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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 여행 - 하야시에게 성리학을 전한 간양록의 강항을 회상하다!
시모노세키 역에서 버스로 30분만에 초후 長府(장부) 에 도착해 모리번주 저택 을 보고는
조슈번의 다카스키 신사쿠 가 거사를 일으킨 고잔지 功山寺(공산사) 절에 가는데,
1,864년 12월 80명의 동지로 존왕양이 반란을 일으키니... 메이지유신 으로 이어 집니다.
"존왕양이론" 이 일어나게된 계기가 있었으니..... 1,853년 6월 에도 앞바다 우라가
(浦賀, 요코스카) 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증기선 군함 구로후네 4척을 끌고 나타납니다.
일본은 번의 반란을 예방 하려고 큰 배를 건조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100~ 200톤 규모
범선 뿐이었는데... 서스케헤나호는 증기선 에 2천 5백톤 이었으니 놀라움은 컸습니다.
다음해인 1854년에 다시 7척의 구로후네 군함을 이끌고 나타난 미국의 흑선 무력 앞에
함포사격으로 도쿄가 불바다 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하니, 굴복한 막부 는 개국
을 하기로 하고 1,854년 2월 쇼헤이코 교장인 유학자 "하야시 후쿠사이" 를 보냅니다.
에도 막부에서 쇼군을 보좌하던 유학자 하야시 후쿠사이 는 임진왜란때 포로 로
끌려간 조선 유학자 "강항" 으로 부터 유학을 배워 성리학의 개조가 된
후지와라 세이카 의 수제자로 도쿠가와의 스승인 하야시 라잔 의 후손 입니다.
“ 이국 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임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이 노래는 조용필 이 부른 MBC 문화방송의 1980년 방영 드라마 “간양록” 주제가 인데
신봉승 씨는 가사를 강항(姜沆) 이 지은 “간양록 (看羊錄)”을 참고했다고 합니다.
강항 은 전라 좌병영 우후 로 싸우다가 사로잡혀 일본으로 끌려온 이엽 이 일본을
탈출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엽이 쓴 시를 간양록" 에 적었다고 합니다.
저 다음 구절은 “어버이는 밤 지팡이 잃고 새벽달에 울부짖으며...
지켜 오던 조상 묘지 에는 풀 반드시 거칠었으리.” 입니다.
“간양 看羊”은 한나라 무제 때 흉노에 사신 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흉노왕의 회유를
거부하고 양치는 노역을 하다가 19년 만에 돌아온 소무의 충절 을 뜻합니다.
강항 자신이 붙인 제목은 “건차록 巾車錄” 이니 “건차(巾車)는 죄인을 태우는 수레 이니
적군에 사로잡혀 끌려가 생명을 부지한 자신을 죄인으로 자처하는 의미인데 사후
제자들이 책을 펴내면서 스승을 한나라 소무 에 견주어 제목을“간양록”으로 붙였다네요?
강항 은 형조좌랑 직에서 휴가를 얻어 고향 영광 으로 내려왔다가 1,597년 정유재란 이
일어나자 군량조달 을 맡았는데 남원성이 함락되고 전주가 점령되니 영광으로
돌아오는데, 명나라와 일본간에 화평교섭 이 결렬되자 일어난게 정유재란 이니...
국사편찬위 자료를 보면 병력수는 왜군 14만, 명군 11만 7천에 조선군 3만 8천 이었습니다.
황석산성에 조선군 5백, 남원성에는 조선군 1천과 명군 3천이 수비했고 전주는 명군 2천과
조선군 500명 그리고 충주에 명군 4천등이 있었지만 그외 조선군 1,000 을 합해도
명군 9천과 조선군 3천등 도합 1만 2천 정도로는 왜군 12만명 을 저지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8월 12일 고니시와 우키다 및 시마즈군이 남원성 을 공격하자 명군 3천은 동문에 중군
이신방, 남문에 천총 장표, 서문에 천총 생승선이 지키고, 조선군 1천 은 전라병사
이복남등이 북문 한곳 만을 맡았는데, 전투 나흘만인 8월 15일 성이 함락되자
부총병 양원만 달아나고 4천 병사는 전멸 하니 전주 의 명군 진우충의 2천도 달아납니다.
전주 점령후 좌군 우희다수가와 고니시, 시마즈는 전라도로 내려가고 우군은 공주 점령후
가토 기요마사는 청주를 거쳐 충주로 진격하니 충주의 명군 오유방의 4천은 달아납니다.
우군의 다른 갈래인 구로다와 모리가 천안 을 점령하자 충청병마사 이시언과 방어사
박명현 조선군은 흩어지는데 평양의 양호가 서울에 와서 마귀를 다그쳐 명군을 파견 합니다.
