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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유산자료 스크랩 인물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겸재 정선 [謙齋 鄭敾] - 조선의 금수강산이 붓끝에서 완성되다
朴晙瑛 추천 0 조회 56 15.10.17 02: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겸재 정선

조선의 금수강산이 붓끝에서 완성되다

[ ]

출생 - 사망1676년(숙종 2년) ~ 1759년(영조 35년)

겸재 정선( , 1676~1759년)이 살던 시대는 진경시대()이다. 진경시대는 숙종대에서 영조대까지인데 겸재의 활동기인 영조대에는 진경시대 중에서도 전성기다. 진경시대란 조선 후기 사회가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 고유 문화인 진경 문화를 이루어 낸 시기를 의미한다. 이 문화의 주도자는 왕조시대의 특성상 군주인 숙종과 영조, 정조지만 구체적인 문화 현장에서 당시대가 진경시대임을 작품으로 실증해 준 이는 정선이다. 그래서 그는 화성()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선, 「인곡유거()」1740~41년, 종이에 옅은 채색, 27.3×27.5cm, 간송미술관 소장.

양란 후 조선 사회는 전란 후의 혼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상처받은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는 방안을 강구했으니 명ㆍ청이 교체된 세계 질서 재편기에 무력으로 중원을 제패한 청나라의 야만성을 부각시켰다. 청이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동맹국인 조선을 선제 공격한 것이 병자호란이므로, 조선은 침략자인 청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고취하는 것으로 전쟁 후유증 극복의 장치로 삼았다.

또한 평화 공존하는 세계 질서를 무력으로 파괴한 청나라는 세계(당시의 동아시아)의 주도국이 될 수 없다고 치부하고, 조선이야말로 예의를 숭상하고 인륜을 지키는 도덕적 문화 국가의 핵심이라 자부하면서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국임을 천명했다. 조선 문화의 본질은 평화와 애경을 기본으로 하는 자연 친화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문화의 주도층인 지성들이 숭상하는 선비 정신과 검소 질박한 삶의 방식이 그대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생활 양식의 주류가 되었다.

진경을 절묘하게 묘사한 산수화의 수요가 폭증한 것도 이때였다. 조국 산천을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일컬으며 산천 경개 유람하는 국토순례가 유행을 했는데, 왕을 비롯한 궁중 사람들이나 여행 할 처지가 못 되는 사람들이 그 사실적 산수화의 수요자였다. 그러한 문화계의 흐름 속에서 진경산수화의 화법을 완성한 화가 중의 화가가 겸재 정선이었다.

한호, 『후출사표』종이에 먹, 30.5×20cm.
한호는 조선 전기에 유행하던 조맹부의 송설체를 넘어 왕희지체와 안진경체의 재해석을 통해 조선 고유의 서체를 이루어 냈다.

진경산수화가 겸재의 손에서 완성되기까지 조선의 독자성을 형성하기 위해 고심한 여러 인사의 사상적, 문화적 움직임이 있었다. 문학에서는 송강 정철(, 1536~1593년)이 가사문학으로서 국문학 발전의 서막을 열었고, 글씨에서는 석봉 한호(, 1543~1605년)가 송설체를 뛰어넘는 조선 고유 서체인 석봉체를 이루어 냈으며, 그림에서는 창강 조속(, 1595~1668년)이 전국을 유람하면서 경개 절승의 감흥을 읊고 그림으로써 진경시화의 기틀을 닦았다.

조선 왕조는 중국 송나라에서 형성된 성리학을 국학으로 채택하여 성립한 국가이다. 따라서 조선 왕조의 입국 체제는 송나라의 제반 문물을 모방한 것으로서, 불교 예술이 발달한 고려의 미술이 불상 조각을 중심으로 발달한 점과 비교된다. 고려 말에 성리학과 함께 원나라에서 도입된 중국의 강남 문화는 송의 한족 지식인들이 이어온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였다. 이 문화의 특징은 사대부의 교양 필수로서 시ㆍ서ㆍ화를 겸수하는 것이었다. 이때 조맹부(?)의 송설체()가 들어와서 조선 전

진경산수 탄생의 배경

조선 전기는 외래 사상인 성리학을 이해하여 자기화해 간 시기였는데 시대의 꽃인 예술도 성리학을 뿌리로 하여 자기화를 촉진하였다. 예컨대 전기의 그림에서는 산천도 중국 남방의 산천이요, 의관도 문물도 중국의 것이었다. 그림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중국 옷을 입었고, 소도 조선의 소가 아니라 구부러진 긴 뿔을 가진 중국 남방의 물소였다.

