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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500만원을 가지고 두 남자집사님과 목사님과 기도원 부지를 얻으러 다녔지만 허탕치고 돌아오면서 그것도 흐지부지 되었다. 그것을 사두었으면 기도원의 땅값이 올라서 교회도 그분들도 좋았을 텐데... 믿음이 없는 남자 집사님의 말을 듣고 다음에 사기로 했지만...그곳이 시누이가 사는 용인근처였다.
만약 내가 같이 갔으면 일을 저질렀을 텐데...
난 하나님 일이면 무조건 저지르고 말았고 또 하나님이 해결해 주셨다.
목사님은 남자집사님들의 말을 듣고 그냥 돌아오고 그일들은 없었던 처럼 되어버렸다.
그때 계약이라도 했으면 그대로 진행이 되었을텐데...
목사님은 실수를 안하려고 하고 모든 것을 좋게만 하려고 했다.
교회가 부흥되면서 나는 점점 뒤로 빠져야 했다. 난 그 때부터 꽃꽂이선교회에 다녔다.
꽃꽂이 때문에 교회의 기도를 소홀히 했고 또한 교회를 비우는 일들이 많아졌다.꽂껓이 사범이 되었다. 교회가 부흥됨으로 사모는 뒤로 물러나야 했고 모든 일들은 집사님들과 의논을 했다.
마침 다시 신학을 다시하며 신학대학교 공개 강의를 들으며 나사렛대학교 목회자1년과정을 수료하며 천안까지 다녔다. 모임을 좋아하던 난 여러가지 모임에 참석을 하며 마당발이 되려고 했다.
미국에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미국의 동생집에도 가보고 싶었다.
미국 에 루터교신학교에서 단기 가정상담학을 수료했다.
서부구경을 하며 그랜드케년과 디즈니랜드, 헝틴턴 라이브러리등 여러 곳을 다녀서 동생집으로 갔다.
동생은 가게가 너무 크고 바뻐서 도와 주었다. 땅도 사놓고 가게가 잘되었지만손이 모자랐다. 그 곳에 있으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이 살림과 동생이 아기를 낳았기에 같이 일을 했다. 마침 난 칼빈대학교에 학비가 필요했다.
미국사람들은 일을 해야 돈을 준다는 것을 동생을 통해 알았다.
일도 잘 안해본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살림과 아기돌봄과 가게 일을 같이 하니 너무나 힘들었다.
교회는 더구나 차를 타고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시간이 늦어도 가야하는데 그당시 운전을 못했고 시간이 조금 늦으면 안가는 동생을 뒤로 하고 무조건 걸어서 교회에 갔다.
그 교회목사님은 너무나 놀라했다. 여기를 어떻게 걸어왔느냐고... 교회를 가지않으면 마음에 너무나 부담이 커서 동생이 차를 태워주지 않으면 걸어갔다.
미국은 구역예배도 저녁에 드리고 철야예배도 드리다가 일을 가야한다고 빠져 버리는 그런 곳이다. 그때 당시 600불을 주었지만 남편이 연세대학교에 대학원에 붙었다고 한국에서 전화가 와서 내 것을 포기하고 남편의 등록금을 마련하기 힘들어도 열심히 일했다.
그러면서 틈만나면 뒷마당에 있는 창고에 십자가를 달고 휘장을 치고 그곳에서 기도를 드렸다.
몇개월이 지나니 한국이 그립고 교회도 마음놓고 가고 싶었다. 여러가지 힘든 일도 있고 교회도 걱정이 되어 가고 싶었다.
동생은 그 때 땅을 사서 여기있으면서 땅이 있으니 교회도 기도원도 하라고 했다.
집에 공기총을 침대옆에 두고 자며 밤에는 밖에도 못 나갔다.
가끔 볼링장이나 수영장외에는 나가기가 힘들고 금요일날부터는 네바다주나 멀리 차를 가지고 주일까지 지냈지만 교회를 못가는 난 그곳에서도 교회를 찾아다녔다.
일단 한국 갔다가 오겠다고 하며 교회로 오니 한 번갔다 올때는 괜찮았는데 두 번 갔다오니 교인들이 빠진사람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교회가 부흥될 때 사모님은 뒤로 물러나라는 그 말을 듣는 것이 아니었는데...
꿈에 앞에 있는 불에 타다만 휘장과 교회가 청소가 되어있는 영적인 꿈을 꾸었지만 이상하다고 만 생각했다.
