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의 문 -
☆ 2014년 가해 5월11일 (백)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청주] 부르심에 응답하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사도 2, 14ㄱ. 36-41
† 제2독서 : 1베드 2, 20ㄴ - 25
† 복음 : 10, 1 - 10
해마다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이다. 성소(聖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뜻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교회는 다양한 성소의 가치를
모두 존중해 왔으나, 오늘 성소 주일은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하여 기도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날이다. 이 성소 주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마태 9,37-38)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하였다. '성소를 위한 세계
기도의 날', 곧 성소 주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소를 계발하고 육성하는
일에 꾸준한 기도와 필요한 활동으로 협력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게 하는
특별한 기회가 되고 있다.
오늘 전례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의 비유를 드시며 당신을 '양들의 문'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오늘 '성소 주일'을 지내며 주님의 뜻을 받들어
성직과 수도 생활을 지망하는 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늘 새로이 하도록
기도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이 미사에 참여하며 주님께서 한국 교회에
풍성한 성소의 은총을 허락하시기를 한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이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다는 점을 선포한다. 이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움직여 삼천 명가량이 세례를 받게 이끌었다
(제1독서).
★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이겨 내면,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이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 짊어지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일이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목자의 비유를 드시며 당신과 당신의 사람 사이의 관계를
알려 주신다. 목자는 문으로 양을 데리러 들어가며, 양들은 목자를 알기에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소 주일인 오늘은 많은 사람이 '성소의 못자리'라 일컫는 전국의 신학교들을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는 신학생들의 생활상을 보면서
인간적인 부족함과 고뇌 속에서도 목자의 길로 나아가는 젊디젊은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애틋하게 여기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서울 신학교를 방문하는 이들이라면 언덕바지에 성곽 쪽으로 나 있는 호젓한
오솔길의 아름다움에 깊은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신학교에서는 이 길을
'목자의 길'이라 부릅니다. 서울 신학교 출신의 사제들이라면 누구나 그리
길지 않은 이 산책로를 걸으며 깊은 생각에 잠기거나 묵주 기도를 바친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성소의 고비를 이곳을 거닐며 힘겹게 넘기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길의 들머리에는 신학교에서 사제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며
학생들을 돌본 신부님 한 분이 세운 시비가 있습니다. 이 시비의 시는
시인이자 영성가로서 역시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돌본 최민순 신부님
(1912-1975년)의 '두메꽃'입니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해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신학생 때 이 시를 보면서 마음이 뭉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목자의 길'을 걷는 사제들은 무엇보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기쁨과
보람을 얻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 대한 삯꾼이 아니라 참된 목자로
살아가려는 사제라면, 이 시가 노래하듯 자신을 사람들 속으로 파견하신
주님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올라야 할 것입니다.
내일의 목자인 신학생들이 소박한 일상 속에서 '숨어서 피어나는 꽃'의 기쁨과
고귀함을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부르심에 응답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5월11일 부활 제4주일 (요한 10,27-30) 성소주일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 10,1-10
부르심에 응답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기
빕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를 신앙에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고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의 봉사직에 부름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하는 날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성소(聖召)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르심 중에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하느님자녀에로의 부름입니다.‘성소’라고 하면
성직자나 수도자의 부름만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성직자, 수도자 이전에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이전에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받은 것이고
이미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각기 부르심을
받은 대로 그 부르심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의 충직한 삶을 살아야
하고 결혼에로 부름 받은 사람은 혼인 안에서 가정을 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성소는 더 높고 낮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양들을 알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이웃을 위한 희생, 봉사에 한 몫을 다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부름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양도 목자를 알게 되고 또 그의 음성에 기쁘게
달려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 반가워야지 부담스러우면
피하게 됩니다. 기왕이면 반가운 목소리, 기다려지는 음성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10,14).고 하셨습니다. 더군다나 “나는 양들의 문이다”
(요한10,7).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통하여 구원의 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만큼, 나도 주님을 알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분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내가 그분을 모르면 그의 양이 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정 안에서, 또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알고 서로의 음성에 귀
기울여 주는 넉넉함이 그 구성원임을 확인해 줍니다. 한 주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웃을 위한 희생 봉헌의 삶을 새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제51차 성소주일을 맞아 담화문을 발표하셨습니다.
