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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한국사 |
세계사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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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 |
대동법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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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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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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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 |
상평통보 주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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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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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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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5 |
탕평책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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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 |
균역법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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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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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차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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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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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독립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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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5 |
이승훈의 천도교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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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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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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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 |
수원화성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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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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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제국의 독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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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 |
홍경래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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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 |
기해박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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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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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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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 |
최제우 동학 창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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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 |
진주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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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 |
흥선대원군 집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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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 |
병인양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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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 |
신미양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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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별무리모둠 선정 <조선후기> 중요 5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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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 |
중요 사실 |
선정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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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
조선 후기 어려운 대내외 상황 속에서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개혁에 대해 알아보고 그 효과와 한계에 대하여 알아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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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탕평책 실시 |
조선시대에는 붕당간의 다툼이 많았다. 특히 후기로 가면 노론을 중심으로 한 장기집권가문 즉 벌열이 성립된다. 이들은 정치적 실권을 독점하고 부정수단으로 자제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그 지위를 세습시키는 등 악행을 저지른다. 이로 인해 왕권이 약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영․정조가 실시한 탕평책을 살펴보고 균형의 중요성을 생각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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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실학의 등장 |
실학은 백성들이 잘 살고 나라가 튼튼해지는 방법을 탐구한 학문이다. 실학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살펴보고 실학이 정치에 반영될 수 없었던 상황을 살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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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독도 분쟁(안용복이 우리영토임을 확인받음) |
안용복이 일본에 가서 독도가 우리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이 영토라고 우기는 상황에서 반박할 수 있는 근거를 살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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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강화도 조약 |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조약인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일본과 같이 자주권을 가진다는 것, 항구 개항, 일본의 조선 해양측량권 허용, 치외법권 허용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해양측량권, 치외법권 등을 허용한 불평등 조약으로 국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볼 수 있다. |
흥선대원군의 개혁 옳았을까?
별무리 모둠 : 김은진, 김치범, 이지혜, 조선아
발표자 : 김치범
18세기부터 탐험과 측량을 구실로 우리나라에 접근해 온 서양 세력은 19세기 이후로는 조선에 직접 통상을 요구해 왔다. 그리고 조선에서 세도 정치가 실시되던 19세기에 서양 여러 나라들은 산업 혁명을 거쳐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하여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구하기 위해 아시아를 침투하고자 시도해 왔다. 19세기 중엽에는 서양 선박의 빈번한 출몰과통상 요구가 있었고, 아편 전쟁에서 이긴 영국의 중국 문호 개방,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영․프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는 사건, 미․일 수호 조약의 체결, 러시아의 연해주 일대 확보 등 대외적 상황의 변동은 조선 사회의 큰 충격을 주었고 위기 의식을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외세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군제 개혁과 군비를 강화하는 등 국방력을 강화하였으며, 열강의 통상 요구를 거절하고 서양 상품의 유입을 엄금하였으며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이러한 대외정책은 그 당시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 곧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를 도굴한 사건, 두 차례의 외세 침공(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횡포와 문화재 약탈 등 서구열강의 위협 문제는 대원군으로 하여금 열강에 대해 경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에 따른 자구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는 또한 대원군이 중시했던 백성을 편안케 하고 조선을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게 하려는 국제적 공존을 위한 정책이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쇄국정책을 통해 개항과 개방을 막고 발전의 기회를 차단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쇄국정책을 통해 서구의 문물과 과학기술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고, 발전과 부흥의 계기를 막았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를 역행한 시대착오론자'라는 평가와 '왕권 강화 및 국권 융성을 꾀한 개혁가'라는 평가도 엇갈린다. 그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모두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개항의 시기가 늦어졌고 결국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고 발전이 늦어지게 되었다. 발전이 늦어지게 되면서 발달이 늦어지고 결국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대외적 사정에 밝지 못했고 단지 서양문물을 이단이라 배척하며 받아들이지 못했다. 물론 무분별하게 문물을 받아들였다면 큰 혼란을 가져다 주었겠지만 적절하게 받아들였다면 분명히 우리나라는 식민지 상황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로 말미암아 지금의 우리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의 생각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기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생각이 나오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물론 자기 자신만의 생각이나 의견이 옳을 수도 있으나 남의 의견과 생각을 겸허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시대에 맞는 적절한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는 능력을 길러야한다.
첫댓글 * 김치범 : 공동 삶의 원리가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주제를 좀 더 다듬으세요.
다시 말하겠습니다. 공동 삶의 원리가 명료히 드러나도록 발표 제목을 수정하세요.
밑에 수정하였습니다.