몇 번의 미국행으로 교인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미국으로 다시가겠다는 마음을 접고 다시 교회를 위해 기도했지만 전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다.
미국에 다시 갔다올 때는 아주 미국으로 들어갈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남편은 월세를 까먹고 있었고 교인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다.
결국 남편은 같이 미국을 가겠다고 했지만 몸이 아프다고 했다.
학교앞에 교회에 있을때 성미가 넘쳐나서 신학교에 갈때는 쌀을 몇말을 택시에 실고 가서 없어보이는 사모님이나 신학생에게 주었다.
교회를 찾아오는 개척교회 사모님이나 목사님에게는 쌀과 교통비를 주었다.
외모로는 있어 보이는 것 같은 사모 같아서 여기저기서 도움을 청했다.
전가화목사님이 하는 사모세미나에 1500명이 참석하는데 나도 그곳에 참석하여 밤새 입신도 하고(입신중 기둥만한 금십자가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불도 받고 경기도 사모회장이 되어 개척교회들끼리 10여명이 모여 한달에 한번씩 기도하며 교회들을 돌아보았다.
남편도 개척교회 목사님에게 저녁설교를 시키며 식사대접과 차비를 주고 선교비를 주었다. 나에게는 빠듯하게 생활비를 주면서도 돈이 없는 신학생에게 차비와 용돈을 주고 개척교회목사님에게는 옷도 사주었다.
교인이 옷감을 가져온 것으로 양복을 해입으면서 개척교회 목사님에게는 양복점에서 몇십만원 되는 양복을 해주었을때 성도가 시험에 들 때도 있었다. 구두 티켓이 있으면 한 켤례만 신고 나머지는 다 개척교회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에게 주었다. 자기가 신학생때 고생한 것을 생각해서...
퍼주기를 좋아하는 남편은 미국에서 동생이 선교비를 매달100불씩 보내는 것을 말을 하지않고 개척교회들을 도와주었다.
그것은 몇 년이 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개척교회를 하면서 먹을 것이 힘들 때 그때가 38살이었나보다 40일금식을 자쳥하며 하나님께 쌀이 한말이 있으면 반 말을 한가마니가 있으면 반가마니라도 없는 사모님들을 위해 개척교회를 위해 쓰겠다고 했다.
40일금식이 끝난 후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부해졌다. 그기도원원장님은 나보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다.
옷도 성도들이 사주고 화장품도 미국에서 동생이 화장품가게를 할때 쓰던 쌤플을 쓰고 있었지만 성도들이 사주기도 했다.
속을 썩이는 성도들도 있지만 잘하는 성도들을 바라보며 교회가 성장해 나갔지만 미국행으로 기도를 소홀히 했던 나에게 교회를 나하고 상의하지 않고 접은 남편이 야속하기만 했다. 인천에 있는 노회 목사님이 자기교회에 오라고 해서 협동목사로 갔지만 성전건축이었던 교회라 남편은 눈이 빨갛게 되면서도 성실하게 일했다.
봉고차로 새벽기도에 운전을 하고 에배도 드리고 그목사님은 잠을 자도 우리는 잠을 못잤다. 그러나 교인들의 새벽기도가 100명으로 늘면서 젊은 목사님은 남편을 누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친절했지만 인기가 된 목사님을 누르기 시작했고 또 나에게까지... 처음에는 나도 전도사이기에 같이 사례비도 준다고 했지만 사모이기에 잠잠하라고 했다.
가기전과 가고 나서의 일들이 달라졌다.
남편이 심방을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났다.
병든 자가 일어나서 그집식구들이 다 교회를 나오고 안되던 사업이 잘되어서 목사님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큰교회가 되니 행사가 많아져서 일을 해야 했지만 교인들은 사모니까 하지말라고 하고 난 그냥 서성이기만 했다.
성전건축에 돈이 들어가니 결정했던 사례비도 적게 주었다. 나보고 생선장사라도 하라고 말했기에 믿었던 사람들이었는데... 우리는 그곳을 더이상 사이가 나뻐질것 같아서 기도원에 간다고 하며 있지 못하고 나와버렸다.
교인들을 만나도 전화번호도 안 알려주었다.
남편은 그렇게 고지식한 선비타입의 의로운 자였다.
어린이집을 조그맣게 했지만 그것도 안되었다. 먹고 살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안하는 나에게 겨우 풀칠만 하다가 망하게 했다.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면서 아는 여자 목사님이 시골에 교회를 지었지만 부흥이 안된다고 우리보고 내려오라고 했다.
