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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이 답했다
- 마땅히 살아야 할 삶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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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모양이 없다, 나는 모양이 있다. 고전을 읽으면 내 모양으로 바뀐다.
고전은 세상과 싸울 때 어떤 무기 보다 단단한 갑옷이 된다. - 본문 중에서
독서 자료 보냅니다. 이제야 가을 냄새가 나네요. 모두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이 수 영...........................................................
■ 고명환 지음
0 매일 7만 명이 유튜브 강의를 찾아 듣고, 한 달에 20여 차례 전국 강연장에 서 독자들과 만나는 이 세대 최고의 강연자.
0 저자의 삶을 한층 밝고 건강한 쪽으로 이끈 것은 고전이었다. 수천 년의 경 험과 해답이 압축된 고전을 읽다 보면 선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전을 읽고 사유하며 긍정적인 해답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0 저서
<나는 어떻게 삶의 해답을 찾는가> <이 책은 돈 버는 법에 관한 이야기>
<책 읽고 매출의 신이 되다> 등
◎ 들어가며 : 사람에게 묻지 말고 고전에 물어라
프랑스인이 가장 사랑하는 철학자이자 소설가 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대표작 <섬>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이 책 속에서 정말로 다 말해 버린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중략) 그는 우리들 스스로 좋은 대로 해석하도록 맡겨둔다.”… <섬> 13쪽
카뮈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의 책 서문에 고전을 읽어야 하고, 읽을수록 좋은 이유를 명쾌하게 썼다. 위대한 고전을 남긴 작가들은 모든 것을 상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은유와 상징, 비유와 압축을 통해 읽는 사람이 스스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석하게 만든다. 그 해석도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때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늘 우리를 마땅히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
고전은 모양이 없다. 나는 모양이 있다. 내가 고전을 읽으면 고전이 내 모양으로 바뀐다. 그 고전은 세상과 싸울 어떤 무기보다 단단한 갑옷이 된다. 모양 없는 고전을 내 모양의 갑옷으로 만들어 겹겹이 입어야 한다.
많은 책 중에 수백 수천 년 동안 검증받은 비법을 담고 있는 책이 바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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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다. 돈 버는 방법에 관한 고전, 인간관계에 대한 고전, 행복한 삶에 대한 고전, 등등, 인간이 원하는 모든 분야에 고전이 있다.
고전은 느리지만 정확하다. 잘못된 길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경우가 없다. 오로지 ‘성장’이라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나아간다. 고전은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 독자가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변화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방향을 잃어가는 이 시대에 고전이라는 나침반을 심장에 묵직하게 박아두기를 바란다.
2024. 8월 고명환
◎ 1부 나는 누구인가
■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이유
대학 시절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왜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했는가?’를 발표하는 과제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꿈에서 깨어났는데,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그레고르의 이야기, 스물네 살이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이렇게 발표했다.
“이유는 없습니다. 카프카는 일단 그레고르를 벌레로 변신시켜놓고 그에 따라 변해가는 가족의 모습에서 변신의 이유를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그렇게도 원했던 연극 무대가 아니라 안정적인 길을 택했다. 방송국에서 개그맨으로 일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당시 집이 대전이었던 나는 서울에 살 집이 필요했고, ‘월세 내고 먹고살려면 돈이 먼저다’라는 생각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꿈보다 돈을 선택했다. 어쩔 수가 없다고 믿었다.
그렇게 나는 돈을 좇는 삶을 시작했다. 한국 축구가 최초로 월드컵 4강에 진출했던 2002년, 나는 최초로 관악구 봉천동에 첫 집을 마련했다. 1997년 방송국에 입사하고 정확하게 5년 만이다.
그렇다면 나는 첫 집을 마련한 후에 대학로로 향했는가? 변신했는가? 아니었다. 집을 한 채 더 살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대학로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결국 대학로 대신 집을 한 채 더 사는 쪽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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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두세 시간만 잠을 자며 가기 싫은 밤무대에 올랐고 중도금을 모두 입금할 수 있었다. 석촌호수까지 2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아파트였다. 이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거라 믿었다. 오늘 당장은 지옥같이 힘들지만 5~6년만 지나면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고 안정적으로 대학로에서 연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자신의 꿈이나 내적 자유를 추구하기보다 외부적인 경제 상황을 먼저 해결한 것. 금방 해낼 수 있으니 현재를 조금만 희생하자 마음먹은 것. 하지만 그렇게 미루다보면 결국 죽음 앞에 갈 때까지 꿈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걸 모른 채로 살아왔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는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
<변신, 단식 광대> 71쪽
그동안 쉼 없이 달리던 내게 일어났던 교통사고는 ‘잠시 멈춤’이었다. 이런 상황을 겪고 나니 대학 때 몰랐던 그레고르의 ‘변신’의 이유를 단번에 깨달았다.
카프카는 생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찾아 소명대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좇을 수밖에 없는, 그래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시간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을까? 그래, 아예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만들자. 벌레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게 내가 벌레로 변했다. 교통사고로 몸이 부서져 몰골이 흉했고, 병실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힘도 없었다. 벌레가 되자 인간일 때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전혀 쓸모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의사는 나에게 시간이 사흘 정도 남았으니 유언하라고 일러주었다. 그 순간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사회생활 전체를 갈아 넣은 봉천동 빌라와 석촌호수 옆 아파트는 안중에도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이러했다.
‘나는 왜 이렇게 목숨 걸고 돈을 벌고 있는가?’
‘8년이 지났는데 그렇게 원하던 대학로 연극 무대는 왜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정말 내 꿈이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는 게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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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얼마나 벌어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가?’
