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 말복(末伏) [1956년] 제2대 지방의회 의원 선거 실시 ← 제2대 지방의회 의원 선거 유세 장면
제3대 대통령선거가 끝난지 약 석달 뒤인 1956년 8월 13일 전국 437개 선거구에서 제2대 서울시의원-전국 도의원선거를 실시했다. 선거결과 정당별 당선자수는 자유당이 의원총수 437명의 57%인 249명으로 과반수를 넘었으며 민주당은 98명, 무소속 83명, 기타 7명이었다. 시·읍·면장과 시·읍·면의회 의원선거는 도의원선거보다 5일 앞선 8월 8일 실시되어 자유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번 제2대 도의원선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3선당선 여세를 악용한 자유당의 방종과 관권개입으로 부정불법이 전국적으로 판을 쳤다. 곳곳에서 관권의 협박 때문에 야당후보들의 사퇴가 잇따르자 야당 국회의원들이 이에 항의,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자유당은 무더기 대리투표, 표바꿔치기 등의 불법 행위를 곳곳에서 저질렀다. 전북 정읍군 서성면에서는 투표함의 봉인을 뜯어내고 자유당후보표를 무더기로 집어넣는 광경을 투표함 호송경찰관 박재표 순경이 목격하고 8월 27일 동아일보 본사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폭로했으며 민주당 김의택 국회의원도 전남 함평군 선거에서 경찰이 투표함을 개표장으로 호송하는 도중 무더기 표바꿔치기를 했다고 폭로했다./조선
[2004년] 제28회 아테네 올림픽대회 개막
고대 올림픽 발상지이자 제1회 올림픽경기대회가 열렸던 그리스 아테네에서 108년만에 열리는 하계 올림픽경기대회이다. 대회 기간은 2004년 8월 13일부터 8월 29일까지 열렸다. 참가 선수단은 총 202개국에서 1만 6500명의 선수·임원이 참가했다. 경기 종목은 28종목, 세부 종목은 301개이다.
대회 주제는 '올림픽 정신으로의 복귀'이다.
개회식은 주경기장인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렸다. 202개 회원국이 모두 참여한 올림픽으로, 개최국인 그리스가 가장 먼저 입장하고, 한국 선수단은 북한 선수단과 함께 대형 한반도기를 흔들며 84번째로 올림픽 스타디움에 공동 입장하였다.
한국은 임원진 109명, 선수 267명 등 총 376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고, 출전 종목은 23종목이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9개, 은메달 12개, 동메달 9개로 종합 9위를 차지했다.
한편 이번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미국이 금메달 35개 은메달 39개 동메달 29개로 종합 1위, 금메달 32개 동메달 17개 은메달 14개의 중국이 2위, 전통의 강호 러시아가 금메달 27개 은메달 27개 동메달 38개로 그 뒤를 이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 지난 2006년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2001년 8월 13일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당초의 방침이었던 ‘8월 15일 참배’를 이틀 앞당겨, 이날 오후 4시43분쯤 태평양전쟁 주모자인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도착, 참배를 마쳤다.
이날 야스쿠니 신사엔 수백명의 일반 참배객이 모여 일장기를 흔들며 환호성을 보냈고, "만세"를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이날 참배와 동시에 고이즈미 총리는 과거 침략을 반성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으나, 그동안 한국과 중국 등 국제사회가 참배를 강력히 반발하거나 비난해 왔다는 점에서 공허한 변명으로 비춰졌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는 1996년 7월 자기 생일에 참배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당시 총리 이후 5년 만의 일이다. 한국과 중국 정부는 각각 성명을 발표,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조선
[1996년] 전 연세대 교수 정석해(鄭錫海)씨 별세
정석해 전 연세대교수가 1996년 8월 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97세를 일기로 타계한 서산 정석해 선생은 격동의 우리 현대사를 직시하며 살다 간 20세기의 선비이자 참스승이었다.
1899년 평안북도 철산 태생인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문과재학 중 3·1운동이 터지자, 기독학생회장으로 학생시위를 주도하면서 이미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망명, 이어 프랑스와 독일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했다. 이 때에도 그는 언제나 태극기를 지니고 다닌 확고한 애국심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1940년 귀국해서도 일제의 탄압으로 연금-은거생활을 했던 선생은 광복이 되자 교육계에 투신, 연세대 철학과에서 후학을 길러내는 일에 전념했다.
