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의 친구라.
< 요 15:13-15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 서론 >
1980년 7월 만 5살이 된 아들이 주일 오후 예배에 다녀온 후에 방 한 구석에 앉아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예수 항상 나의 친구, 기쁠 때든지 슬플 때든지, 예수 항상 나의 친구, 주님 나의 친구.”라고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에 내 마음에서 “아니? 뭐라고? 예수님이 네 친구야? 예수님이 어떻게 너와 친구가 될 수 있니?”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친구가 되려면 비슷한 것이 있어야 한다. 기본적으로는 나이가 비슷해야 하고, 성인들에게는 고향이나 취미나 직업이나 이런 것이 같거나 비슷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5살 짜리 어린이와 예수님과 무엇이 비슷한 게 있어서 친구가 되겠는가?
그러자 바로 그 다음 순간에 마음에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러면 너는 나와 친구가 되겠 니?” 깜짝 놀라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주님과는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비슷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예수님을 처음 믿었던 때에 369장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나,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같은 찬송을 얼마나 즐겨서 불렀던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가 예수님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이때에도 주님은 깨달음을 주셨다. 비밀은 내가 먼저 예수님과 친구하자고 하면 안 되지만, 주님이 먼저 나에게 친구하자고 하시면 되지 않는가!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의 가장 큰 원칙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initiative’(선도권, 先導權)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먼저 행하신다. 주 동(動)하면 나 동하고, 주 정(停)하면 나 정하네.
1) 친구 사이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① 본문은 친구 사이에는 “13절 – 목숨도 줄 수 있어야 한다, 14절 – 말을 잘 들어주어야 한다, 15절 – 비밀이 없어야 한다.”라는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② 그런데 순서에 문제가 있다.
a. 우리가 사람끼리 친구가 되는 순서는 “말을 잘 들어주고(14절)→비밀도 털어놓고 상의하고(15절)→목숨까지도 준다(13절)”이다.
b.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는 순서는 먼저 목숨을 주시고(나는 주님을 알지도 못하였는데, 13절, 롬 5:6,8,10)→14→15절이다.
c.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친구로 삼는 거꾸로 간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먼저 죽을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주님이 명하시는 것을 행할 능력도 없다. 이것이 구약이 보여주는 바 이스라엘이 실패한 원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 나아와 우리의 비밀을 털어놓고 회개하는 일이다. 진심으로 회개하면 비로소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을 받으니까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을 알게 되고, 이렇게 거듭난 새사람이 되니까 비로소 능력을 받아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게 되며, 나아가 그 은혜에 감격한 생활을 하다가 목숨까지도 바치게 된다. 그러므로 그 순서는 15절→14절→13절이 된다.
③ 우리가 주님과 친구가 된다면 얼마나 놀라운 복을 받게 될 것인가? 그 가장 큰 복은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이루어주심으로(7절), 기적의 사람, 승리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2) 우리를 친구 삼으시려는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도 예수님을 친구로 모시자.
① 예수님과 친구가 되는 첫 단계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우리 힘으로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장 쉽고 기본적인 것은 우리의 비밀을 솔직하게 아뢰는 것(15절)이다.
그러면 우리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렇다. 죄(罪), 바로 죄가 아닌가! 사람마다 이것을 숨기고 남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먼저 내놓으라고 하신다. 이것을 감추고 내놓지 않으면 절대로 주님과 친구가 되지 못한다.
죄는 자기를 감추려는 본능이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는 나무 사이에 숨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을 수도 없고,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죄를 용서 받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죄를 감추는 까닭은 나의 위신과 체면 때문이고, 남들은 내 죄를 알지 못하기에 내가 감추면 얼마든지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 앞에서는 통할 수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주님은 다 알고 계신다. 주님은 내 죄를 환히 다 들여다보고 계시지 않은가! 주님 앞에서는 죄를 숨길 수 없고, 피할 곳도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좋고 편할 것인가!
