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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1년 8월 31일, 수요 마음공부방
제목: 한국에서 논의 중인 제 신학사조
강연자: 이정배 목사
타이핑: 초벌)심하은, 완성)김도권
오늘 오전 중에 강연원고를 다 써서 보내드리고 안산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컴퓨터가 망가졌어요. 고치는데 갔다줬더니 내일 오라고 해서 오늘 자료를 못 나누어 드렸는데... 나중에라도 드리겠습니다.
지난주만 해도 더웠는데 오늘 신기하게 날씨가 개벽하는 것처럼 달라졌습니다.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평소에 알고 있다 하시는 분들은 입을 다물어주시고, 지금 이자리에서 뭔가 답을 찾았다 생각이났다! 이런 분들이 있으면 손을 들고 답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임금이 훌륭한 제상을 찾으려고 문제를 냈습니다. 이 문제를 풀면 내 딸과 결혼도 시키고 제상을 시켜주겠다. 라고 하고 벽에다가 긴 줄을 그어놓고서 줄에 손 하나 대지 말고 짧게 만들어보라. 제상을 시키겠다고 딸과 결혼을 시키겠다고 눈도 찡그려보고 난리가 났어요. 알고계신 분도 있을텐데... 이게 답일거다 생각하시는 분은 어떤 답을 찾으셨나요? 이 줄을 물리적으로 줄에다가 손 하나 건들지 말고 줄을 짧게 만드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원불교에 희망이 있다고 하신 어르신이 계시는데 답을 하나 제시해주시죠.
(심산) 옆에서 보면 짧아지죠.
그렇게 말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이 줄 밑에다가 더 긴 줄을 그은 신하. 절대적으로 길었던 줄 밑에다가 더 긴 줄을 그으니까 상대적으로 짧아졌습니다. 지금까지는 그게 나한테는 절대적이었을지라도 뭔가 자꾸 익히면 지금까지 알았던 모습은 상대적으로 짧아지고 부족해 보이는 거죠.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오늘도 마지막 강의인데 조금 더 기독교에 대한 예를 들면서 자기 종교에 대한 예를 든 것은 기존의 줄에 더 긴 줄을 긋기 위한 방편이죠.
도로테졸레라고 하는 독일이 자랑하는 여성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고향은 독일 함부르크인데 함부르크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갑부의 딸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신학교에 들어간 동기가 야곱의 하나님 전지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아무도 안 믿는 집에서 부모님 몰래 다른 대학 간다고 하고 혼자 신학교에 찾아가서는 대학교 3학년 때 들켜가지고 집안이 발칵 뒤집어 지긴 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아들이 원하는 길을 들어주게 하심으로써 불효를 저지르게 되었죠. 그러다가 그녀가 독일에서 아우슈비츠 경험이라는 걸 합니다. 유태인들 600만명을 히틀러가 학살하는데 거기에 기독교인이 가담합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사람이 로마가 사형선고 하지만 로마가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유태인들 아닙니까?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유태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어요. 기독교인들이 이번 기회에 우리가 예수를 죽인 유태인들에게 원수를 갚자라며 하며 미치광이 히틀러에게 기독교인들이 동조해 버린거에요. 그래서 600만명의 유태인들이 학살을 당합니다. 물론 뜻있는 기독교인들은 저항했어요. 엘리자베스 비젤이라고 하는 사람의 소설에 보면 나오는 이야기인데 가스실에 유태인들이 갇혔어요. 가스의 농도를 점점 높이니까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디계십니까 하고 소리쳐요.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고통 속에서 지금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니까. 저기서 누가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죽고 계시다고 했어요. 지금 이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도와주지 못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하나님은 죽었다 가스실에서 하나님은 아무런 역할도 못했다. 라는 거죠. 세월호가 이와 같은 경험이라고 할 수 있죠. 이제 하나님은 죽었다. 한 유대인에게 신에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기독교 신앙에 펼친다. 하나님은 죽었지만 예수라 하는 분이 있다
