(百禽 : 많은 날짐승)을 길들였다. 하후(夏后)시대에, 처음으로 알을 먹어, 봉황을 따라, 맹서(孟舒)도 떠나갔다.》
《大荒東經云:帝舜生戲,戲生搖民.海內經云:有嬴民,鳥足.嬴,搖亦一聲之轉,嬴民即搖民,戲即孟戲也. : 대황동경(大荒東經)에서 이르기를 : 순(舜)임금 때 희(戱)가 살았고, 희(戱)는 요민(搖民)을 낳았다. 해내경(海內經)에서 이르기를 : 영(嬴)백성들은, 새(鳥)의 발(足)을 가졌다. 영(酃), 요(搖) 또한 일성(一聲)이 변한 것이다. 영민(嬴民)은 곧 요민(搖民)이며, 희(戱)는 곧 맹희(孟戱)다. 不過原以柏翳(伯益)為祖先者,乃又移之於舜也. : 백예(柏翳)(백익伯益)의 조상(祖上)은, 순(舜)임금 때 옮겨갔다. 舜與伯益蓋皆東方殷民族傳說中之祖宗神,亦即詩玄鳥所謂天命玄鳥,降而生商之玄鳥,即燕子之化身. : 순(舜)임금과 백익(伯益) 모두는 동방(東方) 은(殷)민족(民族)의 전설(傳說)상의 조종신(祖宗神)인데, 또한 즉 시(詩)에서 일컫기를 하늘(天)의 명(命)을 받은 현조(玄鳥)가, 하강하여 상(商)이 태어났는데 현조(玄鳥)는, 곧 연자(燕子)의 화신(化身)이다. 玄鳥再經神話化,又為鳳凰.故其子孫或鳥身人言,或人首鳥身,或鳥足,且有鳳凰隨焉. : 현조(玄鳥) 신화화(神話化)는, 봉황(鳳凰)이다. 예전의 그 자손(子孫)이 혹 새의 몸에 사람 말을 하는, 혹은 사람머리에 몸은 새인, 혹은 새의 다리는, 봉황(鳳凰)이 있어 이를 따른 것이다. 此隨焉之鳳皇,即此處所記,滅蒙鳥及海內西經所記孟鳥是也. : 봉황을 따른다는 것은, 곧 이것이 머물러있는 곳을 말하는 것인데, 멸몽조(滅蒙鳥)와 해내서경(海內西經)에 기록된 맹조(孟鳥)이다. 為鳥青,赤尾,或其鳥文赤,黃,青云云,乃所謂五采之鳥,山海經多記有之,皆鳳凰之象. : 그 푸른 새는, 꼬리가 붉다. 혹은 그 새는 붉은, 황색의, 푸른색의 무늬가 있다고 전하는데, 소위 다섯 가지 빛깔의 채색(采色)을 가진 새(鳥)이다. 大荒西經云:有五采之鳥,有冠,名曰狂鳥. : 대황서경(大荒西經)에서 이르기를 : 다섯 가지 색깔의 채색을 가진 새는, 볏이 있고, 이름이 광조(狂鳥)이다.》라고 하였다.
