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8 2024 General Audience Pope Francis (youtube.com)
교황
“이주민 추방은 중죄입니다. 바다와 사막을 묘지로 만들지 마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4년 8월 28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을 통해 전쟁과 재난을 피해 목숨을 걸고 위험한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이주민의 비극을 강조했다.
교리 교육: 바다와 사막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그동안 해오던 교리 교육을 미루고, 지금 이 순간에도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땅을 찾아 바다와 사막을 건너는 이들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다와 사막.’ 이 두 단어는 이주민 그리고 그들을 돕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의 수많은 증언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제가 이주 현상의 맥락에서 “바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대양, 호수, 강을 비롯해 세계 각지의 수많은 이주민 형제자매들이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건너야 하는 온갖 위험 수역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사막”은 단순히 모래와 언덕으로 이루어진 곳이나 바위로 가득한 지역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주민들이 홀로 고립된 채 힘겹게 거쳐야 하는 험난하고 위험한 지역들, 예를 들면 숲, 밀림, 대초원 등을 아우릅니다. ‘이주민, 바다, 사막.’ 오늘날의 이주 경로는 종종 바다와 사막을 건너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여정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 정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이 비극, 이 고통에 대해 잠시 멈춰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몇몇 이주 경로는 종종 뉴스의 주요 사건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이주 경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음에도 여전히 많은 이주민들이 그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지중해를 언급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로마의 주교이고, 지중해가 상징적인 의미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바다’(mare nostrum, 지중해)는 민족과 문명 간의 소통의 자리였으나 이제는 묘지로 변했습니다. 비극적인 것은 많은 이들, 곧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충분히 구조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이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곧, 몇몇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이주민을 조직적으로 쫓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동한다면, 이는 중대한 죄입니다. 성경 말씀을 잊지 맙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탈출 22,20). 고아, 과부, 이방인은 하느님께서 항상 지켜주시는 가난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도 그들을 지켜주라고 요구하십니다.
불행히도 몇몇 사막 또한 이주민의 묘지로 변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이주민들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닙니다. 자연사가 아니죠. 때로는 이주민들이 사막으로 끌려가 버려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파토 형제의 아내와 딸이 사막에서 굶주림과 갈증으로 목숨을 잃은 사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공위성과 드론이 판을 치는 시대에도 이주민과 어린이는 아무도 보면 안 되는 존재로 간주됩니다. 이들은 감춰집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들을 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이것이 우리 문명의 잔혹함입니다.
실로 바다와 사막은 성경에서도 상징적 가치를 지닌 장소들입니다. 바다와 사막은 탈출기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들로, 모세가 이끄는 하느님 백성이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대이동, 곧 대이주의 무대입니다. 이 장소들은 억압과 노예생활을 피해 탈출하는 하느님 백성의 드라마를 목격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 절망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해방으로 가는 통로이며 –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해방을 위해 바다와 사막을 건너고 있습니다 – 구원을 위한 통로이자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자유를 향한 길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24년 제110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담화 참조).
주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시편이 있습니다. “당신의 길이 바다를 가로지르고, 당신의 행로가 큰 물을 건넙니다”(시편 77[76],20 참조). 또 다른 시편은 “주님은 사막에서 당신 백성을 인도하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 136[135],16 참조)라고 노래합니다. 성경의 이 말씀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해방의 길에 동행하시기 위해 몸소 바다와 사막을 건너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주민들의 비극에 동참하십니다. 이주민들과 함께 하시고, 이주민들과 함께 고통을 받으시고, 이주민들과 함께 우시고, 이주민들과 함께 희망을 품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바다’인 지중해에서 우리 이주민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주민들과 함께 계시지만, 이주민들을 쫓아내는 자들과는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한 가지에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생명을 위협하는 이 바다와 사막에 이주민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다릅니다. 그렇다고 엄격한 법률, 국경의 무장화, 강제 추방으로는 이주민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주민을 위한 안전하고 합법적인 이동 경로를 확대하고, 전쟁이나 폭력, 박해나 여러 재난을 피해 탈출하는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정의와 형제애, 연대를 바탕으로 한 전지구적 이주 관리 체제를 촉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신매매를 근절하고, 다른 사람의 궁핍함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인신매매 범죄자들을 막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주민들이 겪는 수많은 비극을 생각해 봅시다. 지중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람페두사와 크로토네의 비극을 생각해 봅시다. 끔찍하고 슬픈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끝으로 저는 다섯 대륙의 절박한 희망의 경로에서 다치고 버려진 이주민들을 구하고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많은 착한 사마리아인들의 헌신에 감사하고 경의를 표하며 교리 교육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 용감한 사람들은 무관심과 버림이라는 나쁜 문화에 물들지 않은 인류애의 표징입니다. 이주민들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우리의 무관심과 그들을 외면하는 태도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비정부단체 ‘메디테라네아 세이빙 휴먼스’를 비롯해 여러 단체를 통해 최전선에서 헌신하는 많은 착한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처럼 우리가 “최전선”에서 헌신할 수 없다고 해서 이 문명과의 싸움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대부분은 최전선에 있지는 않지만, 그 싸움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 여러 방식으로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주민들, 생존을 위해 우리 땅으로 오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나요? 그들을 내쫓으려 하는 게 혹시 “여러분”은 아닌가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 바다와 사막이 묘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유와 형제애의 길을 열어주시는 자리가 되도록 합시다.
번역 김호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