예수는 이 현실에 대해서 저항하도록 하는 분이다. 우리 사회, 현실이 하나님을 죽게 만들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죽게만들었다 하나님은 없는건데 기독교에는 예수가 있어 전지전능한 하나님만을 믿었다가 정치신학교로 하나님마저 죽이는 이 세상에 저항한다. 여자인데 굉장한 정치신학 인데 그러다가 점점 나이가 들었어요. 이제 50,60되다가 한번도 자기가 여성이라는 자의식을 가진적이없어요. 그렇게 투쟁적인 젊은 시대를 살았다가 아 내가 여성이구나 하는 자의식을 가진거에요. 하나님은 죽었다했는데 자신의 자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여성성을 발견합니다. 지금까지는 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이었는데 살림살이가 하나님의 여성성이 드러난겁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만 불렀지 하나님은 어머니같은 속성이있는데.. 그래서 지금까지 희생만 강요당한 여성에 대해 의미를 강조합니다 돌아가실 무렵 70, 80대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나님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수수깨끼와 신비는 둘다 모를 때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신비라 하는 것은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알 수 없습니다. 일원상진리를 말로 해도 다 말로 설명 불가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우리가 알려고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늘 정의의 편에 서게 해주십니다. 정의의 편에 서도록 하는게 그녀의 마지막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었어요. 한 사람의 일생속에서도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것이 달라지는거에요. 도그마에 빠져있으면 예수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대답이라면 그것을 대답이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의 문제, 상황이 무엇이길래 우리의 대답이라고 하는가 대답이라고 하는 것이 도그마적인 것이 중요한것이아니라 그 사람의 상황이 뭔데 예수를 대답이라 하는가 라는 거죠. 과거에는 성서라는 텍스트가 있는데, 성서가 똑같은 대답을 준다라 할 수 있지만 우리의 물음이 없으면 성서는 답을 주지 않아요. 우리의 물음, 내가 어떤 상황에서 오는가, 태어날때부터 부유하고 정통한 하나님 한번도 느끼치 못한 여성적인 자의식의 하나님 인생을 다 살다간 하나님이, 여전히 하나님은 양파껍질처럼 벗기고 벗겨도 알 수 없는 한 사람의 삶의 경험속 에 서 정황 속 에서 그 신앙이 달라진집니다. 제 경우도 45년을 신학을 했는데 얼마나 많은 경험들이 변천사가 있는지 모릅니다.
상황이 달라지면, 텍스트에 대한 경우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거죠 이제 기독교 신학에서 다양한 신학이 존재하는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전에도 첫 번째인가 두 번째에도 말씀드렸는데 기독교 신학은 동일성에 생각이었어요. 여러분 다 푸르테스크의 침대가 있어가지고 그 기준이 있어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사람들을 눕혀보는거에요. 침대보다 길면 짤라버리고 짧으면 늘려버리고 하는 그런 기준이 있었어요. 여자에 대해서는 남자가 기준이구요 자연에 대해서는 인간이 기준이고 그리고 가난한 사람, 빈민들에 대해서는 부자가 기준이구요. 제 3세계에 대해서는 제 1세계가 기준이고,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기준이고 그게 푸르테스크의 신비입니다. 부르주아, 남자, 인간 그런 것이 푸르테스크의 침대입니다. 이 침대에 맞지 않으면 다 열등하게 되어버리죠. 그게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가 가지고 온 우월의식입니다. 그런데 푸르테스크의 침대가 이제는 사라져 버렸어요 더 이상 그런 침대는 없죠. 한마디로 말하면 포스트모던시대, 탈현대가 돌아온거죠. 지금까지는 동일성에 의해서 열등하고 차별이 되었는데 이제는 나와 다른 것, 차이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초월과도 같은겁니다. 남자인 내가 여성이 될수있어요? 없잖아요 차이라고 하는 것은 차별이었어요. 이제는 푸르테스크의 침대가 사라졌으니 차별이 아닌 초월과도 같습니다. 내가 그렇게 될 수 없는 나와는 전혀 다른 초월과도 같다고 바뀌어진거죠. 그러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대접을 받지 못한, 열등하게 차별적으로 대우를 받던 주체가 신학의 주어가 된거죠 남자에 의해 한번도 인간의 대우를 받지못한 인간에 항상 열등했던 자연이 생태신학, 자연신학이 나온거죠. 기독교에 대해서 항상 열등했던 다른 종교가 기독교 신학이 아니라 종교신학이란 말이 나오는거죠. 원불교의 교리도 저희들의 눈으로 보면 종교신학이죠. 유교신학, 불교신학, 원불교 신학 다 믿는거죠. 지금까지는 항상 부르주아들, 있는 사람들 편에서 신학을 해왔지만 역사의 주체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신학의 주체로 생겨난거죠. 난민지역에서는 그 가난한 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지역의 바깥에서는 해방신학 생기기 시작하고요. 난민지역에서는 그리고 이제 항상 인간주의였지만 자연 생태신학, 그리고 여성 남성과의 관계에서 여성을 중요시하는 여성신학이 태동됩니다. 기독교신학이 아닌 종교신학이 떠오르게 된겁니다. 기존에 인간이 동일성을 가지고 그게 보편적이라고 말해왔던 기독교가 보편적이다 남자가 보편적이다. 하던것들을 이제는 거짓된 보편에 의해 희생당한 주체를 우리가 하겠다. 이것이 여러 다양한 신학이 나오게 된 배경들이죠.
