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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4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주일)
일상에 깃든 성령의 숨결
행2:1~13; 고전12:4~13; 요20:19~23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지 약 오십일이 되어갈 무렵(그때가 유대인의 절기로 칠칠절(오순절) 때였는데)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제자들과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있다가, 그들 위에 성령이 임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세찬 바람이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그들 위에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 모두는 성령에 충만해져서, 오순절 명절을 위해 각 지역에서 모인 디아스포라들에게 그들 각자의 방언으로 말을 하면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원형이 되어, 우리는 부활절 7주 후에 “성령강림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사도행전이 전하는 사건보다 더 오래된 성령강림의 원형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일하던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오던 전날 밤, 이스라엘 자손들은 유월절을 지키게 됩니다. 그들은 유월절에 양을 잡고 무교절 음식(누룩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양고기와 함께 먹었는데, 출발할 준비를 모두 마치고는 서둘러 먹는 의례를 치뤘다고 합니다. 양을 잡을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는데, 재앙이 그 피를 바른 집을 넘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넘어간다”는 말, 히브리어로 <파싸흐>에서 <페싸흐>라는 유월절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영어로 passover라고 하지요.
이 유월절의 모티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원형이 됩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켜 <파스카> 신비라는 말을 썼는데, <파스카>는 <페싸흐>의 라틴식 발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그때 흘린 십자가의 피는 우리를 살리는 <페싸흐> 곧 <파스카>의 신비가 되었다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해석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예수님과 부활은 유월절 시기와 겹쳐 있습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자손은 광야로 나갔고, 셋째 달 초하루에 시내산에 도착합니다. 이때는 시기적으로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었는데, 그래서 이 날을 칠칠절이라고 부릅니다. (칠칠절은 히브리어로 <샤브옷트>이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주간들이라는 뜻으로 한 주간이 일곱 번 지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헬라식으로는<펜테코스테> 즉 50번째라는 뜻이지요) 이때가 요즘 양력으로 따지면 오월 중순 이후가 됩니다.
이 칠칠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출애굽기19장은 묘사하고 있지요. 출애굽한지 50일이 지나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과 계약의 의식을 치룹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향해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고,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백성 가운데 강림하시는데, 불 가운데로 내려오셨는데 산에서는 연기가 솟아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마치 화산 폭발이 일어난 것 같은 묘사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이집트에서 빼내서 당신의 보물(스굴라)로 삼았고, 그래서 이 백성을 “하난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으로 삼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지킬 계명을 주십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생기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의미 있는 절기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성령의 강림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의 성령강림은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경험했던 칠칠절 사건의 재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도 세찬 바람소리를 들었고, 불길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강림을 체험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칠칠절 시내산의 하나님의 강림 사건의 재현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성령강림절의 기원을 길게 말씀드렸는데, 우리는 이 이야기가 하려는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잘못하면, 묘사된 이야기의 겉모습에 밀려 진짜 하려는 속 이야기를 잘못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는 칠칠절에 대한 장엄한 묘사(신화적 묘사)를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게 되면, 이 이야기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일어난 일이어야 한다고 하는 문자주의에 빠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꾸며낸 신화라는 불신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칠칠절의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친밀함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물”이라 하시며 자신의 백성이라고 받아주시고,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사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는 일은 출애굽과 같은 놀라운 사건보다는,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열매를 거두는 일상의 삶일 것입니다. 거기에선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개입보다, 좀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개입을 필요로 합니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자연 속에서 알게 모르게 경험되는 하나님의 개입 말입니다. 일상 속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의 품 말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성실하게 지키며 순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헤세드의 하나님, 즉 변함없고 충실한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기적 같은 하나님의 개입보다는,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누울 때까지 자신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품을 의식하고, 자신도 변함없고 충실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계명을 충실히 지킴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바로 이것이 중요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 살 때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성령 하나님의 보통의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갈멜산의 하나님,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사르는 하나님 경험이 일상적인 경험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경험한 오순절 성령의 체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했던 하나님 강림 경험과 비슷한 패턴을 갖습니다. 일종의 절기가 재현된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 경험을 했던 제자들이 일상의 삶에서 매번 이런 특별한 체험을 하며 산 것이 아니라, 특별 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비범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삶이 되어야 했습니다.
오늘 고린도전서12장은 소위 성령의 은사에 대한 사도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세운 이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열광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공동체를 해치는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열광주의자들은 성령의 카리스마를 받기를 갈망했고,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만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열광주의는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릴 때도 매우 무질서하게 표출되곤 했습니다. 가령, 신자들이 모여 있을 때, 여기저기서 방언하고 예언하고 찬송하고 가르치고 이런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은사들은 교회에 덕을 끼쳐야 한다고 하면서, 한 사람씩 차례차례 하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14:33) 라고 말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이 열광주의에 빠진 은사주의자들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각각의 은사들은 한 성령님에게서 나온 것이며, 그래서 성령이 하시는 일은 공동의 유익, 즉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각각의 은사들은 바로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몸은 하나지만 많은 지체가 있다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그리고는 12장 마지막에서 각각의 모든 은사들보다 “더 큰 은사”, “가장 좋은 길”을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사랑을 말하고 있지요. 그래서 그 유명한 13장 사랑장이 나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집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 성령강림절에 드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큰 소리가 나고 불이 혀같이 갈라지면서 성령이 임했던 마가의 오순절 사건이나, 사람들이 갑자기 각 나라 말로 말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에 임하신 성령의 현존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대부분이 이런 시간들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품을 의식하며, 마음을 더 크게 열고, 짜증 부리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자신의 삶을 확언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삶 속에 현존하고 계신, 성령의 임재를 알아차리며 살 수 있을까요? 성령은 이렇게 온기로, 지지로, 생명의 둥지로, 보호와 조용한 이끄심으로 작용합니다.