《爾雅釋鳥云:狂,●鳥,實則狂鳥,●鳥皆鳳凰屬也,狂即皇,●即鳳,音之轉也.●鳥又即孟鳥,字之異也. : 이아석조(爾雅釋鳥)에서 이르기를 : 광(狂), ●조(鳥)인데, 실은 광조(狂鳥)이다. ●조(鳥)는 모두 봉황(鳳凰)의 무리이다. 광(狂)은 곧 황(皇)으로 ●는 곧 봉(鳳)인데, 음의 변화이다. ●조(鳥)는 또 곧 맹조(孟鳥)인데, 글자의 다름이다.【筆者 주(注) / 이아석조(爾雅釋鳥)를 보면 :「皇.黃鳥 : 황(皇)은 곧 황조(黃鳥)이다」라고 하였다.】大荒西經又云:有弇州之山,五采之鳥仰天,名曰鳴鳥. : 대황서경(大荒西經)에서 또 이르기를 : 엄주산(弇州山)이 있는데, 다섯가지 채색을 가진 새(鳥)가 하늘을 우러러 보는데, 이름이 명조(鳴鳥)이다. 郝懿行云:鳴鳥,蓋鳳屬也.鳴鳥亦●鳥,孟鳥也.則此處所記之滅蒙鳥,固鳳屬之狂鳥,●鳥,鳴鳥,孟鳥之異名也. : 학의행(郝懿行) 이르기를 : 명조(鳴鳥)는, 모두 봉(鳳)새의 무리다. 명조(鳴鳥)는 또 ●조(鳥)인데, 맹조(孟鳥)이다. 머무르고 있는 멸몽조(滅蒙鳥)로, 봉(鳳) 무리로 광조(狂鳥)이다. ●조(鳥)는, 명조(鳴鳥)로, 맹조(孟鳥)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 참고(參考) /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帝嚳高辛者,黃帝之曾孫也.高辛父曰蟜極,蟜極父曰玄囂,玄囂父曰黃帝.自玄囂與蟜極皆不得在位,至高辛即帝位.高辛於顓頊為族子. : 제곡고신(帝嚳高辛)씨는, 황제(黃帝)의 증손(曾孫)이다. 고신(高辛)의 아버지(父)는 교극(蟜極)이고, 교극(蟜極)의 아버지(父)는 현효(玄囂)이다. 현효(玄囂)의 아버지(父)는 황제(黃帝)이다. 현효(玄囂)와 교극(蟜極)은 모두 임금의 자리를 얻지 못했는데, 고신(高辛)때에 이르러 임금(帝)의 자리에 올랐다. 고신(高辛)과 전욱(顓頊)은 일가(簇子)이다.》라고 하였다.
ⓐ 조선사(朝鮮史)에서는 : 위의 제곡고신(帝嚳高辛)씨는 고구려(高句驪)의 시조(始祖)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백제(百濟)의 시조(始祖)도 똑같다.】
ⓑ 제곡고신(帝嚳高辛)씨의 할아버지인 ‘현효(玄囂)=청양(靑陽)=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는 신라(新羅)인, 그들 스스로 시조(始祖)라고 하였다.
이 모두는 황제(黃帝)로부터 출발(出發)한 것이고, 그 직계(直系)는 ‘현효(玄囂)=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부터 나왔는데, 봉황(鳳凰)은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를 상징(象徵)하는 영물(靈物)이다. 바로 동방(東方)을 뜻하며, 상서로움과 평안(平安)과 흥성(興盛)을 상징(象徵)하며, 동방(東方)의 군주(君主)로 상징(象徵)되어 왔다는 이야기다.
○ 이러한 이야기는, 21세기(世紀) 현대(現代)에서 전설(傳說)로 치부되고 있으나, 은(殷)나라의 600년 역사(歷史) 또한 신화(神話) 또는 전설(傳說)로 여겨지다가 그 유적(遺蹟) 발굴(發掘)로 인하여 실존(實存)했던 나라(國)로 확인(確認)되었다.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이야기들은 결코 신화(神話)나 전설(傳說)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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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봉황(鳳凰)
상서롭고 고귀한 뜻을 지닌 상상의 새. 고대 중국에서 신성시했던 상상의 새로 기린·거북·용과 함께 사령(四靈)의 하나로 여겼다.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는데 그 생김새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봉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으며, 오색(五色)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악집도(樂汁圖)에는 닭의 머리와 제비의 부리, 뱀의 목과 용의 몸, 기린의 날개와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동물로 봉황의 모양을 묘사하고 있다. ≪주서 周書≫에는 봉의 형체가 닭과 비슷하고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고 하였다. 이처럼 봉황의 모양은 한결같지 않다.
그러나 상서롭고 아름다운 상상의 새로 인식된 것만은 확실하다. 봉황은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서 사해(四海)의 밖을 날아 곤륜산(崑崙山)을 지나 지주(砥柱)의 물을 마시고 약수(弱水)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風穴)에 자는데,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녕하다고 한다.
그래서 봉황은 성천자(聖天子)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천자가 거주하는 궁궐문에 봉황의 무늬를 장식하고 그 궁궐을 봉궐(鳳闕)이라고 했으며, 천자가 타는 수레를 봉연(鳳輦)·봉여(鳳輿)·봉거(鳳車)라고 불렀다. 중국에서 천자가 도읍한 장안(長安)을 봉성(鳳城)이라 하였고 궁중의 연못을 봉지(鳳池)라고 불렀다.