제일 먼저 부르주아에 의해 된 지금까지 인간은 모두다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모두다 죄인들이죠. 제가 저를 봐도 죄인에 가까워요 잘못을 많이 지어요. 내가 또 얼마나 그렇게 죄를 많이 지었나 하는 생각도 해봐요. 어쨌든 기독교는 인간은 죄를 지었다. 죄인이다. 부정하지 않아요 그러나 또 다 긍정하지도 않구 뭘 근거를 두었나면 성경안에 있는 선악과 하나님이 만물을 지어놓고 선악과를 지어놓았는데 이것을 하지말라 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먹었죠. 그래서 인간이 이제 죄인이 되었던 거죠. 자유의지보다는 나쁜의지를 가지고 살 유혹이 크게 됩니다. 기독교는 원죄의 종교로 이해했어요 인간이 죄를 지었고 죄를 지은 인간이 교회에와서 용서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아요. 카톡릭은 신부에게 고백을 해요. 그 죄를 또 내가 사하노라 라고 하면서 하나님 대신 역활을 하는거죠.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모두 죄인이라 하는 것,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모든 인간이 교회에서는 자기머리를 둘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성직자들의 권위가 한없이 높아지죠. 죄를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 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그러다 보니까 성경도 내가 너희를 자유케 했으니 다시는 종 노릇 하지마라. 그런데 교회만 오면 계속해서 너희들 죄인이라 이야기하고 교회안에서 사람들이 고개를 들 수 없게 하죠. 그런데 민중신학자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요. 하나님이 모든 것들을 우리들에게 맡겼어요. 이제 우리들것이고 선악과는 내꺼 하나님꺼라는 것은 구분이 아니라 우리모두의 것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모두의 것인 이것을 가져다가 개개인들이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거에요. 하나님의 것은 모두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은 공적인데 개개인이 사적으로 만들어버려요. 그럼 이게 바로 죄가 되는것이고 선악과를 따서 교만해졌고 이것이 원죄였다. 이렇게 가르쳤는데 모두의 것을 사적으로 쓰고 있어요. 여러분 3천억짜리 교회알죠? 일년에 800억 헌금을 하고 있어요. 어느 큰 대기업 회장이죠 그런데 비정규직을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악명높은기업이에요. 그렇게 번 돈을 교회에 바치게 됩니다. 자, 이게 뭡니까. 지금 마땅하게 그 노동자에게 돌려줘야할돈을 돌려주지 않고 기업가가 자기것으로 만드는겁니다. 그리고 모두의 공적인 것을 자기것으로 만든겁니다. 왜 우리시대에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많아요? 지금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겠어요? 저희집에 아들이 연극을 하는데 15명들어가는 작은 공간이있어요. 여러분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런 책들 있잖아요. 연극하는 애들이 다 찢어버렸어요. 이런책들이야 말로 아편이고 진통제이라 하는거죠. 다 대학 졸업하면 2천만원 3천만원 빚을 지었어요. 죽어라고 바쁘게 일을해도 해결이 안보이는거에요. 그런데 그 노동력 가지고 우리 사회가 이렇게 살아지는거 아닙니까. 모두의 것으로 나두면 되는 것을 사적으로 취하는거죠. 구원이라는 것은 자기가 취한 것을 공적으로 돌려놓는거에요. 여러분들 교회가 매일 안식일을 지키라고 합니다. 얼마나 교회가 주일예배를 강조합니까? 6일동안 일이있어야 안식일의 일이있죠. 일이없는데 그 안식일이 도대체 무슨 축복이겠어요? 바로 이런 현실의 문제의식이죠. 그래서 민족신앙이라는 것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민중을 가난한 사람을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한, 이런 것을 교회가 좋아할리 없죠. 신학은 신학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신학자의 사명이죠. 조금더 막스주의에 가깝죠. 남미라고 하는 것은 종속이론에 근거하여 끊임없는 착취를 당하였는지 말도 못해요. 과거 영토지배 때 일이죠. 여러분들 미션이라는 영화를 보아서 알지만 잉카의 남미대륙의 인구가 8천여명 있을 때 남자들을 다죽이고 여자들만 천만명 칠천만명만이 살아버렸어요. 그래서 남미대륙의 사람들이 다 혼혈아 아닙니까 지금은 다 해방되었지만 경제적으로 종속이 되어서 헤어나올수가 없죠. 막스가 다 나쁜것만은 아니죠. 종교가 그들의 고통을 다 외면하고, 막스가 종교는 아편이다. 기독교는 아편이다. 말하는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유명한 헬더까마라 하는 대 주교는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그 사람들을 도와주니까 그 사람들은 나를 성자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왜 가난하게 되었는지 말하니까 빨갱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왜 이렇게 가난하게 되었는지 말하고 가르치니 빨갱이라고 공산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서구의 얼마나 종속적으로 경제적인 삶의 양식이 되었는가 프랑스카 교황이 그런 현장에서 오래해서 개혁적이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거죠. 종교가 아편이 되지 않으려면 젊은 이들이 연극에서 다 찢어버렸던거 저는 아주 소름이 돋게 봤어요. 한때 우리는 얼마나 많이 봤어요 별별 이름의 책들이 많더라구요. 그게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에요. 이 대학생들의 젊은 이들의 현실이에요. 그런 문제속에서 종교가 얼마나 젊은이들에게 곁이 되어줄것인가. 그들 편의 선 신학 이게바로 부르주아적인 신학이 답이 되는게 아니라 돌이 아닌 빵을 주자는거에요. 부르주아식이 돌을 건네는 것이에요. 여기서는 교무님이 맛있는 빵을 많이 주시는거같아요. 현실이랑은 맞지 않으니까요. 한번도 주인이 되지못한, 주인이 되지못한 사람보고 주인이 되라고 하시니까요.