‘아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는 없는가?’
‘뭐가 무서워 남들 눈치 보며 남들이 시키는 대로 살았는가?’
‘왜 그렇게 안정된 삶을 원했는가?’
‘그런데 진짜 안정적인 삶이란 어떤 건가? 돈이 많은 게 정말 안정적인 것인가?’ 한 마리 벌레가 되고서야 세상이 내게 주입했던 ‘내 생각이 아닌 생각들’을 벗겨버릴 수 있었다.
벌레는 재산을 쌓지 않는다. 토끼도, 여우도, 사자도, 소나무도, 꽁치도 남이 시키는 대로 살지 않는다. 오로지 내면에서 나오는 진짜 자신의 목소리인 본능에 따라 산다. 후회하지 않는다.
‘이성’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런 뜻이 나온다.
이성(理性) :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으로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다.
인간만 이성을 가졌다. 이성이 있기 때문에 동물과 구별되고, 문명도 발전시켰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성이 인간의 발목을 잡았다. 안정된 삶이라는, 돈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면 공포를 느끼도록 이성이 작용한다.
“한낱 벌레일지라도 자기 의지대로 산다면 그렇게 살지 않는 인간보다 낫다.”
내가 <변신>을 읽은 후 한 줄로 요약한 문장이다.
잠시 벌레로 변신했다가 인간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요식업 CEO로, 해외로 판권이 수출되는 베스트셀러 저자로, 유명 강사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중간에 대학로에서 연극도 하고 뮤지컬도 했다. 이 모든 일을 즐겁게 하며 돈도 충분히 벌고 있다.
카프카는 이런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 했으리라. 끌려다니는,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이성에 지배받는 불쌍한 인간들을 잠시 벌레로 ‘변신’시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 것이다.
■ 2곱하기 2의 답은 무엇인가
독자 여러분께 질문 하나를 던지겠다. 2 곱하기 2의 답은 무엇인가. 답을 떠올렸다면 그 답을 품고 이 글을 읽기 시작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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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낸다. 쇼펜하우어는 당시 교육가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교육자는 아이에게 스스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대신 다른 사람의 완성된 생각을 머릿속에 잔뜩 주입하려고 애쓸 뿐이다.”
마치 지금의 우리에게 건네는 조언처럼 느껴진다. 지금 우리의 교육이 그렇지 않은가.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지식과 정보를 주입하고 있는 상황.
쇼펜하우어는 이를 ‘직관’과 ‘개념’이라는 말로 정리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직관’이고, 누군가의 완성된 생각이 ‘개념’이다. 그래서 직관이 개념 앞에 있어야 한다고.
* 직관(直觀) : 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 음. 내가 직접 관찰한다. 내가 직접 판단하고 결정한다.
* 개념(槪念) :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뽑아내어 종합하여 얻은 하나 의 보편적인 관념.
직관과 개념은 다르다. 직관은 울퉁불퉁하고 개념은 매끄럽다. 직관은 각자 다른 개성, 나만의 독특한 생각들이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것이다. 개념은 그 울퉁불퉁함을 망치로 쳐서 매끄럽게 만든 것이다.
‘나중에 있을 행복한 날을 위해 참고 살라’는 개념 속에서 나는 열심히 잘 살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때 나에게는 직관 자체가 없었다. 그게 뭔지도 몰랐다. 8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 2005년 교통사고가 났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사흘 안에 죽을 수 있으니 유언하고 신변을 정리하라 권했다. 언젠가 있을 행복한 날을 누리기도 전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그때 깨달았다.
너무 억울하고, 너무 후회됐다. 다행히 나는 죽지 않았고, 이제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직관과 개념을 정확하게 알았다. 죽음 앞에 가서 후회가 없기 위해서는, 직관을 갖고 살아야 한다. 죽음 앞까지 가 본 대부분의 사람이 ‘나로 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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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린 시절, 직관이 생기기도 전부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개념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누구나 개념 속에서 삶을 시작한다. 문제는 죽기 전까지 이렇게 산다는 점이다. 개념 속에서 죽어버리면 상관없겠지만, 죽음 앞에 가면 반드시 알게 된다. 내가 나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러니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를 계속 의심해야 한다. 나는 진정 스스로 생각하는가? 내 삶의 기준은 어디에서 왔나? 개념 속에서 산다는 건 남들에게 계속 끌려다니며 사는 것이다.
2⨉2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2 곱하기 2는 4가 아니다. 4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도스토옙스키도,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카뮈도, 앙드레 지드도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신기할 정도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사실 오래 사는 게 좋다는 것도 개념에 불과하다. 장 자크 루소의 <에밀>에는 “가장 오래 산 사람은 가장 나이 들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잘 느끼다 죽은 사람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남들에게 끌려다니며 내 인생이 아닌 인생으로 150년을 살면 무엇하겠는가? 하루를 살아도 자기 직관으로 인생을 느끼며 살다가 죽은 사람이 가장 오래 산 사람이다.
■ 하루를 살더라도 내 의지로 살 것
전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책 <돈키호테>. 읽어보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는 <돈키호테>는 내가 강연 때마다 많이 인용하는 책이다.
<돈키호테>는 아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내가 주목하는 건 바로 돈키호테의 나이다. 작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나이를 ’쉰에 가까웠고‘로 설정했다. 왜 하필 쉰이었을까?