난 인천에서 어린이집을 출근하고 남편은 시골교회로 내려보냈다. 일주일에 한번씩 오는 여자 목사님에게 순수하게 성실하게 하여 몇 명밖에 없던 교인들이 40~50명씩 되었다.
시골이라 반찬도 없고 사람도 낮에는 없는 곳에서 남편은 책도 읽고 기도도 하며 일주일에 한번씩 주일날 올 때만 기다렸다. 주말이면 눈이 빠지며 추워도 기차를 타고 가면 남편은 봉고차를 가지고 역전으로 나왔다.
일주일에 한번씩 광주로 나가 목욕과이발을 하게하고 반찬을 준비해놓고 올라가며 내려갔다. 그곳에서도 사례비를 잘 안 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부흥되니 교인들에게우리들을 멀리 하게 만드는것이다.
남편은 순하고 착하기에 무조건 순종하지만 이치에 안맞으면 화를 낸다. 그곳에 교회에 필요한 것을 채우며 시골교회라 순수함이 있었지만 난 직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여자목사님은 교회가 부흥되면서 사례비를 안주기 시작하고 설교도 안시키고 남편을 괴롭혔다. 나까지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난 그목사님에게 사례비를 안주려고 하여서 먹고 떨어지라고 하고 남편을 기도원으로 보냈다.
이젠 내가 아프기시작했다.
왜 돈도 못벌게 하고 세상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며 하나님께 따졌다.
아무병명도 없이 몸이 너무 아펐다.
3일만 금식하겠다던 난 20일 금식을 작정했다. 여름장마라 산에 물이 안맞았고 배알이를 하였지만 그물을 마셨다.
어느 젊은 목사님이 20일 작정을 하고 산에 왔는데 일주일도 못하고 내려간다고 하길래 여자인 나도 지금 15일 째인데 (그때 물을 사주고 갔다)
남자 목사님이 못하면 어떻하냐고 했더니 무사히 20일을 마치고 내려갔다.
기도원에서 답답했다. 빨리 나가서 교회를 하던지 돈을 벌던지 해야 하는데...당시 그 곳은 돈있는 사람들이 방세를 내고 살고 있었다.
.기도원에서 방세를 못내서 공동목회자실에 있던 남편은 못된 목사님이 차를 안태워주고 착하고 마음 약한 남편을 괴롭혔고 식권까지 빼앗아갔다.
자기도 그기도원에 아무것도 없이 얹혀살면서 ...
난 그목사님에게 따졌다. 그 분은 급기야 방 열쇠를 잠궈버렸다.
돈도 있는것같고 사모도 입고 다니는 옷도 괜찮아 보이고 차도 있는데 방세를 안낸다고 ... 내가 가서 따졌다고 문을 잠궈버렸다.
난 추운 성전에서 울며 기도하며 그기도원의 장로님이 주인인 그사람에게 우리의사정을 편지를 썼다. 그당시 원장님은 따로 있었다.
우리는 떠돌이가 아니고 현재 돈이 없지만 돈이 생기면 주겠노라고 하며 눈이 펄펄내리는 연병장에서 봉고차안에서 이렇게 살면 무엇하나 금식하다 죽자하는 마음에 40일을 작정하고 시작했다.
그곳에 있던 교인들이 담요와 석유스토브와 스치로폴등을 갔다주었지만 어느 남자집사님이 방세 25만원을 주어 금식40일을 마칠 때까지 따뜻하게 지낼수 있게 방세를 끝날 때까지 주었다.
성전이 5층인데 그 곳을 하루에 4번씩 오르내렸다. 39일째 물이 목구멍으로 내려가지않아서 물한모금에 방을 뱅뱅돌면서 물을 삼켰다.
그날 밤 나올 것도 없는데 수도꼭지를 붙잡고 아기 낳는것 같은 고통 속에 헛구역질을 했다. 물이 받아주지 않았다.
마지막날 밤에 비몽사몽간에 밤 하늘에서 나팔소리가 났다.
그리고 화면이 펼쳐지면서 내가 노트북만한 크기에 깊이가 있는 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눈처럼 만나가 내려왔다.
한 알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 상자에 가득 채워지고있었다.
그곳에서 기도회를 이끄는데 사람들이 모이니 원장이 싫어했다.
남편친구목사님의 소개로 금식40일이 끝난 후 조금 알려진 부흥강사가 자기교회로 초빙을 했다.
