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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북 순창 광덕산 강천사(廣德山 剛泉寺)를 찾아서
-강천사의 전각과 이모저모-
지난 4월 2일, 관리사무소에서 강천사 일주문까지 2km에 불과한 길을 그것도 완전 평지길인 데도 1시간 10분 걸려 오전 9시 40분, 일주문에 도착했습니다. 딱 한 번 앉아 쉬었을 따름인 데... 사진에 담는다고 발걸음을 멈춘 때문이지요. ^^
강천사는 어떤 절일까 상상 속에 그려 보고 정보를 알아보았지만 막상 대하고 나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강천사 일주문인 강천문(剛泉門)
강천문(剛泉門) 편액 -남곡 김기욱(南谷 金基旭) 선생 글씨-
관지(款識)를 보면 신사중추절(辛巳仲春節) 남곡 김기욱(南谷 金基旭)이라 했으니, 이 편액 은 불기 2545년(2001)년 음 2월에 남곡 김기욱 선생이 쓴 글씨입니다.
선생은 전라북도 서예대전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전라북도 서예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 서 예대전 초대작가, 월간서예 초대작가, 대한민국 서예문인화대전, 단원미술제 심사위원을 역 임한 순창의 대표적인 서예가입니다.
광덕산 강천사 전경
이 사진은 전망대에 올라 담은 것으로 오색연등 아래 5층석탑이 있습니다. 이 탑은 바로 대웅전 앞에 있습니다.
이제 강천사에 들어섰으니 강천사에 대하여 알아볼 차례입니다. 『전통사찰총서』에 의 거하여 가술해 봅니다.
강천사(剛泉寺)는 전북 순창군 팔덕면 강천산길 270(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996번지) 광덕 산(廣德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암사의 말사로 비구니사찰입니다.
이 절은 호남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부르는 강천산 계곡을 따라 관리사무소에서 2km정도 오르면 있습니다. 아마도 강천산(剛泉山)이란 이름은 소금강(小金剛)의 강(剛)에 물이 좋아 천(泉)을 보태 이루어진 이름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이 절은 신라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원년(887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고, 고려 충숙왕(忠肅王) 3년(1316)년에 덕현(德賢) 스님이 중창하면서 오층석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서는 성종 13년(1482년)에 작성한 「강천사모연문」 을 통해 이 해에 절이 중창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연문은 신말주(申末舟, 1439~?)의 부인 설씨(薛氏)가 적은 글로서 당시 강천사의 중건에 관련된 내용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말주(申末舟)는 저 유명한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인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는 성종 1년(1470년)에 순창에 내려가 오랫동안 살았다고 합니다. 이 모연문에 따르면 절은 옛날에 신령(信靈) 스님이 광덕산(廣德山) 가운데서 명승지를 골라 그곳에 초암을 짓고 지 낸 것으로 유래한다고 합니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절이 폐허가 되자 중조(中照) 스님이 서원을 세워 시주를 모아 중창했는 데, 부근에 부도(浮屠)가 있으므로 절이름을 임시로 '부도암(浮屠庵)으로 불렀으며, 이때 절은 자그마한 규모였지만 청정한 수도처로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절은 다시 퇴락하였고, 중조 스님은 설씨(薛氏)의 도움을 얻어 중창을 했다고 합니다. 이 때의 중창은 설씨부인의 힘이 매우 컸는데, 가부장적인 남성 위주의 사회를 지배하던 당시 에 여인의 힘으로 큰 불사를 이룬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하겠습니다.
경내에 들어서면 쉼터에 돌무더기가 보입니다.
이후 절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으나 선조 37년(1604년)에 소요대사(逍遙大師)가 중창 하였습니다. 그런데 영조 36년(1760년)에 출판된 『옥천군지(玉川郡誌)』에 '복천사(福泉 寺)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 무렵 한때 복천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옥천군지(玉川郡誌)』에는 당시 절의 부속암자로 명적암(明寂庵)ㆍ용대암(龍臺庵) ㆍ연대암(連臺庵)ㆍ왕주암(王住庵)ㆍ적지암(積智庵) 등 5개 암자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절의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철종 5년(1855년)에는 금용(金容) 스님이 중창 했다고 합니다.