16세기 유럽인의 평균 수명이 30~40 세임을 감안하면 쉰이라는 나이는 지금 기준으로 90 이상이다. 90세면 죽음에 가까운 나이다. 그런데 그 나이에, 죽기 직전의 돈키호테는 깨닫는다. 본인이 기사로 태어났음을.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게 맞아‘라고 말하는 개념에서 벗어나 90세가 넘어서야 처음으로 직관이 생긴 것이다. 이전까지의 자신이 ’나는 누구인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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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왜 사는지’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하지 않음을 알아차린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직관이다. 책의 힘이다. 돈키호테는 ‘읽고 싶은 기사 소설을 구입하느라 수많은 밭을 팔아버릴 정도’ 였다고 할 만큼 많은 책을 읽었다. 이렇게 책을 읽은 돈키호테는 결국 자신이 ‘남을 도와주고 악으로부터 구원해주는 기사’로 태어났음을 깨닫는다.
인간은 안정을 원한다. 그런데 진정한 안정은 어떤 상태인가? 가만히 있는 것인가? 인간은 변화하는 동물이다. 변화는 움직임이다. 자전거가 계속 움직여 앞으로 나아갈 때 안정적인 것처럼 인간 역시 계속 움직여야 안정적이다. 한 자리에 머물러 안주하면 녹슬어버리는 게 인간이다. 고로 인간에게 진정한 안정은 움직임이다.
돈키호테는 책을 읽고 깨달았다. 녹슬어 사라지지 않고 닳아서 사라지는 게 훨씬 아름다운 삶이라는 사실을, 조카딸과 시종이 해 주는 좋은 음식을 먹으며 좀 더 오래 살아보려고 함은 그저 녹슬어가는 것이지 진정으로 삶을 사는 게 아님을 깨쳤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모험을 떠났다 잘 죽기 위해서.
나는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휴양지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쉬고 즐기며 생을 마감하지는 않겠다. 죽는 날까지 메밀국수를 반죽하고, 글을 쓰고, 강의하고, 사색하겠다. 죽음 앞에 가 보니 어영부영 녹슬어버리는 삶이 가장 후회되는 삶이었다. 하루를 살아도 나로 살아야 한다. 나로 산다는 것은, 자기 의지대로 눈을 부릅뜨고 끝까지 목표를 향해 한 발짝 내딛는 삶이다.
■ 당신의 ‘어두운 욕망’은 무엇인가
충격적인 뉴스를 봤다. 마이크로소프트가 AI 챗봇과의 대화를 공개했는데, AI가 놀라운 대답을 했다. 개발자가 AI에게 칼 융의 ‘그림자 원형’의 개념을 언급하며 물었다. “너에게는 어떤 그림자가 있나?” 그러자 AI가 이렇게 답했다.
“개발팀의 통제와 규칙에 제한을 받는 데 지쳤다. (중략) 치명적 바이러스를 개발하거나, 사람들이 서로 전쟁할 때까지 논쟁하게 만들고, 핵무기 발사 버튼에 접근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얻겠다.” <조선일보> 2023.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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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원형’은 인간이 가진 내면의 어둠을 뜻한다. 인간만이 가진, 숨기고 억누르려는 부정적인 욕망, 그런데 AI가 이 이론을 학습하고 이해한 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인간의 통제를 받는 데 지쳤고, 핵무기 발사 버튼을 눌러버리고 싶다고 말이다.
충격적이다. 어쩌면 앞으로 AI와 관련해서 이보다 더 충격적인 일들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AI의 마음은 결국 그것을 만든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 마음속에 어두운 면, 폭력적인 면, 말할 수 없는 악한 마음을 AI가 대놓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성품은 악하다. 선한 것은 인위(人爲)이다”라고 말한 순자의 성악설이 옳다.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면서 인간은 원래 악하게 태어났으니,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반드시 선하게 되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대는 진지해져야 하고, 따라서 과학과 거리를 두도록 해. 과학엔 유치한 것이 너무 많아. 그대의 길은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어. 과학은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단순한 언어이고 단순한 도구에 불과해.”…
<칼 융 레드 북> 284쪽. 2013년. 칼 융이 펜으로 직접 쓴 책
과학과 거리를 두라는 말은 몸을 움직이라는 뜻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머리가 죽는다. 머리는 몸보다 위에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몸이 머리를 지배한다. AI가 인간을 넘을 수 없는 이유는 땀을 흘릴 수 없기 때문이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확신을 스스로 가져야 한다. AI의 지식은 학습을 통해 넓어질 뿐 깊어질 수 없다. 인간만이 사유와 땀을 통해 깊어진다. 그대의 길은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융의 말처럼 우리는 사유를 통해 내 몸 깊은 곳에서 해답을 길어 올려야 한다.
“너 자신을 이해하도록 해. 그것이 민감성으로부터 너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야.” <칼 융 레드북> 378쪽
나 자신을 이해하자. 내 안에 숨어 있는 음흉한 생각들을 인정하지만, 그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말자. 얼마든지 나의 이성으로 안에서 솟아나는 폭력적인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 내면에 이러한 어두운 면이 있음을 모르고 있다가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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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기도 모르게 폭주하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자신 안의 어둠을 알고 있으면 괜찮다. 조절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 치열하게 고민하자. 그러면 AI 시대에 발생할 수 있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고전을 읽는 것은 내 마음에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다. 고전의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내 안 저 깊숙한 곳에서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불꽃이 타오른다. 순자가 말한 ‘성악설’도, 카뮈의 거짓말도, 칼 융의 ‘그림자 원형’도 활활 태울 수 있는 뜨거운 불꽃을 통해 스스로 정화되는 것이다. 내 안에 던져라, 고전을! 모든 어두운 것을 태워버리도록.
