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성스럽지 않음이 성스럽지 않은 줄만 알고, 성스러움이 성스럽지 않은 줄을 모르고, 이미 어질지 않음이 어질지 않은 줄만 알고, 어짊이 어질지 않은 줄 모른다.
그러므로 성스러움을 끊어 버린 이후에 성스러운 공업이 완전해지고, 어짊을 버린 이후에 어진 덕이 두터워진다.
강함을 싫어하는 것은 강해지지 않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해지면 강함을 상실하기 때문이고, 어짊을 끊어 버리는 것은 어질지 않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질어지면 작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스림이 있으면 이에 어지럽게 되고, 편안함을 보전하면 이에 위태롭게 된다.
자기 자신을 뒤로 물리는데도 자신이 남보다 앞서게 되니, 자신이 앞서게 됨은 자신을 앞세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도외시하는데도 자신이 보존되니, 자신이 보존됨은 자신을 보전하여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첫댓글 이름이란 ‘나 이외의 사물’을 확정하는 것이고, 일컬음이란 ‘말하는 사람의 의향’을 따르는 것이다. 이름은 나 이외의 사물에서 생겼고, 일컬음은 나에게서 나왔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이든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에 적용하면 그것을 도라고 일컫고, ‘어떤 묘함이든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으로 추구하면 그것을 ‘아득히 구분할 수 없음’이라고 말한다. 미묘함은 아득히 구분할 수 없음에서 나오고, 모든 것은 도에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낳아 주고 길러 준다는 것’은 막지 않음이 사물의 성품을 통하게 하는 것이니, 도를 말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내놓아도 있다고 하지 않고, 무엇을 시행해도 그것에 의지하지 않으며, 장성하게 해놓고도 주관하지 않고, 덕은 있지만 주관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니, 아득히 구분할 수 없는 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