이 담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성소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고 참다운
교회 생활에서 서로를 섬기며 형제애를 경험하는 가운데 싹 틔운다”며 서로를
섬기는 형제애를 강조하셨습니다. 형제애가 넘치는 가정, 공동체에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본당을 시작하신 임가밀로 신부님을 생각하면, 첫영성체를 준비할 때의
가정의 환경과 어머님의 말씀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영성체할 때 드리는 기도는 꼭 들어 주신다는 어머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알아들어 ‘성인 신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평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다짐하였으며 요한 사도가 성모님을 모신 것처럼
‘자신도 성모님을 모시고 평생을 사제로 살다가 천당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사제성소의 꿈은 성장하여 1888년9월16일 19세의 어린
나이에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1893년 5월27일
성모성월에 사제로 수품되었습니다. 그 때 나이 24세였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한국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1947년 10월25일 ‘성모님 저를 구하소서’를 반복하며 임종을
맞이하기까지 51년 1개월을 우리 본당에서 사목하셨고 오늘도 성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라는 말씀을 늘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사랑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
프랑스로부터 한국에 오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셨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재촉하였습니다. 이곳에 오셔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구원의 기쁨과 희망을 안겨 주셨는지 모릅니다. 신부님께서는
성체신심과 성모신심의 고양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세상에 기쁜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 사람의 주님께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베푸는 사랑의 바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바로 가정입니다. 기도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신심이
깊은 사랑 많은 부모가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이 기도하는
가정, 형제애가 넘치는 가정이 되길 희망합니다.
교황님께서는 “모든 성소는 자신을 벗어나 그리스도와 복음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을 요구한다”며“혼인 생활을 하든, 봉헌 생활을 하든, 사제생활을
하든,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사고, 행동 방식을 극복해야 한다”고
밝히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이루고, 이웃을
위한 구체적인 봉사로 말씀의 씨앗을 드러내라고 권유하셨습니다.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사고, 행동방식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객선‘세월호’침몰사고를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이 가슴아파하고 있습니다. 이 시련의 시기가 길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고
잘못한 많은 이들을 단죄하며 심판하면서도 정작 나는 원칙을 무시하고
있으며 정도를 걷지 않는다면 결국은 나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부터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며 행동으로 옮길 때 선한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숭고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다보면 때로 시류를 거스르고
안팎의 난관에 부딪히기” 마련이지만,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다는
것, 곧 주님의 제자이며 하느님 사랑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 큰 이상,
큰일에 우리의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주님께서는 사소한 것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위대한 것을 향하여 나아가십시오. 고귀한
이상을 위하여 여러분의 삶을 거십시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일에 대해 분명하게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력의
음모와 폭력에 철저한 무저항과 비폭력으로 맞서심으로써 폭력을 오히려
무력화 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 부활한 다음에 여성들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그들이 사회적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나
남편의 보호막이 없으면 세상에서 가장 무방비 상태에 놓인 연약한 신분”에게
먼저 다가간 것은 “작은이들에게 당신의 승리와 영광의 증인이 되고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벗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강우일). 우리도
난관에 부딪칠 때 마다 누구의 눈치를 보지 말고 주님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들이 많이 나와야 영적 풍요로움에 도움이 되고 길을
주님께서 가신 길을 제시할 수 있느니 만큼 고귀한 부름에 응답하는 젊은이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우리
본당에서도 가까운 시기에 성직자 수도자가 배출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누가 신학교 입학의 동기를 물으면 ‘오기(傲氣)로 갔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께 지나가는 말로 “신학교 갈까?” 하고 던져놓은 것이 어머니에게는 큰
고민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저에게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날
버스터미널에서 친구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대뜸 “너 신학교 가야
되겠니? 신부 되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께 효도 해야지. 어머니께서
걱정하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 어머니 하고 제 어머니하고 그러셨답니다.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 ‘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 실은 그 여자 친구보다 더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어째든 그 말씀을 듣고 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신학교 갈까?’가 아니라 “어머니, 저 신학교 가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반대는 시작되어 “신학교 가면 학비는 물론 용돈도 주지 않을
것이고 너와 나는 끝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기가
생겨서 “그래도 갑니다” 하고 버텼습니다. 그때 후원자가 생겼습니다. 바로
위 누나가 공무원 이었는데 학비를 마련해주겠다고 제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때 누나가 열심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안배였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흘러 원서를 준비할 때가
되었습니다.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본당신부님께서 추천서를 써
주실까? 실은 본당을 떠나 공부하였기 때문에 신부님을 잘 몰랐습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나?