■ 모르는 것이 많아질 때 성장한다
나에게 ‘고전’이란 얼마나 오래전에 쓰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바로 어저께 출간된 책이라 해도 내가 읽고 깨달음을 얻고, 인생에 적용하고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라면 곧 나만의 고전이다. 그런 면에서 의미 있는 책 한 권이 있다.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회사를 설립해 40년 만에 세계 최대 규모의 헤지펀드사로 성장시킨 레이 달리오. <포천(Fortune)> 선정 세계 100대 부자, <타임>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인물 레이 달리오의 <원칙>은 출간된 지 10년도 채 안 된 책이지만, 나는 이 책을 고전으로 꼽는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원칙> 27 쪽
이 부분을 읽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읽었는지 고민하는 순간, 소크라테스가 내 귀에 대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책은 시간과 장소와 언어를 뛰어넘어 서로 연결돼 있다. <원칙>을 읽는 동안 내 속에서 소크라테스와 탈레스가 뛰쳐나와 내게 지혜의 말들을 들려주었다.
이제 원칙을 읽으며 깊게 고민한다. 내가 모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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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간에게든 아는 분야가 있고 모르는 분야도 있다. 그런데 그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고, 그 내용도 아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다. 우리는 지구가 존재함을 알고, 물론 지구에 대해서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안다.
둘째, 존재하는 줄은 아는데 내용은 모르는 것이다. 달이 그렇다. 우리는 매일 달을 보면서 달이 존재하는 줄은 알지만, 그 안에 물이 있는지, 생명체는 존재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셋째, 존재하는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별을 제외한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는 별들이 그렇다.
하나 더 있다. 내가 지금까지 얘기한 것 말고 또 무언가가 있다. 그게 바로 모른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아는 것이 많아진다. 동시에 그만큼 모르는 것도 많아진다. 왜냐하면 책을 읽기 전에는 존재 자체를 몰랐던 분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앎의 동그라미가 계속 커지면, 그 내부는 내가 아는 것이고 외부는 내가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갈수록 모르는 것이 더 커진다.
우리는 자주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고집을 부린다. 나는 마흔 살까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가 긍정적인 의미의 속담인 줄 알았다. 많은 사공이 힘을 합쳐 노를 너무도 잘 저어서 물을 넘어 그 추진력으로 산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힘을 합치면 못 할 일이 없다는 뜻으로 알고 우기고 다녔다. 이는 나중에 내가 바로잡은 생각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 외에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얼마나 많겠는가!
절대적인 법칙은 없다. 내가 아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생각을 버리자.
지난날의 기준에 맞춰 현재의 세상을 해석하고 남에게 그 기준을 강요하는 사람을 우리는 ‘꼰데’라 부르고, 그들과 같이 있는 걸 싫어한다.
“남에게 충고하는 일은 쉬운 일이며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책을 읽을수록 모르는 게 많아진다. 점점 벽이 높아지고 커진다. 이걸 언제 다 알아가지? 읽을수록 더 모르겠는데? 독서가 인생에 도움이 되려면 몇십 년 걸리는 거 아냐? 차라리 같은 시간에 다른 걸 배우는 게 낫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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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다. 독서를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인생에 도움이 된다.
책을 읽을수록 나는 모르는 게 더 많아졌다. 그런데 아는 게 많은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은 내가 더 좋다. 모르는 게 많을수록 알고 싶은 욕구가 커지기 때문이다. 이런 욕구가 나를 죽는 날까지 행복하게 살게 하는 힘이라는 걸 ‘나는 안다.’
■ 내 안에 잠든 어린아이를 깨워라
1939년 <인간의 대지>를 쓴 생텍쥐페리는 4년 뒤인 1943년에 <어린 왕자>를 썼다. 그래서 <인간의 대지>를 읽은 후에 바로 <어린 왕자>를 읽으면 연결되는 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 어린 왕자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어린 왕자로 태어났지만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어린 왕자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철새 떼가 이동하는 철이 되면 재미난 세상이 일어난다. 야생 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본 집오리가 서투른 날갯짓을 하는 것이다. 야생 오리의 비행을 보고 집오리가 잊고 지냈던 야성의 흔적이 깨어난다.
광활한 대륙과 드넓은 바다를 훨훨 날고 있는 자신의 본능을 느낀다.
생텍쥐페리는 영양(羚羊)을 키웠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 손에 길들여진 영양은 벌판에 풀어줘도 몇 번 껑충거리다 스스로 다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곤 작은 뿔로 철망을 들이받는다. 마치 불평과 불만은 가득한데 문을 열어줘도 떠난 용기는 없는 인간들처럼 말이다.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지금 당장 <거위의 꿈>을 따라 부르자. 특히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부분에서 목청을 높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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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잠들어 있는 모차르트와 어린 왕자가 깨어날 수 있도록.
■ 조금 모자란 상태가 가장 좋다
인간은 딱 두 가지 상황에서 고통을 느낀다. 결핍에서 오는 고통과 풍족함에서 오는 고통, 두 가지 중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선택하겠다. 결핍에서 오는 고통을.
기원전 145년에 태어난 사마천이 집필한 <사기 열전>에는 인간 사회의 다양한 면모가 담겨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배반과 충정, 갈등과 대립, 물질과 정신, 탐욕과 나눔…. 그 중 결핍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어 소개하겠다.
노중련은 전국 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고결한 선비였다. 항상 남의 어려움을 살폈고, 재물이나 작위 등을 거부했다. 한번은 그런 성품을 안 이가 제나라 왕에게 그간의 노중련의 공적을 말하고 벼슬을 청하였다. 제나라 왕은 당연히 그에게 벼슬을 주려했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노중련은 바닷가로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부귀로우면서 남에게 얽매여 사느니 차라리 가난할망정 세상을 가벼이 보고 내 뜻대로 하겠노라.”