두 번째로 이제 다 이런 구조죠. 여성신학이라 말하는 것이 사실여성과 자연은 동일시한게 있어요. 서구가 여성을 어떻게 이해해왔는가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림)
남성과 여성이 만나면 남성도 나오고 여성도 나오잖아요. 열등한 존재 여성으로 보게되면 생물학적으로 남자속에 완변한 영혼이 들어가있고 여성의 몸은 이것을 받아서 그대로 키워야해요. 이런 존재의 탄생은 어떻게 이해했는가하면 이 완벽한 남성의 존재가 여성의 몸에 가서 기형적으로 태어난다.라는 식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주장한 이유도 되죠. 서양은 우리의 유교문화만 남존여비다.라고 하죠? 사실 서양은 더해요. 전세계의 공통적인 현상이에요. 자 그런데 여성들 가운데 남자를 능가한 감성,지각,이성적 판단을 가진 사람이 왜 없어요? 그런 사람들은 이 구조에 의하면 설명될 수 없잖아요. 그럼 남자보다 우월한 구조의 여자들이 중세의 마녀가 되는거에요. 중세의 백만명이상의 여자들이 마녀재판에 의해 죽었어요. 여성의 몸에 점같은 것이 있으면, 물속에 폭 빠뜨려 버리고 만약 악마가 선택한 존재가 아니면 다시 떠오를 것이다. 라고 하는데 발목에 못 떠오르게 돌맹이를 달아났는데 어떻게 떠 오르겠어요?여성은 절대로 남자보다 우월할 수 없다는 말은 여자들은 애기를 낳으니 고통을 느끼잖아요. 남자는 못느끼지만.. 당시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카모마일이라는 TEA가 독일말로는 카밀렌트라 하는데 민간요법이죠. 독일여자들은 카모마일로 목욕을 하죠. 민간요법이에요. 저도 스위스 유학때 위장병이 걸려서 몇 년간 카모마일을 마셔서 위장병을 고쳤어요. 그 당시 여자들은 다 마녀라고해서 마녀재판을 열어 다 목숨을 잃었던 역사가 있어요. 이제 근대에 들어오면 막 남자들이 밖에서 일해야 할거 아니에요. 일하고 돈도 벌어와야 할거아니에요. 이에 반해 여성은 집에서 남성들을 위하고 즐겁게 하는 이미지의 창녀로 비췄어요. 중세가 여성들을 마녀로 이해했다면, 근대는 창녀의 메타포로 여성들을 이해했어요. 그당시 베이컨 같은 사람들 아는 것이 힘이다 그 사람들이 여성을 창녀의 메타포로 이해했던 사람이었죠. 여성은 세컨드 섹스 이렇게 여성들이 하나님의 흔적이다.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는 방법도 종류도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근대가 막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기독교 전통에 머물러있으면 희망이 없다고 해서 기독교를 떠났겠어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하죠. 여성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다 이렇게 써 있죠. 그런데 떠나지 않고 그래도 남아있는 여성들이 아직은 기독교 전통 안에 하나님을 다시 볼 수 있는 전통이 없는가를 묻기시작한거죠. 그래서 유명한책 메모리오브허 그녀의 기억속에서 성경안에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발견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지난번에도 말씀하였듯이 히스토리를 끄집어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지만, 기독교에 남아서 기독교를 여성들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려는 페미니즘이 일어났어요. 하나님을 어머니의 메타로로 이해할 때 아버지의 메타포로 이해할 때 보다 훨씬 공감하고 사실적이였죠. 자식은 어머니의 몸으로 낳은거니까, 하나님과 이 세상의 관계는 아버지라고 불렀던 세상과 다른 세상이 오지않겠는가. 하는거죠. 하나님의 모성성 성경안에서 여성들의 경험들을 굉장히 중요하게 찾아냈고 여성신학자랑 저도 같이 살지만 쩔쩔 맵니다. 여성신학이라 하는 것이 세상의 절반도 넘습니다. 지금 000이라는분도 엄청나잖아요. 남자들 지금 정신 하나도 없습니다. 그게 다 옳은것만도 아니지만 남자들이그래? 그래 우리 똑같이 그래보겠어.. 이 과정도 한번 겪어봐야합니다. 양자들이 한번 여성들이 바꾸려고 작정을 하는거죠. 미국에서는 같은 여성이라 해도 백인여성 흑인여성이 달라요 백인여성에 비해 흑인여성은 더 처참하게 피해를 2중3중으로 당했던 것을 비춰보면 여성들 사이에서 인텔리여성들이 차별당했겠지만 일자무식한 어머지세대와 또다른 경험이 잇을거아닙니까. 지금까지 신학은 머리로 하는것인데 이제는 자기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나오는거에요. 자기의 스토리텔링을 이제 신학자들이 삶의 경험에서 많이 나옵니다.
