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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통일학회
제26차 멘사토크 학술대회
주제발표2. 김병욱 박사 강의 요약
“통일 이념과 이론과 철학:
미완의 삼일독립혁명과 일상의 정치”
https://youtu.be/ccO3j87g71o?si=S1tTEs4-BZMvysma
이 자료는 조해강 목사가 김병욱 박사의 위 강의를 녹취하여, 그 내용을 다듬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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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발제하고자 하는 것은, 이번 모임의 주제인 ‘한일관계와 역사’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역사를 해명할 때 어떤 시각으로 또는 어떤 시선으로 해명해야 하는가?'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좀 더 일반적인 역사를 포함합니다. 이 세상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삼라만상의 생명 활동이라는 큰 흐름을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해명해야 될까요?
제가 보기에 기존에 우리의 인식, 내지는 시선은 너무 파편화되거나, 데카르트가 사용했던 그 실체(Substance)라는 개념틀이 지금도 여전히 모든 인문사회학 저변에 강고하게 장악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이런 우리 현실과 전혀 융합되지 못하고 괴리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이 빚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런 실체와 실체 사이에 능동과 수동의 어떤 운동의 모습으로만 생명 활동을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작은 시선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건강한 보수라든가 건강한 진보를 지향하면서도 양극단의 이념적 지형 속에서 새로운 전향적인 중심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우리의 생명력을 고갈하고, 새로운 생명력을 제대로 창출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쉬운 지점들은 분명히 우리가 근현대의 서구 인문사회학 저변에 깔려 있는 이런 실체적 사유방식에 포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프레임이 너무도 강고하게 특별히 사회과학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프레임을 세계관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고, 패러다임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저는 ‘메타 이론’이라는 말을 쓰겠습니다. 왜냐하면 세계관이라는 말은 이념적 지형이나 철학을 잘 반영해 주는 반면,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제대로 해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는 그것을 잘 해명해 주는 측면이 있습니다. 토마스 쿤이 들고 나온 이 패러다임 개념은, 생명 활동의 유기적 변화를 잘 해명해 주는 장점이 있습니다만, 결정적인 결함은 바로 철학이 부재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대주의로 흘러가 버리는 이런 양상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철학적 가치가 보완되어야 합니다.
사실 한국과 북한 사이의 갈등이나 남남의 갈등을 얘기할 것 없이, 기독교인 안에서조차 우리는 갈등과 대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진실과 화해를 도출해내지 못하는 이런 무기력함의 근저에는 분명히 철학을 해내는(philosophieren) 역량의 부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진실과 화해를 도출하기 위한 철학의 모티브를 형성해내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관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지금 패러다임이 전환(shift)되어야 하는 시대적으로 아주 중요한 어려운 곤궁 속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태계 재해 문제, 일자리 실업 문제, 인구 절벽 문제, 그리고 모든 그 가치의 정점에서 모든 걸 대체시켜 버린 화폐 금융 문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앞에서 끌어가면서 강력하게 이 시대를 지금 지배하고 있는 지식 기술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AI 기술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 이유 자체까지 전면 묵음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침묵의 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이런 거대한 쓰나미와 같은 이런 생명 고갈의 상태 속에서 우리는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잉태해내지 못하고 그걸 발설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중요한 어떤 모티브를 형성해 내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이 오늘날 세상에서 많은 지탄을 받고 있는데, 크리스천의 이 나약한 모습의 근원에는 생명의 고귀한 가치를 우리의 삶으로 증명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우리는 크리스천이지만 거대한 종교의 그 상아탑에 머무른 채,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라는 형해화(形骸化)된 이분법 속에 우리 스스로가 매몰돼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발제에서 저는 이런 고민들을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제 발제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발제의 제목은 ‘통일 이념과 통일 이론과 통일 철학’입니다. 통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실과 화해를 통해서 통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도 통일이고, 남북간의 통일도 통일이고요, 사실 우리 기독교통일학회 안에서도 통일적 역량이 요구되고 있죠. 우리 안에서부터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통일이라는 개념조차 우리에게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통일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가 오가고 있지만 통일이라는게 과연 뭐냐 하는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은 상당히 미성숙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통일에 관한 미성숙의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세계관의 차이입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은 패러다임의 차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세계관이나 패러다임이라는 이것은 그 용어가 담아내는 의미의 폭에 있어서 상당히 미흡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세계관은 변화, 즉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상황이라는 것은 성숙한 상태에서 미숙한 상태로 변화하기도 하고, 통일되었다가도 분단과 분열로 이어갈 수도 있고, 분열의 상황에서 다시 통일로 이렇게 전환되어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유기적인 변화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세계관이라는 용어는 정치학적 측면으로 보면 이론적인 설명이 결여돼 있습니다.