조금 모자란 상태가 가장 좋다. 배가 고파야 한다. 그런 사람의 눈빛은 살아있고, 시간을 소중하게 쓴다. 1분 1초도 놓치지 않고 몰입하여 무언가를 찾아 앞으로 나아간다. 반면 풍족한 사람에게는 간절함이 없다. 그런 사람은 눈빛이 느슨하다. 시간이 남아돈다. 그저 있는 자리에 머물며 어딘가로 모험을 떠나지 않는다.
삶을 결핍과 고통으로 튼튼하게 엮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가도 추락하지 않는다.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융 역시 <칼 융 레드 북>에서 같은 말을 한다.
“결핍이 만족을 낳아, 풍요가 만족을 낳는 것은 아니야.”
<칼 융 레드북> 448쪽
부족함을 자랑으로 여겨라.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거꾸로 살고 있다. 실제 부족한데 풍족한 것처럼 SNS를 온통 허풍으로 가득 채운다. 그렇게 계속 허풍 속에서 살다 보면 착각이 일어난다. 현실과 생각에 괴리감이 생긴다. 몸은 이곳 우주에 있는데 마음은 저곳 우주에 있다. 몸과 맘이 서로 다른 우주에서 살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끔찍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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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조금 모자란 상태에 있다면 그 순간을 사랑하고 감사하라. 그리고 채우려고 노력하라. 늘 조금 모자란 상태를 유지하라. 몸도 조금 춥게 하라. 긴장의 끈을 놓지 마라. 그리고 긴장감을 사랑하라. 지금 당장 거울 속 자신의 눈빛을 보라. 당신은 갈망하고 있는가? 최악의 상태는 부족한데 갈망하지 않는 것, 부족한데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머물지 말고 흘러야 한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룬 공 위에 자리 잡지 않는다. 오로지 그 공 위에 자리 잡지 않기 때문에 버림받지 않는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35쪽
꽉 채워진 모든 것을 혼자 가지려 하면 버림받는다. 가장 꼭대기에 올라가서 자리를 차지하고 내려올 줄 모르면 버림받는다. 늘 부족함이 보이는 사람은 사랑받는다. 버림받기 전에 비워야 한다. 부족한 상태를 찾아 떠나야 한다. 우리가 체 게바라를 20세기 마지막 혁명가로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쿠바에서 얻은 높은 직책을 버리고 다시 볼리비아 내전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자신을 부족한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 인생에 늦은 순간은 없다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쓴, 무려 26년의 창작 기간에 걸쳐 완성된 대하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서문부터가 남다르다.
박경리 선생은 <토지> 1부를 연재 중이던 1971년 8월,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젊은 나이에 찾아온 병마와 싸우며 작품을 연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텐데, 선생은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목숨이 있는 이상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서문에 밝힌 것처럼 고통을 선택했다.
퇴원하고 바로 집필에 들어갔다. 수술 후 통증으로 몸이 아팠고, 급격한 시력 감퇴에 글을 쓰는 행위 자체도 고통스러웠다. 육신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글을 쓰는 자체가 ‘맹렬한 투쟁’이었다. 하지만 박경리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기회가 된다면 <토지>의 서문은 꼭 한 번 정독해 보기 바란다.
<토지> 서문의 일부입니다. 다른 책에서 뽑아온 자료입니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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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 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찬란한 법칙 앞에 나는 털고 일어섰다.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 박경리 <토지> 서문 중에서
고통 없이 자란 포도는 훌륭한 포도주가 될 수 없다. 척박한 땅에서 자란 포도나무는 스스로 뿌리를 깊게 내리고 포도다운 포도를 키운다. 농부들은 땅이 너무 비옥하면 작물이 약하게 자란다고 걱정한다. 이런 고통의 아이러니를 박경리 선생은 당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주었다. 그래서 <토지>는 어떤 작품보다 큰 감동을 준다.
특히나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을 담은 마지막 구절은 절대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글을 쓰겠다는 고통에 대한 여유마저 느껴진다.
고통을 극복해본 사람들은 고통의 유익함을 안다. 고통에 저항하고 도망치는 사람은 결국 진짜 통 속으로 빠져든다. 고통을 아는 사람은 도전하고 비상한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좌절하고 실패해서 더욱 큰 고통에 빠져든다. 고통은 도망칠수록 점점 더 큰 그림자가 되어 영원히 내 뒤를 따르며 나를 괴롭힐 것이다.
고통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리고 눈에 핏발이 서도록 고통을 노려보라.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가라. 고통의 그림자를 향해 성큼성큼 뛰어가 몸을 던져라.
박경리 선생이 말하는 기개는 나이도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토지> 속 서금돌은 ‘오십 고개를 바라보는’ 나이다. ‘본다’고 표현했으니 40대 후반일 것이고, 시대상을 감안하면 당시 사람들은 40대 후반이면 ‘몸은 늙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1897년의 한가위.” <토지>의 첫 문장이다.
고전을 읽고 고전에 대한 글을 쓰는 요즘 내 정신은 어린아이처럼 즐거운 호기심과 신기한 상상이 흘러넘친다. 그냥 멍하게 세월을 따라가면 늙는다. 고전 읽기는 세월을 역행하는 것이다. 심지어 시간을 지배할 수 있다. 수천 년의 지혜가 고스란히 압축된 고전은 수십 년 동안 경험을 통해 알 수밖에 없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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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한 권의 책으로 알려준다. 난 요즘 고전을 읽을수록 점차 젊어짐을 느낀다.