그런 가운데 시골 공소를 방문하신 테오필라 수녀님의 “하느님의 뜻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러니 힘들게 하지 말고 기쁘게 보내라” 는 말씀에 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입학할 때는 학비도 살림살이도 모든
것을 어머니가 준비해 주셨습니다. 신학생 신분으로 있을 때 여자에게 전화만
오면 걱정하시고 신부가 되어서도 자나깨나 걱정이십니다. 이 놈이 끝까지 잘
살아야 할 텐데….그러면서 매일 기도하십니다. 어떤 때는 기도하시면서 꼬박
꼬박 졸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묵주기도 한번을 몇 시간을 하시는 줄
모르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도 나오고…… 그냥 주무시라고 해도
상관하지 말래요. 당신이 할 것은 다해야 한답니다. 졸음을 지적하니 자존심이
상하셨나 봅니다. 이런 어머니의 기도가 저를 여전히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여자 신자 분이 옆자리에 앉으신 것을 보고 ‘보기 좋지 않다’. ‘뒤를
돌아다 보지 마라’고 편지를 쓰셨어요. 미국 와서도 한번 편지를 받았는데
‘공부할 때 용돈을 제대로 주지 못한 게 가슴이 아프고 신학교 간다 할 때 반대
한 것이 안타깝고 면목이 없으시다’고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신부님
생각하면 한없이 기쁘다. 앞날을 보고 사는 것이 인생이니까 어려움을 잘
견뎌라. 당신 생각하지 말고 잘 지내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째든 하느님의 부르심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옆에서 잘 부추겨 줘야 하고 어떤 사람은 오기가 생기도록 해 주어야 하고요.
사실 ‘제가 신학교 갈까?’ 하고 얘기한 것도 시골 공소 회장님이 “너는 신부가
됐으면 좋겠다” 는 말씀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시골 공소에 어울리는 4명이
있었는데 하나는 시집가고 하나는 수녀가 되고 둘은 신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한마디 말이 귀한 열매가 맺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응답은 나의 몫입니다. 하느님은 부르시고 나의 협력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젊은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입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참된 목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는 응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각자 받은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오늘이 되어야
2014년 가해 5월11일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 10,1-10
“당신의 이야기를 기분 좋게 들어 드리겠습니다. 10분에 1달러.”
미국의 한 청년이 낸 실제 광고 문구였습니다. 이 광고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이 광고가 나간 지 수십 분 만에 신청이 쇄도해 청년은 단시간에 많은 수입을
얻었다고 합니다. 들어주는 사람을 찾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듣기보다는 말하기에 더욱 더 집중하고
있거든요. 자신의 속사정을, 자신의 아픔을, 자신의 비밀 등을 들어줄
누군가를 원하는 우리들이 아니었을까요? 하긴 저 역시 듣는 것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조리 있게 말하지 않으면 졸리기도 하고, 그래서 듣는 척
하면서 다른 행동들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잘 들어주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습니다. 그 누구도 잘 듣지 않는 내 말을 들어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한 듣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잘 알기에 존경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우리들의 어떤
목소리도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을 끊어버리면서 당신의
이야기만 풀어 놓지 않습니다. 혹시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그
기도를 끊으신 적 있으신 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좋으신
분이고, 사랑 가득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을 따르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들은 어떠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다 들어주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잘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도 더 많이 받게 될 것이고, 주님의 멋진 제자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인 동시에 성소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자신들의
생활에 따라 구체적인 부르심을 주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세상의 가치만을 존중하고 우선시 하다 보면
주님의 부르심을 외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특별히 오늘은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세상 속에서 주님의 일을 맡아서 해야
할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해 기도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 말씀에 근거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소 계발과 육성에
관심과 기도를 함께 하는 날인 것입니다.
각자 받은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오늘이 되어야 함과 동시에,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의 뜻에 맞게 주님의 일을 잘 해 나갈 수 있도록
더욱 더 마음을 모으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공이 행복의 열쇠가 아니라 행복이 성공의 열쇠이다.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찬양받을 만한 사람은 가장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 사람이다(슈바이처).
다리를 잃은 남자가 얻은 것(인터넷에서 퍼온 글)
어떠한 상황도 포기하고 주저앉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넘어설 때,
우리에게는 커다란 선물이 희망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글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감동이었지요. 이 글을 통해
희망은 우리 눈 너머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지금 현재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아래는 미국 워싱턴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며 사랑을
키워가는 댄 버신스키 중위와 레베카 태버 씨의 이야기입니다.