인간에 의해서 항상 홀대를 받았던 자연의 문제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오늘날 자연환경에 의해 생태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에 대한 문제는 그렇게 알면서도 못산다는게 불편한 진실이에요. 미국대통령 고흐가 벤더리터의 신학대출신이었어요. 환경문제를 가장많이 이야기했던 사람인데, 그 집에 갔더니 어마어마하게 환경 친화적이지 못한 삶을 보면서 나온 말이 불편한 진실이 바로여기에 있구나. 그런겁니다. 사실 올 여름에 저희는 참 많이 갈등했습니다. 선풍기 한 대를 가지고 지냈거든요. 안이 시원해지면 밖은 더 더워지거든요 그래서 이제 얼마든지 시원하거 좋지만 그런 갈등을 겪어가면서 제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생태신학자라는 타이틀을 얻었기에 이게 무거운 명예입니다. 제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욕을 먹잖아요. 밀양에 가면 송전탑이 사방의 그물망에 얽혀서 여기가 사람의 살 곳이 못된다는 생각이들어요. 그 지역사람들 속에서 전기가 흐른다라해요. 일평생 고아로 자라서 송전탑이 세워졌는데 돈도빌릴수 없고 농사도 안되어서 자살했잖아요. 지금 여러분들은 마음대로 전기를 쓰면서 살아가지만 그곳에 잇는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는 기후 게으른 목동이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환경문제가 지나가지만 2010년을 기후분개원년을 살아갔습니다. 우리가 살아갔던 당대의 기온이 100년동안 살아갔던 것에 비해 가파르게 자연스럽게 오르게 되어있어요. 6도 3도 4도가 오를지 몰라요. 6도가 오르면 지구는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3,4도가 오를 때 연구가 되어있고 그 책의 결과가 6도의 악몽이라는 책이 나와 있습니다.우리는 생태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2천년동안 기독교는 땅을 지배하고 정복했습니다.그런데 인간이 모든만물보다 절대 우월한 존재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태어난 인간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어요. 잃어버렸다는 것은 땅을 지배하는 권리도 잃어버린거에요 인간이 예수를 믿어서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거에요 그러면 땅에 대해 인도를 정복하고 아프리카를 정복하고 땅에 모든 것을 다 파헤쳐서 근대화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수없는 발전을 이루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이게 맞을까요.과거 기독교는 근대화의 제일 동력이었죠 뗄레야 델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종교 기업 정치 삼위일체의 모습을 제일 앞장선 기독교였으니까요. 지금도 기독교인은 땅을 다스려라 기독교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이고 그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음껏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세상을 개척하고 있는것이죠. 이 세상에 척박한 자연을 가지고 인간을 이만큼 살게만드니 기독교는 참 훌륭한 존재이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과는 같은 방식으로 기독교가 자기의 그런 입장을 취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지구자체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지구가 십자가에 함께 달릴 것 같은 위기에 처했어요. 또 어떤 신학에서는 사람만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이 지구도 가난한 것이 되어버렸어요. 올림픽이 3일한다는 이유로 가리봉산의 나무들이 다 사라져버렸어요 이런 일들이 부지기수로 많죠. 지금은 기후붕괴 원년의 시대를 살고 있어요. 우리의 현재 종교들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고 있어요. 너 지금 그 밥을 먹고살아? 너 아직 그 집에 살아? 이 옷을 입고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를 초라하게 만들고 있어요.