음력 9월 7일 구로다군 선봉대 1천 5백은 직산으로 진출하니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해생의
명군 2천 이 왜군을 급습하는데, 전황은 구로다군 본대 3천 이 도착하여 역전됩니다.
이에 다시 명군 유격 파새의 2천 이 도착해 전세를 재역전시키자 천안에서 모리군
3만 이 달려와 좌우로 포위하니 명군이 수원으로 후퇴 하자 왜군도 천안으로 물러납니다!
양원의 명군 3천과 전라병사 이복남등 조선군 1천 합계 4천이 지키는 남원성 에 우키다와
고니시등 왜군 죄군 5만 4천이 공격해 오니 중과부적으로 남원성이 함락되자 강항 은
영광으로 돌아와 의병 수백을 모았지만 왜군의 기세 앞에 흩어졌고 영광 도 왜군에
유린당하니 집안 식솔 60명 이 2척의 배 에 나누어 타고 이순신 장군의 함대 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명량해전 7일후인 1,597년 9월 23일 우수영을 돌아 멀리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경계인 영광 까지 북상해온 왜군 배에 사로잡혀 전남 무안항 으로 끌려오니
항구에 왜선 수백척 이 정박하고 있는걸 보는데 벼슬아치라고 해서 심문을 당합니다.
충남 태안 에 명나라 두유격 이 군선 1만척(?) 을 이끌고 전라도 명량 처럼 험한
안행량에 주둔하는데 유선은 군산포에 진출해 이순신 장군 과 합류했다고
말하니 왜군은 대경실색해서는 실의에 빠집니다. 이순신이 명군 과 이미
합류했다니? 그러니까 "강항의 거짓 정보" 가 왜군의 전투의지를 꺾은 것 이지요!
이 무렵 성주 목사 정기룡 장군은 4천명을 거느리고 충주를 유린하고 경상도로 남하한
가토등 왜적을 경북 고령에서 격파하니 왜군도 더 이상 북진(?)하기 어려웠습니다.
실은 왜적은 애초부터 전라~충청을 유린할 생각이라 천안에서 스스로 물러갔던 것입니다!
게다가 충청병마사 이시언에게 포로로 잡힌 아시가루 대장 후쿠다 간스케 는 히데요시가
충청, 전라도를 분탕질후 음력 10월 2일 까지 남해안으로 철수해 주둔하라 했다는데,
그러니까 정유재란은 임진왜란과는 달리 조선 하삼도를 초토화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마침 도요토미의 철수명령 이 있으니 왜군은 남해안으로 후퇴해 성채를 짓기 시작했으며
강항의 일행등 천여명의 조선인 포로 들은 우수영과 순천을 거쳐 시코쿠섬 에히메현
이요국 오즈 로 끌려가는데 강항을 잡은 왜적은 9월 16일 명량해전 에 참가한 그 왜군이라!
명량해전 에서 이순신에게 패한 도도 다카토라 의 휘하로 시코쿠섬 이요(伊豫) 국의 오즈
(大洲 에히메현 오즈시) 성주 사도(佐渡)의 부하인 노부시치로 (信七郞) 였던 것이라!
강항 은 순천 왜성 을 "성은 하늘로 솟구쳐 은하수를 가르는듯 하다" 라며 크게 놀랍니다!
도도 다카토라 는 임진왜란에도 수군으로 참전했던 무장으로 귀국해서는 시코쿠섬
이요국 사카지마(현 우와지마시) 7만석 다이묘 로 있다가 다시 참전한 정유재란
때는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고 명량해전 에서는 왜군 총대장 이었습니다.
도도 다카토라 는 임진왜란후 귀국해 이요국 번주 로 있다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는 도쿠가와측 동군으로 돌아서서 큰 전공을 세웠으며 축성술이
뛰어난지라 에도성(도쿄) 축성을 지휘한 공로로 이세국 쓰번 22만석 번주가 됩니다.
그런데 우린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이 전멸한후 이순신 장군이 천신만고 끝에
패잔병을 수습해 명량해전 에서 불과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만나 선두에 서서
31척을 격파하니 왜적은 패해 도망치니 바다를 지켜낸 세기의 대승리로 알고있으며...
이후 조선수군이 제해권 을 차지했으니 바다는 안전해졌고 왜군은 얼씬도 못한걸로 압니다.
그런데 왜군이 명량해전에서 참패해 멀리 도망친줄 알고 있었는데 전투후 불과 7일째 에
왜군이 명량 에서도 한참이나 더 북상 하여 전남 무안과 영광 까지 진출해서는
이순신의 행방을 뒤쫓으며 조선인들을 포로 로 잡았다니.... 그럼 진실은 무엇 일까요?