남자에게는 젊고 아름다운 전문직 여자 친구가 있었다. 예일대 시절
학생회장까지 맡았던 그녀는 지적이고 얼굴도 예뻐서, ‘예일대의 나탈리
포트먼’ 으로 불릴 정도였다. 남자는 아프간으로 떠났고, 탈레반과의 교전이
치열한 아르간다브 계곡에서 땅 속에 묻혀 있던 지뢰를 밟고 두 다리를
잃었다.
처음 남자가 워싱턴의 병원으로 후송되었을 때, 그의 가족들이 여자 친구의
방문을 막았다. '서로를 위해 빨리 잊으라.' 는 것이 이유였다. 남자의 상태는
여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오른쪽 다리의 엉덩이 아랫부분부터
없었고, 왼쪽은 넓적다리 부분만 약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먼저 간 동료들을
애도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남자를 보면서 여자는 그가 '미래를 함께할 수
있는 사람' 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친구와 가족들은 "동정과 사랑을 혼동하지 말라" 며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는 남자를 돌보기 위해
잘나가는 직업도 포기하고 업무량이 적은 교육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둘은
현재 워싱턴의 한 아파트에서 함께 살고 있다.
"그는 두 다리를 잃었지만 나를 얻었으니, 결코 손해 본 것이 아니다.“
잃기만 하는 인생은 절대로 없음을 이 부부를 통해 깨닫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머묾과 길들여짐
2014년 가해 5월11일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 나는 양들의 문이다. >
복음 : 요한 10,1-10
< 머묾과 길들여짐 >
어떤 분의 추천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일본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자녀란 ‘핏줄’인가, ‘키운 정’인가에 관한 오랜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있습니다.
대기업에서 아주 잘 나가는 젊은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여섯 살 난 아들이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이기기
위해 밤새 노력하는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아들은 그런 면에서는
좀 아버지와 닮지 않았습니다. 피아노를 아무리 쳐도 좀처럼 늘지 않고 남들이
더 잘 하는 것을 보고는 박수를 쳐 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그런 강인하지
못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소식, 병원에서 아들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친자확인을 마친 아버지의 말은 “역시, 그랬군!”이었습니다. 아내는 그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자신의 친 아들이었다면 더 완벽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래의 부모에게 돌아가야 할 친자녀와 정을 들여야 할 몇 달의 시간. 그러나
이 아버지는 회사가 너무 바쁜 나머지 친아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합니다. 6년 동안 키운 아들을 보내고는 자신의 친아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엄한 교육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6년 동안 너무나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그런 환경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화는 이것일 것입니다. 자신의 친아들을 키워준
가난하지만 다정한 아버지는 자녀들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에만 빠져있는 주인공 아버지를 약간은 나무랍니다. 그러나 핏줄을
앞세우는 그는 그 말에 수긍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있기만 한다고 아버지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파상을 운영하는 가난하지만 다정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입니다. 시간.”
아버지가 되기 위해 과연 중요한 것은 함께 한 시간일까요, 핏줄일까요?
핏줄도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이 영화는 ‘함께 한 시간’에 더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우연하게 자신의 아들이 찍은 사진들이 있는 사진기를 한 장 한 장
넘겨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진기에 찍혀있는 것은 온통 아버지의 모습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들과
놀아줄 시간도 없이 집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들, 그렇게
피곤해 소파에 쓰러져 자고 있는 아버지의 다리와 몸과 얼굴모습들, 아침에
일어나기 전의 그 꿀 같은 잠에 빠진 아빠, 엄마의 얼굴 등. 아버지가 함께 해
주지 못한 시간에 6살짜리 아들은 항상 아버지를 바라보며 아버지 곁에
있어주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내치다시피 보내버린 6년 동안 키운 아이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청합니다. 함께 해 주지 못해서.
이 영화의 제목은 ‘그렇게 아버지가 되어간다’입니다.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아버지가 되어간다는 메시자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쩌면 그리스도와 시간을 함께하여야만 그분의 참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영화는 요한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 ‘머물다’라는 말이 생각나게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드님 안에 머무시고, 아드님도
아버지 안에 머무신다고 합니다. 또한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네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라고 하시며,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도 하십니다.