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이 가끔씩 재미난 프로그램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고 있는거죠. 제가 좋아하는 러시아의 사상가 베르자베트라는 사람이 인간은 물질이없으면 한순간도 살아갈수없다고 말해요. 그런데 최소한의 물질로 살려고할 때 그 물질은 단순히 물질이 아니게 되고 인간은 정신으로 살아가는 존재이 되는겁니다. 기독교인이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렇게 따르게 되죠. 원불교 신앙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되자고 하죠. 욕망을 줄이는 거에요. 과학기술로 어떻게 할 줄은 모르니까 말이죠. 우리는 기후붕괴 원년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계속해서 땅을 정복하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기독교의 2천년 역사에서 가르친 것을 생태학적으로 달리 이해하도록 기독교 신앙으로 다르게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해 사람들은 말해요. 우리는 사실적 분말의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지구의 역사를 100년이라 할 때 사람이 태어난 것은 불과 2주일 전입니다. 산업혁명은 지구로부터 5분의 대가로 이 100년된 지구가 사실적 종말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존층파괴라든지 기후변화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에요. 지금 기독교는 그런식으로 가르쳐 세상을 망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물질적인 축복신앙 덕분에 물질적으로 계속성장합니다. 성장신앙 때문에 말이죠. 얼만큼 우리가 하나밖에 없는 지구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를 종종 불교학자들하고 대화 할 기회가 많은데, 그분들은 너희 기독교가 자연을 파괴한 나쁜놈들이야. 합니다. 우리는 인정하면서도 잘 망가뜨린 사람이 잘 고치기도 해.라고 합니다. 이건 실제로도 고치려 무진장애를써요 자연도 사실 이런거죠 어떻게까지 말하냐면 동양사상이랑도 흡사하지만 인간이 인격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과의 인격을 가지고 관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페리칸이라고 하는 것을 페리칸의 방식이다. 하나님은 각각 그들의 방식 들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계류, 감정을 가지고 대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정의라고 하는 분배문제가 현실에 분배문제에 불균형하고 있습니다. 핵무기의 과다보유하고 세계의 늑대들은 싸우다가 자기 약점 보이면 싸움끝나거든요. 그렇게 14번이나 파괴했어요. 핵무기의 과다경쟁, 자연의 파괴 그렇죠? 우리 분배문제가 불균형한 이상 핵무기가 불균형한이상 기독교의 구원은 아직 무언합니다. 우리 종교가 모든 것을 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종교가 혼자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한국의 1960년대에 한국이 가장 핵무기의 위기에 노출된나라, 가속된나라 ,인구등 제이피아시아대회에서 모였어요. 기독교는 나름대로 이 문제앞에 끊임없이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를 해요. 요즘 영어로된 eco를 붙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경제적으로 환경에 관심이 많듯이 신학도 eco라는 말이 본래 집이라는 뜻이에요 함께 거주하는 집이라는 뜻이죠. 자기들의 교리에 근거해서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살려낼수있는가에 대한 문제, 인간 중심적으로 신학을 자연을 펼쳐서 생태신학을 발전시켜서 이야기하고 십자가와 함께 태양광발전을 교회의 상징으로 하려해요. 십자가 옆에 태양광 발전을 같이하자 모든 교회가 그렇게하자 말이죠.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하려하고 있습니다. 생태신학이라는 장르가 기독교안에서 아주치열한 자기 반성이죠. 여전히 교회안에서는 축복좋아하구요, 저도 교회 학교에 들어오기전에 300명정도의 담임목사 했지만 다 좋은 대학나온 부인이고 아파트있는 사람들인데 저한테 기도해주시면 헌금할게요. 그 불법으로 아파트 당첨되는 것을 흥정해요. 이제 그러한 시대에 살면 안되는거죠.
