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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이야기(북이스라엘)15-브가히야, 베가, 호세아
241124낮 (왕하15:23-31/17:1-6)
(왕하15:23-31)<23)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년에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간 다스리며 24)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25)그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과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이되 길르앗 사람 오십 명과 더불어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더라 26)브가히야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27)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이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간 다스리며 28)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9)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30)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31)베가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아멘
(왕하17:1-6)<1)유다의 왕 아하스 제십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 년간 다스리며 2)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3)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올라오니 호세아가 그에게 종이 되어 조공을 드리더니 4)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5)앗수르 왕이 올라와 그 온 땅에 두루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 곳을 삼 년간 에워쌌더라 6)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아멘
(복습)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정시대의 계보를 봅시다.
사울->다윗->솔로몬->남북분열->
북왕국 이스라엘 초대왕->여로보암->나답->바아사->엘라->시므리->오므리(12년)->아합(22년)->아하시야(2년)->여호람(12년)->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2세->스가랴->살룸->므나헴->브가히야->베가 ->호세아
* 도표(계보도) :
오늘은 북이스라엘 왕조 17대왕 브가히야, 18대왕 베가, 19대왕(마지막왕) 호세아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큰 은혜 되시길 축원합니다.
북이스라엘 제17대왕 브가히야(왕하15:23-26)
북이스라엘 17대 왕 브가히야는 므나헴(16대)의 아들로 왕위에 올라 역시 시조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는 악행을 계속 저질렀습니다. 이 때문에 브가히야는 재위 2년 만에 역시 부하에게 배신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브가히야 정권의 장관이었던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구테타의 주역이었습니다.
베가는 이미 요단강 동편지역을 중심으로 상당부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10년을 넘게 착실히 세력을 키워오던 그가 마침내 왕을 시해하고 국가의 전권을 장악하기로 결단합니다.
베가는 50명의 길르앗용사를 이끌고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의 일행을 습격합니다. 왕궁 호위소는 왕궁에서도 높은 곳에 위치한 요새화된 성채로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지만 브가히야는 이곳에서 자객에 의해 칼을 맞은 것입니다.
브가히야 왕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도 결코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천혜의 요새와 수많은 경호원들이 지켜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제왕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은 세상 그 어디도 없었습니다.
브가히야의 비참한 최후는 어쩌면 아버지 므나헴이 왕위를 찬탈할 때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린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죄 없이 죽은 아벨의 피가 땅속에서 호소하듯, 무고한 피를 함부로 흘린 사람의 가문은 언젠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제18대 왕 베가(왕하15:27-31)
브가히야를 암살하고 이스라엘의 18대 왕이 된 베가(B.C 740-732)는 8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됩니다. 열왕기 하는 베가가 20년을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왕하15:27) ...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할 때가 B.C 722년이었던 사실과 유다의 요담왕 재위 20년에 그가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왕하15:30) 사이에 모순이 생깁니다.
또한 성경은 베가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호세아가 유다왕 아하스 제12년에 이스라엘왕이 되어 9년을 다스리다가 나라가 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왕하17:1)
거기다가 앗수르측 사료에는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셋의 재위기간이 18년이었고, 처음 이스라엘을 침공 했을 때의 이스라엘왕이 브가히야의 아버지 므나헴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런 여러 사실들을 참고 해서 정리해 보면, 베가는 처음 12년 동안 요단 동편을 부분적으로 통치하다가 서서히 이스라엘 전체를 장악하여 정식왕으로서는 8년간 다스렸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 보여 집니다.
베가는 그의 경력이 보여주듯 군대를 양성하고 움직이는 리더쉽이 뛰어나고, 나름대로 배짱과 전략이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담하게 앗수르에 대항하는 적대 노선을 지향 했습니다. 이를 위해 이제까지 원수였던 아람왕 르신과도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 연합전선에 유다도 끌어들이려 했으나 유다는 이 제의를 거절합니다.