요한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머물다’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는 ‘시간을 함께
보낸다’라는 말과 바꾸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머문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붙어있는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은 착한 목자이신데 당신의 양들은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십니다. 개나 고양이는 주인이 오는 소리를 기가 막히게
알아듣습니다. 멀리서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것이 주인의 소리인지
지나가는 사람의 소리인지 정확하게 구별합니다. 또 일정한 시간에 귀가하면
시골에 있는 개들은 동구 밖까지 나와서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맞이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오랜 시간 함께하며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영화에서도
6년 동안 함께 서로에게 익숙해진 그 시간이 냉혈한이라고 할 만한 아버지의
마음까지도 녹일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진리’의 부르심과, ‘유혹’의 목소리가 뒤섞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도 부활했다고 말하는 이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소문을 믿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교회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구원을 받았겠지만, 세상에 떠도는 그런 소문을 믿었다면 구원을 장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때에는 교회조차도 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태리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라는 광장에는 브루노라는 분이 화형을 당한
자리에 세워진 그분의 동상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가 브루노를 화형에 처한
것인데, 브루노는 갈릴레이보다 먼저 지동설을 주장한 수사님이었습니다.
우주는 끝이 없는 무한한 공간이고, 지구는 그런 무한한 공간에서 먼지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천동설을 믿어오던 교회는 그를 파문하고 재판을
하여 화형에 처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수많은 종교들이 있고 또 수많은 이론들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매혹시킵니다. 같은 성경을 해설하면서도 서로 다른 수많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안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참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만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저에게 사제성소의 길을 제시해 주었던 책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1-10권’입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조금씩 5년이라는 시간을
읽었고 사실 지금까지 매일 읽고 있습니다. 그 전엔 예쁜 여자와 결혼하고,
좋은 직장 갖고, 돈도 많이 버는 것 등이 저의 행복의 조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삶이, 비록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삶이었지만,
너무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행복의 기준이 변화된 것입니다. 갖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을 위해
내 자신을 소진할 수 있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성소를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예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기록되었다는 다른 많은
책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왠지 위의 책을 읽을 때의 그런 감동은
느낄 수 없었고, 그 말씀하시는 내용이나 어투, 모든 면에서 어색한 책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책들은 몇 장 이상 넘기지 못했습니다.
제가 위의 책에서 읽은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목소리에 너무 익숙해졌고
길들여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어떤 책들은 그와 같은 감동을 받는 책들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성경의 권위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어떤 분의 목소리와 오랜 시간 함께 한다면, 정말 그만한
시간을 꾸준히 할애할 수 있다면, 그 목소리에 익숙해져서 그와 다른 목소리와
절대 헛갈리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왕자에게 친구가 되는 방법을 일러줍니다.
“난 너의 친구가 될 수 없어.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친구를 갖고 싶다면
나를 길들이렴.”
“길들인다는 건 어떤 거지?”
“먼저 내게서 좀 떨어져서 앉아. 하루하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너는 조금씩
나와 가까운 곳에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언제나 같은 시간에 오는 게
좋아. 만약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그렇습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습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말씀을 접하는
시간을 꾸준히 갖는다면, 마지막 순간에 그분의 목소리를 구불해내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길들여지기 위해 머물 줄 알아야겠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서울]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2014년 가해 5월11일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 10,1-10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며, 성소주일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들은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교회는 사제성소와
수도자성소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삶을 통해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증언할 사제와
수도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늘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 ‘회개’입니다. 욕심과 교만함으로
나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겸손과 희생으로 타인을 위해서 살도록 마음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어진 능력이 다르고 하는 일도
다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능력과 재능으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개’했는지 아니면 우리의 뜻대로 살아가는지를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사는 가족들의 음성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이웃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희생과 봉사를 하고 내가 원하는 만큼 타인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 성소 주일을 맞이해서 신앙생활의 3가지 요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앙생활의 3가지 요점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과,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세례를 받았지만 우리의 생각과 가치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늘 주변부로 밀려가는 것을 봅니다.