마지막으로 종교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모든 기독교 끝에 이즘이라는 것이 붙어있어요. 이데올로기라는것이요. 기독교 우월주의, 생태학적인 위기를 보면서 기독교혼자 감당할 수 없고 불교혼자 감당할 수 없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속에서 기독교가 그렇게 말한다고 힘으로 무력으로 꼼짝 못했지만 오히려 프랑스에는 기독교가 0.7 불교가 10프로가 넘습니다. 서양인들이 동양종교를 좋아하기도하고 일방적인 시대는 지났어요. 이제 모든 종교들 가운데서 가장 이세상에 궁극자를 표현하는 좋은 종교는 힌두교일 것일 겁니다. 가장 궁극적, 그리고 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궁극자의 몸을 입고 죽었다. 우발성, 역사성이라해요. 어려운말로요. 신도 인간처럼 고통을 받고 죽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전능한 신이 그가 우리와 더불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요 우리와 함께 죽고 있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종교는 사실없어요. 기독교는 역사속에서 우리와 더불어 죽고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잘 풀어 말하는데 이는 기독교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불교 연기론만큼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없어요. 바로 생태학의 기본 원리입니다. 만물의 유기체성 등 어느거 하나도 진리아닌게 없죠. 사은사상이고 역사성 우발성 인간과 더불어 고통을 받는다. 만물의 절대적인 궁극자가 있다.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힌두교, 기독교와 흡사한 유교 이슬람이 들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모든 종교들이 다 자기들의 궁극자를 말할 때 힌두교를 먼저 말하고 역사의 문제는 기독교의 이해 만물의 유기체성은 불교이고 이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모든 종교들간에는 독자성을 가지고 서로 협력해성 우리의 과제는 이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자본주의의 구조안에서 하는 것이 정면승부할 것은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23시 59분59초에 생겨난거라 보죠. 자본주의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24시간중에 23시 59분59초에 생겨나요 1초만에 생겨난거죠 종교라 하는 것이 그것을 넘어서 보여줘야해요. 이 자본주의 체제안에서 하나님 나라사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체제밖의 사유, 이 체제안에 있는 사유, 그런 상상력과 비전 이 틀 안에서 맴돌고 하는 것이 아니니, 모든 종교가 함께 하자. 바로 종교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감당하는것이죠.
지금까지 이런 신학이 있어서 한번도 주체가 되보지못했던 것을 그들에게 당당히 전해주는 것은 좋은거잖아요. 부르주아는 안되고 민중만 옳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신학은 주체가 되지못한 것이 여성의 신학, 종교의 신학, 자연의 신학, 민중의 신학 이렇게 되었잖아요. 너무나 편파적인것이있어요. 그러나 과거처럼 보편적이 남자가, 서양이 기준이고 그렇지 않지만 종교라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 있는거 아닌가. 소유격의 신학이 소중했지만 그거 가지고 안됩니다. 새로운 의미의 보편성이 앞으로 신학이 나와야할 길아닌가. 그런 종교가 도대체 어떤 종교가 될것인가입니다. 아직까지도 기독교는 헤어나오지 못한점이 참 아쉽죠. 원불교는 새로운 시대복합적으로 나올수있지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사도바울은 본래 유태인중에 유태인이었고 헬라인중에 헬라인이었죠. 그 시대의 유태인의 특권, 헬라적인 지식도 누구보다 공부많이했고 그런그가 자기 동족유태인이 예수를 믿는다는것에 잡으러가려했을 때 눈이 멀었어요. 그러다 다시 눈이 떠졌어요. 사도바울의 역사적 체험이다 종교적 경험을 합니다. 그래서 보통 기독교는 뭐라고 말하냐면, 엄청나게 이야기하지만 교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말해요 더 이상 유태인의 율법을 강조하지않고 버렸어요. 헬라인의 지식도 버렸어요 .
버린것뿐만 아니라 로마인에게는 로마인처럼 유태인에게는 유태인처럼 없는자에게는 없는거처럼 이게 사도바울의 체험이에요. 그가 부활해서 믿었다. 그러나 교리도 그렇게 말하면 안돼요.
새로운 보편적인것이다라는 것이 내가 너희를 자유케했으니 너희도 믿어라라는 식은 안되죠. 종교는 자유한것이죠. 우리 몸을 줄이고 마음을 크게하는거죠. 그런 의미에서 모든종교는 다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거죠. 당파적이아니라 새로운 보편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시대의 간직한 종교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우리들의 삶의 모습과 더불어 종교인으로서의 삶이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해봐야할 시기입니다.
이쯤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질문-
질문1
비정규직이 많은 기업주가기업주입장에서 직원들의 물질적 풍요보다는 구원을 함으로써 영적가치가 더 높다고 하면 된 것 아닌가요?
답변: 그 분은 그렇게 하겠죠. 그런데 그 많은 분들이 계속해서 우리들을 해고하지 말라. 우리들을 그렇게 하지말라. 노사간 수많은 싸움과 투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분들이 그렇게 시련과 고통을 통해 그렇게 해서 얻은 3천억짜리 건물을 짓는게 옳은지 생각해봐야합니다. 이제 교수를 다행히 그만둬서 다행 히지만 신학대에 오는 애들이 가난한애들이 많아요. 학교의 부채가 50-60억이 됩니다. 일반 학교의 몇배죠 취직도 안되고 계속 알바로 살아가고 갚을길이없어요. 학자금을 메꾸는데 그 돈을 받고서 우리들을 살아간다는 것을 보고 우리들은 정당한 임금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은 모순된 것이있죠. 그것을 우리들이 다 알아야해요 어느 종교인이라할지라도 이 모순된 자본주의의 구조, 희생을 우리가 다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구조자체가 그렇게 되어있어요 돈하나 쓸때도 더 잘 써야하고 잘쓸 수 있도록 잘가르쳐야해요 그렇게 살지않으면 안돼요 종교인들도 다 마찬가지이죠.