근래에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보광전ㆍ칠성각ㆍ첨성각 등이 불탔으나, 주지 김장엽(金 奬燁) 스님이 1959년에 첨성각, 1977년에 관음전, 1978년에 보광전을 각각 신축하였습니 다. 그 뒤 1992년에 보광전을 대웅전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후 강천사에 대한 정보는 없는데 현재 있는 당우(堂宇)로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과 수 행처 선실(禪室)인 심우당(尋牛堂), 그리고 주지 스님의 주석처인 염화실(拈華室), 요사인 세심대(洗心臺), 안양루(安養樓)가 전부인 단출한 규모입니다. 이밖에 오층석탑, 괘불대 등이 있고 범종을 걸 종각 신축불사를 추진 중에 있습니다.
비록 작은 정성이지만 그 마음은 크게 자라 선업을 이루리라.
강천사 안양루를 통해 강천사 경내로 들어갔는데, 안양루 옆길은 강천산, 광덕산을 찾는 탐방로입니다. 우리도 강천사 대웅전을 찾아 예배하고는 이 길을 통해 현수교, 전망대, 구장군폭포로 갈 예정입니다.
안양루(安養樓)
강천사의 전각은 보이는 것이 다인데 대나무울타리가 운치 있어 보입니다.
스님들이 기거하시는 세심대(洗心臺), 요사채로 보입니다.
이곳은 출입금지
주지스님의 주석처 염화실(拈花室) 및 종무소.
강천사를 일견해 보니 일자형으로 늘어선 당우가 단출하기가 이를 데 없더군요. 참배할 전각은 오직 대웅전 하나... 절에 늘 있는 삼성각 하나 없더군요. 다만 선실인 심우당(尋 牛堂)과 종무소를 겸한 주지 스님의 주석처 염화실과 요사가 전부인 조촐한 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천사를 한번 가보고 싶었던 것은 무슨 연유였을까?
대웅전 마당엔 오색연등이 달려 있습니다.
대웅전은 오색연등에 가려져 있어 정면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대웅전 모습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좌보처 관세 음보살 우보처 지장보살과 신중탱화와 칠성탱화 그리고 산신탱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 건물은 1978년에 보광전으로 신축한 건물인데 1992년에 대웅전으로 개명했다고 합니다.
여기 네 개의 기둥에 주련이 있는데 불자들이 늘 애송하는 찬불게입니다.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무여불 천상천하 어느 누가 부처님과 견주리오. 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무여불 시방세계 둘러봐도 비길 자가 전혀 없네. 世間所有我盡見 세간소유아진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살피어도 一切無有如佛者 일체무유여불자 부처님을 따를 자가 천지간에 없습니다.
대웅전 편액 고달 최승활(古達 崔承活) 선생 글씨
대웅전 편액을 쓴 고달 최승활 선생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여 알 수 없습니다.
우보처 지장보살 본존 석가모니불 좌보처 관세음보살
신중탱화(神衆幀畵) -불기2546년(2002) 4월 8일 봉안-
칠성탱화(七星幀畵) -불기2546년(2002) 4월 8일 봉안-
산신탱화(山神幀畵) -불기 2537년(1993) 3월 25일 봉안-
대웅전 마당의 오층석탑 및 괘불대 등이 연등 그늘로 잘 보이지 않네요.
그늘 속의 오층석탑
강천사 오층석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2호-
여기에 안내문이 있어 전문을 옮겨 봅니다.