그런 이론적 설명을 잘 해명해 주고 있는 것이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입니다. 이 패러다임 개념은, 과학의 혁명의 역사 속에서 보면, 어떤 퍼즐들이 양산될 때는 기존의 노멀(normal) 패러다임이 애브노멀(abnormal)로 전락하고, 기존에 그 양산되는 퍼즐들을 해명해 줄 수 있는 노멀 패러다임이 새롭게 등극하는 변화(shift)의 양상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과학의 혁명의 역사에서도 그런 구조의 변화에 대하여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로 해명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것을 좀 더 확대해 보면 역사에서도 어떻게 그런 패러다임의 변화(shift)가 일어나는지, 그리고 인문 사회학에서도 전체적인 큰 패러다임의 변화가 어떤 시점에서 가능하겠는지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논문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21세기, 벌써 20세기 후반부터, 좀 더 거슬러 가면 1890년대부터 이미 패러다임의 변화(paradigm shift)는 상당히 이루어지고 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그 패러다임이 지금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를 우리가 지금 언어적으로 학술적 용어로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데카르트가 제시한 실체적 패러다임 속에 여전히 강고하게 묶여 있다 보니까 지금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금 제대로 해명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 활동은 이미 진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상적으로 깊이 있게 고찰하거나 제대로 길을 닦아주고, 길을 들여 갈 수 있도록 그걸 구체적으로 학문화시켜 나가는 이런 작업들이 상당히 더뎌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통일이라는 것은 하나의 모양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그 통일의 상태를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통일의 상태를 세 가지 상태로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상태라든가 사회주의적 상태라든지 아니면 두 가지 적당히 짬뽕한 중도적 상태입니다. 우리는 통일의 상태(state)나 내용(quality)을 이 정도 수준에서 생각하고 그 이상의 상상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상이 거기에 멈춰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주의적, 자유주의적 또는 중도적 통일의 상태나 삶의 상태, 그 상태에 대한 우리의 해명은 기존의 근대 서구의 사상 속에서 개념화된 그런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가 상태에 대한 그런 갇힌 해명에만 머물러 있다면, 이미 변화되고 있고 변화되기를 간절하게 요망하고 갈망하고 있는 이 생명의 근원적인 필요성을 담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1890년대 이후 세계 질서의 변화에 대하여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890년을 제가 강조하는 이유는, 서구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제국주의적 노선들을 밟았고 그리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이 치열한 국제 질서, 또는 세계 질서의 어떤 변화의 흐름이 1890년대 이후부터 가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인류는 그 연장 선상에서 다같이 그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인간과 인간을 넘어서 인간과 자연 세계, 즉 생태계까지 이것이 확장되었습니다. 지배와 피지배 속에서 생명이 고갈되는 이런 현상은 더욱더 가속화되고 있고 심화되고 있고, 그 생명 고갈의 현장은 참으로 너무도 참혹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화(shift)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는 현재 상황 속에서 남북간의 어떤 통일의 문제를 단순히 민족적 단일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논리에 근거한 통일로 바라보거나, 경제 성장을 도출해내는 논리로 이해하든가, 아니면 동아시아의 안보 내지는 평화를 구축해내는 논리로서 통일 문제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상당히 낙후된 이념적 지형일뿐만 아니라 통일을 역동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모티브로서 역할은 도저히 해낼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부분을 고민하는 것이 오늘 제 발제의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통일에 대한 논의에는 통일의 모양이나 상태를 넘어서는 더 심층적인 것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의 상태는 방식 및 과정이 어떻게 결합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건물이라는 것도 똑같은 건축 재료로 지어진다 하더라도 그 건물을 지어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좋은 건물을 올바로 지어서 이 건물을 사용하는 모든 당사자에게 이롭도록 지어갈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좋음과 올바름과 이로움이라는 이 구체적인 방식(way)입니다.