이처럼 봉황이 천자의 상징이 된 까닭은 봉황이 항상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 나타난다고 믿어 천자 스스로가 성군(聖君)임을 표방한 데 연유한다. 한유(韓愈)의 송하견서(送何堅序)에서는 “내가 듣기로 새 중에 봉이라는 것이 있는데, 항상 도(道)가 있는 나라에 출현한다(吾聞鳥有鳳者, 恒出於有道之國).”라고 했다.
또, 순자(荀子) 애공편(哀公篇)에는 “옛날 왕의 정치가 삶을 사랑하고 죽임을 미워하면 봉이 나무에 줄지어 나타난다(古之王者, 其政好生惡殺, 鳳在列樹).”라고 하였으며, ≪춘추감정부 春秋感精符≫에는 “왕이 위로 황천을 감동시키면 난봉이 이른다(王者上感皇天, 則鸞鳳至).”라고 하였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황제(皇帝) 57년 추칠월 경신에 봉황이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고, 백호통(白虎通)에는 “황제시절에 봉황이 동원(東園)에 머물러 해를 가리었으며 항상 죽실(竹實)을 먹고 오동(梧桐)에 깃들인다.”는 기록이 있다.
황제시절 뿐 아니라 요(堯)·순(舜)·주(周) 때에도 봉황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중국 고대에는 성군(聖君)의 덕치(德治)를 증명하는 징조로 봉황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대에는 봉황에 대한 신성관념이 중국처럼 강하지 않은 듯하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봉황에 대한 신성관념이 발견되지 않고, 고려사 악지(樂志) 당악조(唐樂條)에 악관이 노래하는 가사 중에 봉황이 등장한다.
동풍보난사(東風報暖詞)에 ‘봉궐(鳳闕)’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오양선(五羊仙)에 ‘봉황내의(鳳凰來儀)’라는 말이 나온다.
오양선(五羊仙)은 군왕을 송수하는 무곡(舞曲)으로서 당악(唐樂)의 영향을 받아 봉황이 성군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년환(萬年歡)·감황은령(感皇恩令)·화심동(花心動)등의 노랫말에도 봉황이 등장하는데, 대체로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선적(仙的)인 분위기와 관련되어 있다. 이처럼 봉황은 고려조에 이미 중국음악의 전래와 함께 중국에서와 같은 의미로 인식되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봉황은 성군의 덕치를 상징하는 의미로 노래나 춤에 쓰였다. 조선 초기에 윤회(尹淮)가 개작하였다는 봉황음(鳳凰吟)은 송축가(頌祝歌)로서 조선의 문물제도를 찬미하고 왕가의 태평을 기원한 노래이다.
또한, 세종실록 악보(樂譜)에 수록된 봉래의(鳳來儀)는 궁중무용으로서 조선조 궁중에서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추던 춤이었다.
이 무용은 당악과 향악을 섞어서 연주하는 음악에 맞추어 태평성세를 찬양하는 의미로 추어졌다. 이처럼 조선조 궁중의 가무 명칭에 봉황이 들어간 것은 옛날 순(舜)임금이 태평지치를 이룩하고 ‘소소(簫韶)’라는 음악을 지어 연주할 때 봉황이 와서 놀았다는 고사에 따라 군왕의 성덕을 찬양하는 의미로 쓰였음을 말해 준다.
또한, 봉황은 천자를 상징하는 새라는 점에서 조선왕실이 중국의 제실(帝室)과 대등하다는 의식을 보여주는 점이기도 하다.
봉황은 새 중의 으뜸으로서 고귀하고 상서로움을 나타낸다. 그래서 봉황의 문양(文樣)이 건축·공예 등에 두루 쓰이었다. 전각(殿閣)의 기둥 머리에는 ‘봉두(鳳頭)’라고 하는 봉황의 머리 모양을 조각한 꾸밈새가 쓰였고, 공예에는 봉황문양을 장식한 장롱인 ‘봉장(鳳欌)’이 있다.
그밖에도 봉황은 여러 가지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공주가 시집갈 때 예장(禮裝)으로 띠는 비단 띠에 금박으로 봉황무늬를 새겨 ‘봉대(鳳帶)’라고 하였고, 비녀 머리에 봉을 새긴 것을 ‘봉잠(鳳簪)’이라고 하였다.
