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사를 쓰면서 느꼈던 조선지도층은 똑똑하고 재능은 있으나 역사를 알려고도 하지 않은 냉소주의자에 나라와 민족을 모르고 자신과 가문만을 아는 기회주의자들이 득실거렸다.
특히 평상시보다 나라가 건곤일척 위기에 빠져있을 때 조선지도층들의 이런 현상은 두드러졌다.
똑똑하고 재능까지 있으면서도 그들은 왜 그런 선택을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들의 각자 타고난 개인적인 성향도 있겠지만 당시 조선사회분위기에도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다. 내가 역사를 배우면서 가장 재미없고 어려웠던 부분이 성리학에 관련 된 것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은 사단칠정론, 인물성 동이론 등의 탐구는 200∼300년 여에 걸쳐 논의되었고, 그 내용 또한 중국이나 일본의 성리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심오하고 풍부하였다. 이처럼 너무나 복잡한 철학적 성리학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이런 성리학이 17세기경부터 송시열이 성리학계의 대부가 되면서 성리학은 의리와 대의명분에만 얽메이며 교조주의적으로 변해간다. 조금이라도 자기들 이론과 다르면 ‘사문난적’으로 몰아 붙여 배척하였다. 다른 사상이나 이념은 발 붙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성리학은 극우보수화 되어 간다.
조선 후기에 비주류층에서 실학이 나타나긴 했지만 조선 지도층의 주류는까지 파고 들지는 못했다.
이처럼 송시열 이후 조선 후기의 변형된 성리학은 당파싸움 특히 노론의 이념이 되어 갔고 현실권력 추구의 수단이 되었다.
그들은 의리와 대의명분을 추구한다면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극심한 사대주의에 빠졌고 명이 망한 후에도 조선이 소중화라는 망상에 빠져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 갔다.
그들에게는 명의 황제만이 극진히 모셔야 할 황제였고 조선이나 조선 왕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면서 권력추구에만 매달리다 보니 나라나 백성보다는 당과 가문이 더 우선 이었던 것이다. 나라가 망하던 말던 그들은 사대대상만 바꾸면 되었다.
노론의 직계후예이고 당시 노론의 당수역할을 했던 이완용의 친미, 친러, 친일로 화려하게 변신해 가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한편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들은 겉으로나 학문적으로는 관상, 사주팔자등을 미신으로 치부했지만 어떤 종교나 학문보다 현실주의적이었던 성리학 영향으로 현실의 호위호식과 현세구복을 추구하며 믿었다.
조선백성들 또한 유교의 영향으로 현세구복을 중시 여겼다.
유교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다루지 않는다.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묘를 잘 쓰려고 하는 것은 조상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조상을 잘모셔야 현실에서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불교도 현세구복형 불교가 강하다.
사주팔자, 관상, 풍수지리등도 모두 현실에서 복받고 편안하게 사는 것을 위주로 한다. 현재도 사주팔자나 관상, 풍수지리는 우리 생활속에 아주 깊숙히 침투해있다.
요즈음도 특히 사회적 지도층이 더 믿는다. 대통령선거에서도 누가 어디 묘를 써서 되었다거나 어디로 이사를 해서 된다는 등 언론에서도 공개적으로 밝힌다. 이번에는 두꺼비상이 대통령이 된다는 등....
사후세계를 위주로 하는 기독교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현세구복이 강해졌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현실주의적인 면이 강하고 현세에서 잘먹고 잘살기를 바란다. 특히 성리학이 유일무이한 정치이념이자 생활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 심해졌던 것이다.
우리 민족 많은 분들이 믿는 사주팔자로 보아서는 그들은 ( 이완용,송병준 두사람 뿐만 아니라 친일을 한 많은 사람들 )좋은 사주와 관상을 타고나서 현실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잘 살다갔고 후손들도 잘 산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친 애국지사들은 현실에서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살거나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후손들조차 어렵게 산다.
이 분들은 관상이나 사주팔자가 나빴기때문이라고 말해야 할까?
일설에 따르면 유명한 관상가가 이완용의 관상을 보고 평했다.
'천재'의 상이고 펑생 재물도 많이모아 호위호식할 팔자다.' 라고 했다.
현실 삶만을 보면 이완용은 관상가 말대로 살다가 갔다.
흥미로운 건 그와 정반대의 관상을 가진 동시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이다.
김구선생은 과거에 실패하고 관상가가 되기위해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자신의 얼굴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도 부귀한 좋은 상은 없고 천하고 가난하고 흉한 상 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과거시험에서 겪은 좌절 이상의 비관에 빠진 선생. 그런데 <마의상서>에서 운명을 바꾸는 한 구절을 선생께서는 만났다.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
이 글귀에서 선생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굳게 결심했다.
"이제부터 밖을 바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어쩌든 한 사람은 반민족 매국노가 되어 영원히 민족으로 부터 지탄을 받게 되고 한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되어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 영원히 남는다.
옳고 그름을 떠나 하지만 현실의 삶은 어떠했는 가?
관상대로 삶이 아니었는 가?
역사 속에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타 넘어야 할지 많은 상념에 빠진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려고 하는 목적과는 크게 배치된다.
우리 역사속 인물 중 의기있고 백성들을 위하여 살려고 한 개혁적인 인물들은 거의가 현실 속에서는 비참한 삶을 살고 대부분 처참한 죽음을 당한다.
현재 우리 시대에서도 이런 일은 자주 보인다.
특히 구한말 이완용, 송병준과 안중근, 김구등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더 넓게 반민족 매국세력과 독립운동들의 본인과 후손들까지 현실 삶을 비교해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이러한 우리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가 존경하며 의기있는 위인들의 삶을 자기 자신의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아라!"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내가 구한말 역사 글을 쓰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장난삼아 물어 보았다.
친일매국노라는 역사의 오명을 듣고는 있으나 천수를 누리면서 죽을때까지 호위호식하고 산 이완용의 삶과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로 남았지만 삼십 조금 넘어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한 안중근의 삶 중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이냐고 물으니 대부분은 상당히 고민은 했지만 그런 선택의 기로에 있다면 이완용 삶을 택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오늘이 바로 안중근의사가 사형을 당한 날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러한 것은 안중근의사처럼 단단한 애국심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는 한 보통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물론 가장 좋은 생은 나라가 안정되고 세계 평화가 유지되어 그런 선택의 기로에 빠져 들지 않는 삶 일 것이다.
그리고 당시를 같이 사는 대부분의 삶을 그런 삶으로 살도록 해주는 게 정치를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일이다.
우리 현실 주위에서도 나라의 명운까지 걸린 일은 아닐지라도 이완용, 송병준 부류의 인간형은 수도 없이 많이 볼 수 있다. 내 주위에서도 많이 본다.
어쩜 이런한 게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일 수도 있다. 그 누구도 자기 이익을 버리고 국가나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야하는 상황에 부닥치며 쉽게 결정하기 힘든 일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어떤 결정이 나라와 민족에 큰 영향을 끼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달라야 한다.
그런 위치에 가기까지 쉽지도 않게 만들어야 하지만 그런 위치에 가기까지는 철저하게 검증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겨야 한다.
구한말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다.
구한말역사는 현실의 욕구에만 충실한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망쳐왔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첫댓글 조선시대 반정과 정난의 동인과 명분이 관상학과 성리학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더이다
아?
그렇군요
관상도 자신이 만드는것ㅡ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