이러한 경향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 사상계의 변화와 맞물린다. 퇴계 이황(退 )에 의하여 외래 사상인 성리학의 이해가 완결되고 율곡 이이( )에 의하여 성리학이 조선에 토착화하자 제반 문물도 고유색을 띠기 시작했다. 성리학이 조선에 와서 조선 풍토에 맞는 신사상으로 재정립된 것이다.

조선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림이 자신의 이상을 정치 현실에 구현하려는 시점에서 일어난 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었다. 이 양란은 조선성리학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사림에게 엄청난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난 뒤에 모색된 것이 조선중화 사상이었다. 조선이야말로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국이라는 자부심이 고양되었고, 나의 국토, 나의 산하가 가장 아름답다는 국토애가 고양되었다. 17세기의 양란 후유증 극복 과정을 거쳐 18세기의 문화 전성기가 도래한 것이다.

조속, 「호촌연응()」종이에 옅은 채색, 27.6×38.5cm, 간송미술관 소장. 구름과 아지랑이 가득한 호수 풍경을 미법() 산수의 기법으로 표현하였다. 조속은 사대부 화가로서 사생과 함께 중국 산수화의 기법을 임모해 가며 진경 산수의 화법을 찾아간 선구자이다.

이러한 시기에 태어난 겸재는 자신의 시대 사명을 그림으로 이루어 낸 화성이다. 화강암의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우리 산천을 표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필법을 창안하고, 산천을 음양대비로 표현하는 음양기법도 창안했다. 그의 금강산 그림에서 음양대비법이 극명하게 구사되고 있다.

가까운 곳의 흙산()을 육산()으로 표현하고 먼 곳의 바위산()을 골산()으로 표현했으니 육산은 음()으로서 양()에 해당하는 골산을 부드럽게 에워싸는 형국을 이루었다. 육산은 먹물이 뚝뚝 흘러내릴 듯한 붓질로 수많은 점을 찍어 무성한 숲을 표현하고, 골산은 수직으로 내려긋는 선의 묘사로 바위산의 강경한 기세를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겸재의 화법은 조선의 산천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진경산수화법으로 일세를 풍미하며 조선 고유 문화의 징표가 되었다.

겸재는 80세 이상 장수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화필을 놓지 않았다. 「인왕제색도」처럼 우람하고 힘찬 산수화는 물론, 신사임당류의 조선적 정조가 흐르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초충도 」에 이르기까지 모든 회화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금강산 그림에서 특히 이양자의 요소가 잘 조화되어 있다. 겸재 그림의 변화 과정은 몇 차례에 걸쳐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그때마다 새롭게 그린 금강산 그림들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겸재는 당대의 대시인이자 평생지기인 사천 이병연(? )과 시화상간()의 약속을 하고 시와 그림을 바꾸어 보면서 선의의 경쟁을 했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이른바 시와 그림이 서로 보완하는 경지를 개척했다. 그의 그림은 대부분 실제 경치를 사생한 진경이지만 소나무 아래 두 노인이 시축()을 펴놓고 앉아 있는 「시화상간」 그림은 두 사람의 우정과, 시와 그림이 만나는 경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림으로 일세를 울리다

작자 미상, 「영조대왕 어진」1900년 이모, 비단에 채색, 110×68cm.
영조는 세제 시절 정선에게서 그림 수업을 받았을 정도로 관심과 소질을 보였고, 진경 문화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겸재의 그림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후원 세력이다. 당대의 명가인 안동 김문이 그를 후원했고, 겸재는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안동 김문의 주거지인 청풍계()를 여러 번 그렸다. 그가 청풍계 그림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 하는 것은 현재 남아 있는 겸재의 그림 중에서 최고 명품으로 꼽히는 데서 확인이 된다. 아울러 최고 권력자인 영조의 후원이 있었다. 영조는 세제()1) 시절 그에게서 그림 수업을 받을 만큼 그림에 남다른 관심과 소질이 있었다.