4·19가 터졌을 때 학생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정권은 더 이상 존속할 이유가 없다며, 교수데모를 주동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선생은 5·16 이후에도 대일 굴욕외교를 정면으로 반대하다가 정치교수 1호로 꼽혀 줄곧 탄압과 감시에 시달리는 고초를 겪었다. 이 땅에 민주 국가 건설을 염원했던 선생은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등장한 1981년 미국으로 떠났다. /조선
[1989년] 배용균 감독의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대상 수상
신예 배용균 감독이 제작ㆍ연출한 극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1989년 8월 13일 스위스에서 열린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금표범상을 수상, 한국 영화 70년 사상 처음으로 세계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는 쾌거를 기록했다.
11개국 18편이 본선에 오른 경쟁부문에서 ‘달마가...’는 대상을 비롯, 청년비평가상(2위), 기독교평론가상, 최우수작품상, 국제기자협회상(1위), 바크리상(2위) 등 특별상 4개부문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세계 8대 영화제의 하나로 꼽히는 로카르노 국제영화제는 1-2편을 연출한 신인영화감독들만을 대상으로 역량을 평가하는 전통깊은 세계무대 등용문이다.
1951년 대구 출생인 배용균 감독은 서울대 미대를 거쳐 프랑스 파리대 대학원에서 조형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후 대구 효성여대 서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었다. 파리유학시절부터 세계영화제에 진출, 그랑프리를 거머쥐겠다는 집념을 불태워 왔다는 그는 이번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8년의 정열을 쏟아부었다. /조선
[1965년] 1개사단 전투병력 월남파병 동의안 국회통과
1965년 오늘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안이 국회에서 심의된다. 야당 의원은 한명도 참석하지 않은 채 여당인 공화당 소속 의원들만이 표결에 참여한다. 출석 의원 104명 가운데 101명이 찬성함으로써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안이 통과된다. 베트남 파병과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여온 야당 의원들은 모두 사퇴서를 내고 이날 표결에 참가하지 않았다.
전투부대 파병안의 국회 통과로 같은 해 10월 9일 청룡부대가, 11월 20일에는 맹호부대가 베트남에 도착한다. 이듬해 4월 16일 혜산진부대가, 8월 15일에는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함으로써 우리 나라는 미국 다음 가는 베트남 파병국이 된다.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 군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고 있다.
1961년 오늘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브란덴부르크문에 처음으로 철조망이 설치된다.
동서냉전의 상징이 된 이른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동독 정부가 서독으로 넘어가는 동독의 기술자와 지식인들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처음에는 45km의 철조망으로 설치되었으나, 얼마후에는 그 길이가 150km까지 늘어났고, 철조망에 강한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으며, 이내 붉은 색 벽돌로 된 두꺼운 콘크리트벽으로 바뀌었다.
베를린 장벽은 설치된 지 28년 만인 1989년 11월 9일, 냉전체제가 끝나가고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잇따라 독일 통일이 추진되면서 동서대립의 상징이자 민족분단의 상징이던 이 베를린 장벽도 철거되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중심으로 한 약간의 부분만 기념물로 남겨졌다. 자유를 찾아 이 장벽을 넘으려던 동독인 백 명 이상이 목숨을 잃는다.
[1960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프랑스로부터 독립
1911년 차드호를 포함한 프랑스 식민지가 프랑스령(領) 콩고로 확정되었고 이듬해에는 프랑스령 적도(赤道)기니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어 1916년에는 차드와 분리, ‘우방기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중앙(中央) 콩고’와는 별개의 통치단위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1958년 프랑스공동체 소속 자치공화국이 되어 국명(國名)을 ‘중앙아프리카공화국’으로 정하였다. 해방운동 지도자이며 흑(黑)아프리카사회진보당(MESAN) 당수였던 자치정부 수상 바르텔레미 보강다가 1959년 4월 비행기 사고로 죽자, 다비드 다코(David Dacko)가 뒤를 이었으며 그는 1960년 8월 13일 독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65년 12월 장 베델 보카사가 이끄는 쿠데타가 성공하여 장 베델 보카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듬해인 1966년 장 베델 보카사는 헌법을 폐지하고 국회를 해산함으로써 독재체제의 강화를 꾀하였다.