질문2
2천년전에 사대문명이 나온 발상지는 지금 못사는 살기어려운땅이에요 2천년전의 문화를 발상한 이사람들이 척박한 땅에 살지 않았고 당시에는 좋은땅었어요. 그리고 지난 1900여년동안 지구의 온도는 계속 올라가고있습니다. 이게 많이 써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지구 자체에서 지질학자들이 원천적으로 온도가 올라가고 있는데 1세기의 주기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하는의견도 있습니다. 또 남자들이 주도권을 지고, 가진자 들이 더 잘살기 위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제 생각에는 더 잘살기 위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답변: 사실은 그사람들이 빠르게 살고있다는 것은 인정해요. 하지만 문제는 못 사는사람들이 더 잘살기위해 후발주자들로 하여금 살 수 없도록 하는거거든요. 그래서 이제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린라운드는 환경문제를 보는 시각이 달라요 엄청나게 환경문제를 조건으로 달아서 그런 조건에 제약을 달고 있어요. 제 1세기 사람들을 놓고 환경을 놓고 토론을 하고 있어요. 이제 문제는 혹시 아메리쿵이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5천만명이 인구가 쓰는 온도를 아메리쿵이라해요. 수백개가 되고 있어요. 인도 중국같은 나라들 우리나라도 되가고있어요. 중국의 발전은 우리나라의 제약이라는 말도 있지않습니까. 그런 상황속에서 저희들이 환경문제를 놓고 다소 과장해서 말하고 있다 의견들도 있지만 그러나 저희로서는 환경문제 에너지의 과다사용을 가지고 조심해야 할 것 이구요. 인류문명의 발생지 사대문명의 발생지가 종교의 발생지이기도 하잖아요. 사막지역으로 이야기하면 사람이 살수없어요 거기서 문명, 종교가 태어났어요. 사막지역에서 태어난사람은 우지적 인간이해가 생겨요. 개인의 의지만이 아닌, 집단의 의지, 사막이라하는 자연은 절대 척박한땅이니까. 초자연적인 신관을 발전시켜요. 초자연적 신관과 인간의 의지적인 자기이해방식이 문명을 종교를 개척해낸것이에요. 그때는 좋았고 지금은 나빴고가 아닌 종교의 이해가 달랐고 이렇게 보는게 옳지않은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질문3
궁금했던게, 우리들이 제 3자입장에서 기독교 입장이었다면 성서입장에서 세계에서 요구하는게 이해를 못한것인지 위배한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성서는 그 시대의 물음에 대해 답을 하려고 애를 썼어요. 그 시대에는 성서를 그렇게 이해했지만 오늘날에는 그렇게 이야기 하면 안되요. 중세기때 이해했던 시각을 여전이 이해한다면 그건 하나님 말씀을 가두는거죠. 그러면 안되잖아요 새로운 물음으로 답을 해야해요. 그런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 생각해요. 오늘날 우리시대에는 그냥 강요할 수 없어요.
질문4
어떤 사고의 권위를 누가 제시할것인가 합의하에 이해 할 수있다지만 한 사람의 경우 니가 누구이길래 그런 권리가 있는지 문제 제기가 될 수도 있잖아요.
답변: 카톨릭은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부분이있지만 성서안에도 하나님 예수님 아닌것들이 많아요. 성경은 사후 50년 1세기때 쓰여졌어요. 사도들이 머릿속에 기억했다가요. 자기들의 상황속에서 쓰기시작한것이기에 본인들의 사람들의 생각도 들어갔어요. 진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게 왜곡되었구나. 라고 우리가 재해석하여 성서학자들의 작업에 근거하여 해석 하는 건데 그런 물음에 대해 옛날 방식을 따르겠다. 그런 것을 안믿겠다. 이런 판단들을 하는데 우리 신학자들의 사명은 이런일들을 끊임없이 하는거죠.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기독교인, 성서학자들을 근거로 비판을 해요. 이제는 다시 새로운 교회가 되어야 해요. 사실 카톡릭은 절대로 여자는 사제 안시켜요. 반면에 원불교는 여성교무님이 훨씬 활발하죠.? 그런것들이 교회와 우리들의 갈등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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