조선 왕조는 왕과 후계자인 세자에게 성학()2)을 강조하면서 신하들에 의한 평생 교육인 경연과 서연을 지속적으로 행했기 때문에 성학이 완성된 군주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숙종도 그림과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지만 영조는 시ㆍ서는 물론 그림에도 탁월한 재능과 관심을 보였다. 영조가 군사()로 자부하게 되는 배경에는 성숙된 학문과 더불어 빼어난 시ㆍ서ㆍ화의 경지가 있는 것이다. 임금이면서 신하의 스승 역할까지 할 수 있다는 영조의 자부심은 그대로 정조에게 계승, 발전되었다.

이와 같이 신하들의 학문을 능가하는 학자 군주가 연이어 탄생하면서 진경시대가 열렸으니, 시대의 꽃에 해당하는 진경 예술이 탄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겸재는 이 진경시대의 중심부에서 영조의 후원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영조는 그를 청하현감으로 임명하여 금강산 그림의 완결판인 「금강전도」를 그릴 기회를 주었고 양천현감으로 임명하여 한강변의 경승을 그린 『경교명승첩 』 제작의 기회와 여건을 제공했다.

정선, 「금강전도」1734년, 종이에 수묵담채, 130.7×94.1cm, 호암미술관 소장.
정선은 화강암으로 된 우리 산천을 표현할 새로운 필법과 흙산과 바위산을 음양대비로 표현하는 기법을 창안하여 금강산 그림에서 이를 극명하게 구사하였다.

겸재는 1676년(숙종 2년) 1월 3일 서울 북부 순화방 유란동(오늘날의 청운동)에서 아버지 시익()과 어머니 밀양 박씨〔박자진()의 딸〕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 당시로서는 만혼이었고, 겸재가 14세에 아버지가 사망했으므로 같은 동네의 외가에서 의탁하여 성장했다.

겸재 정선의 그림은 1711년 『신묘년풍악도첩 』을 제작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1710년 5월 금화현감에 부임한 사천 이병연은 그 다음해에 친구 겸재를 초청하여 금강산 여행을 함께 한다. 이때 겸재는 그의 첫 금강산 그림인 『신묘년풍악도첩』을 그렸다. 그리고 이 해에 겸재의 후원자인 안동 김씨 가문의 육창()3) 중 첫째인 김창집()이 동지정사로 북경에 갈 때 넷째인 김창업()은 자제군관()으로서 겸재의 그림을 가지고 갔다. 이로써 화가 겸재의 명성이 북경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그 후 겸재의 그림은 북경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고가로 거래되었다.

정선, 「단발령망금강산()」1711년, 비단에 옅은 채색, 34.3×39.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묘년풍악도첩』은 1711년 이병연의 초청으로 금강산 여행을 함께 한 뒤 그린 첫 금강산 그림이다.

「단발령망금강산」에 붙인 이병연의 시

겸재는 안동 김문 육창 중 셋째인 김창흡()의 제자였다. 효종의 딸 숙경공주()의 손자로서 영조대의 대표적인 탕평대신인 원경하(, 1698~1761년)는 김창흡의 시와 겸재 정선의 그림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김창흡의 시와 정선의 그림이 있으면 높은 곳에 수고로이 오르지 않고도 중향성()과 만폭동()이 눈앞에 삼연()하다. 문을 닫고 안석에 기대앉아 하나하나 읊조리노라면 이 몸은 늘 금강산에 있고, 누워서 명산을 유람하니 옛사람이 부럽지 않다. 시와 그림을 다시 논하겠는가.”

제자인 정선이 그리고 김창흡이 시를 붙인 금강산 동국진경이, 서울에 앉아서 금강산의 명승을 감상할 수 있을 만큼 핍진하게 시화일치의 경지를 이룬 데 대한 찬사이다.

작자 미상, 「김창흡 초상」비단에 채색, 37×29cm. 김창흡은 조선의 산천 풍물을 자기 소리로 읊고 영물시도 조선의 문물을 위주로 했다.

정선, 「금강산내총도」비단에 채색, 28.2×33.6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영의정 이천보는 세상에 그림을 논하는 자는 반드시 정선의 그림에 김창흡의 시를 맞춘다고 평했다.

「금강산내총도」에 붙인 김창흡의 제사

영조대의 영의정 이천보(, 1698~1761년)도 김창흡과 정선 사제 간에 이룬 시화일치의 경지를 이렇게 평가했다.

“세상에서 그림을 논하는 자는 반드시 정선의 그림에 김창흡의 시를 맞춘다.”

