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께 삼배드립니다. ()()()
삼봉 정도전의 불씨잡변 중에 불가의 性과 作用에 대한 내용이 심히 왜곡된 것으로
보이고, 心跡과 道와 器에 대한 내용도 불법을 몰이해한 것으로 보이는데, 큰스님께서 바로 잡아주시길
바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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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 작용이 성이라는 변 佛氏作用是性之辨
나는 살피건대, 불씨(佛氏)의 설에서는 작용(作用)을 가지고 성(性)이라고 하는데,
방 거사(龐居士)의 이른바 '먹을 물과 땔나무를 운반하는 것이 모두 묘용(妙用) 아닌 것이 없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안】방거사의 게송(偈頌)에 '날마다 하는 일이 별 다름이 없으니, 내 스스로가 할 일을 하는 것뿐이네. 취할 것 취하고 버릴 것 버리고 과장하지도 말고 어긋나게 하지도 말 것. 신통(神通)에다 묘용(妙用)을 겸한 그것이 바로 먹을 물과 땔나무를 운반하는 것일세.'하였다.
대개 성(性)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태어난 이(理)이고, 작용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태어난 기(氣)이다. 기가 엉기어 모인 것이 형질(形質)이 되고 신기(神氣)가 된다. 그러므로 마음의 정상(精爽)함이나 이목(耳目)의 총명함이나 손으로 잡음이나 발로 달림과 같은 모든 지각(知覺)이나 운동을 하는 것은 모두 기(氣)이다. 그러므로, '형(形)이 이미 생기면 신(神)이 지(知)를 발(發)한다.' 하나니, 사람에게 이미 형기(形氣)가 있으면 이(理)가 그 형기 가운데에 갖추어진다. 마음에 있어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과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정(情)이 되고, 머리 모양에 있어서는 지(止)가 되니, 이런 등속의 것은 모두가 당연한 법칙이라 바꿀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理)이다.
유 강공(劉康公)은 말하기를,
'사람이 천지의 중(中)을 받아 태어났으니 이른바 명(命)이다. 그러므로 동작(動作)·위의(威儀)의 법칙을 두어 명(命)을 정(定)한다.'
하였다. 그가 말하는 '천지의 중(中)이다.'고 한 것은 곧 이(理)를 말함이요, '위의의 법칙이다.'고 한 것은 곧 이(理)가 작용에 발(發)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자(朱子)도 말하기를,
'만일 작용을 가지고 성(性)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칼을 잡고 함부로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감히 성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또 이(理)는 형이상(形而上)의 것이요, 기(氣)는 형이하(形而下)의 것인데, 불씨는 스스로 고묘 무상(高妙無上)하다 하면서 도리어 형이하의 것을 가지고 말하니 가소로울 뿐이다.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우리 유가의 이른바 '위의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과, 불씨의 이른바 '작용이 성'이라고 하는 것을 놓고서, 안으로는 심신(心身)의 체험에 비추어 보고 밖으로는 사물(事物)의 증험(證驗)에 비추어 본다면 마땅히 저절로 얻는 바가 있으리라.
불씨 심적의 변 佛氏心跡之辨
마음이라는 것은 한 몸 가운데의 주(主)가 되는 것이요, 적(跡)이라는 것은 마음이 일에 응하고 물에 접(接)하는 위에 발하여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 적(跡)이 있다.'고 하였으니 가히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사단(四端)이나 오전(五典)이나 만사(萬事)·만물의 이(理)는 혼연(渾然)히 이 마음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는지라, 그 사물이 옴에 있어 변함이 한결같지 않으나 이 마음의 이(理)는 느낌에 따라 응하여 각각 마땅한 바가 있어 어지럽힐 수가 없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어쩌나 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기 마련이니, 이는 그 마음에 인(仁)의 성(性)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어린 아이를 볼 때 밖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측연(惻然)한 것인데 마음과 적(跡)이 과연 둘이겠는가? 수오(羞惡)니 사양(辭讓)이니 시비(是非)니 하는 것도 모두 이와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내 몸에 접하는 바에 비추어 보자. 아버지를 보면 효도할 것을 생각하고, 아들을 보면 사랑할 것을 생각하고,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으로 하고, 신하를 부림에는 예(禮)로써 하고, 벗을 사귐에는 신(信)으로 하는 것, 이런 것은 누가 그렇게 시켜서 하는 것일까? 그 마음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이 있기 때문에 밖으로 말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으니, 이른바 체(體)와 용(用)이 한 근원이요, 현(顯)과 미(微)에 사이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의 학(學)은 그 마음을 취하나 그 적(跡)을 취하지 않고, 표방하여 말하기를,
'문수(文殊) 보살〔大聖〕이 술집에서 놀았는데, 그 행적은 비록 그르나 그 마음은 옳다.'
