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신교회 은퇴장로 유랑기 11
2024년
6월 1일(토) (영광 1번지 굴비한정식) 백수해안 (Red Hill Cafe)
6월 6일(현충일) (공주새이학가든)(로타리 카페) 공산성 무령왕릉
6월 22일(토) (고산 미소) (O's Gallery) 오집사 내외, 장경애, 김영숙
8월 31일(토) (고산 미소) 전북도립미술관, 문복철교수 회고전
(시원 카페) (영화동 통닭)
10월 1일(화) - 2일 제천 배론 성지, 청풍호 유람선 (대장군 꿩요리)
(수안보 파크 호텔) 화양계곡 (경희식당) 법주사
(다향) (유정) (정태봉 문남철 이신웅)
제천 배론성지
8시, 충북 제천으로 출발. 배론성지에 가는 길이다. 평균 나이 만84세의 세 노인들이 천주교 성지를 찾아 먼길을 떠난다. 정안 후게소를 지날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천안에서 증평 음성을 거쳐 제천에 도착하고 배론성지를 찾았다. 성지가 가까운 곳에 고상이 서있다. 여기에서부터 경건한 느낌이 든다. 건물 앞에 차를 세웠는데 기도학교였던 모양이다. 사무실 옆 화장실에 들렸다가 순례를 시작한다. 옷이 서서히 젖을 정도로 비가 내린다.
'마음을 비우는 연못'이라는 곳의 무지개 다리를 건넌다. 예수님 고상이 서있다. 브라질 리오의 고상과 비슷하다.
시설들이 많고 넓게 펼쳐져 있어서 노인들이 걷기에 어렵다. 황사영 백서 토굴과 성 요셉 신학당,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만 보기로 하다. 묘만 제외하고 인접해 있다. 눈에 띄는 황사영 알렉시오 현양탑에 간다. 진복문이 나온다.
진복문. 문 곁에 성 요셉 상이 서있고 문기둥 양측에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글이 씌어 있다.
문을 지나서 계단을 오르면 '순교자들의 집'.
안에 성인들의 그림이 있다.
왼쪽에 있는 초가집을 본다. 성 요셉 신학당이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 교육기관이다. 1855년 파리외방전교회 메스트르 신부가 설립했다. 교우촌 회장 장주기 요셉이 자기 집을 신학당으로 봉헌했다. 1856년 푸르티에 신부가 교장, 프티니콜라 신부가 교수로 재직했다. 1866. 3. 2 두 신부가 관헌에 체포되고 3. 11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신학당 사진. 자기 집을 봉헌했던 장주기 요셉은 3. 30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벽의 사진은 프티니콜라 교수.
신학당 초가집은 6.25 때 불탔고 현재 건물은 2003년 충북도가 복원한 것.
마당에 두 교수의 상이 있다. 푸르티에 교장, 프티니콜라 교수.
자기 집을 봉헌한 장주기 요셉 상. 비도 오는데 노친네들 수고 많으십니다.
옹기굴. (황사영의 토굴로 오인했다. '황사영의 백서 토굴'은 순교자들의 집의 뒷쪽에, 이 옹기줄이 이어지는 곳에 있다. 집에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고 살펴보면 신학당 초가집 사진 '신학교' 표지판 뒷쪽에 토굴 입구가 일부 보인다.)
1801(순조 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어 주문보 신부가 자수, 처형되고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자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은 1801. 2월부터 9월까지 8개월간 옹기굴로 위장한 토굴에 머물며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명주천(40X62cm)에 122줄 13.384자를 쓴 편지였다(황사영의 백서) 신유박해 과정을 이야기하고 교회 재건과 신앙자유를 찾기 위한 5가지 방안을 서술한 것이었다. 편지는 발각되고 황사영은 체포되어 대역부도의 죄로 능지처참되고 어머니는 거제도로, 아내는 제주도로, 2살 아들은 추자도로 귀양 보내졌다.
(배론 성지의 가장 중요한 심벌을 모르고 지나치다니 한심스러웠다. 다시 찾아가리라.)
곁에 '황사영 순교 현양탑'이 있다.
황사영이 하늘을 향하여 팔을 올려 기도한다. 동상의 모양이 어디서 본 듯하다. 나가사키인가?
최양업 도마 신부의 상. 신부님의 묘를 찾아가려 했다. 산길로 십자가의 길을 올라가면 사제들의 묘지가 나오고 그 위에 가경자 최양업 도마 신부의 묘가 있다는 데 우중에 시도를 했지만 실패하고 후일을 기약했다.
최양업 도마 신부(1821-1861)는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이시다. 1836. 12월 김대건 안드레아,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갔고 1849. 4. 15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귀국 후 11년 6개월 동안 산간오지의 교우들을 방문하며 목자의 삶을 살았다. 전라, 경상, 충청 등 5도의 6천여 명의 신자들을 돌보았다. '땀의 순교자' 1861. 6 과로와 장티부스로 문경에서 선종하고 베르뇌 주교에 의해 11월에 신학당이 있는 배론에 안장되었다.
길가 식당에서 청국장 백반을 먹고 청풍호 유람선을 탄다. 1시간 20분, 18000원.
배는 쾌적하고 풍광이 좋다.
수안보로 와서 올 때마다 들르는 꿩요리집에 간다. 꿩코스 요리, 1인 5만원. 5년 전과 가격이 같다. 꿩을 많이 사육하는 모양이다.