이에 분노한 베가는 유다를 어떻게 해서라도 반 앗수르 동맹에 끌어들이기 위해 아람과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이스라엘 전체의 멸망을 불러올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이 때, 앗수르 와이디글랏벨레셋이 대군을 움직여 이스라엘 징벌을 단행합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단련된 앗수르의 정병들은 들판을 까맣게 덮으면서 몰려왔습니다. 순식간에 이스라엘의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네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휩쓸어 버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포로가 되었는데, 포로가 된 이스라엘인들 중 귀족, 기술자, 청년, 젊은 여인들은 모두 앗수르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국제정세를 잘못 읽은 판단 착오로 베가는 나라를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성난 민심은 그를 떠난 지 오래되었고, 자괴감에 빠진 리더십은 레임덕현상을 가져왔습니다.
거기다 앗수르도 자신들에게 대항한 이스라엘의 이 괘씸한 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친 앗수르 정책을 펼칠 새 왕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마침내 민심과 앗수르의 은밀한 지원을 등에 업고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일어나서 베가를 죽여 버립니다. 결국 베가도 자기가 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권좌에서 끌어내려진 것입니다.
19대왕 호세아 (B.C 731-722)(왕하17:1-6)
호세아는 앗수르왕의 후광으로 왕위에 오른 북이스라엘 최후의 왕입니다. 그가 왕위에 있었던 10년은 북이스라엘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극의 시간이었습니다.
반 앗수르정책을 펼쳤던 베가를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호세아는 처음 9년 동안은 앗수르에게 착실히 조공을 바치면서 자신의 권세도 유지하고 나라도 지켰습니다.
성경은 또 그가 악하긴 했어도 선대왕들처럼 심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시대에 나라의 멸망이 왔습니다.
2절입니다.
<2)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다른 지도자들 보다 좀 낫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리더십의 진정한 평가는 다른 왕들과 비교하는 상대적인것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좀 더 나으니까 괜찮아... 아니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좀 더 낫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가 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평가 하시는가 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중요한 것입니다.
멸망의 원인은 호세아 자신이 제공했습니다.
앗수르의 영광을 이뤄낸 카리스마적인 정복자 디글랏빌레셀이 죽자 호세아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천하의 디글랏빌레셀이 없이는 앗수르는 이제 더 이상 옛날 같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앗수르에게 그동안 당했던 설움에서 해방될 기회라고 여기고,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던 것을 끊고, 당시에 유일하게 앗수르를 견제할 수 있었던 나라였던 애굽을 의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즉, 친 앗수르에서 친 애굽으로 정책기조를 바꾼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애굽은 춘추전국시대처럼 수많은 군소영웅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고, 당시 애굽의 소왕은 멀리 떨어진 앗수르와 싸우고 이스라엘을 도울 여력이 없었습니다. 호세아는 완전히 썩은 동아줄을 붙잡은 꼴이 된 것입니다. 결국 줄을 잘못선 호세아는 자신과 나라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됩니다.
호세아가 붙잡아야할 동아줄은 하나님의 손이어야 했습니다. 앗수르왕이던, 애굽왕이던 다 썩은 동아줄입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의지가 되실 수 있으며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호세아의 갑작으런 친 애굽정책은 앗수르의 새 왕인 살만에셀을 격분시키게 되었고, 앗수르의 살만에셀의 대군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했습니다.
호세아의 전령은 애굽으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애굽에서는 아무런 원조도 오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포위직전 도중에 살만에셀 왕이 원인모를 병으로 갑자가 사망했지만, 곧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그의 형제 사르곤 2세(B.C722-705)가 사마리아 공격을 계속 했고, 이로 인해 호세아 왕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함으로 사마리아는 함락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약 210년 전 여로보암이 세웠던 북이스라엘 왕국은 멸망하고 맙니다.