[1959년] 일본 적십자사와 북한적십자사, 인도 캘커타에서 재일교포북송협정 체결
일본적십자사와 북한적십자사가 1959년 8월13일 인도 캘커타에서 만나 `재일교포북송협정`을 체결했다. 북송협정을 포기하면 ‘한일기본협정’ ‘재일교포귀환협정’ ‘평화선 철폐’등을 체결할 수 있다는 한국정부의 끈질긴 설득과 한국민의 북송반대 데모에도 불구, 일본은 북송방침을 고수했다.
다시 한국정부는 북송문제를 국제재판소에 회부하자고 주장했으나 일본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재일교포 북송은 자유송환으로 간주한다"는 미국 국무성의 발표도 한국정부에 불리하게 작용, 결국 12월14일 재일교포 1진 975명을 실은 북송선이 일본 니이가타항을 출발했다. 재일교포는 이후 모두 1백50여차례에 걸쳐 약 8만여명이 북한으로 건너갔다. /조선
1959년 8월 13일 북한과 일본 정부가 인도 캘커타에서 '재일교포북송에 관한 협정'에 정식 조인했다. 재일교포북송 문제가 처음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55년 2월이었다. 당시 북한은 6·25전쟁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이유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의 귀환을 추진하면서 귀환자들의 생활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입장을 대내외에 알렸다. 그 무렵 일본도 인구증가와 각종 사회·경제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하던 중이었으므로 양측의 이해관계는 서로 일치했고 협상은 급진전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재일교포북송 반대시위가 잇달았으며 외교 활동도 다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1958년 11월 17일 재일조선인귀국협력회가 결성되는 등 북송을 실현시키기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마침내 북한과 일본 정부 간에 협정이 조인되었고, 1959년 12월 14일 975명의 북송재일교포 제1진이 일본 니가타 항[新潟港]을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동(同) 협정의 만료시한인 1962년 11월 12일까지 7만 7,288명의 재일교포가 북송되었다. 이후 기한이 연장되어 북송이 계속 진행되었으나, 북송교포의 비참한 생활상이 알려지면서 그 수가 급감해 북송사업은 종결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브리태니커
[1953년] 소련 수소폭탄 실험
미국에 이어 소련도 1949년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게 되자 미국은 이론적으로는 제작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진 핵융합무기인 수소폭탄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1952년 액체수소(중수소 또는 삼중수소)를 이용한 습식(濕式) 수소폭탄이 완성되어 11월 1일 서태평양상의 에니위톡(Eniwetok)에서 실험에 성공했으며, 소련에서는 1953년 수소화리튬을 이용한 건성수소폭탄(리튬폭탄)을 완성함으로써 수소폭탄이 실용화되었다.
1954년 미국은 수소폭탄의 외각을 우라늄238 238U으로 싼 3F 폭탄을 개발하여 3월 1일 비키니(Bikini)에서 실험하였는데 그 위력은 TNT 1,500∼2,000만 t(15∼20Mt)에 달하였다.
현재까지 실험된 수소폭탄 중 최대의 것은 소련이 1961년에 실시한 것으로 위력은 58Mt인 것으로 알려졌다.
[1946년] 영국의 공상과학소설가 웰스(Wells, Herbert George, 1866.9.21~1946) 사망
영국의 소설가 겸 문명비평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가 1946년 8월 13일 향년 80세로 사망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대학을 마친 웰스는 교사생활을 잠시 거쳐 문필활동에만 전념, 일생동안 10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처음에는 자연과학적인 넓은 교양과 상상력을 결합해 책을 저술했다. ‘타임머신’(1895)과 ‘투명인간’(1897) ‘우주전쟁’(1898) 등이 이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타임머신’에서는 퇴화하고 멸망한 인류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투명인간’은 남의 눈길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소외된 인간의 고독을 현실감있게 그렸다는 점에서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이후에는 ‘연애와 루이셤씨’ 등처럼 풍자와 유머가 넘치는 소설을 썼다. 그는 역사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져 1920년 '세계사 대계'를 내 놓았고, 그후 2년 뒤 이를 읽기 쉽게 압축한 또 다른 '세계사'를 펴냈다. 이 초판본과 1946년, 1965년 2차례에 걸친 개정판을 비교해 보면,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또한 세계정부 지지자로 미래를 낙관하며 살아온 그가 2차대전을 거치며 비관주의자로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이 직접 수정한 개정판에서 자신의 세계관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전망에 다소의 잘못이 있었음을 시인했으며, 아버지의 시각을 토대로 웰스의 아들이 다시 수정한 2차 개정판에서는 한국전쟁이 동서 이데올로기 분쟁의 최대 희생물이라고 썼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우유부단한 정책과 소련의 뒤틀린 야망이 분단을 초래하고 마침내 엄청난 비극을 몰고 왔다는 것이다./조선
[1935년] 심훈의 상록수, 소설 현상공모에 당선
35년의 짧은 생이었지만 심훈(1901∼1936)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작품에는 늘 강한 민족의식이 배어있었다. 재능 가운데 먼저 빛을 발한 쪽은 영화였다. 영화 ‘장한몽’에 이수일 역으로 출연했고,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정통으로 영화를 공부한 뒤에는 원작ㆍ각색ㆍ감독으로 ‘먼동이 틀 때’를 제작해 큰 성공을 거뒀으나 곧 영화계를 떠났다.