우리는 급히 그기도원을 나왔다. 응답인줄알고 갔지만 사택도 얻어주고 사례배도 100만원을 주겠다고 하며 자기는 부흥강사라 주일만 설교한다고 하더니 교인들이 남편을 좋아하고 자기보다 설교를 잘한다고 몇 번 부르더니 이것저것 흠을 잡았다.
남편이 주눅드는 것이 싫어서그목사님에게 남아일언 중천금인데 목회자가 강단에서 말을 바꾸면 되냐고 하면서 그곳을 나왔다.
더이상 있다가는 다툼만 날 것같아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나간 것처럼 나왔다.
그 사람은 백석대학원에 다닐 때 그곳 에서 만났지만 나에게 머리를 못들었다.
난 우리에게 시련을 준 목사님들을 미워했다.
이름을 대면 다아는 부흥강사였고 뻥쟁이 였고 깡패출신이지만 난 아량곳하지 않았다.
먹고 떨어지라고... 사람의 말을 잘 믿는 우리 부부가 바보 같아 보였고 남편은 아무 말도 못하니 더욱화가 나며 무능해 보였다지만 잘참아주었다.
우리는 아파트 뒤에 창고 같은 방을 얻어서 그곳에서 기도를 했다.
그야말로 창고이다. 방 하나에 부엌은 우산을 쓰고 밥을 하고 화장실도 우산쓰고 가야 하고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자고나면 아침에 얼굴이 부었다.
냉장고에 김치도 없었다. 난 수시로 살기를 거부했다. 금식하면서 죽기를 간청했다.
어느날 남편은 다투고 나가서 개천가에 세워둔 봉고차 안에 있다가 새벽에 들어와서 라면을 먹었다.
아침에 일자리를 찾으러간 나를 급히 엄마가 불렀다. 가보니 입술이 파랗게 죽어가고 있었다. 난 이제 더 이상 나에게 대적하지 않을꺼지 하면서 배를 만졌더니 그래 하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더니 살았다 하는 것이었다.
그때 악한 영이 남편을 죽이려고 했는데 기도를 하고 나니 나가버린 것이었다.
그후로는 목사님이 화를 내도 참으며 방언으로 기도하고 나면 나중에 자기가 잘못했다고 사과를 했다. 전에 40일 기도를 할 때 원장님이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한것이 생각이 났다. 난 힘들때마다 기도원에 다녔다.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고칠 길이 없었지만 기도원에서 만난 대전에 목사님이 아는 장로님이 보일러를 만진다고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 장로님이 다니던 교회 여전도회에서 10만원씩 선교비를 보내주었다.
쌀만 있으면 살 수는 없다. 그래도 감사했다.
옆에 엄마 집 근처라 엄마를 많이 의지했다. 어려서는 고생을 모르고 살다가 없는 집에 무능한 목사를 만나 사는 나를 원망하며 가끔씩 생활비를 대주었다. 무능하고 가난한 남편을 만난 나를 나무라며 동생들도 못산다고 쳐다보지도 않았고 빈정대며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능하게 산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당시 동생은 미국에서 엄마에게 돈을 보내주었고 난 그돈을 엄마에게 받아썼다.
동생은 한국에서 일이 이렇게 일어난 것을 알지못하고 미국으로 다시 가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를 미워했다. 그때미국을 갔다면 나의 인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교회를다시 하고 일으키고 싶었기에 포기를 했다.
밤이면 아파트 뒤에 나와 별을 보고 기도하며 성전을 달라고 2년을 기도했다.
그래서 앉아서 기도하는 것보다 서서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기도를 소홀히 했던 내가 성전 제단을 소홀히 했던 나를 자책하면서 울며 불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기도했다.
첫댓글 늘 기도의 삶을 살았던 삶을 보면서 넘 귀하시다는 마음이 드네요
계속해서 기도를 통해 주님과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이 되심을 믿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목사님께서 제단의 불을 피우시고
기도하시는 모습에 주님께서 기뻐
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늘 강건하세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목사님😊♥️🔥🍒
인생의 길에 함께 하시는 귀한 주님의 손길을 찬양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늘 그 손 꼭 잡으시고 승리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다시 글을 읽습니다..
우리 손목사님의 신앙행전이 참으로 귀하십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을 위해 사시는 모습이 귀하십니다.
교회를 세우고 싶어하셨군요.. 그래서 영성교회에 그리 애착이 많으시군요..
하나님께서 우리 목사님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거예요..
오래 오래 건강하니 목회 잘 하시며 복 많이 받으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