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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9:1-41
▣ 에베소에서의 소동-사도행전 19장-
본 장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놀랍게 사역하는 것을 전해 주며 세 그룹의 사람들과 접촉하는 과정을 말해 준다.
1. 복음을 모르는 열 두 제자들과 바울(19:1-12)
이 열 두 사람들은 아볼로로 말미암아 개심한 사람들인 것같다(18:24-28). 이 달변의 설교자가 알고 있는 것은 요한의 세례(침례)가 전부였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를 가르친 후에, 아볼로가 이 개심자들에게는 이 지식을 전달할 수가 없었음에 분명하다. 에베소는 큰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이러한 열두 사람을 만났을 때 그들의 영적인 생활에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을 간파하였다.
바울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질문하였다. 이 구절에 근거하여 “제 2의 축복“에 관한 교리를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의 삶에 들어 오신다. 그 후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다(엡 1:13-14).
이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알지 못하였노라“고 응답했다. 이들은 물론 성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요한이 앞으로 성령의 세례(침례)가 있을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마 3:11). 이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이 성령이 오순절에(행 1:5/행 2:4), 그리고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10:44-45/11:15-16) 이미 임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그들의 세례(침례)에 대하여 물었다. 그는 세례(침례)를 받았는가를 확인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물세례(침례)를 받는 일이 바랄만하여 용납되는 것임을 또한 번 나타내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생활에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인데, 바울은 왜 세례(침례)를 받을 것을 요구했는가? 왜냐하면, 사도행전에서는 물의 세례(침례)와 성령의 세례(침례) 사이에 분명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볼로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침례)가 그들이 아는 유일한 세례(침례)였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더이상 효력이 없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열 두명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그릇된 멧세지를 믿었으며(“그리스도가 오신다“), 그릇된 세례(침례)를 받았던 것이다(회개의 세례). 이들은 아볼로처럼 성실하고 진지했지만,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었다.그들이 바울에게 “우리는 오순절날 세례(침례)를 받았습니다“라는 대답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이들은 성령을 받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장 38절은 회개하고 세례(침례)를 받은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들이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진실로 믿은 것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혹은 이들이 “사마리아에서 세례(침례)를 받았습니다“(행 8장)라고 대답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안수함으로써 성령을 받았어야 했다(8:17/ 9:17). 또는 “우리는 고넬료의 집에 있었고 베드로가 말씀 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면, 그들은 믿는 즉시로 성령을 받았을 것이며(10:44-45), 그다음에 물세례(침례)를 받았을 것이다.
이들이 요한의 세례(침례)를 받았다고 말했을 때 바울은 이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음을 알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으시고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에 더이상 효력이 없게 된 멧세지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누가는 바울이 이들에게 한 모든 말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셔서 죽으셨다는 복음의 멧세지를 믿었으며, 그리스도인의 세례(침례)를 받았다. 바울이 안수하자 그들은 성령을 받았으며, 방언을 말함으로써 성령을 받은 증거를 나타내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은 증거로 방언을 말하는 예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 열 두사람은 에베소 교회의 핵심을 이루었다.
하나님께서 통례에서 벗어나 바울의 안수로 성령을 받게 하신 것은 바울이 다른 사도들과 동등하다는 것과, 그가 교회를 세우는 하나님의 종인 것을 입증한 것이다. 이 전체 사건은 몇 가지 진리를 강조한다.
- 구원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바른 멧세지를 믿어야 한다.
- 세례(침례)는 중요하며, 사도행전 2장 38절의 세례(침례)는 오늘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한도 내에서만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을 뿐이다.
-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동등한 하나님의 사자(使者)이다."
행 19:13-20
2. 바울과 그를 흉내낸 일곱 명의 유대인(19:13-20)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을 보냈다(20:31). 회당에서 3개월, 두란노 서원에서 장소를 빌려 2년간 가르쳤으며, 9개월간은 여러 장소에서 보냈다(19:8-10/19:22). 전 아시아가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은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신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특별한 기적들로 바울의 사역을 입증하셨는데, 이것은 바울의 활동이 통상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기도자의 옷과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못하다.