심훈의 타고난 운명은 기자였고 작가였다. 7년간을 동아일보ㆍ조선일보ㆍ조선중앙일보 기자로 지내며 많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조선일보 기자 시절에는 장편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를 연재했으나 둘 다 일제의 검열에 걸려 중단하고 말았다.
1932년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판하려 했으나 또 일제의 검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충남 당진으로 낙향해 손수 필경사(筆耕舍)라는 초가집을 짓고 소설 ‘상록수’ 집필에 몰두한다. 55일 만에 탈고한 심훈은 동아일보의 소설 현상공모에 응모했고 상록수는 1935년 8월13일에 당선된다. 상록수의 인기에 힘입어 일약 유명작가가 됐으나 명성도 잠시 뿐 이듬해 장티푸스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조선
[1926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Castro, Fidel) 출생
쿠바 동쪽 끝 올긴(Holguin) 주의 한 소도시에서 출생. 1945년 말 아바나대학교(University of Havana) 법학과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다. 대학 재학 때부터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Rafael Trujillo)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침공에 합류하였다.
1948년에는 콜롬비아 보고타(Bogota)에서 발생한 도시폭동사건에 참여하였다. 1953년 당시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Batista)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동지 156명과 함께 쿠바의 산티아고데쿠바(Santiago de Cuba)에 있는 몬카다(Moncada) 병영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5년 5월 특사로 풀려나 아바나로 돌아오자마자 멕시코로 망명, 바티스타 정권 타도 계획을 세웠다. 1956년 86명의 동지들과 함께 원정에 나서 오리엔테(Oriente) 주 시에라마에스트라(Sierra Maestra)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워 총리가 되었다. 총리에 취임한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몰수하는 등 사회개혁을 단행하였으며, 그해 제1차 아바나선언을 발표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제창하였다.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1961년 4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쿠바 해안을 침공한 반혁명군을 격퇴하였으며, 5월 쿠바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하고, 7월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결성, 제1서기에 취임하였다. 1962년 10월 소련의 중거리미사일의 쿠바 반입을 둘러싸고 핵전쟁 위기로까지 발전하였으나 미국이 카스트로 정부 전복을 기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종결되었다. 이듬해 제2차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1965년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PCC(Communist Party of Cuba:쿠바공산당)로 개칭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초에는 중국이나 소련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자주독립이라는 입장을 취하였으나, 1972년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 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인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에 가입한 후 점차 친소적(親蘇的) 성향을 띠게 되었다. 1976년 신헌법을 제정하는 등 사회주의국가체제 정비에 힘썼다. 1976년 12월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하여 당·정부·군의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소련 등 동구권의 민주화 바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해나갔다.
2006년 7월 장 출혈 수술을 받기 위해 친동생이자 공식 후계자인 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 국방장관에게 임시로 권력을 이양한 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사망설이 돌기도 하였으나, 10월 말 국영 텔레비전에 모습을 보이면서 사망설을 일축하였다.
[1910년]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Nightingale, Florence, 1820.5.12~1910) 사망
"백의의 천사" "등불과 같은 여인" 등으로 알려져있고 박애주의의 대명사로 불려진 나이팅게일이 1910년 8월 13일 런던에서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독신으로 산 나이팅게일은 어렸을때부터 간호원직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크리미아 전쟁중에 그녀는 군대병원이 얼마나 비위생적인가를 알고, 간호원팀을 조직하여 터키에 있는 수쿠터리와 발라크라바이 병원들을 소독해가며 위생적인 의료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군대와 싸웠다.