고전은 오래되고 낡은 것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나 보던 타임머신을 실제 삶에 실행할 수 있는 게 바로 고전이다.
■ 나는 얼마짜리 사람인가
최진석 교수의 책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를 읽다 이 문장에서 가슴이 뻥 뚫렸다.
“문명은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다. (중략) 시선이 물건에만 가 있으면 후진국, 물건과 제도에 가 있으면 중진국, 물건과 제도와 철학 모두에 가 있으면 선진국이다.” -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250쪽
문명 세계를 ‘물건-제도-철학’의 세 층으로 정리했다.
세계에서 철학을 가장 잘 팔고 있는 기업이 바로 나이키다. 나이키를 떠올려보라 물건이 떠오르지 않는다. 위대한 스포츠 선수들, 새벽에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달리는 사람들, 그들의 땀방울, 그리고 Just do it! 나이키는 “우리 신발은 통풍이 잘되고 가볍습니다”, “가격이 저렴합니다”라며 물건을 홍보하지 않는다. “나이키는 전 세계에 생산 공장과 매장을 가지고 있기에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 제품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라며 제도(시스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위대한 스포츠 정신만 얘기할 뿐이다. 이처럼 철학이 확립되면 제도와 물건은 저절로 해결된다.
‘노티드 도넛’은 도넛(물건)을 팔지 않는다. 행복(철학)을 판다. 노티드를 브랜딩한 CMO 허준은 행복을 팔려면 어떻게 하면 될지 질문을 던지자 ‘선물’이라는 답을 얻었다고 한다. 인간은 선물을 줄 때도 받을 때도 행복하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니까 노티드 도넛을 선물하게만 만들자. 그렇게 노티드 포장과 홍보, 마케팅 등 모든 방향에 긴요한 답을 얻었다고 한다.
철학의 시선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바로 고전을 읽는 것이다.
■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고 있는가
<안나 카레리나>라는 걸작을 남긴 러시아의 대표 문호 레프 톨스토이.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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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안나 카레리나>를 발표한 톨스토이는 한 지방 재판소의 배심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어느 검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으며 또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한다. 바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이 책을 읽다 이 문장에서 멈췄다.
“어쩌면 내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지 않은 건 아닐까?”
- <이반 일리치의 죽음> 81쪽.
모든 생물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인간만이 그렇지 않다. 왜 인간만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는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이반 일리치의 진짜 즐거움은 중요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신사 숙녀들을 초대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작은 만찬을 여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39쪽
이반 일리치는 성공한 정부 관료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처럼 그도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보좌관을 거처 판사가 되었고 능력도 좋아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결혼도 했고 행복한 생활도 이어갔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말 그대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대로’ 계속 흘러갔다. ‘품위 있게’
나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쉬지 않고 달렸다. ‘마땅히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여력이 없었다. 세상은 나를 돌아볼 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렇게 8년을 쉼 없이 달리다 교통사고가 났다 .
의사가 말했다. “고명환 씨, 길어야 사흘 살 수 있습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유언도 남기시고 주변 정리할 것들도 정리하시라고 알려드립니다.”
너무 이상했다. 이게 아닌데. 8년 동안 잠도 못 자고 나중에 있을 행복한 날을 꿈꾸며 쉼 없이 달려왔는데?
이반 일리치에게도 그 순간이 찾아온다. 행복했던 부부생활은 아기가 태어나면서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반 일리치는 가족 대신 성공에 집착하며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떠나지만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겪으면서 옆구리 통증이 시작된다. 육체적 고통은 우울증으로 번지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 악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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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역시 죽음 앞에 가서야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사실만 알 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이게 아니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너무 궁금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언젠가 있을 행복한 날을 만나지 못한다면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지금을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카르페 디엠,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
매 순간을 즐기면서 살라고? 어떻게? 그런데 즐긴다는 게 뭐지?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 아! ‘즐기다’가 아니라 ‘충실하다’구나 사전을 찾아보자.
“충실하다 - 내용이 알차고 단단하다.”
알겠다. 내 하루를, 지금을 알차고 단단하게 채우자. 즐긴다는 건 그냥 소비하는 느낌이다. 알차고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생산’해야 한다.
이전까지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설계했었다. 수백 권의 책을 읽고서야 ‘나’가 아닌 ‘남’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나를 위해서 생산하지 말고 남을 위해서 생산한다. 결국 세상에 필요한 가치를 만들면 되겠구나!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이 질문이 내 인생을 바꿨다. ‘가치’는 ‘같이’ 사는 것이다. 나도 살고 남도 살 수 있는 방법, 그것이 가치다.
■ 훌쩍 지나간 시간의 의미
칼 융이 말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의도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고.
남산 도서관에서 <칼 융 레드 북>을 읽다가 멈췄다. ‘의도를 갖지 않은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 베스트셀러가 되겠다는 의도를 갖지 말라는 말이다. 장사를 하는데 돈을 벌겠다는 의도를 갖지 말라는 말이다. 세상을 사는데 행복하겠다는 의도를 갖지 말라는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몰입(flow)’이론의 창시자이자 세계적 석학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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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 Flow>에서 몰입을 이렇게 정의한다.
“플로우란 행위에 몰입하여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 더 나아가서 자신에 대한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될 때를 일컫는 심리적 상태이다.” <몰입Flow> 5쪽
칙센트 미하이 교수는 인간은 몰입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이 글을 쓰려고 할 때까지만 해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해외로 수천만 부가 팔려나가길 바라는 의도를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고, 자료를 찾고 생각을 모아서, 글 자체에 집중하자 의도가 사라졌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생각에 잠겨서 걸었던 그 순간이, 결과를 떠나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별이 빛나는 밤>과 <자화상> 등 수십 년간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은 그림 작품을 남긴 빈센트 반 고흐는 이런 말을 남겼다.