유대인 일곱 명이 바울의 권능을 흉내내려고 했으나(사단은 대단한 모조가이다), 이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 옷을 벗기우고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 사건은복음이 널리 퍼지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마법사들과 술객들이 회개하고 그들의 책들을 불태웠다. 에베소는 마술로 잘 알려진 도시였으며, 그러한 전 계획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었다. 복음이 사단의 근거지에 침투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행 19:21-41
3. 바울과 은 세공업자들(19:21-41)
무지한 제자들과 유대인 흉내장이들을 통하여 복음을 방해하는 일에 성공을 하지 못한 곳에서 사단은 그 성읍의 사업가와 상인들을 통해 거의 성공을 거두었다. 뱀의 속임수가 실패하자, 사단은 사자로 변신하였다. 에베소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다이아나(아데미)신상을 관리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미신이 성행하는 곳에는 어디나 신상들과 종교적인 상거래가 있게 마련이다. 유대인의 성전에서 제사에 쓸 동물들을 팔던 일을 기억하는가?
참된 복음 전파는 언제나 미신으로 인한 돈벌이와 정면 충돌을 하게 되어 있으며, 에베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은 세공업자들의 조합(또는 연합회)은 그들의 주된 관심이 종교에 있는 것처럼 주장했으나 그들이 참으로 걱정하는 것은 사업을 잃게 되는 것이었다! 복음이 그 도시를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상에게서 돌아서서 참되신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으며, 이 일은 그들의 사업을 망치고 있었다. 웨일즈(Wales)에 부흥이 일던 시대에는 수십 개의 술집이 고객을 잃고 문을 닫았다고 보고되었다!
은 세공업자들은 사람들에게 감정을 일으키는 데에 종교를 사용하였고, 그 결과로 군중이 모여들게 되었다. 성읍 전체가 온통 혼란에 빠졌는데, 이러한 상황은 마귀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25,000명 가량이나 앉을 수 있는 거대한 야외극장으로 달려갔다. 지혜롭게 조처를 취하여 바울의 친구들은 그가 거기 들어가지 못하게 했는데,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할지도 모를 형세였었다. 그 도시의 서기장이 군중을 조용히 시키고, 이들이 법을 어길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여 모든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 보냈다.
사단은 에베소에 교회가 강력하게 세워지는 것을 막는 데 고심했다. 이 도시는 여러 해 동안 사단의 근거지가 되어 왔고 미신과 우상과 마술이 성행하였다. 마귀의 활동이 에베소를 장악했으나 하나님의 영이 이제 일을 개시하셨다. 바울이 이 열 두사람들의 얄팍한 고백을 간파하지 못하고 이들의 간증 위에 지교회를 세우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역은 실패했을 것이다! 이 유대인들이 바울의 기적들을 흉내낼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군중들이 바울과 그 일행을 데리고 가서 감금하거나 죽였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그 놀라운 에베소서를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단은 에베소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그 곳에 한 교회를 세우셨다. 에베소서를 읽어 보면 그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 중에서 가장 영적인 교회였던 것 같다. 이 놀라운 서신은 교회에 대한 진리를 분명하게 요약하고 있으며, 사단이 원치 않았던 점이 바로 이것이다.
사단은 여전히 경험이 부족한 거짓 신자와 흉내내는 자들과, 노골적인 반대의 세 가지 방법으로 주님의 사역을 방해한다.
행 19:1-
▣ 부가적 연구 사항-사도행전 19장 1-7-
이 구절에는 몇 가지 의문점들이 있는데, 여기 간단하게 정리하여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열 두사람은 구원을 받았는가?
1. 이 열 두사람은 구원을 받았는가?
여러 가지 나타난 점으로 볼 때 이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 성경에 나오는 “제자“란 말은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들이 믿는 것으로 추정했었지만(2절),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이 바른 멧세지를 믿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느 시대에 사는 사람이나 똑같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가 오늘날 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었던 것은 아니다. 노아는 앞으로 심판이 닥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풍성한 씨의 약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아담은 미래에 오실 씨의 약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오늘날 은혜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이러한 약속들을 믿어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복음을 믿는 것뿐이다.
열 두 사람들은 요한의 사역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후에 아볼로를 통하여 세례(침례)요한의 멧세지를 들었는데, 그 사이에 갈보리와 부활의 사건이 일어났었다. 요한의 멧세지와 세례(침례)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요한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지적해 보이는 것이었으며, 이제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므로 요한의 사역은 끝이 난 것이다. “단순한 믿음“은 사람이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전부이다. 하지만 올바른 멧세지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들은 왜 성령에 대해 무지했는가?
2. 이들은 왜 성령에 대해 무지했는가?
성령이 계시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세례(침례)요한 자신이 성령이 오실 것임을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성령이 이미 오셔서 은혜의 시대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영적인 지식이 빈약했던 아볼로에게서 멧세지를 들었다. 아볼로는 갈보리와 오순절이 있기 전에 요한의 멧세지를 믿고 회심했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8장 24-28절에서 그가 다시 세례(침례)를 받았다는 말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서는 오순절 후에 세례(침례)를 다시 받은 사람은 아무도없다. 왜냐하면 이들의 믿음과 세례(침례)는 제 때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볼로는 성령이 오셨음을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지식을 전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정도 만큼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을 뿐이다.