"영화 명량" 에서는 사실과 다른게 너무 많으니.... 경상우수사 배설 은 병가를 내고 전투
이전에 도망 갔으니 거북선을 불태울수 없을뿐더러 거북선 건조 사실 자체도 없었는데
연속극이나 영화에서는 악역 을 맡을 사람 이 필요하니 없었던 배설을 억지로 꾸며냈네요?
겁에 질린 조선 수군이 뒷전에서 머뭇거리자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이 홀로 전진해 적선을
맞아 단 한척 배로 오래토록 싸운것도 사실과 다르며... 왜적이 통제사 이순신의
배에 올라와 조선군과 수십분간 치열한 백병전 을 벌이는데, 이 또한 새빨간 거짓말 입니다.
조선군 피해는 "전사 2명에 부상 3명" 에서 보듯이 전투는 멀리서 대포로 적선을 격침한
것이니, 근접전 은 거제 현령 안위 장군 이 유일한데 그것마저 백병전은 없었습니다.
조총의 사정거리는 100미터 인데 비해 조선 대포는 500미터에서 천미터 니 300미터
거리만 유지한다면 조선 수군은 전혀 피해없이 대포사격만으로 적선을 격침 할수 있습니다.
조선의 판옥선 은 소나무로 만들고 바닥도 평평해 튼튼하며 120명 이상이 탑승하니 200명
까지도 탑승이 가능하고 20여문 이상 대포를 장착한 전함 이지만, 일본 세키부네 는
수송선 으로 삼나무 판자로 만들고 바닥이 뾰족해 빠르기는 하나 작고 낮으며 약합니다.
근본적으로 판옥선 은 전투함으로 이항복이 성곽 과 같다고 말했듯이 크고 매우 높은데,
왜군은 적선에 올라 백병전 을 벌이는게 특기지만 반면에 세키부네 는 작고 낮은지라
험한 파도속에 흔들리는 낮은 배에서 높은 판옥선에 오르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
이순신 장군은 전투후 왜적은 아직 300척 이 남았으니 다시 올것이라 예상하고는 13척
뿐인 아군 전력도 밝혀질 것이고 화약도 거진 다했는데 적이 진도 바깥을 돌아
포위 당하면 승산이 없으니 9월 16일 명량해전 승리후 조선 백성들이 기다리는
우수영에 돌아오지 않고, 당일로 신안군 당사도로 철수해 배 안에서 자고 17일 신안군
어의도, 19일에는 영광 법성포를 거쳐 21일에는 멀리 군산 선유도 까지 후퇴했던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 에서 이때 상황을 "아군의 형세가 위태롭고 또 위태로웠다" 고
적었는데, 예상대로 다음날 왜적들은 다시 몰려왔고 우수영 을 점령해 조선인들을
학살하고 전라도 해안 을 노략질하며 이순신을 뒤쫓아 무안을 지나 영광 까지 북상
하면서 살륙과 약탈에 방화와 포로잡기 등 전라도 해안은 아비규환 지옥도 를 연출합니다.
강항의 종형인 선전관 강협 은 18일 강항이 피해있던 비로초섬에 도망쳐와 왜선 천여척이
우수영을 지나 올라오고 있으며 장군도 북상중 이라 말했던 것인데, 이순신은 12일간
군산 선유도에 머물다가 왜적이 물러간 10월 3일 출발해 법성포에 이르러 정세를 보고
다시 우수영 으로 돌아온 날은 후퇴한지 24일째 인 10월 9일로 왜군이 철수한 이후 입니다.
왜군은 1592~3년 임진왜란때 보급문제 와 겨울추위 로 고생한데서 1597년 정유재란 은
충청도와 전라도를 유린한후 남해안으로 내려와 순천에 고니시, 사천에 시마즈,
창원에 모리와 구로다, 울산에 가토등이 28개 왜성 을 쌓아 겨울에는 쉬고 봄에
출진하는 장기전 으로 나가니 이렇게 몇년만 되풀이하면 멀리서 온 명군은 철수 하고
그러면 지치고 고립된 조선으로 부터 경상, 전라, 충청 3도를 얻을수 있다 여긴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 함대가 우수영에 돌아왔으나 성 안팎에 거주하던 그 많은 조선인들이 한명도
나타나지 않으니 영화 명량에서 응원하던 조선 백성들은 모두 학살되거나 포로로
잡혀 끌려간 것이라? 해서 비통한 심정으로 안편도로 물러난 장군은 광양 서쪽에
왜군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10월 29일 목포 고하도로 옮겨 군선을 건조하는데,
피란민이 탄 배 수천척에 한척당 쌀 3섬 을 받고 통행첩을 발행해 1만석 을 모아
13개월후 벌어질 노량해전 을 대비하니 명나라에서도 진린의 수군이 도착해 연합 합니다.