그런데 이 웨이(way)라는 것은 요즘 우리 표현대로 한다면 방식이겠습니다마는, 그러나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면면이 이어져오는 개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동아시아 사상사에는 불교, 유교, 그리고 기독교까지 포함됩니다. 동아시아에서 이 Way는 공통적으로 도[道]라고도 얘기할 수 있고, 성리학에서는 리[理]라고도 이치라고 얘기할 수 있고, 기독교에서는 로고스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삶에 살아가는 생명 활동 속에서 결합을 어떻게 이루어 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길을 잃지 않고 길을 어떻게 찾아 가는가에 따라서 건물 하나를 짓더라도 훌륭한 탁월한 건물, 탁월한 상태가 되기도 하지만, 똑같은 건축 재료를 사용하고도 건축을 마친 건물은 부실한 상태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방식의 과정이 어떻게 결합하느냐의 문제는, 실체 운동 메타이론, 즉 데카르트 이래 서구의 어떤 사상사를 지배하고 있는 이 거대한 패러다임 속에서는 완전히 제거돼 있습니다.
방식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서 그 방식의 지위를 대체하고 차지하는 것이 인간의 이성과 감성입니다. 바로 이런 패러다임 속에서 보다 보니까, 통일이라는 것도 하나의 단순한 모양이나 상태까지만 접근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상태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질적으로, 그 방식 및 과정(way and process)이, 로고스와 에르곤(logos and ergon)이, 불교적으로 얘기하면 리와 사가, 어떻게 상호 결합을 이루어가고 어떻게 그것이 어떤 일의 상태 속에 발현(appearance)되고 실현(actualize)되느냐가 중요해집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조명하는 부분이 완전히 삭제돼 있는 학문적 거대한 메타이론 속에 우리가 함몰돼 있기 때문에 우리가 통일에 관한 모양이나 상태에 관하여 논할 때 기존의 자유주의적 상태, 사회주의적 상태 또는 중도적 적당한 상태로 접근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중도적 상태를 저는 짬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중도 노선이야말로 아름답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건 적당한 타협에 불과하고 미봉책에 불과하며 오히려 상태를 더 악화시켜 놓는 장본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중도가 요구되는 게 아니라 이 시대의 새로운 중심과 새로운 모티브, 새로운 지향점을 어떻게 선제적으로 잘 구축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통일 철학의 핵심이고, 그것을 구체적인 상태로 일구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 구체적인 상태와 모양에 대한, 아주 단순화된 장치가 이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철학과 이론 수준까지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이념적 장치를 통해서 함께 그 일을 동역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일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이념을 제공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이것이 오늘 제 발표의 총론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오늘 발제의 제목을 ‘통일과 미완의 삼일독립혁명’으로 정했다는 얘기는 통일 철학과 이론과 이념을 삼일독립혁명과 연계하여 생각하겠다는 뜻입니다.
1919년 삼일독립혁명은 우리 역사 속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혁명은 이미 1800년대, 아니 17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 한반도라는 역사 속에서 응어리졌던 어떤 그 새로운 철학적 가치의 열망이었습니다. 이런 열망이 분출되는 과정이 있었고 그것이 잘 드러난 것이 삼일독립혁명의 독립선언문입니다. 그 혁명은 마치 겉으로 보기는 실패한 혁명처럼 보이지만 상해임정에서 임시헌장이라든가, 또 그것을 기초로 하여 남북한 공히 민주공화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런 역사적 흔적들이 상당히 중요하게 작동했습니다.