또한, 봉황의 날개처럼 대나무로 만든 악기인 ‘봉소(鳳簫)’가 있고, 봉황새의 꽁지 모양으로 만든 부채로서 ‘봉미선(鳳尾扇)’이 있다.
봉황은 여인들의 수(繡)의 소재로도 많이 쓰였다. 봉황을 수놓은 베개를 ‘봉침(鳳枕)’이라고 하는데, 바늘을 조상하는 <조침문 弔針文>이라는 글에 “난봉과 공작을 수놓을 제”라는 구절이 있음을 보아 봉황은 우리의 생활 속에 고귀한 것의 상징으로 이미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황새는 자웅(雌雄)이 서로 의가 좋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었다는 <봉구황곡 鳳求凰曲>이 구애(求愛)의 악곡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봉황은 남녀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속담에 ‘봉 가는 데 황(凰)이 간다.’, ‘봉이 나매 황이 난다.’라는 말은 사랑하는 남녀관계나 천정연분을 의미한다.
고전소설 <이대봉전>은 태몽에 봉황 한 쌍이 등장하여 남녀 주인공의 탄생을 예시하는데, 봉의 꿈을 꾸고 탄생한 남주인공 이대봉과 황의 꿈을 꾸고 탄생한 여주인공 장애황의 결연담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봉황은 죽실(竹實:대나무 열매)을 먹고 살며 오동나무에 깃들인다.
이러한 봉황의 생태와 관련하여 <사랑가>에 “단산 봉황이 죽실을 물고 오동숲을 넘노는 듯”이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봉황은 지절(志節)이 굳고 품위를 지키는 새로 알려져 있다. ‘봉은 굶주려도 좁쌀은 쪼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그것을 말해 준다. 봉황은 새 중에 으뜸으로 뛰어나게 잘난 사람을 상징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황 [鳳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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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황(鳳凰)
‘새 중의 왕은 봉황새요, 꽃 중의 왕은 모란이요, 백수의 왕은 호랑이다’라는 말처럼 봉황은 모든 새의 우두머리로 여겨지며, 한국인의 의식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민속 상상 동물이라 할 수 있다. ‘봉황은 새 중의 으뜸으로,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왔다. 이 새가 한 번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고 하여 봉황은 곧 ‘천자(天子)를 상징하게 되었다. 천자의 궁문에 봉황을 장식하여 ‘봉궐(鳳闕)’, ‘봉문(鳳門)’이라 하였고, 천자의 수레를 장식하여 ‘봉거(鳳車)’나 ‘봉련(鳳輦)’, ‘봉여(鳳輿)’라 했다. 좋은 벗을 ‘봉려(鳳侶)’, 아름다운 누각을 ‘봉대(鳳臺)’,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봉음(鳳音)’이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봉황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잘 드러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 청자상감봉황문대접(靑磁象嵌鳳凰文大楪)을 보면 내면에 봉황과 구름무늬가 정교하게 백상감되어 있다. 네 마리의 봉황은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신비로운 구름 속에서 고고한 자태로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이다.
봉황은 우는 소리가 퉁소를 부는 소리와 같고, 살아 있는 벌레를 먹지 않으며, 살아있는 풀을 뜯지 않고, 무리 지어 머물지 않으며, 난잡하게 날지 않고, 그물에 걸리지 않으며,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아무리 배고파도 조 따위는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특성과 아울러 임금의 정사가 공평하고 어질며 나라에 도가 있을 때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순자(荀子)] ‘애공편(哀公篇)’에 ‘옛날 왕의 정치가 삶을 사랑하고 죽임을 미워하면 봉이 나무에 줄지어 나타난다’는 내용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예로부터 용, 기린, 현무와 함께 사령(四靈, 신령스러운 네 가지 동물)의 하나로 불린다.