1598년 6월 강항 은 시코쿠섬 에히메현 오즈에서 교토 후시미성 으로 이송되는데 이안과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의 스승인 후지와라 세이카 등에 성리학 을 가르치는데
후지와라 세이카 는 옛글도 잘 알아 통달하지 않은 글이 없었으니... 훗날 이에야스가
교토에 집을 짓고 해마다 쌀 2천석 을 주고자 했으나 받지않고 청빈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강항 이 주자(朱子) 의 주석에 따라 훈점을 표시한 “사서오경왜훈 四書五經倭訓”은
다지마 성주가 재정을 후원하고 후지와라 세이카가 편찬을 총괄 했는데....
이 책은 일본 최초의 성리학 저서 로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 은 스승의 추천
으로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강(侍講) 이 된 이후 4대 쇼군 까지 시강합니다.
책이 출판된후 후지와라 세이카 는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 에게 청원해
강항 일행 의 통행증명서 를 발급 받게 해주고는 여행 비용 까지 대주는데,
4월 2일 식솔 10명과 다른 선비와 사공 등 38명 일행은 교토 후시미성 을
출발하니 사공을 붙여 대마도 까지 인도해 주어 1,600년 5월 부산 으로 돌아옵니다.
강항 일행 38명을 조선으로 돌려보낸 1등 공신 아카마쓰 히로미치 는 주고쿠를 공략하러
온 히데요시에게 저항하다가 항복후 전공을 세워 다지마 다케다성 (효고현 북부 )
2만 2천석의 성주가 되었는데... 그후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및 임진왜란 등에도
참전하였으며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 의 가르침을 받는등 문학자적 일면 도 있었습니다.
강항은 간양록에서 아카마쓰 히로미치 에 대해 "일본의 무장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 마음"
을 지녔으며 공자묘 를 세우고 3년상 을 치르며 중국의 제도와 조선의 예법 을
착실히 따랐다. 조선 선비들에게 유교 경전의 필사를 요청하고 옷과 음식마저도 조선을
본뜨려고 했으며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말 위에서 까지 책 을 놓는 일이 없었다" 고 합니다.
아카마쓰 히로미치 가 성주로 있던 다지마의 다케다성 (竹田城) 은 효고현
북부에 있는 산성 으로 강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때문에 마치 성이 떠있는 것 처럼 보여 “천공의 성” 이라 불리었다고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인 1,600년 9월 15일 일본의 운명을 건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
아카마쓰 히로미치 는 서군 에 속해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거성 다나베 성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이 한나절만에 패한걸 알게 되자 배신해 동군으로 돌아서서
서군에 속한 돗토리성을 공격해 함락 시키지만 성하 마을을 불태운 혐의를 받습니다.
히로미치 는 1600년 12월 3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할복자결 하는데....
실제로는 그가 서군의 총수 이시다 미쓰나리 와 가까운지라 밉보였기 때문 입니다.
아카마쓰 히로미치의 부인 은 임진왜란때 15만 왜군의 총수 우키다 히데이에 의
여동생 인데 우키다도 서군에 속하니 죽고 다케다 성은 폐성 되었습니다.
이에 제자이자 후원자를 잃은 후지와라 세이카 는 식음 전폐 대성통곡 하고는
도쿠가와의 부름에 본인은 응하지 않고 제자인 하야시 라잔 을 추천했던 것입니다!
강항 이 처음 끌려갔던 에히메현 오즈시 에는 1990년에 건립된 “홍유강항현창비”가 서
있으니 성리학을 전해준 강항의 고향 영광군 과 오즈시 는 2001년 부터 교류하고 있습니다.
“왜인들은 호기심 이 많으며 외국과 통교 하는 것을 좋아하여 외국 상선이 와도 사신
행차라고 하니 교토에서는 남만(유럽) 사신 이 왔다는 소리를 거의 매일 듣습니다.
먼데서 온 외국인 을 왜졸이 해치기라도 하면 통교가 끊어질까 염려 하여 반드시
가해자 삼족을 멸한다 하며 천축(인도) 같은 나라도 내왕이 끊임이 없습니다.“
강항 이 귀국해서는 서울로 가서 임금 선조가 베푼 잔치상을 받는데.....
위 내용은 그후 고향에 내려와 선조에게 올린 글 중의 일부로 간양록 에 실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