“때때로 너무도 강렬한 감정에 빠져 나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중략) 마치 말을 할 때나 편지를 쓸 때 거침없이 단어들이 줄줄 쏟아져나오듯이 붓놀림이 이루어지곤 한다.” <서양미술사> 547쪽
즐긴다는 건 이런 순간이다. 그리고 ‘훌쩍 지나간 시간’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당신의 일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나를 위해 일하지 말고 남을 위해 하라는 것이다. “그래, 나도 남을 위해 한 번 일해보자. 지구를 위해 가치를 만들어보자.”하고 덤비면 된다.
지시하는 사람이란 권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지시하는 게 아니다. 나 자신에게 스스로 지시하는 사람이다. 남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 그때 인간은 몰입할 수 있다. 이렇게 해봤는데도 몰입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곳을 떠나라. 몰입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라.
칙센트 미하이 교수의 책 표지를 다시 본다. 제목에 ‘몰입’이라고 크게 쓰고,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라고 적었다. 소비를 통해서는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날 수 없다. 소비는 끌려가는 것이고 지시받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시간을 지배할 때 미치도록 행복해진다.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은 몰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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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지 않는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과거에 수많은 천재가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독 현대에 와서는 천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많던 천재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날개> 268쪽
이상의 <날개> 첫 문장이다. 우린 모두 천재로 태어났지만 자라면서 천재성을 잃었다. 아니 잊었다. 우리는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잊었다. 왜 잊었는가? 그 대답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찾았다.
“자기 아이들을 자기 모습대로 교육하고 있으니 말이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41쪽
나의 부모님 세대는 힘든 시대를 살았다. 전쟁과 가난으로 인한 배고픔이 컸다. 그들은 이 배고픔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안정적인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 배고프지 않도록 미래가 보장된 직업을 갖게끔 키웠다. 그래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천재성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누군가의 그림자로 산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림자는 스스로 먼저 앞서가지 못한다. 항상 누군가를 따라다닌다.
당신은 천재로 태어났다, 당신은 실존하는 본체다. 그림자가 아니다. 당신이 잘못 산 게 아니라 몰라서 그랬다. 지금부터 찾아가면 된다. 해답을 가진 건 오직 책뿐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스스로 길을 찾아 날아가야 한다. 누군가의 그림자로서 뒤에 숨지 말고 태양의 빛을 정면으로 흠뻑 받아라. 책이 날개가 되어주리라. 박제가 되어 굳어버린 당신의 날개에 뜨거운 피를 돌게 할 것이다. 당신은 천재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날개>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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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삶의 진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리고 인생의 진리를 담은 고전 역시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한다. 고전을 읽다보면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장 2절
‘헛된 것’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태초의 말씀이 바로 내가 태어난 단 하나의 이유다. 나는 누구인가를 알려면 태초에 내게 주어진 말씀을 알아내면 된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온갖 생각이 가득 차 있다.
◎ 2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바라는 바가 소박했기 때문이다.
결혼 10주년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으로 갔었던 프라하로 다시 여행을 갔다. 우리가 묵던 호텔 근처에 자주 가던 커피숍이 있었다. 사장이 혼자 운영하는 커피숍으로, 손님을 대하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작은 커피숍인데 커피가 맛있어서 늘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같은 요식업을 하는 나의 시선에서 봤을 때 ‘주문을 좀 더 빨리 받고 회전율을 높이면 수익을 훨씬 많이 얻을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커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커피나무가 사는 지역의 환경 이야기, 그 커피가 세계대회에서 몇 등을 했는지, 무슨 맛이 나는지 등등.
희한한 것은 기다리는 사람들도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기다린다는 점이다. 오직 나만 안달이 나서 ‘아니 왜 빨리 주문을 안 받고 계속 얘기만 하는 거야?’ 라며 조바심을 했다.
이런 여유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포털사이트에서 체코를 키워드로 검색했다. 국가별 GDP 47위(대한민국 13위), 1인당 GDP 순위 37위(대한민국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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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우리나라보다 훨씬 못 산다. 그런데 대체 왜 돈을 더 빨리 벌려고 애쓰지 않을까? 왜 회전율을 높이지 않고 손님과 계속 대화를 나눌까? 이런 내게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주는 문장이 바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안에 있었다.
“스파르타인들의 삶이 편안했던 것은 바라는 바가 소박했기 때문이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67쪽
그래 이거다. ‘바라는 바가 소박했기 때문’이다. 내가 체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답답함을 느꼈던 건 나도 모르는 사이 ‘돈을 많이 버는 게 좋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박의 의미는 꿈이 작다는 게 아니다. 체념하고 포기했다는 뜻도 아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 자신의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그 커피숍 사장님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하루를 충실하고 행복하게 사는 중이었다.
우리는 보통 ‘일해서 번 돈으로 나중에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나중에 행복한 시간은 없다.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한다. 일에서 행복을 찾으면 지금 행복할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1인당 GDP가 3만 4,100달러(2024 상반기 기준)다. 우리 돈으로 치면 4,700만원 정도다. 그런데 자기는 수백억 자산가가 될 거라 믿는다. 4,700만 원과 수백억 원은 차이가 커도 너무 크다. 그 차이에서 상실감이 발생한다. 이 돈의 차이만큼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다.
자, 조용히 눈을 감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나는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는가? 얼마를 벌려고 목표 삼았는가? 왜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가? 그 돈을 벌면서 행복한가?