바울은 왜 이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침례)를 베풀었는가?
3. 바울은 왜 이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침례)를 베풀었는가?
세례(침례)가 이 시대를 위한 명령이기 때문이라고 답을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세례(침례)는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그리스도가 교회에게 주신 사명 중의 일부이다. 3절에 나오는 질문으로 보아 바울은 이들이 어떤 종류의 세례(침례)를 경험했다고 추정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만일 세례(침례)가 이 시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바울은 결코 이 질문을 했을 리가 없으며 이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주지는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가지고 간 곳이면 어디나 마태복음 28장에서 주어진 그리스도의 지시대로 복음을 전하고, 세례(침례)를 주며, 지교회를 조직하고, 말씀을 가르쳤다. 바울이 직접 세례(침례)를 주는 것을 일삼았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특별한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고전 1:17). 오늘날 전도자로서 세례(침례)를 주는 사람은 몇 안된다. 사실상, 신약 성경은 바울이 최소한 20명에게 세례(침례)를 베풀었음을 시사한다.
-사도행전 16장 15절/ 루디아와 그녀의 집(최소한 2명)
-사도행전 16장 30-33절/ 간수와 그의 집(최소한 2명)
-사도행전 19장 1-7절/ 열 두제자들
-고린도전서 1장 14-16절/ 그리스보, 가이오, 스데바나의 집(최소한 2명)
“집“이라고 할 때에는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인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러한 명백한 사실들은 바울이 세례(침례)를 행했고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입증하며, 바울이 직접 세례를 베푼 것도 20명 이상에 달한다. 바울은 몸된 교회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사자(使者)였다. 만일 세례(침례)가 이 시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바울은 그것을 알고 세례(침례)베푸는 것을 거절했을 것이다."
이들은 왜 믿을 때에 성령을 받지 못하였는가?
4. 이들은 왜 믿을 때에 성령을 받지 못하였는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 형태는 다음과 같다.
- 사도행전 1-7장/ 유대인들이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2:38).
- 사도행전 8-9장/ 사마리아인들과 바울이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았다(8:17/9:17)
- 사도행전 10장/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다(10:44-48).이것은 오늘날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형식으로서, 말씀을 듣고, 믿고, 성령의 세례를 받고 물세례(침례)를 받는다.
에베소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왜 통상적인 방법에서 이탈하여, 이 열 두 사람에게 안수함으로써 성령이 임하게 하셨는지의 이유를 잘 이해할 수있다. 에베소는 복음 전파의 큰 중심지가 되어 복음을 주위의 각 도에 전해야 했다. 바울이 이 도시에 3년을 머물렀다는 사실은 이 도시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에베소는 귀신 숭배와 사단의 활동의 본거지였으므로 사단은 신약 교회의 설립을 막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에베소 교회는 근본적으로는 이방인의 교회였다. 바울은 유대인이었으며 처음부터 자기의 사도권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성령을 전달하는 특권을 주셔서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권위를 입증하셨으며,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제자들과 동등됨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한 걸음 진전시키시며 새로운 본거지를 설립하실 때는 반드시 특별한 기적으로써 그 사역을 인준하셨음을 명심하자.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옮기워졌을 때에 증거가 되는 기적들과 방언, 안수하는 일 등이 있었다(행 8:5-17). 사마리아에서 사단은 마술사를 통하여 이 일을 방해하려 하였음에 주목하자.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이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을 때에는 하늘에서 빛이 비취었고 음성이 들렸으며 안수를 받았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질 때에는 방언을 하여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이제 복음이 사단의 조정 아래 있는 대도시인 에베소로 이동해가자. 하나님께서는 다시 “특별한 기적들“을 통하여 그의 사역과 사역자들을 입증하셨다(19:11 참조). 또다시 사단은 가짜 일군들을 통해 반대하려고 시도하지만 성령은 그들이 가짜임을 입증하신다.