봉황 두 마리가 그려지면 쌍봉도(雙鳳圖)라 부른다. 쌍봉도에는 한 그루의 오동나무가 배경이 되어 암수 한 쌍의 봉황이 다정하게 함께하며, 표현된 다른 소재들과 함께 그 자체만으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와 함께 봉황이 아홉 마리의 새끼를 거느리고 있는 그림은 구추도(九雛圖)라 한다. 이러한 까닭은 9라는 숫자가 예로부터 양을 의미하여 길상의 의미를 지닌 고귀한 숫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군봉도에는 아홉 마리의 새끼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자수나 나전과 같은 공예품에서도 아홉 마리의 새끼가 있는 봉황도가 많은데, 다산과 부부화합의 의미에 더해 태평성대의 염원도 들어있다. 신혼 부부 베개인 구봉침의 베갯모 장식에도 암수 한 쌍과 새끼 일곱 마리의 봉황을 수놓는 등 다양한 생활 공예품에 넣는 것이 좋은 예이다. 민화 가운데 문자도에도 봉황은 흔히 등장하는 소재이다. 봉황이 천리를 날아 아무리 배가 고파도 조를 쪼아먹지 않는다는 고고한 처신으로 인하여 청렴하고 고귀한 군자, 성인을 암시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유교문자도 중 ‘염(廉)’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그려진다.
중국 후한대에 나타나고 우리나라에는 불교와 함께 전래했다고 여겨진다. 6세기 백제 시대에 축조된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베개 문양에도 보이고,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국보 제287호 금동대향로에서 용과 함께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산해경(山海經)] ‘남산경(南山經)’에는 봉황이 닭과 비슷하지만 다섯 색 깃털에 다섯 가지의 신묘한 소리를 내고, 저절로 노래하고 춤을 춘다고 묘사했다. 본래 암수 구분은 없었으나 중국 한 대부터 볏이 있는 수컷을 ‘봉(鳳)’이라 하고, 볏이 없는 암컷을 ‘황(凰)’이라 하였다. 점차 시간이 흘러 용은 황제를, 봉황은 황비를 상징하게 되었다.
[설문(說文)]에는 봉황이 앞은 기러기, 뒤는 기린의 모습이고, 목은 뱀, 꽁지는 물고기, 용과 같은 비늘, 턱은 제비, 등은 거북이’를 닮았다고 묘사하였다. 이처럼 봉황은 실재하는 닭을 비롯하여 상서로운 의미를 가진 여러 동물들이 상상력으로 결합되어 만들어졌다.
같은 문헌에 ‘닭은 때를 아는 가축(鷄, 知時畜也)’이라는 특성에 따라 봉황이 새벽을 지키듯 한다고 기록하여 태양이나 아침과 연관되는 요소가 되었다. 기러기는 신의를 지키고, 기린은 어진 성군을 상징한다. 제비는 비를 오게 하는 재주나 부귀, 뱀은 풍년과 다산, 거북이는 장수와 예지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상징성은 또한 제왕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 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경북 안동의 봉황사(鳳凰寺)에는 조선 중기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웅전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건물의 단청은 봉황이 그렸다고 한다. 봉황은 상승하는 듯 두 날개를 활짝 펴고 꼬리는 휘날리듯이 그려졌는데, 연봉우리와 연잎이 매달려 휘날리고 있어 신비롭다.
상상의 동물 봉황은 오동나무를 배경으로 하여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민화와 같은 그림 속이나 왕실의 복식이나 장신구, 베갯모 등 다양한 장식 문양으로 나타났다. 현재도 국새 손잡이에 조각되는 봉황이나 대통령의 전용 휘장 문양으로 볼 수 있으며, 청와대 정문에도 두 마리의 봉황이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다. 앞으로도 우리의 삶 속에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강력한 상상 아이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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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사전 : 봉황(鳳凰)
예로부터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상상의 새. 기린, 거북, 용과 함께 사령(四靈) 또는 사서(四瑞)로 불린다. 수컷은 ‘봉’, 암컷은 ‘황’이라고 하는데, 성천자(聖天子) 하강의 징조로 나타난다고 한다. 전반신은 기린, 후반신은 사슴, 목은 뱀, 꼬리는 물고기, 등은 거북, 턱은 제비, 부리는 닭을 닮았다고 한다. 깃털에는 오색 무늬가 있고 소리는 오음에 맞고 우렁차며, 오동나무에 깃들이어 대나무 열매를 먹고 영천(靈泉)의 물을 마시며 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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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기록(記錄)들을 살펴보았는데, 오제본기(五帝本紀) 우순(虞舜)의 말미(末尾) 본문(本文)의 주석〔9〕를 보면 :
〔九《中略.括地志云:百濟國西南海中有大島十五所,皆置邑,有人居,屬百濟. : 괄지지(括地志)에서 이르기를 : 백제국(百濟國)의 서남(西南) 바다가운데에 큰 섬 15 개소가 있다. 모두 고을을 두고, 사람이 사는데, 백제(百濟)에 속(屬)했다. 又倭國西南大海中島居凡百餘小國,在京南萬三千五百里.案:武后改倭國為日本國. : 또 왜국(倭國) 서남(西南)쪽 큰 바다가운데 섬(島)에 모두 백여 개 작은 나라가 있는데, 서울에서 남(南)쪽으로 13,500리 떨어져있다. 안(案) : 무후(武侯)가 왜국(倭國)을 일본국(日本國)이라고 고쳤다.》라고 하였다.