고 하는가 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유(類)의 것이 매우 많으니, 이는 마음과 행적이 판이(判異)한 것이 아니냐?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불씨의 학에는 경으로 안을 곧게 함〔敬以直內〕은 있으나, 의로써 밖을 방정케 함〔義以方外〕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막히어 고루(固陋)한 자는 고고(枯槁)한 데로 들어가고, 소통(疏通)한 자는 방자(放資)한 데로 돌아가니, 이것은 불씨의 교(敎)가 좁은 까닭이다.'
하였다.
그러나 의로써 밖을 방정케 함이 없으면 그 안을 곧게 한다는 것도 결국은 옳지 않은 것이다.
왕 통(王通)이란 사람은 유학자(儒學者)이면서도 또한 말하기를,
'마음과 적(跡)은 판이한 것이다.'
하였으니, 불씨의 설에 미혹된 무지한 자다. 그러므로 여기에 아울러 언급해 둔다.
불씨가 도와 기에 어두운 데 관한 변 佛氏昧於道器之辨
도(道)란 것은 이(理)이니 형이상(形而上)의 것이요, 기(器)란 것은 물(物)이니 형이하(形而下)의 것이다.
대개 도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와서 물마다 있지 않음이 없고, 어느 때나 그에 해당되지 않음이 없다. 즉 심신(心身)에는 심신의 도가 있어서 가까이는 부자·군신·부부·장유·붕우에서부터 멀리는 천지 만물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도가 있지 않음이 없으니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하루도 그 물을 떠나서는 독립할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내가 모든 일을 처리하고 물건을 접촉함에 또한 마땅히 그 각각의 도를 다하여 혹시라도 그르치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유가의 학이 내 마음과 몸으로부터 사람과 물건에 이르기까지 그 성(性)을 다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는 까닭이다.
대개 도(道)란 비록 기(器)에 섞이지 않으나 또한 기에서 떠나 있지도 않은 것이다. 그런데 저 불씨(佛氏)는 도에 있어서는 비록 얻은 바가 없으나, 그 마음을 쓰고 힘을 쌓은 지 오랜 까닭에 방불(戴揺)하게 본 곳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대통〔管〕으로 하늘을 본 것과 같은 것이라, 한결같이 한갓 위로만 올라갈 뿐이요, 사통팔달(四通八達)할 수가 없어서 그 본 바가 반드시 한쪽의 치우친 데로 빠진다.
도(道)가 기(器)와 섞이지 않음을 보고는, 도와 기를 나누어 둘이라고 하여, 이에 말하기를,
'무릇 상(相)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본다면 곧 여래(如來)를 볼 것이다.'
【안】이 한 단(段)은「반야경」(般若經)에서 나왔으니 '눈 앞에는 법이 없으니, 눈에 부딪히는 것은 모두가 그러하다. 오직 이와 같은 것을 안다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고 하여, 반드시 모든 존재〔有〕를 파탈(擺脫)하려고 하다가 공적(空寂)에 떨어지는가 하면, 그 도가 기(器)에서 떠나지 않음을 보고는 기(器)를 가지고 도(道)라 하여, 이것을 말하기를,
'선(善)과 악(惡)이 모두 마음이요, 만법(萬法)이 오직 의식〔識〕이다. 그러므로 일체에 수순(隨順)하되 하는 일이 다 자연 그대로이기도 하고, 그와 반대로 미쳐 날뛰고 하고 싶은 대로 하여 온갖 짓을 못할 것이 없기도 하다.'
【안】'선한 마음이 생기면 일체에 수순하되 하는 일이 다 자연 그대로에 맞고, 악한 마음이 생기면 미쳐 날뛰고 하고 싶은 대로 하여 못할 짓이 없으니, 이러한 마음의 지닌 것이 곧 의식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선이나 악이나 마음이 아니면 의식이 없고, 의식이 없으면 마음도 없나니, 마음과 의식이 상대되어 선과 악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고 한다. 이것은 정자(程子)가 이른바 막히어 고루(固陋)한 자는 고고(枯槁)한 데로 들어가고 소통(疏通)한 자는 방자한 데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도(道)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지만, 이는 도리어 형이하(形而下)인 기(器)에 떨어지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니 애석한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