안수함으로 성령을 부여하는 것은 사도의 권한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오늘날 사도가 없는 까닭은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안수하는 것은 이제는 더이상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하나님은 그러한 일들을 이를 적당한 사람들을 보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설립하고 인도할 신용장을 주신 것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일은 아볼로에 대해서인데, 이 유능한 설교가는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갔으며(19:1) 베드로, 바울과 더불어 교회의 한 분파를 이루었다(고전 3장). 바울은 고린도에 교회를 설립하여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아볼로가 이 기초 위에 건물을 세웠다. 얼마 안 있어 교회가 셋으로 나누어졌다. 한 그룹은 창설자인 바울을 따랐고, 다른 이들은 양육자인 아볼로를 따랐으며, 세번째 그룹은 “참된 사도권“을 따르기를 원했으므로 베드로를 택했다 ! 이 지도자들이 분당을 일으키거나 또한 그렇게 되도록 자극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결과가 빚어졌다. 원인 중의 일부는 교회가 바울의 사도적 사명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데 있었다(고전 9:1-).
이제는 이러한 형편이 에베소로 이동한다. 이곳에는 아볼로의 회심자들인 열두 제자가 있어 에베소 교회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이 믿을 때에 사도행전 10장에서와 같이 성령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 그들은 언제나 아볼로를 지도자로 여길 것이며 바울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므로, 이에 따라 에베소의 사역은 처음부터 분열을 초래했을 것이며, 그들을 가르치고 세례(침례)를 준 것은 아볼로였으므로 바울의 지도권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사용하셔서 이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하셨으며, 이 열 두사람을 통하여 에베소에 위대한 교회를 세우셨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내는 장엄한 서신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에베소서에는 몸과 머리에 관한 영광스러운 진리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역사하시지 않았다면 사단은 또한번의 승리를 획득했을 것이다 !
사도행전 1-7장에서 왕국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제시되었을 때에는 2장 38절의 세례(침례)가 유효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유효하지 못하다. 사도행전 2장 38절의 형식에 따라 세례(침례)를 받은 사람은 성경적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며,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 따라 바르게 세례(침례)를 받아야 한다. 요한의 세례(침례)는 성령의 오실 것을 예상하여 선행(先行)된 세례(침례)였으며, 오늘날의 세례(침례)는 성령의 세례가 우리의 생활가운데 실재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행 20:1-38
▣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사도행전 20장-
1. 바울과 지교회(20:1-12)
19장의 폭동이 있은 직후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19:21) 마게도냐로 향했다. 그는 드로가에서(지도 참조) 디도와 만나 고린도교회의 상황에 대한 보고를 직접 듣고자 했다. 그는 디도를 그곳에 파견하여 몇 가지 문제점들을 교정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했었다(고후 7:13-15/고후 12:17-18).
디도를 만나지 못하자, 바울은 교회들을 심방하며 마게도냐로 진행해 갔으며 거기서 동역자를 만났다(고후 2:12-13). 고린도로부터의 보고는 바울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헬라(그리이스)에서 3개월을 보내고는 대부분 고린도에서 보냈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였다. 전에 고린도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던 유대인들의 반대가 다시 나타나자(행 18:12) 바울은 수리아로 향하는 대신 마게도냐로 떠났다. 이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과 동행했는데 이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는 구제 헌금에 기여한 교회들의 대표단이었다. 누가는 빌립보에서 이들과 합세했으며(6절의 “우리“라는 말에 유의하라), 7일간 드로아에 머물렀다.
여기서 우리는 지교회를 정착시키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신자들은 그 주간의 첫날인 일요일에 함께 모이는 관습이 있었으며 바울은 이들을 만나보고자 7일을 머물렀을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과 주님의 날을 우선으로 여겼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할 좋은 본보기이다.
여기서 누가는 신자들의 저녁 집회를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하루종일 설교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습은 참으로 기쁨이 아닐 수 없다 ! 그런데, 잠들어 난간에서 떨어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다. 횃불을 많이 켜 두어 방안공기를 따뜻하게 했을 것이므로 잠들기에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의사인 누가는 그 사람이 죽었다고 보고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바울은 생명이 그안에 있다고 알렸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켰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신자들과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었다(설교한 것이 아님-11절). 아마도 집회가 끝난 다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출항하였다.이 기적에 무슨 영적인 의미가 있는가? 한 가지는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린 것과 비슷하다는 점이다(행 9:36-43). 우리는 앞서 바울과 베드로가 비슷한 기적들을 일으킴으로 바울의 사도권이 베드로의 사도권과 같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임을 보여 준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도르가는 그녀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추천을 받은 여인이며, 그녀의 부활로 인하여 다른 이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반면에 유두(“행운“이라는 뜻)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는 못했었으나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을 회복하였다. 그는 떨어져(모든 사람은 죄에 빠졌다) 죽었으며(모든 사람들이 죄 가운데 죽었다), 오직 은혜로만 생명을 받았다."