이처럼 역사라는 거대한 스펙트럼에 비추어 보면, 삼일독립혁명은 실패한 혁명이 아니라 지금도 미완의 혁명이며, 그리고 이 삼일 미완의 혁명을 완성해 가는 과정으로 우리가 남북의 통일을 바라보는 것도 우리의 통일 논의를 상당히 폭넓게 해 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런 관점은 어떤 모양만이 아니라 상태를 아우르는 것이며, 기존의 자유주의적 관점을 능가하고 사회주의적 관점을 능가할 것입니다. 또한 이 시대 인류가 정말 갈급하게 요구하고 있는 생태계 재해 문제, 일자리 실업 문제를 해결해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행복한 삶의 터전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은 미완의 삼일독립혁명에서 이미 밝혀졌다고 생각됩니다.
특별히 이 독립이라는 개념도 단순히 주권을 되찾는 의미로서 그때 당시에 사상가들이 쓰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 독립운동했던 사상가들의 계보를 굳이 저의 사상적 정체성과 연결지어 본다면, 저는 도산 안창호에 가깝습니다. 도산 안창호가 제시한 독립의 개념은 단순히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회복하는 독립이 아니고 ‘죄로부터의 독립’입니다.
죄악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면, 안인섭 박사가 말한 진실과 화해의 필요성을 바탕으로 말씀드리자면, 진실과 화해로 이끌어가는, 그 진실의 교두보는 무엇보다도 허위로부터의 독립입니다. 뭐가 허위이고 뭐가 진실입니까? 사실 우리의 모든 인간 관계(relation)를 화해로 끌어가고 사랑의 관계로 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허위와 진실의 명확한 구분입니다. 우리는 그 둘 사이의 구분을 늘 명확하게 짓고, 허위로부터 끊임없이 독립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진리의 자체일 수 없지 않습니까?
영어에서는 진리와 진실이 구분되지 않고 트루스(truth)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동아시아 언어에서는 이 진리와 진실이 구분된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은 진리일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진리의 일부분에 동참해(take part in) 나갈 수 있습니다. 거짓과 허위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독립입니다. 그것은 생명활동의 가장 심층에 있는 영역입니다. 가까운 부부간의 관계가 됐던, 가까운 우리 학회 안에서가 됐던, 좀 더 나아가서 우리 기독교 안에서 진실을 회복하는 이 일은 '동사'입니다. 그것은 '명사'나 '형용사'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일상에서 그렇게 실행해 나가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일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끊임없이 우리 안에 엄습해 오는 이 가증스러운 거짓들과 자기 정당화를 보십시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회개하고, 내려놓고, 또 우리 기독교적 용어로 얘기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이 일이야말로 크리스천들이 앞장서서 해야 될 일이고, 크리스천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의 변곡점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키워드는 바로 이 독립입니다. 그리고 그 독립은 바로 그 자체로 혁명입니다. 그것은 허위로부터 돌아서는 혁명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혁명은 세상의 어떤 질서의 혁명이기 이전에, 어떤 상태의 변화이기 이전에, 내 안의 혁명입니다. 우리 안의 혁명이고 내 안의 혁명입니다. 제가 ‘삼일독립혁명’이라는 이 워딩을 갖고 나온 이유는 바로 통일 철학의 핵심 내용이 바로 이 안에 다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과 같이 이 통일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막연하게 갖고 있었던 이 메타이론, ‘실체 운동 메타 이론’이라고 저는 이름 붙였습니다만, 이걸 아주 단순화시키면 결국 관찰자적 시각이라고 하겠습니다. 관찰자(observers)적 시각이 무엇입니까? 주체가 있고 대상이 있다는 이것이 관찰자적 시각입니다.