그녀는 영국으로 귀국한 후, 간호원을 양성하기 위해 나이팅게일 간호학교와 기숙사를 세운 다음 건강위생에 대해 전문적인 교육을 강의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의 메릿훈장을 수여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조선
[1899년] 영국 태생의 미국 영화감독 히치콕(Hitchcock, Alfred, 1899~1980.4.29) 출생
히치콕은 '스릴러' 영화를 다수 발표해 명성을 얻은 영국 태생의 미국 영화감독이다. 세인트 이그나티우스 칼리지와 런던대학교에서 공학을 전공했다. 1925년 첫 작품인 <쾌락의 정원 The Pleasure Garden>을 감독했고, 1926년 <하숙생 The Lodger>을 감독하면서 서스펜스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29년에는 영국 최초로 성공을 거둔 발성영화 <공갈 Blackmail>을 만들었다. 이후 서스펜스 영화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해 인기를 얻었다. 1939년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만든 첫 작품 <레베카 Rebecca>(1940)로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이후 30년 동안 1년에 1편 정도의 작품을 감독했으며 1948년부터는 제작도 겸했다. 그는 살인사건과 스파이 활동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위협·공포 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능했다. 여기에 카메라의 구도와 움직임, 정교한 편집, 효과적인 사운드트랙 등 기술적인 효과를 사용함으로써 서스펜스 영화의 재미를 더했다. 1979년 미국영화협회(American Film Institute)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1980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1898년] 스페인, 미국에 마닐라 할양
1898년 8월 13일 필리핀 마닐라가 미국에 할양되었다. 1895년 2월 쿠바인들이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일으킨 독립투쟁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은 1898년 4월 스페인과 미국이 서로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미해군 아시아 함대 사령관으로는 조지 듀이 준장이 임명되었다. 5월 1일 미해군 소함대는 마닐라 만으로 진입해 그곳에 정박 중이던 스페인 함대를 공격했다. 이날 아침의 전투는 사소한 포격이 수차례 오간 뒤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전투 결과 미국측의 피해는 수병 7명의 부상에 그쳤지만 스페인군 사상자는 381명에 이르렀다. 마닐라 점령에 이어 미군은 7월 3일 쿠바의 산티아고에 정박해 있던 파스쿠알 세르베라 제독 휘하의 스페인 카리브 함대까지 격파했고, 이로써 전쟁은 사실상 끝을 맺었다.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 체결로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모든 권리주장을 포기했으며, 괌·푸에르토리코를 미국측에 양도하고 필리핀 통치권도 2,000만 달러에 미국측에 넘겨주었다. 미국은 이 전쟁의 승리로 광범위한 해외식민지를 보유한 강대국이 되었으며 국제정치 무대의 새로운 중추로 떠올랐다./브리태니커
[1888년] 세계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에 성공한 베어드(Baird, John Logie) 출생
스코틀랜드의 공학자
1888. 8. 13 스코틀랜드 던바턴 헬런즈버러 ~ 1946. 6. 14 잉글랜드 서식스 벡스힐온시.
처음으로 움직이는 물체의 화상을 전송(電送)했다. 라치필드 아카데미, 왕립기술 칼리지, 글래스고대학교에서 공부했고, 1924년 텔레비전 방송으로 물체의 외관을 전송했고, 1925년에는 인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화상으로 전송했으며, 1926년 런던 왕립연구소에서 운동하는 물체를 텔레비전으로 보여주었다. 1929년 독일 체신청에서는 그가 텔레비전 서비스를 개발하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1936년 영국방송협회(BBC)의 텔레비전 방송 서비스가 시작되었을 때, 베어드의 체계는 마르코니전기-음악산업회사(Marconi Electric and Musical Industries)가 내놓은 체계와 경쟁했으나, 1937년 2월 BBC는 마르코니 EMI 체계를 독점적으로 채택했다. 베어드는 1928년에 컬러 텔레비전을 선보였으며 1946년 입체 텔레비전에 대한 연구를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다./브리태니커
[1844년] 핵산 발견자 미셔(Johann Friedrich Miescher) 출생 ← Friedrich Miescher
1844. 8. 13 스위스 바젤 ~ 1895. 8. 26 다보스.
세포대사를 연구한 스위스의 학자, 핵산 발견자
1868년 튀빙겐대학교에서 애른스트 호퍼 자일러 밑에서 연구하던 중, 고름에서 얻은 백혈구의 핵에 인과 질소가 들어 있는 물질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이 물질을 세포의 핵에서 나왔다는 뜻에서 뉴클레인(nuclein)이라 불렀으나, 1874년 미셔가 이것을 단백질과 산성물질로 분리시킨 다음부터 핵산(nucleic acid)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젤에 돌아와 교수가 된 그는 연어의 정자에서 핵산과 프로타민(protamine:일반적으로 핵산과 결합되어 있는 단백질)을 발견했으며, 또 혈액 내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호흡을 조절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1885년에 스위스 최초의 생리학 연구소를 창설했다.