* 김치범 : 1) 흥선대원군의 개혁 옳았을까? ->> 2)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구하기 위해 아시아를 침투하고자 시도해 왔다. ->> 3) 19세기 중엽에는 서양 선박의 빈번한 출몰과통상 요구가 있었고, 아편 전쟁에서 이긴 영국의 중국 문호 개방,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영.프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는 사건, 미.일 수호 조약의 체결, 러시아의 연해주 일대 확보 등 대외적 상황의 변동은 조선 사회의 큰 충격을 주었고 위기 의식을 느끼게 하였다. ->>
4) 물론 무분별하게 문물을 받아들였다면 큰 혼란을 가져다 주었겠지만 적절하게 받아들였다면 분명히 우리나라는 식민지 상황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로 말미암아 지금의 우리를 살펴봐야 한다. ->> 5) 우리는 자기 자신만의 생각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기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생각이 나오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 6) 물론 자기 자신만의 생각이나 의견이 옳을 수도 있으나 남의 의견과 생각을 겸허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 7) 그리고 그 시대에 맞는 적절한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
8) 지금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는 능력을 길러야한다. ->>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일시적인 해결책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공부법에도 적용시켜 볼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할 때 있어 근본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공부를 할 때 때론 본질에 필요하지 않는 것을 버릴줄 알아야합니다.
저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변화 속 나름의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원군이 내세웠던 개혁은 그저 임기응변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열강의 침입이 잦아지고 많은 혼란을 겪는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고 본질적인 해결을 하려고 노력해야 했습니다. 제국주의가 팽배하였던 그 시대의 요구에 조금만 발맞춰 시야를 넓혔다면 조선이 결국 일본에 넘어가는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공부해야 하고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하며 정책을 잘 세워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깊이 남습니다. 지도자의 가치판단이 국가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 이익을 고려하며 시대정신에 따라갈 줄 알아야 합니다.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은 이미 청이 서양과의 충돌 때문에 곤경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서양의 통상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조선이 그러한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나온 정책인 것 같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장기적인 안목을 가졌더라면 어땠겠느냐는 아쉬움이 든다. 즉, 흥선대원군이 단기적이 아닌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역사는 다르게 쓰였을 수도 있다는 말로 이를 통해 우리는 지도자의 생각이나 태도가 한 조직의 앞날을 결정하기 때문에 지도자 선출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개혁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약 60년간 행해진 세도정치 때문에 발생한 정치적 문란과 그로 말미암은 사회적 문란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재정수입원인 전정, 군정, 환곡을 칭하는 삼정의 문란을 들 수 있는데 삼정은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을 줄 뿐 아니라 국가의 재정까지도 위협하였다. 그리고 조선을 이씨의 왕조라고는 하지만 세도정치가 성행하였을 때는 김씨나 조씨의 세도가의 세력이 막강했으므로 개혁을 통해 그들의 세력을 눌러 왕권 강화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힘없는 왕실은 이런 혼란을 직접 보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개혁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왕실에서 쫓겨나 민중들 삶에서 살던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문제점을 직접 겪고 있었기에 제대로 된 개혁을 할 수 있었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고 환곡제도를 사창제도로 바꿔 삼정의 문란을 잡았으며 출신에 상관없는 과감한 인재 등용책을 써서 세도가의 힘을 눌렀다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이것을 통해 우리는 직접 겪지 않고는 고통을 알 수 없으며 고통을 알아야만 그에 맞는 정책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흥선대원군과 같이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만들려는 실질적인 실천 태도를 보여야 한다.
흥선대원군이 실시하였던 개혁 정책은 그 필요성이 줄곧 강조되고 있었으나, 양반 관료들의 압력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압력을 이겨내고 하지 못했던 개혁을 해냈습니다. 양반 관료들의 압력을 이겨내고 필요한 일을 하였던 흥선대원군의 결단력과 주체성은 본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빠르게 변화하는 반면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과거 지향적인 면이 강했기 때문에 결국 조선을 낙오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흥선대원군처럼 변화에 발맞추지 못한다면 현재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처럼 단기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현재에 충실하여 장기적인 부분까지 고려하는 안목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고 판단한 현실적인 대책 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금 더 멀리 보면 쇄국정책이 결코 좋은 선택 이였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지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다른 문화를 겸허하고 현명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정책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깨달을 수 있었던 것처럼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먼 미래를 예측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깨닫고 시대의 변화에 견주어 맞춰가는 것이 더 열린 시각을 갖게 해 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김유경 : 1) 현실적인 대책 이였을지도 모릅니다. ->> 2) 좋은 선택 이였다고는 ->> * 1)과 2)가 잘못인 이유를 [우리말 바루기]에 밝히세요.