인문 사회학뿐만 아니라 서구의 모든 과학의 영역에서 모든 방법론이 이 관찰자적 시각에 머물러 있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연을 끊임없이 조작을 하고 마침내 유전자 조작에 이르렀습니다. 끊임없이 조작(manipulate)해 나가는 이런 방법론을 과학적 방법론이라고 치켜세우면서 그것이 마치 이 시대의 진리인양 우리를 아주 이념적으로 호도하고 있지만, 과학의 영역이야말로 가장 허위적이고, 인위적(artificial)이며, 인공을 가미하여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우쭐거리는 거대한 바벨탑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로 이 관찰자적 시각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나와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그렇게 바라보는 이 시선이야말로 바로 데카르트의 실체 운동 메타이론이 강고하게 담겨 있는 시선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것을 당사자 시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당사자 시각이 무엇입니까? 좀 전에 제가 건물 짓는 비유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자신의 건물을 짓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벌써 당사자 시각일 때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어떤 건물을 지어야만 좋은 건물이 되는가, 어떻게 기초를 파고 기둥을 세우고, 어떻게 창문을 내야 올바로 세워질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할 것입니다.
그 과정(process)이 올발라야 합니다. 과정의 올바름이라는 것은 외재적 올바름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내재적 올바름입니다. 올바로 짓지 않고서는, 그 도를 따르지 않고서는, 그 길을 따르지 않고서는 결코 건물이 훌륭한 건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참으로 좋은 일을, 그 작은 일에서 올바로 해버릇하지 않고서는 내가 진정한 크리스천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구원을 받았다 또는 용서함을 받았다 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제까지 상처투성이고 실패했지만 그걸 더 이상 하나님께서 묻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자들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 가능성은 바로 부활의 가능성인데 이 부활의 가능성을 자기 삶속에서 자기 손과 발 속에서 실천하는 이 역량이야말로 좋음과 올바름과 참으로 그 당사자 모두에게 이로운 일을 지어나가는 것이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삶속에서 실천해 나가는 이 역량이야말로 크리스천 역량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로 이 역량이 우리 안에서 꿈틀거릴 때 우리 기독교 교계 안에서조차도 적대화 되어 있고 역사인식이 완전히 다른 잘못된 진영 논리가 극복될 것입니다. 또한 그런 그릇된 진영논리에 매몰돼 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형해(形骸)화된 신앙생활의 양상들을 극복해 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 지점이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거대한 남북간의 통일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실현되어야 할 일입니다. 저는 ‘일상의 정치’란 말을 들고 나왔는데요, 일상의 작은 일 속에서 바르고 참되고 좋게 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음은 하나님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참되시니 진리 자체이십니다.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그 부분에서 동참(take part in)하고 참여해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 동행해 갈 수 있고, 참여해 갈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에 입성하는 그 광야에 40년을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 민족에게도 40년과 같은 시간을 주셨습니다. 우리 역사의 이 40년을 저는 ‘역사의 삼각주’라고 생각합니다. 삼각주는 모든 쓰레기가 다 밀려오는 아주 시궁창 같은 곳이지만, 그 안에서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이며, 좋지 않은 문제가 무엇인지, 좋은 주제가 무엇이고 좋지 않은 문제가 무엇이고, 이 각각이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되고, 그 좋은 주제가 잘 실현될 수 있고, 올바로 잘 처방을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맡겨 주신 이 일을 외면하고 우리가 그 책임을 방기하는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크리스천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응답해 나가는 그 역량'(response-ability)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이 역량의 거점을 우리는 어디서 마련할 수 있습니까? 결국은 일상의 작은 일에서부터 찾아야 합니다. 거시적인 남북 통일을 얘기하기 전에, 미시적인 우리 기독교통일학회 안에서부터 그 역량의 거점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교계 안에서부터, 내 가정 안에서부터 우리가 지어나가는 그 모든 일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참으로 좋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우리가 구현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올바른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 방도와 과정(way and process)를 바르게 밟아 나가면 상태가 변화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상태(state)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 각각의 외부에 보이는 외형적, 공간적 모양과 모습도 분명히 변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변화의 양상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맨 마지막에 저는 이런 비유를 들고 싶습니다. 씨앗이 뿌려져서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을 봅시다. 뿌려지는 씨앗은 죽는 것이 아니라 문제투성이인 그 역사의 삼각주 속에 삼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뿌려집니다. 거기서 생명을 잉태해냅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삼각주는 정말 시궁창 냄새가 나고, 모든 허위가 난무하기 마련입니다. 이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 씨앗을 잉태해 내고, 거기서 싹을 돋아내느냐에 따라서 이 역사의 삼각주는 시궁창이 아니라 비옥한 토양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21세기 남북 통일의 상태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후에 연세대 하상섭 박사의 논평이 있었다.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유튜브 영상에서 볼 수 있다.)