한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국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망한 나라의 백성들은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미 수차례에 걸친 앗수르의 침략 때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끌려갔지만, 나라가 완전히 망하면서 또 거의 3만 명에 달하는 포로들이 앗수르로 끌려가게 됩니다.
왕하17:24절을 볼까요?
<24)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사람을 옮겨다가” 라고 한 것은 당시 앗수르의 식민지 이주정책을 말하는 것입니다. 앗수르는 피지배민들을 포로로 잡아가서 자신들의 영토 전역에 흩어버리고 대신에 정복지에는 자신의 백성들을 대거 이주시킴으로 정치적, 인종적 분란을 사전에 방지 했습니다.
이런 강제 이주정책은 유대인들처럼 강력한 민족성을 가진 백성들의 응집력을 깨어 버리고, 고향 땅에 대한 애착을 갖는 애국심을 자손 대에 가서는 아주 말살시켜 버리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우리나라 현대사도 이런 비극적인 일이 있었죠...
1937년 소련의 스탈린이 17만이나 되는 조선인들을 극동지역에서 수백 키로나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 집단 이주시켜 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얼마나 처절한 까레이스키들의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까?(까레이스키: 이 때 끌려간 한국인을 칭하는 러시아 용어...)
가족 친지들끼리 서로 생이별 당하고, 먼 길을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끌려가다 죽어 나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머나먼 낯선 이국땅에서 조국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얼마나 고단한 삶이었을지 감히 잠작도 못할 정도입니다.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이와 비슷한 혹독한 운명이 불어 닥친 것입니다.
앗수르는 포로들을 앗수르로 끌어갈 때마다 말할 수 없이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포로들의 발목을 줄이나 사슬로 묶어 짧은 보폭으로 걷게 했을 뿐 아니라 가죽 끈에 묶여진 갈고리를 혀나 턱에 꽂았습니다. 묶인 손이나 발에 구멍을 내어 밧줄을 엮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포로들이 잘 따라오지 못할 때에는 이 갈고리 끈을 사정없이 잡아당겨서 포로들에게 형언키 힘든 고통을 주었습니다. 앗수르의 이 잔혹한 포로 다루기는 바벨론에게도 그대로 답습되었습니다.
이런 앗수르의 포로정책은 두 가지의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첫째는, 인종의 혼합입니다.
이렇게 이주해온 이방인 족속들과 토착 이스라엘 백성들이 섞여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서로 결혼함으로서 인종이 섞이게 된 것입니다. 즉 단일 민족의 순수성을 목숨보다 중시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한 치욕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은 후에 이스라엘 역사속에 두고두고 큰 내분의 원인이 됩니다.
둘째는, 종교의 혼합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우상들도 고스란히 사마리아로 가지고 와서 섬겼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앗수르 왕실에 한 가지 청을 한 것은 포로로 잡혀온 북이스라엘의 제사장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종교도 가르쳐서 활성화되게 해달라고 함으로써 야훼종교가 이방종교와 혼합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앗수르 사람들이 사마리아로 이주해 와서는 아무 갈등 없이 자신들의 우상을 섬겼는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 중 몇 사람을 죽여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왕하17:25절입니다.
<25)그들이 처음으로 거기 거주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경악한 그들이 나름대로 원인을 분석해 본 결과 이것은 이지역의 신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무시한 결과로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의 수호신 하나님이 자기들을 해하지 않게 하려면 자기들의 신을 믿으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하나님도 같이 믿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온 우상은 우상대로 믿으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지역의 하나님도 예배하게 함으로써 종교 혼합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마리아 지역은 인종이 혼합되었을 뿐 아니라 종교도 혼합되어 버리는 불행한 땅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 훗날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에도 사마리아인들을 사람취급하지 않았고,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서로 반목하는 것이 예수님 태어나던 시대에도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다음 주에 북이스라엘은 왜 망했을까? 그 원인을 말씀드리고 북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의 이야기를 마치고, 남유다의 왕들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아멘(기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