저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비단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서구의 근대화모델을 답습, 모방하는 것만이, 즉 서구화가 곧 근대화의 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구의 문물을 더 세련되고 진보된 가치인양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서구우월주의나 외재선호풍조 등이 현대사회에 팽배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펴지 않고 서양 열강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면, 문화가 공존되기는커녕 서양의 문화에 의해 우리 고유의 문화가 동화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저는 쇄국정책이 우리민족의 주체성을 발휘한 일대의 사건이며, 우리 고유의 문화를 수호하기 위한 민족의 노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우리나라의 주체성을 돈독히 하는 것과 백성이 열강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쇄국정치로 발전이 늦게 되고, 그 때문에 왜의 침략을 받게 된다. 흥선대원군이 좀 더 깊게 생각했더라면 쇄국정치 말고 다른 기발한 생각을 얻었을 것이다. 여기서 '박학이독지'가 왜 중요한지 다시 깨우쳐 주고 있다. 넓게 공부했더라면, 더 기발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하기 위해 더 넓고 깊게 배워야 한다. 그래야 일제 침략 같은 위험한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조선의 근대화를 늦췄다. 쇄국정책을 펼침에 따라 국제정세를 알지 못하게 되었고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세계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 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개화가 늦어져 서양문물이 늦게 들어옴에 따라 근대 기술의 발전은 늦춰지게 되었고 이것은 국력의 약화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도들을 박해함에 따라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서양의 기술에 따라가지 못하였던 우리의 국력을 보충하기 위해 군대 훈련 강화가 뒤따르고 국방비는 늘어났으며 더불어 국민들의 원성까지 받게 되었다. 또한 많은 문화재들이 손실되고 귀중한 책들이 많이 도난당했음은 물론 국제관계 또한 악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던 쇄국정책 때문에 우리는 식민지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본다. 서양 열강들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쇄국정책을 펼쳤던 흥선대원군은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를 막기 급하고 넓게 바라보지 못 하였다. 우리도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는 '소탐대실'이 아니라 좁게 보지 않고 넓게 봐야겠다.
* 강두호 : 1) 알지 못 하게 되었고 -> 2) 따라가지 못 하였다. -> * '못하다'의 의미를 [우리말 바루기]에 밝히세요. 3) 바라보지 못 하였습니다. ->> * 어투가 일관되지 못합니다. 4) '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는다 ' 를 뜻하는 소탐대실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듯이 우리도 어떤 일을 하려고 하거나 무언가를 생각할 때 좁게 보지 말고 넓게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 우리도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는 '소탐대실'이 아니라 좁게 보지 않고 넓게 봐야겠다.
수정하였습니당
'못하다'의 의미를 [우리말 바루기]에 밝혔습니당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은 우리나라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처럼 무조건 서양의 것은 우리에게 좋지 않다는, 우리 것이 아닌 것은 안 좋다는 선입견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고 동도서기와 같이 우리의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받아들일 줄 아는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서양 열강들의 통상요구가 사실은 침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펼친 것도 있습니다. 이렇듯 저희도 공부할 때 겉만 보고 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가르침을 알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 박소연 : 1) 우리의 것이 아니더라도 ->> 우리 것이 아니더라도 2)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융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분부정책을 통하여 우리는 자주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대외적 배경은 외세들이 측량과 탐험을 구실로 접근해오고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세도정치의 문제와 삼정의 문란으로 혼란된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만약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치지 않고 외세와 수교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면 일제강점 하의 식민통치가 더욱 일찍 찾아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외세의 침입을 확실히 막는 쇄국정책 덕분에 양반의 세력확장을 막을 수 있었고 농민들을 위한 법 개혁을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아 근대화를 이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의 상황을 고려한 흥선대원군의 정치를 저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보아 저희도 현실의 상황을 고려한 일 처리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은 주변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행하였습니다. 누구의 의견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고집으로만 시행한 정책 때문에 조선은 다른 나라에 비해 근대화가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계기를 인해 다른 나라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누군가 살면서 결정을 할 때 자신의 고집쟁이다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충분히 파악하고 상의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흥선대원군이 그 시대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좀 더 먼 미래까지 생각하였다면 쇄국정책은 더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미 세계는 서구화를 받아들이고 있고 주변의 강국 역시 서구화를 좇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고려하였다면 단순히 그들을 배척하지 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정치자는 그 시대의 국한에서 정치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까지고 생각해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자신의 감정적인 판단이 아니라 백성까지 생각하는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정치 지도자는 넓고 깊고 멀리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 이건희 : 1) 단순이 그들을 배척하지 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 * 무엇이 문제인지 [우리말 바루기]에 모두 밝히세요. 2) 따라서 정치자는 넓고 깊고 멀리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 따라서 정치 지도자는 넓고 깊고 멀리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은 변화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좋으나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흥선대원군의 정치를 통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져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준비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시대의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