질문: 왕십리에서 온 목사인데요 김병욱 교수님의 강의는 너무 짧고, 강의안도 다 다루시지 않은 것 같아요. 강의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아니면 책이나...
사회: 네, 답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책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2019년에 제가 ‘지탱’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물론 그전에 낸 책도 여러 권 있습니다마는 제가 그동안 학문 활동을 하면서 3부작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 중에 첫 번째 책이 ‘지탱’이라는 책이고요. 이제 올해 내지는 내년쯤에서 ‘응분’이라는 책을 내려고 합니다. 삼부작 중에 하나는 ‘지탱’이라는 책으로 나왔고, 이 윤곽은 거기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 2019년 이후로 약간 좀 생각을 좀 약간 더 정교하게 만들어서 여러 편의 논문들을 제가 오늘 들고 나왔는데요. 오늘 강의의 주요 내용른 지탱에서 이미 언급됐고요, 골격은 거기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계급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급 개념은 너무나 자유주의적으로 중립적 의미의 계급입니다. 또 사회주의적으로 계급은 부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인간 사회는 분업과 협업이 없이는 단 한시도 살아갈 수 없고, 쌀 한톨도 우리는 분업과 협업 없이는 생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분업을 하면 그 분업하는 일과 당사자가 곧 계급이 됩니다. 민중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를 민주적 관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의미를 고찰해야 되겠는지 이런 부분에까지 깊숙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하박사님이 언급하신 민주주의에 관하여 좀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실이 부분이 제 오늘 발표 논문에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철학적인 부분은 이미 서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를 생각하면 다수의 지배로 이해합니다. 소수의 지배를 귀족정이라 하고, 1인 지배를 왕정이라 부르며, 공화국하면은 왕국이 아닌 나머지를 다 공화국으로 이렇게 이해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 공화국이 얼마나 다양한 상태(state)가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상상력이 아예 묵음처리 돼 버렸습니다. 그러나 공화국이라는 건 단순히 다수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수에게 소수가 지배를 당한다는 점도 사실 결코 좋은 상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다수도 어떤 다수이며 어떤 성질의 다수인가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앞에서 어떤 분이 토론 중에 4.3사태 때 우리 국민들은 상당히 공포스러웠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수의 지배가 꼭 좋은 상태만 아니란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데카르트적인 이 사유의 틀에 네무도 갇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데카르트는 대단한 사상가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몇 세기에 걸쳐서 전 인류의 사고를 이렇게 옥죄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자유로워져야 됩니다.
그렇게 자유로운 시각으로 민주주의에 대하여 바라보면, 그것은 단지 다수의 지배가 아니라는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풀어낼 수 있는 단초를 중국의 기독교 정치가였던 쑨원이 밝혀 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쑨원은 민주주의를 다수의 지배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민정치(全民政治)라고 봤습니다. 모든 민이 참여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직접 민주주의란 말입니까? 그렇다고 직접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바로 이 쑨원 사상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 거기에 있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안창호를 거론한 이유가 있습니다. 안창호는 쑨원의 전민정치를 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어 대공주의를 제시했습니다. 그 사상의 핵심은 같습니다.
