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김제 벚꽃축제 & 전주한옥마을
완주 송광사 벚꽃축제
종남산 아래에 자리한 사찰로, 867년(경문왕 7)에 체징(體澄)이 창건하였습니다. 그 뒤 폐허화돼 있다가 1622년(광해군 14)에 응호(應浩) · 승명(勝明) 등이 중창하면서 벽암(碧巖)을 초빙하여 50일 동안 화엄법회를 연 후 1636년(인조 14)에 각성(覺性)이 다시 중창하기까지 계속 큰 불사를 벌여 대가람을 이룩하였습니다. 봄이면 송광사로 들어가는 길 2.2km는 40년생 벚나무 300여 그루가 길 양옆을 덮는 벚꽃터널을 이뤄 우리나라 명품 벚꽃길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완주 구이저수지 왕벚꽃축제
구이저수지 둑길의 벚꽃은 조성한 지가 50년이 되었습니다. 1962년 저수지 둑을 쌓으면서 300m 정도에 100여 그루를 심은 것입니다. 모악산과 경각산에 둘러싸인 저수지에 봄이 찾아오면 둑방길 아래 흐드러지게 왕벚꽃이 피어 환상적인 풍경이 연출됩니다. 경각산 자락의 태봉(胎峯)은 조선 왕조 예종의 태실이 있었던 곳으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입니다. 경각산은 아버지 산, 모악산은 어머니 산입니다. 이곳 두현리 두방마을을 종점으로 조성된 태봉마실길을 걸으면 봄의 정취를 맘껏 느낄 수 있습니다.
김제 금산사 벚꽃
드넓은 평야로 유명한 김제에도 이름난 산이 하나 있습니다. 해발 794m의 모악산입니다. 모악산 자락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되고, 776년에 진표율사가 고쳐 지어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보물 10점을 보유한 유서 깊은 도량으로 있으며, 호남제일의 고찰로 손꼽힙니다. 목조 미륵전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삼층법당으로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소된 것을 재건한 것으로, ‘미륵’은 장차 중생을 구제하러 온다는 부처의 이름입니다. 보물 제 26호 방등계단에 올라 바라보는 미륵전과 절 풍경도 근사합니다. 봄철이면 산 입구에서부터 금산사까지 늘어선 수만 그루의 40-60년생 벚나무의 장관을 보려고 각지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로 붐빕니다. 미륵전 미륵보살상은 옥내 입불로서는 세계 최대이며, 삼존불 중 가운데 미륵불상이 11.82m, 좌 · 우 불상은 8.8m나 됩니다.
전주 한옥마을
전주 완산구 교동(校洞) · 풍남동(豊南洞) 일대 25만2000여㎡에 700여 채의 전통 한옥으로 이뤄져 있는 특별한 곳입니다. 을사조약 이후 전주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부성의 서쪽 외곽을 주거지로 택했다고 합니다. 본래 상인이나 천민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차지한 일본인들은 현대적인 기술을 도입해 신식 건물을 짓고 도로를 정비하였습니다. 침입자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주 사람들이 풍남문 동쪽에 형성한 것이 바로 한옥마을입니다.
그러므로 일대에 한옥들이 들어선 건 100년 전. 따라서 수백 년이 넘은 고택은 거의 드물고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지어진 근현대 한옥이 대부분입니다. 해방 당시 한옥마을은 재력가들이 사는 동네였지만, 점차 퇴락해 슬럼화가 진행됐습니다. 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정해지면서 개발이 어려워진 탓입니다. 당시 이 한옥보존지구에 들어 있는 한옥들은 모두 824채에 이르렀습니다.
오목대라는 곳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보면 그 언저리에 무리를 지어 들어선 팔백 채가 넘는 한옥들의 까만 기와지붕들이 고풍스런 아름다움의 장관을 이루어 전주의 고전 도시다움을 한눈으로 고스란히 읽게 해줍니다. 1999년 전주시가 이 일대를 전통문화특구로 지정하고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 새로운 명소로 부활했습니다. 팔작지붕의 한옥들이 조선시대 건축물과 함께 독특한 풍광을 빚어내고 있는 사이로 빛바랜 간판을 매단 이발소나 세탁소, 벽촌에서나 봄직한 허름한 구멍가게 등이 뒤섞여 시간을 40-50년 되돌려 놓은 것 같습니다. 손때 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흑백사진 같은 풍경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한옥마을의 척추라고 할 수 있는 태조로를 따라 한옥마을 관광안내소와 전통 공예품 판매장, 공예품 전시관 등이 좌우로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전북지역 최초로 국제 슬로시티로 지정되었으며 미국 뉴욕타임즈에 국내·외 식도락가들이 꼭 한 번쯤은 들러야 하는 문화명소로 소개되며 전 세계 관광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경기전(慶基殿)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은 신라 때 사람으로 이성계의 20대 조상입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후 역대 임금들이 건지산 기슭에 있다는 시조의 무덤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러나 몇 백 년이 지나도 발견되지 않으니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영조가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경기전 안에 조경묘(肇慶廟)를 세워 이한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태종은 즉위 11년 되는 해(1410)에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하는 전각을 짓고 어용전이라 하였는데, 왕조의 발상지라 여기는 전주에 세운 ‘慶基殿’은 세종 때 붙인 이름입니다. 태조 어진은 난리 때마다 피란 가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이 결과 전국에 있던 26점의 태조 어진이 모두 사라지고 전주 경기전 어진만이 조선시대에 그려진 진본으로 남았습니다.