밤이 되어 수안보 파크 호텔에 여장을 푼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옛집에 돌아온 듯한 포근함이 있다.
아침 식사 후 산을 넘어서 괴산에 가고 화양구곡에 들어간다.
철이 아니어서 조용하다. 국립공원 직원에게 사정을 하여 잠깐 입장을 허락받고 제 4곡, 금사담까지 들어간다.
화양구곡.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9 골짜기. 명승 제110호.
송시열(1607-1689)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며 중국 무이구곡을 본따서 9개 계곡에 이름을 붙였다.
곁의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아이들과 가끔 놀러왔던 계곡을 내려다 본다.
그 중 제4곡 금사담이 유명한데 계곡 위에 1666년 8월 송시열 선생이 암서재를 짓고 학문을 계속하고 수양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현재 건물은 1986년 다시 복원한 것.
집으로 오는 길에 보은으로 내려와서 법주사에 간다. 입구에서 정이품송을 만난다.
정이품송. 손상이 심하다. 천연기념물 제 103호. 수령 600-800년 추정. 세조가 행차할 때 연(가마)이 가지에 걸리겠다고 말하자 아랫가지를 쳐들어 행차가 지나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이품 벼슬을 하사 헀단다.
손상 전의 모습.
800년 소나무 앞에 84세 노인들이 섰다. 자연의 위대함과 인생의 덧없음이 느껴진다.
식당가에 들어가 점심, 한정식 1인 35000원. 반찬 수는 많은데.
법주사 일주문, '호서 제일 가람'. 주차 후 걷는다. 길이 멀다. 노인들이 쉬며 쉬며 걷는다.
금강문.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법주사는 776년 진표가 중창,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4(인조 2)년에 중창했다.
천왕문, 보물 제2249호.
당간지주
팔상전, 국내 유일의 5층 목탑. 국보 제 55호.
팔상전
팔상전과 미륵불상
청동 미륵불상. 1964년 시멘트 불상을 만들어 세웠다. 80년대 초반, 아이들과 왔을 때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1986년에 시멘트 불상을 헐고 1989년 초파일에 청동 미륵불상을 점안했다. 높이 33m.
대웅보전.
철확(솥) 통일 신라시대. 보물 제1413호.
절담 밖의 찻집 '다향'에서 차를 마신다. 나는 절 찻집에서 차 마시는 게 좋다. 먼 길을 돌아와서 헤여졌다. 좋은 여행이었다.
10월 12일(토) 무주 (산들애, 능이 닭백숙) 리조트 곤돌라 탑승
(최종회 부뚜막 리버사이드)
10월 19일(토) (산외 용두머리 한우 타운) (소풍) 산내 구절초 축제
(유생촌)
정읍 구절초 축제,
정읍시 산내면 마주리산
10월 26일(토) (선운사 신덕 식당) 핑크 뮬리 (pink muhly)
고창 핑크 뮬리 축제,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11월 2일(토) 진안 운장산 오솔계곡 (토종닭백숙) (안단테)
용담댐 물문화원 (유정)
11월 23일(토) (한오백년추어탕) 백수해안 (레드힐 cafe)
(법성포 일번지 식당)
11월 30일(토) (익산 궁) 전북도립 미술관-이건희 컬렉션,
한국 근현대 미술 특별전 (황금 코다리)
만경강
전북 도립미술관 뒷산.
파란게와 어린이 이중섭 1950
섶 섬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 1951
절구질 하는 여인 박수근 1957
정물 박래현 1950
구성 이응노 1970
자화상 (여인초상) 나혜석 1928
2025년
1월 26일(일) 논산 노강서원 (탑정호 Lake Hill cafe) (궁)
논산시 광석면 노강서원을 다시 찾았다. 작년 2월에 찾아왔을 때 가건물 속에서 해체 복원 공사 중이었고 9월쯤 공사가 끝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외삼문을 들어섰을 때
눈 앞에 나타난 거대한 강당, 현존한 서원의 강당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강당, 보물 제1746호. 감동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노강서원은 소론의 대표 서원, 파평 윤씨의 문중 서원, 서원철폐령에 살아남았다.
1675(숙종 원년) 윤황을 배향하러 김수항 등이 건립했고 1682(숙종 8년) 사액서원이 되며 윤문거를 추향했다. 1723년 윤선거, 윤증을 추가 배향했다. (사적 제540호)
마루의 앞면은 열려 있고 마루의 하인방을 새 목재로 바꾸었다.
뒷면은 세살분합문으로 닫혀 있다.
천장을 본다. 주도리 사이에, 화반 위에 통나무 대들보를 놓고 그 위 안쪽 중도리에 종보를 끼우고 그 위에 화반을 세워서 종도리를 받치게 했다. 대들보 사이에 끼운 나무와 링 달린 철사 구조는 원래 있는 것인지, 용도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기둥 사이에 창방(가로재)이 있고 그 위에 화반을 만들어서 장여와 도리를 받쳤다. (각 부위의 명칭과 설명이 바르지 않을 수 있음) 세월에 파인 기둥의 상처를 손으로 어루만진다.
사우의 내삼문. 셋을 분리해 놓았다. 좌로부터 지선문, 숭현문, 숙례문.
사우, 숭의사. 윤황, 윤문거, 윤선거, 윤증을 배향.
강당의 측면, 덧지붕의 활주는 절반을 새 목재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