전민이 있지만 모두가 다 정치에 참여해서 그렇게 좋은 정치를 해 나간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각자에게는 그 몫이 있습니다. 응당한 분업의 몫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응당한 분업의 몫 중에 하나가 바로 진실과 허위를 분별해내는 것입니다. 이 역량이야말로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픈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진단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아픈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픈 문제나 좋지 않은 문제라는 것은 좋은 주제적 상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뭐가 문제인지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하늘이 맑아야 땅이 밝다’는 비유로 표현합니다. 하늘이 맑아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1)전망이나 비전을 말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일을 하고 있는 (2)일의 정체성(identity)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일 속에 뿌려지는 (3)핵심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 3 요소를 저는 주제라는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이 주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틀어쥐고 발견해야만,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문제가 무엇인지 그 정체를 밝힐 수 있고 진단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주제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고 실마리를 잡아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전민이 참여하는 정치이지만 각각의 국민은 그 응분의 몫을 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문제를 잘 진단해 내면 올바로 처방을 하여 어떻게 그런 문제를 잘 해결할 건가를 제시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걸 잘 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언변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론을 잘 끌어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학하는 사람들은 언변이나 말재주가 없거나 침묵하는 다수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일상에서 그저 대세에 짓눌려 조용히 사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정치를 다 합니까? 그러나 말 좀 잘하고 머리가 깨져 있고 그리고 개념적 구사를 잘할 수 있는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역할이 아닌 건물을 지으면 설계도나 이런 것을 그리지 않더라도 벽돌 한 조각 잘 쌓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마다 그 구성원들이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도산 안창호가 대공사상을 통해서 쑨원의 전민 정치를 아주 구체화해 놓은 것입니다. 안창호의 대공사상의 압권이 저는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를 말할 때 보통 풀뿌리 민주주의처럼 양적으로 확대된 민주주의를 생각합니다. 또는 대의 민주주의라는가 시민 민주주의처럼 질적인 제고만을 도모해 보려고 합니다. 아니면 자유주의의 어떤 새로운 버전으로서 모색하는 그 민주주의를 생각합니다. 이런 양자적 민주주의 개념 속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헤매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개념이 아니라 우리는 양적으로도 생명 활동을 북돋울 수 있는 의미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전민이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에서는 참여의 양상은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맡은 일마다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헌법적 체제로 잘 담아내서 통일국가의 비전을 통일 헌법으로 심어 내느냐가 이 시대에 크리스천, 적어도 정치학 내지는 정치학 사상을 하는 사람들의 사명이 아닌가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사회: 네, 꼭 마지막 질문을 하셔야 되겠다 하시는 분 있을까요?
정지웅 박사 질문: 우리 (교수님은) 철학 전공하셨으니까 질문을 드리는데... 아까 말씀 중에 유전자 조작 얘기도 하셨거든요. 그냥 인위적이고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이제 언급을 하셨는데... 지금 인류 역사 발전에 있어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병을 고친다든지... 인류 발전에 긍정인 역할을 하는 부분도 있을 텐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물론 긍정적인 부분이 있고 부정적인 부분이 있는데... 그걸 조금 개별적인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병욱 박사 대답: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20세기적 버전이 저는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라고 봅니다. 따라서 이 시대 그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라는 거대한 사상적 지형 속에서 인간의 주체적 역량을 마음껏 강조하지만 때마다 또는 시대마다 아주 그 쓴 고배를 마시고 있는 게 실존주의 사상입니다. 그걸 여지없이 공격하고 있는 게 구조주의 사상이고요. 인간은 구조에 의해서 틀지어지고 만들어진 존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20세기 국제정치학에서는 바로 그런 구조주의가 상당히 강하게 작용을 하면서 구조주의적 자유주의라든가 구조주의적 현실주의라든가 하는 것이 이제 신현실주의라든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이제 등장합니다.