「이 탑은 1316년에 덕현(德玄) 스님이 강천사를 다시 지을 때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만든 오층탑으로 다보탑(多寶塔)이라고도 부른다. 2층, 3층, 4층의 덮 개돌에는 6ㆍ25 한국전쟁(1950~1953) 때 총탄을 맞은 한적이 남아 있다.
강천사는 풍수지리설을 체계화한 도선국사(道詵國師)가 887년에 지은 절로서 임진왜란(1592 ~1598)과 6ㆍ25 한국전쟁 때 이 탑을 제외한 경내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타 없어졌다.
1959년부터 주지였던 김장엽(金奬燁) 스님이 복원을 시작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웅전을 바라보며 왼쪽의 괘불대 정면 모습
괘불대 측면 모습
괘불대(掛佛臺)는 법당 밖에서 불교의식을 봉행할 때 괘불(掛佛)을 거는 괘불지주(掛佛支柱) 를 말합니다. 괘불(掛佛)이란 글자 그대로 걸도록 조성한 불화(佛畵) 불상(佛像)으로 예배용 불화입니다. 괘불을 법당 앞에 걸어 놓고 법회를 봉행하는 것을 괘불재(掛佛齋)라 합니다.
대웅전을 바라보며 오른쪽의 괘불대 정면 모습
측면에서 바라본 괘불대 모습
강천사순례 인증샷
대웅전 왼쪽에 임시로 설치한 범종
지금 범종을 안치할 종각건립불사를 권선하고 있습니다.
강천사사적비(剛泉寺事蹟碑)
강천사사적비(剛泉寺事蹟碑)
설씨부인 권선문 번역문
앞서 일주문 밖 300m 지점에 있는 부도전에 설씨부인 송덕비와 권선문비가 세워져 있음을 보았는데 거기서 미처 권선문을 읽지 못했는데, 여기에 이르러 <설씨부인 권선문 번역문> 을 읽어 보니 감동이 되어 문장이 길지만 그대로 옮겨 봅니다.
설씨부인 권선문 번역문
「대개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설(因果說)이란 착한 일이건 악한 일 이건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행한 것을 인(因)이라 하고, 그 후에 그에 상응한 보답을 받는 것을 과(果)라고 한다. 나는 한 여성으로서 비록 불교의 오묘한 이치를 잘 알지는 못하지 만, 지난 날의 역사를 대략 살펴보면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이래 자비(慈悲)를 강조 하고, 인과(因果)의 이치를 깨우쳐 주어 많은 중생을 고통에서 구해 주었다고 알고 있다.
그리하여 훌륭한 제왕이나, 제후들, 또는 뛰어난 조정의 대신이나 일반 지식인들까지도 모 두 그 풍속을 따르고, 부처님을 흠모하였다. 그 중에는 몸소 불도(佛道)를 실천하고, 정성껏 부처님을 섬기어 심신의 더러움을 완전히 떨쳐 버려서 깨달음의 길에 나아가는 이가 끊임 없이 나오는 것을 보면 불교 신앙의 깊이와 이로움이 없다면 어찌 이러한 행적이 나타나겠 는가? 그렇기 때문에 나도 평소에 불교의 가르침을 믿고 기꺼이 따르는 가운데에서 마음의 기쁨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금년 음력 2월 어느 날 밤 꿈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님 형싸(邢氏)께서 선녀와 같은 옷차림으로 관을 쓰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내 앞에 마주 앉더니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내일 어떤 한 사람이 찾아와 너에게 좋은 일을 함께 하자고 청할 것이니 모르지기 너는 기 쁜 마음으로 이를 따르고, 행여라도 싫어하는 뜻은 갖지는 말아라. 그가 청하는 일은 장차 너에게 복이 될 일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듣자마자 나는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 고 나는 일어나 옷을 단정히 입고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는데, 과연 꼭두새벽에 밖에서 누군가가 사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찾아온 사람은 가까운 마을에 사는 평소에 잘 아는 약비(若非)라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그를 맞아들여 앉게 하고 찾아온 연유를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순창고을 광덕산(廣德山) 안에 산수가 가장 맑고 아름다운 곳이 있어 옛날 '신령(信靈) 이라는 스님이 이곳에서 잠시 초막집을 지어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를 거치 는 동안 무더위와 추위 및 비바람에 집과 담장이 다 무너져 마침내 빈 옛 터만 남게 되었으 며, 그래서 뜬 구름 흐르는 물과 같이 떠돌아 다니는 스님들의 오랜 한탄의 대상이 되었습 니다.