죄를 고백하면 주님은 너그러이 다 용서하시고 그 증거로 성령을 내려주신다. 성령이 임해야 내 죄가 사함 받았음을 깨닫게 되고, 구원받은 확신과 기쁨과 감격이 샘솟게 된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거듭난 새 사람이 된 것이다. 여기에 성령의 능력이 임한다(행 1:8).
② 둘째 단계는 주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다(14절). 이스라엘의 실패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은 지킬 수 있는 율법이 아니었다. 인간은 지극히 작은 율법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왜? 전적으로 무능력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것을 깨닫고 겸손히 엎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인간들은 방자하게도 자기가 율법을 다 지켜 행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인간의 능력을 과장(誇張)하고 과시(誇示)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되어 저주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고, 우리를 친구로 삼으려고 하신다. 십자가의 세례, 곧 피의 세례(눅 12:49-50)를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의 불을 내려주시고 우리를 능력 있게 하셔서 죄를 이기면서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살게 하시고, 더 나아가 우리 각자가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면서 살도록 하신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아야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게 된다. 친구 관계는 상호 주고받는 관계다. 그런데 주님이 먼저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신다. 우리는 이런 기도 응답의 체험을 많이 가져야 비로소 주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내 힘으로는 안 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데 그 권능은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고, 주님의 명령을 지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그때에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시라 고백할 수 있게 된다”(고전 12:3; 고후 12:18).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③ 셋째 단계는 목숨까지도 드리는 것이다(13절). 우리가 죄를 사함 받고,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으면서 주님의 사랑을 맛보면서 살게 되면 행복이 충만해진다. 7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약속하셨다. 성경의 위인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의 체험을 많이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살아 계심과 나를 사랑하심을 깨닫게 되고, 성경의 말씀을 확신하게 되고,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께 내 생명도 드릴 마음이 일어난다.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규정하면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삼상 12:23a)라고 약속하였다. 기도하기를 게을리하는 것은 “자기 힘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교만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기도생활이 발전하면 주님은 비밀을 주신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라고 하였고, “하나님이 그의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고(엡 1:9), 계시로 나에게 비밀을 알게 하셨다고 하였다(엡 3:3). 주님과의 깊은 교제에 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주님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는 다니지만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성전 뜰만 밟고 다닌다. 습관적으로, 교양 삼아서, 자녀 교육을 위해서, 사업 목적으로, 선거에 표를 얻기 위하여, 심지어는 교회를 파괴할 악한 목적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교회에 다니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결단(決斷)하자.
☞ 1982년 12월, 막내딸이 만 2살 반이었는데, 내가 밖에 나갔다가 오면서 표지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성화가 있는 83년도 새 달력을 가지고 왔다. 이것을 본 딸이 물었다. “아빠, 하나님이 왜 피를 흘리시지?” 그때 내가 지체 없이 퉁명스럽게 대답하기를 “너 때문이야.”라고 했다. 아이가 깜짝 놀라서 울먹이면서 대답하기를 “아니야, 내가 안 그랬어. 진짜로 내가 안 그랬는데...”라고 했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너 때문이고, 네 오빠 때문이고, 또 네 언니 때문이고, 또 아빠와 엄마 때문이다.”라고 가르쳐주었다.
일 년 후 84년도 새 달력을 얻어 집에 돌아왔는데, 역시 십자가 성화가 있었다. 내가 딸아이를 보자 문득 작년의 일이 생각나서 아이에게 “예수님이 왜 이렇게 피를 흘리시지?”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지체 없이 대답했다. “나 때문에요. 또 오빠와 언니 때문에요. 또 엄마와 아빠 때문에요.” 일 년이 지났는데도 잊지 않고 있었다. 내 마음에 깊은 감격이 일어났다.
“맞아. 네가 지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지만, 너는 깨닫고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다음에 저 나라에 가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