토머스 머튼은 반평생을 수도원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거의 수도원 루틴에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지루한 삶을 살지요. 그의 일기를 보면 수도원 초기시절에는 여러 가지 결심도 하고, 영성생활에 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그런 결심이나 영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은 적어지고, 그저 자연의 묘사가 많이 등장하고 그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며 현존하는 얘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어느날 일기는 딱 한 줄입니다. “비가 그친 후 딱새들이 날개를 털고 있다” 여러분, 이 짧은 한 마디 속에서 머튼의 “고요한 현존”을 볼 수 있습니까?
머튼은 죽기 3년 전부터 은수처에 머물게 되었는 데, 어느날 은수처의 하루를 묘사한 좀 긴 일기를 씁니다. 거기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영적 삶이란 사람들이 뭔가 다른 일로 너무 바빠서 스스로 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걱정하는 그 무엇이다... 이곳 숲에서는 신약성서가 보인다. 즉, 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고 내가 숨 쉬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날 일기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납니다. “정오의 뙤약볕 아래 새로 채운 물병을 들고 돌아왔다. 옥수수 밭을 지나 상수리나무 아래 헛간을 지나 언덕을 올라 소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고 난 뒤, 뜨거운 은수처로 들어왔다. 종달새들이 날아오르며 재잘거린다. 땅벌들이 드넓게 그늘진 처마 밑에서 윙윙거린다... 오후의 고요 속에서 현존하며, 오르내리는 소리들이 하나로 모아지는 주선율 안에서 모든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되고 진정한 충만을 맛본다... 청소를 한다. 담뇨를 펴서 햇볕에 말린다. 은수처 뒤의 풀을 벤다. 오후의 열기 아래 글을 쓴다. 담뇨를 걷어 침대에 깐다. 날이 흐리고 해가 저문다. 곧 비가 올 것 같다. 수도원에서 종이 울린다. 독실한 시토 수도회의 트랙터가 골짜기에서 요란한 소리를 낸다. 나는 곧 빵을 잘라 저녁을 먹고 시편을 노래하며 안쪽 방에 앉아 석양이 지는 것을 바라볼 것이다. 창밖에서 새들이 지저귀고 밤이 계곡에 내릴 것이다.”
좀 길게 인용했지만, 이런 일상들 속에서 그는 “고요 속에서 현존하고”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진정한 충만”을 맛봅니다. 하나하나의 행위 속에 그대로 현존하며 지금여기를 사는 모습이 그대로 보입니다. 그가 자연을 자세히 묘사하는 장면을 보면, 바로 그가 그 자연 안에서 현존하고, 거기서 말할 수 없는 신비를 느끼고 진정한 충만을 느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이런 삶이 성령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데 하는 걱정조차도 내려놓고,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숨을 쉬는 것, 그것이 바로 “현존하는 삶”이고 “성령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현존의 삶이 거저 주어져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았던 사람은 우리에게 이런 현존의 삶이 진짜의 삶이고 하나님과 온 자연과 전체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물론 우리는 은수처에서 수도승의 삶을 살 수 없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삶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그 길을 지향하며 사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충만을 주게 되는지를 은연중에 알려줍니다.
한번은 즉문즉설에서 어떤 사람이 법륜스님에게 당신처럼 초연하게 사는 것이 부럽다고, 법륜스님을 부러워하더라고요. 그랬더니 법률스님 왈, “그럼 당신도 출가해서 나처럼 살아 봐요.” 하더라구요. 그런 삶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겠지요. 엄청난 투쟁이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진정 사랑하고 존중하려는 그 갈망, 그리고 모든 생명들을 그렇게 존중하고 사랑하려는 의지, 가까이 있는 이웃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려는 성실함, 오늘 테오리아에 나오는 말처럼, 다른 이들을 향해 ‘예스’라고 말함으로서 경험되는 성령의 숨결을 느끼는 것, 이런 지향들이 모이고 수련되고 연습되고 반복되면서 그 진짜의 삶을 사는 것일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요한복음에 두려워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 한복판으로 들어서셔서, 평화를 전하시고, 숨을 크게 쉬시며 제자들에게 성령 숨결을 불어넣어주시던 주님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불어넣어주시는 그 성령의 숨결을 기억합시다. 우리도 그 숨을 쉬고 있고, 그 숨으로 우리의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숨 가운데 성령의 현존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