그런데 최근 '중조(中照) 라는 뜻 있는 스님 한 분이 있어 의로운 뜻으로 이 절을 다시 세울 것을 결심하고, 자신도 돈을 내는 한편 또 여러 불자들을 두루 찾아가 보시를 권하여 이때 저도 비록 적은 액수나마 성금을 냈습니다. 이 때 불전(佛殿)을 신축하여 단청을 마치고 절 이름을 부도(浮屠)가 있으므로 부도암(浮屠庵)이라 하였습니다. 비록 그 규모는 작으나, 도량이 깨끗하고 고요한 점에 있어서는 이 산 중의 다른 어느 사찰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 으며, 그로부터 지위가 높고, 이름 있는 인사들이, 혹은 조용한 곳을 찾아 수양을 닦으려는 사람들이 모두 즐겨 찾아와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원래의 공사가 바쁘게 서둔 탓으로 매우 부실하여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 였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는데도 집이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중조 스님 과 제가 그 개축을 계획하여 여러 모로 의논을 하였으나, 워낙 재력이 부족하여 아직껏 말 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부인께서는 평소에도 이와 같은 일을 항상 기쁜 마음으로 돕는다고 하시기에 시주(施主)로 모시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부인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정부인 설씨가 강천사 중건을 위해서백성들에게 시주를 권선한 16폭의 문첩
「이때 나는 어젯밤 꿈 생각이 나면서 나도 모르게 일어나 재배를 하였고,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일이야말로 간 밤의 꿈이 얼마나 신기한가를 입증해 보여주는 것이네. 나의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살아 계실 적에도 타고난 성품이 영명(英明)하여 오직 착한 일만을 하고, 악 한 일은 일체 하지 않았으니 지금 틀림없이 저승에서 존귀한 자리에 계시면서 미래의 운수 까지 다 아시고, 나에게 이렇게 알려 주시는 것이 분명하네.
지금 약비 그대가 말한 그러한 일은 내가 평소에도 즐겨 하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더구나 어머니의 명을 받았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내가 마땅히 그 일을 담당하여 그 절 을 우리 집안의 원당(願堂)으로 삼겠네.
지금 그 암자(현재의 강천사)의 규모를 듣건대 그 건축에 소요되는 재물이 그렇게 많은 것 도 아니니 그 일을 나 혼자 감당한들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일에는 이왕 이면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참여하여 그들도 이 기회에 장래의 복을 위한 선인(善因)을 쌓 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다만, 오늘날 세상사람들이 모두 끝없이 욕심만을 쫓아 세상을 뜰 때까지 그 속에서 헤어 나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찌 그들이 다 깨달아 착한 일을 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 러기는 하나 또 한편 생각해 보면, 불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약 낡은 절을 잘 수리하면 이 는 두 개의 범천(梵天)에 나아갈 복을 받는다' 고 하였으니 첫째는 공덕을 쌓아 선한 뿌리 를 내리도록 하여 장차 어버이에게 복이 오도록 하는 일에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를 뜻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그 누군들 이번 기회에 착한 일을 하여 크게는 임금과 어버이에게 복이 되게 하고 작게는 자신에게 이롭게 하며, 나아가 천 지만물에 이롭게 할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마땅히 여러 신자와 그 밖의 뜻 있는 사람들에게 이번 일의 내용을 잘 알려야 할 것일세. 