1899년 광무2년에 이한의 무덤자리를 알리는 비석을 한 나무꾼이 발견하여 거의 천년 만에 그의 무덤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새로 찾은 무덤자리에다 봉분을 모으고 무덤 앞에는 제단을 쌓고 그 제단 옆에는 비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肇慶壇’(조경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철따라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시조묘인 조경단은 전북대학교 뒤편에 있습니다. 경기전이 특별한 이유는 조선 왕들의 어진과 함께 족보인 선원록, 고려사절요 등의 사서를 보관한 전주 사고가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주사고는 조선시대 4대 사고(史庫)의 하나로 1439년(세종 21) 사헌부의 건의로 지금의 전주시에 있던 경기전 안에 설치되었습니다.
현존 건물은 1991년에 새로 건립한 것으로 내부에는 전주사고의 역사에 관한 전시물과 조선왕조실록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주 사고는 드라마 <궁>에서 궁 내의 비밀스러운 공간인 서고로 나온 곳이기도 합니다. 본전에서 전주 사고로 가는 길 우측으로는 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눈에 잡아끄는 아름다운 대나무 숲이 있습니다. 이 장소 또한 드라마 <궁>의 촬영지였습니다. 봄, 가을에 특히 아름다운 경기전은 드라마 <용의 눈물>, <왕과 비>, <명성황후> 등 많은 사극의 배경지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경기전의 경역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보물 931)을 봉안한 정전(正殿)과 조경묘(肇慶廟)로 나뉩니다.
전동성당(殿洞聖堂)
전동성당은 한국 천주교사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곳에 천주교 성당을 짓게 된 이유는 1791년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여기에서 효수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19세기 말에 천주교 신앙이 허용되면서 전주시에도 선교사가 들어왔습니다. 1891년에는 전주성당(현재의 전동성당) 주임인 보두네 신부가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민가를 사들여 임시 본당으로 삼았습니다. 본당이 처음 생겼을 때에 전주읍성 주변에 신자는 거의 없었고, 주로 산골지역에 신자가 밀집해 있었으나, 1894년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는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나면서 신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성당보다 더 큰 성당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후 1908년 명동성당의 내부를 건축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성당이 착공되었습니다. 성당은 1914년에 비로소 외관 공사가 끝났으며, 이후로도 계속 공사가 진행되어 1931년에 완공되었습니다. 호남 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 바로 전동성당입니다. 중앙의 종탑과 양쪽 계단에는 비잔틴 양식의 뾰족 돔을 올렸으며, 성당 내부의 석조 기둥에도 비잔틴 양식이 녹아 있습니다. 곡선미를 최대로 살린 로마네스크 및 비잔틴 양식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동양에서 제일가는 성당 건물로 꼽히고 있습니다.
전동성당은 화강암을 주춧돌로 하여 붉은 벽돌로 지어졌습니다. 주춧돌인 화강암은 착공 당시인 1908년에 대한제국을 간접 통치하고 있던 일본 제국 통감부가 헐은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 돌을 이용하였고 성당을 구성하는 벽돌의 일부도 헐린 성벽에서 나온 흙을 구워 만들었습니다. 전동성당은 아름답습니다. 얼핏 서울의 명동성당이 떠오르지만 조금 작아 보입니다. 명동성당은 고딕 양식, 전동성당은 비잔틴 풍의 로마네스크 양식이라는 차이도 있습니다. 명동성당은 아버지 성당, 전동성당은 어머니 성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올해로 100년 역사의 전동성당을 한국 멜로영화의 걸작이라는 <약속>에서 주인공의 성당 결혼식 장소로 기억하고 있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오늘도 전동성당은 어머니의 따뜻한 눈길로 웨딩 촬영을 하는 예비부부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오목대(梧木臺)
오목대와 이목대는 마주하고 있는데, 옛날 오동나무와 배나무가 가득해 ‘오목대' ‘이목대’라고 했습니다. 오목요대(梧木瑤臺)라 부르기도 하는데 요대(瑤臺)는 아름다울 요(瑤), 물건을 얹는 대(臺)로 ‘옥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누대’를 말하며 오목대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낸 이름입니다. 고려가 한참 기울어져 가던 14세기 후반, 왜구는 고려와 명나라를 번갈아 침범하며 마구잡이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로 임명해 남쪽으로 파견합니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기 12년 전인 고려 우왕 6년(1380년)의 일입니다.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의 이지란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가, 운봉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의 왜구를 완전 소탕했습니다. 이 전투가 바로 유명한 황산대첩(荒山大捷)입니다. 이성계는 대승을 거두고 귀경하던 중, 선조들의 땅인 전주에 이르러 전주이씨 종친들을 불러 모아 오목대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성계는 흥에 겨운 나머지 한나라 고조의 ‘대풍가(大風歌)’를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유방은 숙적 항우를 타도하고, 통일국가를 실현시킨 뒤 고향인 패(沛)로 개선해 연회를 개최했습니다. 연회가 무르익자 유방은 스스로 악기를 들고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읊었습니다.
‘큰바람이 일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위풍을 해내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쏘냐(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1900년, 고종은 태조를 기리기 위해 오목대 정상에 비석을 세우고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고 친필로 썼습니다. 여기서 ‘태조고황제'는 고종이 1897년 황제 위(位)에 오르면서 태조에게 올린 시호(諡號)입니다. 그리고 ‘주필(駐畢)’이란 임금이 머무른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