저는 이것도 조금 전에 제 논문에서 말씀드린, 실체 운동 메타 이론 일반적으로 시선으로 얘기하면 관찰자적 시각에서 만들어진 사유의 양대 지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구조라는 것도 결국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이 있고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구조주의가 우파적 구조주의라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좌파적 구조주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맑스라든가 소셜리스트 계열들은 구조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그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조라는 것은 그렇게 부정과 긍정으로 볼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제가 말하는 바의 핵심입니다. 단순히 부정과 긍정으로 볼 문제가 아니고 근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구조라는 것도 인간의 삶의 방식 및 과정에 의해서 형성되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이 구조가 지금 생명을 과연 잉태하는 쪽으로,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긍정과 부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새롭게 변화하는 임계점에 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구조에는 긍정적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의 구조가 임계점에 도달한 그 결정적 증좌가 바로 생태적 재해 문제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의 의료계에 학생들을 몇 명을 늘릴 거냐 말 거냐 이런 것을 가지고 논쟁을 합니다. 저는 그것을 순전히 가짜 논쟁(Pseudo-problem)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병원이 많이 늘어난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의료인력이 얼마나 충원되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왜 21세기 현실에 이토록 많은 대형 병원들과 병원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인생, 생명활동을 이렇게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까? 건강한 사회, 행복한 사회라는 것은 병원이 줄어들고, 법원이 줄어들고, 형무소가 줄어들고, 법정 싸움이 줄어드는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들이 줄어드는 것이 근본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이 긍정이냐? 긍정적 측면이냐 부정적 측면이냐를 생각하기보다는 과학의 방향성을 생각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예를 들면, AI의 방향성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AI를 없앨 거냐, 말 거냐 이 문제가 아니라, AI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방향성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AI를 만들 것인가? 어떤 핸드폰을 만들 것인가? 이런 것이 더 근본적인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금 전에 그 민주주의와 다시 결부시켜서 말씀드리면, 생명력이 있는 민주주의라는 것은 어떤 문제를 제대로 진단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 갈 뿐만 아니라 '진실한 문제'를 해결해가야 되는 것입니다.
허구적 문제가 있습니다. 만들어진 문제나 인위적으로 조작된 문제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지금 좌우 진영이라든가, 한국사회의 이념적 지형이 복잡한 이유는 사실 대부분 만들어진 진영 논리에 근거하여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망 달성을 위해서 상대를 악마화하는 이 프레임 논쟁에 끊임없이 우리는 함몰돼 있습니다. 저는 거의 100% 장담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논쟁은 거의 100% 허구적 문제(pseudo-problem)이거나 허구적 진영(pseudo-camp) 논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여기서 본질을 찾아가는 역량은 크리스천 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크리스천이야말로 성경에 비추어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이게 과연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인가 또는 이게 생명을 살리는 일인가를 진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근원적 빛의 조명 아래에서 문제를 제대로 진단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좀 전에 민중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걸 문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문화적 저변 속에서, 그리고 일상 생활 속에서 허위적 문제를 뒤로하고, 즉 독립해 나가고, 가짜로부터 독립하고, 진실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공유해 나가는 이 프로세스야말로 사실 남북이 체제적 통일이라든가, 군사적 영토적 통일의 저변에서 작동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게 제대로 작동해야만 헌법적 질서가 안정을 찾게 되고 법이 제대로 작동됩니다. 법은 아무리 자세하게 만들어져 봐야 법은 사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우리는 법치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법이라는 것은 많이 자세하게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법에 어떤 정신이 담아져서 어떻게 우리가 준수하면서 생명활동을 일구어 나가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봤을 때, 그 저변에서 작동해야 되는 것은 그야말로 삶의 실천이고 문화입니다. 이것을 민중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계급 개념에서 저는 그걸 '공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법을 잘 만들고, 살아 있는 법을 잘 준수하고 개정하고 폐기할건 폐기하는 이런 역량을 저는 시민들이 담당해야 될 몫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일상 생활에서 벽돌 한 장 잘 쌓고, 일상 생활 속에서 우편 배달 충실하게 잘하고, 일상 생활 속에서 운전 버스 운전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일이야말로 주민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 각각의 일이 어느 것이 더 능가하고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는 게 없이 근원적 동등성을 가지면서 그 각각의 일 속에서 분명한 차이를 갖는 근원적 동등성과 차이성의 회복되는 바로 이런 세상이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마음속에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우리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상당히 비극적이고 암울한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속에서 분명히 해낼 수 있는 가능성과 실마리를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에게 제공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긍정적으로 내면의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끝>.
강의 영상
https://youtu.be/ccO3j87g71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