다만 내자신이 직접 나아가 다니면서 널리 권유를 한다는 것은 여성의 몸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니 내가 지은 선을 권하는 글[勸 善文]을 중조 스님이 두루 가지고 다니면서 권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렇게 물었더니 약비가 대답하기를 "이것이 바로 저와 중조 스님이 부인께 바랐던 일입니 다." 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지어 우리의 뜻을 밝히는 바이니 신도 여 러분께서는 이 글을 보신 후 각자 뜻에 따라 시주를 베풀어 다함께 착한 인연을 쌓기를 바 란다. 그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건대 혹 그이치를 믿지 않는 자가 있다면 나의 말이 허 황된 말로 들릴 수 있기 때문에 가까운 시기에 있었던 영험스런 사례 몇 가지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고려 말에 한 동량승이 왕륜사(王輪寺)를 고치고 금상불을 주성하려고 원납전을 구할 즈음 에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나 선비 그리고 일반 백성들까지도 재물을 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어떤 늙은 산장관(散將官. 명예직)은 지극히 가난하여 능히 보시를 할 수 없음에 절 에서 심부름이나 시키려고 13세 된 달을 내 놓았다. 스님께서는 할 수 없이 그의 뜻을 받 아들였는데, 그 때에 산장관이 모시고 있는 어떤 장군은 늙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는지라 그의 딸을 양녀로 삼고자 베 500필을 내놓고 데려갔다.
또 시중(侍中)을 역임한 최당(崔讜. 1135~1211. 호는 정안(精安. 고려 후기 문신)이라는 사람은 항상 이웃에 있는 절을 섬겨 언제나 관청에 갈 때나 돌아올 때 마다 절 문 앞에서 말을 내려 배례 를 올리고, 걷다가 절을 지난 뒤에 다시 말을 탔으며, 과일이나 곡물 등 새로운 것을 얻으면 먼저 부처님께 올리고, 혹 원당에 나아가며 손수 차를 끓여 불전에 공양하기를 오랫동안 계 속하였다.
그런데 홀연히 꿈에 부처님께서 나타나시어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나를 부지런히 섬겼으나, 남쪽 마을 응양부에 사는 노병(老兵)의 신심(信心)만 못하도다." 라고 하셨다. 그가 다음날 사람을 시켜 찾아본 즉 과연 한 노병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가 노병에게 "듣건대 그대는 항상 이웃 절에 계신 부처님을 지성껏 공경했다 하는데, 어떤 별다른 방법으로 공양했습니 까?" 라고 물어보니, 노병이 대답하기를 "내가 중풍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한 지가 7년이 되 었습니다. 그래서 다만 아침 저녁으로 이웃 절의 종소리만 들리면 절쪽을 향하여 합장했을 따름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가 노병에게 이르기를 "그와 같은 정성을 지닌 즉, 내가 부처 님을 향하는 마음이 과연 그대의 정성만 못하였습니다." 라고 하고, 이로부터 그 사람을 중 히 여기고, 언제나 녹봉을 받아 번번히 쌀 한 섬씩을 그 노병에게 내려 주었다.
대저 앞서 말한 산장관은 딸을 바친 성의가 지극하여 그 딸이 장군의 양녀가 되어 보답을 곧바로 받았고, 노병은 합장의 정성이 지극하여 그 스스로가 최시중으로부터 녹봉을 받아 일생동안 편안히 지내게 되었다. 인과의 이치가 이와 같이 밝은데, 하물며 후생에 이르러 서는 더 말할 나위가 있으리요? 단지 합장하는 정성도 그와 같은 결과를 낳았거늘 항상 직접 재물을 보시하는 공덕은 어떻겠는가? 이를 통해 보았을 때 반드시 널리 선을 권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아니함을 알 것이므로 감히 이 글을 써서 모든 이들에게 선을 권하노라.
성화(成化) 18년(조선 성종 13년, 1482년) 7월 일 정부인(貞夫人) 설(薛) 공양보시 약비(若非)」
고개를 돌리니 관세음보살을 닮은 바위가 보입니다.