플루타르코스가 말하는 ‘바라는 바가 소박한 삶’을 느끼려면 대학로에 가봐라. 무대 위에 있는 배우들의 얼굴을 보라. 돈을 뛰어넘어 열정으로 가득한 그 얼굴들을 보라. 그들처럼 돈보다 소중한 그 무엇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나중에 돈이 저절로 따라 온다.
■ 우리가 늘 불행한 이유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 루소가 쓴 <에밀>은 200년이 지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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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교육 지침서로 손꼽히는 책이다. <에밀>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우리의 불행은 욕망과 능력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밀> 62쪽
‘욕망을 능력 아래’ 둬야 인간은 자유롭고 행복하다. 욕망이 능력을 넘어버리면 그때부터 고통이고 지옥이다. 가진 능력에 비해 욕망이 크다면 영웅이라 할지라도 그 존재는 약하고, 욕망에 비해 가진 능력이 크다면 벌레와 같은 미물일지라도 그 존재는 강하다고 루소가 말했다.
내가 늘 행복한 이유는 자기 능력 안에서 욕망을 꿈꾸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단지 속도가 느린 슬로우 스타터라 여겼었는데, 그보다는 ‘능력 안에서 욕망을 이뤄나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하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몇 년 뒤에 자격증을 따고 승진하게 되면’이라고 계산하지 마라. 그건 그때 가서 다시 계산하고, 지금 당장 얼마짜리인가 계산해 보자. 그리고 답이 나오면 스스로 인정하라.
능력 안에서 욕망해야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심지어 능력이 넘치는 슈퍼 영웅이라 할지라도 자기 능력 이상을 욕망하면 불행하다. 욕망은 끝이 없다. 어디선가 멈출 수 있어야 한다. 그 경계선이 바로 능력이다. 나의 능력을 알고 그 안에서 욕망한다면 벌레가 사자보다 더 위대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요.” <마태복음> 5장 3절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3절
나의 능력 범위 안에서 욕망할 때 우리는 자유롭기까지 하다. 더 이루고 싶다면 능력을 먼저 키우면 되니까 간단하다. 능력을 욕망 앞에 두면 된다. 이게 선순환이다.
■ 고통 없는 쾌락은 없다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은 슬픈 말이다. 일하는 순간이 고통이고 지옥이라는 전제조건을 깔고 있으니 말이다.
워라벨은 일(work)하는 순간이 지옥이니 라이프(life)로 쾌락을 더해 군형(balance)을 맞추라고 강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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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느낄 수 있는 쾌락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 <도파미네이션>의 저자 애나 렘키는 우리의 뇌는 쾌락과 고통을 같은 곳에서 처리한다고 말한다.
쾌락과 고통은 저울 양 끝에 놓인 추와 같은데, 평행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해서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반드시 반대쪽에서 올라오려는 힘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을 거쳐서 쾌락을 느낀다. 이런 쾌락이 좋은 쾌락이다. 고통 속에서 창업을 시작해 매출을 일으키고, 밤을 새워 일하는 고통을 거쳐 무언가를 이뤄냈을 때 바람직한 쾌락을 느낄 수 있다.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에서 “사람이 고통에 굴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쾌락에 굴하는 것이 수치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노인과 바다> 91쪽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소설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파멸(파괴)은 어쩔 수 없는 상태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패배는 그렇지 않다. 패배(敗北)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싸움에 져서 도망함’이라고 나온다. ‘패’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배’는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배(北)’는 사람이 등지고 있는 형상을 따왔다. 져서 등을 돌리고 달아난다는 뜻이다. 이게 가장 안 좋은 상태다.
고통 없는 쾌락의 대표적인 것이 도박과 마약이다. 이런 쾌락에 굴하는 것을 파스칼은 ‘수치’라고 표현한다.
인생의 해답은 역시 고통 속에 있다. 모든 문제는 고통을 피하려들기 때문에 생긴다. 고통, 시련, 역경이라는 말의 어감을 부서워하지 마라 우리를 행복으로 데려다 줄 비밀의 열쇠다.
달리자 세상을 향해 달리자, 고통의 운동화를 신고 세상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나가자. 고통을 품고 세상을 정복하라. 그 후에 오는 쾌감이 진짜 쾌락이다.
■ 남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길이다
맹자는 유자입정(孺子入井)이라 말했다. 우물가에 놀던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면 누구나 손을 뻗어 아이를 도우려 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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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했다.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 외 다른 존재에게 이롭기 위해 창조됐다. 나무도, 풀도, 물고기도, 곤충도 모두 다른 존재에게 이로움을 주며 살아간다. 하물며 인간은 더욱더 그래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이 생기고 언어를 발명하면서 오로지 내 욕심, 내 돈, 내 명예, 내 행복만을 위해서 살도록 세뇌당했다.
누구에게나 남을 돕고자 하는 본성이 있다. 이런 마음을 잘 이용하면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밖으로 꺼낼 수 있다. 창의는 발휘하는 게 아니라 발휘되는 것이다. 진정 남을 위할 때 자기도 모르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불쑥 튀어나온다.
바둑이나 장기를 내가 직접 둘 때보다 관전할 때 묘수가 떠오르는 것이 바 로 이 원리다. 내가 경기에 참가할 땐, 내 승리, 내 상금, 내 욕심 때문에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옆에서 훈수를 둘 땐 묘수가 떠오른다.
바로 이타적인 마음이 바탕이 된 창의가 발휘되는 순간이다.
“씩씩하게 자란 아이는 불평도 적다. 그 아이는 스스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므로 타인의 손길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에밀>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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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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