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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공헌하는 인재 육성, 정선전씨 필구公 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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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welcome everybody) 스크랩 윤선도의 고산(孤山)
한강의 언덕 추천 0 조회 24 16.07.18 11: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윤선도의 고산(孤山)

번역문
생시런가 꿈이런가 백옥경(白玉京)에 올라가니
옥황(玉皇)은 반기시나 신선들이 꺼리도다
두어라 오호연월(五湖煙月)이 내 분수에 맞도다

 

풋잠에 꿈을 꾸어 십이루(十二樓)에 들어가니
옥황은 웃으시되 신선들이 꾸짖도다
어즈버 백만억(百萬億) 창생(蒼生)을 어느 결에 물으리

 

하늘이 이지러질 때 무슨 수로 기웠는고
백옥루(白玉樓) 중수할 때 어떤 바치* 이뤘는고
옥황께 아뢰보려 하다가 다 못하고 왔도다

 

*바치 : 장인, 기술자를 이르는 옛말
원문

- 윤선도(尹善道, 1687~1671), 『고산유고(孤山遺稿)』 권6 「몽천요(夢天謠)」

해설
   윤선도는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남긴 조선시대 대표적인 국문시가 작가이다.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을 노래한 「오우가」는 윤씨의 종가가 있는 해남의 금쇄동에서 지었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란 구절로 익숙한 「어부사시사」는 남해의 섬 보길도에서 지은 40수의 장편 시조이다. 해남과 보길도는 그의 작품으로 인해 지금은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생각하며 이곳을 찾는다. 그런데 윤선도는 본래 서울 사람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8살에 윤유기(尹惟幾)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젊은 시절 30년을 서울에서 보냈다. 서른이 되던 해, 당시의 권력자인 이이첨(李爾瞻)의 처단을 청하는 상소를 광해군에게 올렸다가 두만강가의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갔다. 이를 시작으로 경상도 기장과 영덕, 평안도 삼수, 전라도 광양 등 귀양지로는 가장 험악한 지역에서만 15년을 보냈다. 남인을 대표하는 정치적 명성에 걸맞지 않게 85년 생애 가운데 실제 관직 생활을 한 것은 8년 남짓에 불과하다. 유배와 관직에서 풀려나서는 해남에서 20년, 보길도에서 10년, 나머지 2년 남짓은 고산이란 곳에서 거처하였다.

 

   효종은 왕위에 오르자 1652년 3월 27일, 왕자 시절 스승으로 모시던 윤선도를 보길도에서 불러올려 승정원의 승지로 임명하게 되는데, 당시 집권층인 서인의 반발과 모함이 극심하였다. 결국, 임명된 지 7일 만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고 만다. 넉 달 후인 8월 11일에 다시 예조 참의에 임명되지만, 이번에는 서인의 거물 원두표(元斗杓)를 공격하다 석 달 만에 관작을 삭탈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즈음에 또 하나의 걸작인 위의 「몽천요(夢天謠)」가 탄생한다. 이 「몽천요」는 승지에서 물러나 고산에 잠시 거처하던 1652년 5월에 지은 시조이다. 당시 효종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서도 허무하게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효종을 옥황상제에, 자신을 배척한 서인을 신선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고산이 해남이나 보길도에 있는 산 가운데 하나이려니 생각한다. 고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윤선도와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이자 숙종 때 남인의 영수로 활약한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쓴 그의 비문 말미에 간략히 보인다.

 

   공(公)이 바다(보길도)로 들어간 뒤로 나는 그를 해옹(海翁)이라 불렀다. 당시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불렀다. 더러는 고산선생(孤山先生)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고산은 서울 동쪽 교외 강가에 있는 그의 구업(舊業)을 가리킨다. (허목, 「해옹윤참의비(海翁尹參議碑)」)

 

   서울 동쪽 한강 가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와 집이 있어 임금의 부름에 언제든 응할 수 있는 이곳을 임시거처로 삼은 것이다. 6년이 지난 1658년에는 공조 참의로 부름을 받아 5개월간 벼슬을 한 후 이곳 고산으로 다시 물러나 2년 가까이 지내게 되는데, 당시의 최대 현안인 효종의 왕릉 위치를 정하는 일과 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을 정하는 문제로 서인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 무렵 고산의 집 앞에 흐르는 한강이 홍수로 한때 범람한 적이 있었다.

 

「고산만 홀로 범람하지 않았기에[孤山獨不降]」

 

푸른 물결이 별안간 푸른 바다로 넘실넘실
어디가 들이며 강물인지 구별할 수가 없네
무슨 일로 이 고산만 매몰되지 않았는지
일천 언덕 일만 구릉 금세 물에 잠겼는데

 

滄浪便作靑溟闊 창랑변작청명활
莫辨長郊與大江 막변장교여대강
底事玆山不埋沒 저사자산불매몰
千岡萬阜忽騈降 천강만부홀변강              -이상현 역-

 

   윤선도가 1659년 여름에 지은 시이다. 한강 가에 홀로 외롭게 솟아나 있어 다른 곳은 다 잠기고 그가 사는 고산만 물 위로 드러나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 반대파에 둘러싸여 싸우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그린 것이다. 그래서 윤선도는 이 산을 굳이 고산이라 불렀나 보다.

 

   고산의 정확한 위치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근래에 와서야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는 퇴미재산으로 밝혀졌다. 이 산은 강가의 평지에 돌출한 산으로 그 아래는 조선시대 한강을 건너는 미음나루[渼陰津]가 있었고 앞에는 한강에서 강폭이 가장 넓은 미호(渼湖)**가 흐르고 있었다. 또한 퇴미재산 너머에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를 대표하는 청음 김상헌을 제향한 석실서원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강 북쪽의 남양주시가 미금시(渼金市)란 이름으로 불렸고 강 남쪽에 라이브 까페촌으로 유명한 미사리(渼沙里)가 있는 것은 이 미호란 강 이름과 관련이 있다.

 

   윤선도는 재주가 다양하여 효종의 왕릉터를 잡는 일에 직접 관여할 만큼 풍수지리에도 밝았다. 그러한 그가 살던 곳답게 고산은 아름다운 한강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에는 남인의 거두 윤선도가 거처하던 집과 서인계 서원을 대표하는 석실서원이 고산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자리해 있었지만, 지금은 두 곳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지고 ‘석실서원지’라 쓴 표석 하나와 몽천요 시비(詩碑)만이 과거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다.

남양주시 수석동에 세운 몽천요 시비

**미호(渼湖) : 예전에 한강은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미호는 상류의 덕소강이 거의 직각으로 꺾여서 내려오고 바로 아래엔 왕숙천이 합류하기 때문에 호수처럼 넓고 잔잔한 것이 마치 호수와 같다 하여 미호라 불렀다. 중랑천이 합류하는 동호(東湖)나 안양천이 합류하는 서호(西湖)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머지 한강은 송파강, 동작강, 용산강, 노들강, 마포강처럼 강으로 불렀다.

최채기
글쓴이최채기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주요 저·역서
  • 『고전적정리입문』, 학민문화사, 2011
  • 『서울2천년사』(공저),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4
  • 『승정원일기』(인조/영조/고종대) 번역에 참여
  • 『홍재전서』,『졸고천백』,『기언』,『명재유고』,『성호전집』번역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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