신라 제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원년(887년)에 강천산을 찾아오신 도선국사(道詵國師께서 부처바위(관음바위)를 보시고 부처님도량으로 적당함을 확인하여 관세음보살이 주석하시는 강천사를 창건하셨다고 합니다.
관음바위 일명 부처바위
안내문의 글을 옮겨 봅니다.
「강천사와 함께 우측산 기슭에 서 있는 신령스러운 관음암이다. 자비로운 모습을 하고, 두건을 쓰고, 배낭을 메고,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부처를 닮았다 하여 부처바위라 부른다. 건너편 동암에 사는 스님들이 새벽에 나와 염불하고 참배하였다고 한다.」
은행나무
아직 순도 나지 않은 나무는 백일홍일까?
수각의 감로수
한 바가지 받아 목을 축이니 물이 얼마나 시원한지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네요.
심우당(尋牛堂) 선실(禪室) 스님들의 수행처
심우당(尋牛堂) 모습
심우당(尋牛堂) 편액 하산 서홍식(荷山 徐弘植 )선생 글씨
하산(荷山) 서홍식(徐弘植) 선생은 전라북도 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 수상(92), 대한민국 서예전람회 우수상 2회 수상(95, 97), 한중서법교류전, 국제서예가협회 이사, 국제서법예 술연합 호남지회부회장 겸 전북지부장, 한국서도협회 부회장 겸 전북지회장, 세계서예 전 북비엔날레 조직위원을 역임한 충남 논산 출신의 서예가입니다.
심우당 모습
여기에 주련이 있는데 흘림체라 얼핏 알기 힘들었지만 다행히 이 구절을 본 바가 있어 적어 봅니다.
月照諸品靜 월조제품정 달 비추니 온갖 품류 고요하구나. 心持萬緣輕 심지만연경 마음이 고요하니 온갖 인연 가볍고 知機心自閒 지기심자한 근기 아니 마음 절로 한가하도다. 獨坐一爐香 독좌일로향 홀로 앉아 한 줄기 향을 사르고 金文誦兩行 금문송양행 경전의 글 두어 줄 읊어 본다네.
심우당 앞의 텃밭
텃밭주변의 탑, 지주석 부재들
강천사 도로가에 화사하게 피어난 생강나무꽃
길손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수선화
이상으로 강천사에 대한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오전 10시 18분, 강천사를 물러나와 전망대 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음은 전망대로 가는 길에 만난 이모저모를 살펴보겠습니다. _(())_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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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강천사의 부처님과 이모저모 그리고 "설씨 부인의 권선문 번역본" 또한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
강천사 하면 설씨부인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길지만 옮겨 본 것입니다. _()_ _(())_
감사합니다.
처음에 떠날 때 백우님이 그러더군요. "강천사는 기대보다는 아주 단출한 절이요. 그래도 한번 가 볼만한 절입니다."로 없는데 읽을 거리는 많네요. _()_
볼 것은
옛날 군대시절에 읽었던 강천사에 대한 글이 머리에 남아 궁금했는데, 여러 정보를 취합해 보니 단출하여
을 주지 않을까 저어 되었지만 도선국사께서 창건한 절이라 하니 보통 절은 아니다 싶어 가보고 _()_ _(())_
었습니다. 그래도 다녀오니 눈에 선하네요. 역사도 살피고... 감사합니다.
강천사 전각모습과 중창불사관련 '설씨 권선문' 잘 봤습니다. _()_
수 많은 성보들이 임진왜란, 한국전쟁 등
전란속에 사라져간 아픈역사를 되새겨봅니다.
전란 속에 사라진 수많은 성보와 기록물... _()_ _(())_
파괴된 터에 다시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겠지만 훼손되어 단절된 역사를 대하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 역사 위에 설씨 같은 분들이 많이 나와서 절의 역사를 만들고 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