[1836년] 일본 최초의 정교회 주교 니콜라이(Saint Kasatkin Nikolay, 카삿킨) 출생 ← Saint Nikolay Kasatkin.
본명은 Ivan Dmitrovich Kasatkin(Kassatkin)
1836. 8. 13 러시아 스몰렌스크~1912. 2. 16 일본 도쿄[東京].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 일본 최초의 정교회 주교.
수사 서약 때 니콜라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1861년 하코다테 주재 러시아 영사관 전속사제로 일본에 갔다. 일본에서는 그리스도교가 금지된 종교였기 때문에 첫해를 일본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면서 지내다가 마침내 일본어로 대사관 예배당에서 정교회 의식을 거행했다. 1868년까지 그는 3명의 첫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개종자들의 수가 늘어나자 러시아 정교회 성의회는 1871년 일본에 대한 정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873년 그리스도교 규제법이 철회되자 1874년까지 400명의 일본인 개종자들로 정교회 교단(Orthodox Community)이 구성되었다. 그는 일본인 가운데서 성직자를 모집함으로써 교회의 자치적 측면을 강조했다. 그결과 1875년에는 일본 본토인 개종자 2명이 사제서품을 받았고, 1880년에는 자신이 주교로 추대되었다.
비록 러일전쟁(1904~05)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정교회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일본 정교회는 성장을 계속했으며, 니콜라이는 교회에 남아 충직하게 사역한 결과 1906년 대주교가 되었다. 1912년 그가 죽을 무렵 일본 정교회의 신도수는 3만 명이 넘는 자치교회로 자립해 있었다./브리태니커
[1826년] 프랑스 의사 라엔네크(Laennec, Rene-Theophile-Hyacinthe) 사망
1781. 2. 17 프랑스 캥페르~1826. 8. 13 켈루아네크. ← The first drawning of a stethoscope, 1819
청진기를 개발했으며 흉곽내과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그는 30㎝ 가량 되는 나무로 된 원통을 환자의 가슴에 대고 폐와 심장에서 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소리를 들었으며 3년 동안 환자의 가슴에서 나는 소리를 연구하고 그 소리들을 부검 때 발견되는 질병과 관련지어보았다. 그 분야의 고전이 된 〈간접적 청진에 관하여 De l'auscultation médiate〉(1819)라는 책에서 자신의 방법과 발견한 소견들을 기술했다. 그밖에 호흡기 및 심장질환에 대해서도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스승인 장 니콜라스 코르비사르 데 마레의 뒤를 이어 파리에 있는 오피탈 드 라 샤리테 병원의 내과의사가 되었으며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도 임명되었다(1822)./브리태니커
그밖에
1998년 러시아, 정치인을 포함해 3명의 승무원을 실은 소유즈 우주왕복선이 카자흐공화국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성공적으로 발사
1991년 원로 한학자 김종무씨 별세
1988년 건설부, 1992년까지 16조3천억원을 투입, 택지 5천7백만평을 마련해 주택 2백만호를 건설한다고 발표
1986년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 준비위원회 구성
1980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정계은퇴 발표
1979년 중국, 산아제한정책 발표
1978년 이란 반정폭동 격화
1978년 베이루트 PLO본부 폭파
1977년 영국 런던서 전후최대의 인종폭동
1977년 북괴, 리비아탁구팀 코치 김창제씨 납북기도
1969년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중국 국경경비대와 소련군 기갑부대 격렬한 무력충돌
1955년 국내 최초로 성전환 수술
1952년 근로기준법 국회 제출
1951년 국민방위군사건 김윤근소장 등 사형 집행
1949년 지방체신관서설치법(법률 47호) 공포
1948년 한국-대만, 국교수립
1943년 광복군, 버마전선에 사관1대 파견
1913년 독립의군부 사건 선고공판 열림
1912년 조선삼림미간지 및 산림산물특별처분령 공포 시행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 조직
1907년 청, 자정원 설립
1396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 사망(음력 8월 13일)
232년 중국 삼국시대 촉한 시대의 전략가 제갈량(제갈공명)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