김창흡과 정선이 이룬 시화일치ㆍ시화상보()의 전통이 김창흡 사후에는 이병연과 정선으로 이어졌다.

겸재 정선의 친구인 사천 이병연도 김창흡의 제자이다. 김창흡과 이병연의 시는 조선의 산천 풍물을 자기 소리로만 읊고 묘사하는 사경시()를 주종으로 함으로써 그 개성을 확연히 드러냈다. 자연 경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영물시(?) 역시 조선의 문물을 주로 했는데 특히 그의 매화시는 명품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겸재는 40세의 늦은 나이에 음직으로 출사했다. 김창집의 천거였는데, 화가로서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이 39세경이므로 그 명성에 힘입은 바 컸을 것이다. 1721년에 하양현감으로 부임하여 5년 간 지방에 있는 동안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그의 후원자 김창집이 노론 사대신()의 한 사람으로 사사()되고 중앙 정계에는 폭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겸재는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 화도()에만 전념하여 이 정변을 모면했다. 1726년 임기를 마치고 경상도의 명승을 그린 『영남첩 』을 가지고 중앙에 복귀했을 때는 신임사화의 폭풍이 지나간 뒤였다. 그리고 뒷날 그의 후원자가 된 영조가 즉위했다.

영조는 진경 문화 전성기의 군주답게 예술에 상당한 조예를 갖고 있었다. 영조는 겸재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호로만 부를 정도로 그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다. 영조는 1733년 58세의 겸재를 경상도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청하현감으로 발령했다. 사천 이병연은 바로 한 해 전에 삼척부사로 제수되었으므로 이들 친구는 함께 해악() 간을 노닐면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정선, 「내연삼룡추」1733~35년, 종이에 옅은 채색, 29.7×21.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조는 즉위 후 정선을 경상도에서 가장 경치 좋은 청하현감으로 발령했으며, 정선은 이곳의 명승 내연산 삼룡추를 화폭에 담았다.

65세인 1740년에 양천현감으로 부임하여 그린 그림이 『경교명승첩』이다. 양천은 경강의 초입으로서 서울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삼각산으로부터 북악산,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백색바위 봉우리들이 한강과 어우러지는 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그는 양천현에서 서울 근교의 명승들과 한강변의 명승들을 그렸다.

겸재는 1747년 72세의 노인으로 또다시 금강산 여행을 떠났다. 이때의 작품집으로 현존하는 것이 『해악전신첩 』이다. 30대인 1711년에 그린 『신묘년풍악도첩』과 비교되는 그림이다. 전자는 패기 넘치는 무명 화가답게 날카로운 필법을 구사하고 있는 데 비하여 72세의 노대가가 그린 후자는 세련되고 부드러운 필치로 달관의 경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필묵 사용법의 기본 원칙과 음양 조화의 원칙은 한결같이 지키고 있다.

정선, 「문암관일출」, 『해악전신첩』 중비단에 채색, 1747년, 25.5×33.0cm, 간송미술관 소장.
『해악전신첩』의 금강산 그림은 기본 원칙은 지키면서도 세련되고 부드러운 필치로 달관의 세계를 보여 준다.

이병연, 「문암관일출」종이에 먹, 1747년, 25.5×33.0cm, 간송미술관 소장.

만년의 겸재는 점차 추상의 세계에 몰입했다. 대상에 대한 대담한 생략과 단순한 색조로 대상의 본질만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화풍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이로써 그림이 도달할 수 있는 최종 경지에 이른다. 겸재가 80세를 넘길 즈음에는 그의 그림을 거의 집집마다 소장할 만큼 애호가가 많았다.

겸재는 화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영예를 누렸다. 벼슬은 재상의 반열인 종2품 동지중추부사에까지 오르고, 벼슬이 없던 부조() 3대의 추증도 받았다. 그림으로 일세를 울렸고 그림으로 경제력도 다졌다. 그가 태어난 동네 부근에 만년의 주거지인 인곡정사()도 마련했고, 이곳에서 1759년(영조 35년) 3월 24일 84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생전에 마련해 둔 터였던 현재의 도봉구 쌍문동에 안장되었다.

각주

  1. 1 세제(世弟) : 경종의 이복동생으로서 후계자에 책봉되었다
  2. 2 성학(聖學) : 제왕학
  3. 3 육창(六昌) : 김수항의 昌자 항렬 여섯 아들

    [네이버 지식백과] 그림으로 일세를 울리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12. 10.,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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