➨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 괄지지(括地志) 인용부분【고전번역원의 해동역사 원문이미지】을 보면 : 《百 濟 國 西 南 渤 海 中 : 백제국(百濟國) 서남(西南) 발해(渤海)가운데》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해동역사(海東繹史) 번역(飜譯)을 보면 《백제국 서남 대해 가운데》라고 해 놓았다. 원문(原文)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한글 번역(飜譯)은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와 똑같다.
ⓐ 사기 오제본기 괄지지 인용부분 :〈百 濟 國 西 南 大 海 中〉
ⓑ 해동역사 괄지지 인용부분 원문이미지 :〈百 濟 國 西 南 渤 海 中〉
또 우공추지(禹貢錐指) 권02 /《冀州.釋文:冀,居器反:冀州為中土,古軒轅,陶唐,有虞,夏後,殷人所都,及實沈,台駘,孤竹之封皆在焉. : 기주(冀州). 석문(釋文)에 의하면 : 기(冀)는, 거(居)와 기(器)의 반(反)이다. : 기주(冀州)는 가운데 땅(中土)인데, 옛 헌원(軒轅), 도당(陶唐), 유우(有虞), 하후(夏後), 은인(殷人)의 소도(所都)와 실침(實沈), 태태(台駘), 고죽(孤竹)의 봉지(封地)등 모두 이곳에 있었다.》고 하였다.
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 탕(湯)【기원전(紀元前) 1,765년 개국(開國)】임금 때, 제후국(諸侯國)으로 봉(封)해졌으며, 군성(君姓)은 묵태(墨胎)씨이다. 또 수서(隋書) 배구전(裵矩傳)을 보면, 〈고려(高麗)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다.〉라고 하였다.
➨ 이러한 나라(國)들이 극동(極東)인 반도(半島)나, 열도(列島) 땅에 있었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사기(詐欺)다. 위의 원전(原典)에서 인용(引用)하고 있는 괄지지(括地志)는 : 「당(唐)나라 복왕(濮王) 태(泰)」등이 편찬(編纂)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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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로부터 그 이하(以下)의 기록(記錄)들은, 모두 ‘동방(東方) 이족(夷族) 왕조(王朝)’로써, ‘천자(天子) 또는 황제(皇帝)’로 불렸으며, 그 속에는 수많은 제후국(諸侯國)들이 천자(天子)와 황제(皇帝)들 받들며, 그 조정(朝廷)을 천조(天朝)라고 부르며, 수천(數千)년 봉건왕조(封建王朝)를 이끌어 왔다.
오늘날 대한민국(大韓民國) 대통령(大統領) 관저(官邸) 정문(正門)에도 봉황(鳳凰)이 크게 새겨져 있는데, 곧 날아오르는 듯하다. 혹자(或者)들은 봉황(鳳凰) 상징(象徵)이 “용(龍)” 상징보다 한 수 아래라고 말한다. 이는 무지(無知)에서 나오는 말이다.
용(龍)은 조선왕조(朝鮮王朝) 황실(皇室)의 상징(象徵)이기도 하며, 또한 수신(水神)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동방(東方)의 이족(夷族) 곧 「동이(東夷)=구이(九夷)」들의 터전이 어떻게 반도(半島) 땅일 수 있겠는가! 또한 어느 때에 한족(漢族)이란 소수(少數)종족(種族)이 끼어 들 수가 있었겠는가?
2017년 11월 11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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