행 20:13-38
2. 바울과 지교회의 목회자들(20:13-38)
바울은 앗소로부터 20마일(32km) 떨어진 드로아까지 혼자서 가기로 결심하였다. 아마도 그는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일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를 사랑했지만(4절) 하나님과만 함께 있어 그의 뜻을 구해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운동을 하는 것은 몸에도 좋았다.
밀레도에서 그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사람을 보냈다. 신약에서는 목회자가 한 명이 아닌 복수로 나와 있음을 기억하자. 특히 에베소 교회와 같이 교인이 많은 곳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들은 장로들과 감독들(28절)이라고 불리워졌다. 에베소 목회자들에게 한 이 연설은 지교회에서의 바울이 어떤 류의 목회자였는지를 나타낸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의 특별한 연설이 세 번 나오는 것에 주목하자.
- 유대인들에게 /13장 16-41절
- 이방인들에게 /17장 22-34절
- 교회에게 / 20장 17절 이하(고전 10:31)
바울의 과거 사역(18-21절)-바울은 비밀리에 무슨 일을 한 적은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멧세지와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을 섬긴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겼다. 그는 겸손한 지도자였으며, 교만한 명령자가 아니었다(벧전 5장에서 베드로의 칭찬 참조). 그는 말씀의 씨에 눈물로 물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19, 31, 37절). 바울은 전 성경 전체를 공적으로, 그리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다니며 전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높였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목회자를 위한 하나의 귀감이다. 얼마만큼의 교회들이 그들의 목회자가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공식적으로 축호 방문을 하며 사역하는 데 시간을 쓰게 하고 있는가?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무슨 위원회다 협의회 모임이다 교파의 총회다 하여, 좋기는 하지만 최선이 되지 못하는 일들로목회자들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
바울의 현재의 부담감(22-24절)-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려는 생각으로 사로잡혀 있었다(성령에 사로잡힌 것이 아님). 이 문제에 있어서 바울은 과연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에 따르고 있는 것인지 심각한 의심을 일으키게 한다. 23절은 바울이 이 도시 저 도시로 다닐 때에, 성령께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게 될 것에 대해 말씀하셨음을 시사하는데, 이는 지교회의 선지자들을 통해서인 듯하다. 21장 10-14절에서, 그는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는 간곡한 경고를 받으며, 21장 4절에서도 이러한 만류가 나온다.
수 년 전 바울이 회심한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전도하지 말 것을 그에게 말씀하셨다(22:18-). 그러나, 자기 백성을 향한 그의 사랑은 이러한 경고를 무시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그를 강권하였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에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부담감을 기각시키고, 죄수로서 로마로 데리고 가셨다(23:11 참조).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24절).
미래의 위험에 대한 바울의 경고(25-35절)-바울이 자신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바울은 교회와, 교회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목회자들에게 먼저 자신들이 경성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만일 그들이 개인적인 영적 행실에서 실패한다면 교회 전체가 고난을 받을 것이다. 후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와 같은 경고를 반복하였다(딤전 4:16).
다음으로 그는 경성하여 교회를 돌보라고 경고한다. 감독자로서 이들에게는 양무리를 인도하고, 먹이고, 영적인 공격들로부터 보호할 책임이 있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는 얼마나 귀중한가 ! 자신의 피로써 교회를 사셨다. 바울은 밖에서 공격하는 늑대들(29절)과 안에서 일어나는 거짓 선생들(30절)로부터의 두 가지 위험을 경고한다. 교회사에서 이 두 가지 일들이 모두 발생했었다.
바울은 자산을 목회자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로 삼는다. 그는 하나님께 그들을 추천하며(기도), 말씀을 추천한다(전도와 가르침). 왜냐하면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만이 지교회를 육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행 6:4).
바울은 그들에게 비겁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바울은 자신의 손으로 일하였으나, 이것이 목회자가 따라야 할 본일 필요는 없다고 지적한다(고전 9장 참조). 그러나, 그가 표현한 비이기적인 마음가짐은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모방해도 좋을 것이다.
바울은 복음서에도 전혀 기록되지 않은 그리스도의 한 가지 복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즉,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종들은 섬김을 받을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한다.
바울의 마지막 축복(36-38절)-이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이 위대한 사도가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동안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바울을 더이상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울었다. 하나님의 종들 사이에, 그리고 이 종들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결속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축복을 보내실 수가 있다 !
바울은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전할 헌금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외 마음에는 자기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전도하려는 불타는 욕망이 있었다. 전도자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엡 3:1)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