가정 안에서, 이웃과의 만남에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피어나는
공동체를 만들기 보다는 잘난 사람은 시기하고, 못난 사람은 무시하며 항상
나만 내세우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동체의
형성과정은 4단계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거짓 공동체인데, 이는 인사는
하지만 서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공동체입니다. 두
번째는 혼돈의 공동체인데 마치 고슴도치가 서로 가까이 하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듯이 함께 살면서 상대방의 장점과 허물을 보게 되고 그래서 다투고,
실망하는 공동체입니다. 세 번째는 ‘비움’의 공동체입니다. 이는 이제 어느
정도 상대방에 대해서 포기하기도 하고, 인정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공동체입니다. 네 번째는 성숙한 공동체인데 3단계를
거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주게 되는 공동체입니다. 신앙인은 혼돈의
과정을 거치면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숙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으면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해주고, 그들을 신앙인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하십시오.” 늘
기도하면 기뻐하게 되고, 늘 기도하면 감사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바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우리교회가 오랜 전통으로 지켜온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이 묵주기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단순히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온 몸으로 모신 최초의 감실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겸손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는 굳센
믿음으로 예수님을 가슴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의 시련을 겪으신 후, 하느님을 온 몸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이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체 성사를 통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통해서 살아있는 감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양들의 음성을
알고, 양들도 나를 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들의 귀와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 회개의 길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절대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강함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2014년 가해 5월11일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복음묵상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요한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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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두려움을 경험하면서 이 삶을 살아갑니다.
그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어린 시절, 홀로 깜깜한 시골의 밤 길을 걸어 어딘가를 찾아가며 느꼈던
두려움을 기억합니다. 목적지의 근처의 불빛이 눈에 들어올 때의 안도감,
그것은 행복이었습니다. 깜깜한 밤에 백열전등을 켜고 혼자 집을 지키며
가족들을 기다리면서 느꼈던 두려움도 기억합니다.
가족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릴 때의 반가움 역시 행복이었습니다.
중학생 시절 새벽 미사에 가기 위해서 깜깜한 새벽 공동묘지를 매일
넘어가면서 느꼈던 두려움도 기억합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오는 성당 마당
불빛이 보일 때 느꼈던 따뜻함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듯한 상황에 처해질 때 역시 두려움을 체험합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음이라는 이별의 강을 건넜을 때도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체험합니다.
그 외에도 셀 수 없는 많은 두려움을 만나고, 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삶 안에서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강함은 결국 한계를 보이게 되어있고,
색다른 두려움이 늘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지요.
절대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인 힘이란 우리가 자신의 약함을 스스로
받아들일 때 만나게 되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그 힘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힘을 만났을 때, 우리는 거짓된
마음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거짓된 마음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은 옳은 힘에
의지하게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하느님을 통해서 얻어내야 합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얻는다는 말은 그분의 완벽한 사랑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들처럼 그분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예수님을 굳게 믿어 모시며
2014년 가해 5월11일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 10,1-10
예수님을 굳게 믿어 모시며
저는 마음의 문을 열고 살다보니 대개는 좋았지만 사기도 가끔 당했습니다.
모든 이에게 문을 열고 계시다는 예수님에 대해 매력적이라 생각했어요.
하늘의 문이 이렇게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니 이 또한 매력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의 문을 드나들며 회의 실망 배신 등 여러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젠 행복한 영원세상을 그리며 살다가 예수님 문을 열고 이사 갈 겁니다.
하느님의 뜻 말씀님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어 모시며 잘 살고 나서요.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요한 10,9)”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너의 운명은 나의 운명[단상]
부활 제4주일(2014년 5월 11일) 너의 운명은 나의 운명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 10,1-10
목자는 양을 보호하고 먹이고 키우는 사람이지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목자가 양을 잘 알기에 양도 목자를 잘 압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눈빛만 봐도 무엇을 말하는 지 서로 앎니다.
서로의 ‘앎’ 안에서 목자와 양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목자는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주님의 양들입니다.
목자이신 주님과 양들인 우리는 끝까지 함께 하는 운명 공동체를 만듭니다.
거룩한 부르심(성소)은 운명을 함께 하자는 초대입니다. 아무리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해도 주님이 나의 목자이심을 알기에 두럽지 않습니다.
가장 힘들 때 가장 아플 때 가장 지칠 때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시편 23,1)를 삶으로 노래합니다.
주님은 물으십니다. “아프니?” 그리고 이어서 말하십니다. “나도 아프다.”
우리의 상처는 주님의 상처로 승화됩니다. 우리의 아픔은 주님의 아픔이기에
우리의 상처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구원을 위한 상처로 변합니다.
“그리스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1베드 2,24). 이것이 부활의
선물입니다. 나의 운명은 주님의 운명이 되고 주님의 운명은 나의 운명입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수사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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