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산책____김지영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전展>
김지영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밤새 내리고 있다. 열에 들떠 침대 밑에 와 있는 저승사자에게 가위 눌린다. 소릴 질러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옆에 자고 있는 남편을 깨우려 해도 깨워지질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울린 천둥소리에 놀라 저승사자가 물러가고
놀라 일어난 나는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거실로 나왔다. 거실 밖 호수 너머 불빛은 비 때문인지 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춤추듯 호수 위에서 흔들리고 있다. 요란스럽게 내리는 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울컥
눈물이 난다. 갱년기에 힘든 일을 몇 건 겪고 나니 나는 절대 걸리지 않을 거라 큰소리 쳤던 우울감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누구나 겪은 만큼 세상사를 이해한다는 말을 상기하며 위안을 삼는다. ‘그래, 이제는 죽을 만큼 힘든 일이 무엇인지, 왜 사람들이 나락까지 떨어지는 지’ 조금은 알 듯도 싶다.
작년엔
유난히 가을에 비가 많이 내렸다. 평소 보고 싶었던 고갱의 대작이 한국을 찾았다는 소식에 덕수궁 옆
시립미술관을 찾은 그 날도 비가 요란스레 내렸다. 차일피일 미루다 하필 잡은 날이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었다. 많은 작품이 오지 않았지만 그의 대작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원작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흥분하기에 충분했다.
서둘러 1층을 관람하고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안경을 고쳐 쓴 뒤 마지막에
전시된 대작 앞에 섰다.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나는 그림의 일부가 됐고 그림은 나를 관통해 내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대작은
고갱의 폴리네시아 시기를 대표하는 걸작이자 고갱의 유언과도 같은 상징성을 지닌 작품이다. 탄생에서부터
삶과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운명을 단계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고갱 예술을 철학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작품으로 고갱을 이해하는 열쇠를 쥐고 있다. 파리의 증권거래소 직원이었던 고갱은 서른다섯의 나이에 직업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예술은 길고 긴 여행과 불안정한 삶의 연속에서 만들어졌다. 가난이
주는 삶의 불안은 죽는 날까지 그를 따라다녔고 생활의 불안감에서 오는 삶의 성찰을 그는 작품에 고스란히 표현했다.
19세기 말에 유럽사회를 지배했던 산업문명과 물질주의는 가난한 예술가에게 원시적인 삶으로 돌아가도록 재촉했다. 그러나 타히티에서의 생활도 가난과 병고로 힘든 상태였는데 사랑하던 딸 알린느가 스무 살 나이로 죽었다는 편지를
받은 고갱은 절망에 빠져 반년 동안 붓을 잡지 못하고 대신 펜으로 자신의 종교적인 사색을 가톨릭 교회와 근대라는 글로 남겼다. 이무렵 고갱의 머릿속에는 근원적인 세 가지의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때묻지
않은 인간의 터전이라 꿈꾸며 찾아간 남태평양 타히티의 풍경을 배경으로 갓난 아기부터 죽음을 앞둔 노인에 이르는
12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탄생의 신비와 삶의 의미,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 거대한 작품을
통해 고갱은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에게 굴레처럼 씌워진 원죄에 대한
물음일까? 길고 험한 인생길에서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낙원에 대한 꿈일까? 고갱은 이 작품의 메시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저 묻기만
할 뿐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어 했던 19세기 마지막 인상주의자 고갱, 인상주의
시대를 마감한 최초의 근대화가 고갱은 동료화가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실패로 끝난 자살 시도를 고백하면서 자살하기 전에 그린 대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른쪽
아래에 잠자고 있는 어린 아기와 앉아 있는 세 명의 여인, 그 뒤로는 붉은 색 옷을 입은 두 명이 각각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지. 중앙에 있는 사람은 열매를 따고 그 뒤로 보이는 여신상은 신비롭게 두
팔을 올려 죽음의 경지인 피안을 가리키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맨 왼쪽에는 죽음에 가까운 늙은 여인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그녀의 발치에는 하얀 새 한 마리가 도마뱀을
발로 움켜쥐고 있는데, 이는 말의 공허함을 나타낸 것이야. 작품의
배경은 복음서와 비교될만한 주제를 가지고 철학적인 작품을 그렸네.
병들고
가난하고 정신적 고통마저 극심했던 고갱이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그림을 통해 표현한 것이 이 작품의 본질이다. 그림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시각적인 어휘로 다양한 의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관객의 역할이자 의무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고 얼마가 지나야 거기에 닿을 지 알지 못하면서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를 곧잘 잊곤 한다. 그런
우리에게 대작은 우리의 허약한 상상력을 보완해주며 앞으로 나아가게 도와준다. 살아가는 동안 겪을 것
다 겪어봐야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성숙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림의 아기에게, 중앙의 열매 따는 여인에게, 그리고 맨 마지막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노파에게 묻는다. 그들은 대답한다. 자기들이 바로 나라고. 나, 죽음은 여기 삶의 한가운데 있노라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와 좀 닮은 구석이 있는 것도 같다.
대작을
뒤로 하고 미술관을 나오니 해가 방긋 반겼다. 언제 비가 왔냐고? 그래, 삶이란 이런거였지. 비바람이 몰아치다가도 잠시 서서 나를 돌아보고
나면 앞에 밝은 빛 한 줄기 내려와 있는 것, 빛을 따라 가다보면 눈이 부셔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도 하고. 세상에 다 좋은 것도 모두 나쁜 것도 없다는 것을 이 나이에 깨닫게 된다. 새옹지마라는
말을 어려서부터 달고 살았건만 그 깊은 뜻을 이제야 알아들으니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를 나이 오십 훌쩍 넘어 알게 되었다. 고갱의 대작에서 힘든 일생과 고단함을 그림으로 승화시킨 그의 전 생애를 보며 나는 이 힘든 시기를 무엇으로
승화시켜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김지영 / 1996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달집태우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