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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임금도 서서히 훈구파가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법을 만들어놓고,
그 법위에 군림하는 그들에 대한 대항마로 새로운 세력을 조금씩 키워가고 있었는데 그들이 '사림파'입니다.
사림파라는 이름은 숲에 묻혀 글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이름에서 보이듯이
그들은 벼슬을 하지 않고 공부를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훈구파가 가진 약점을 물고 늘어지기
위해서 정몽주와 길재를 복권시켜 자신들의 신념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명분으로 사용했습니다.
훈구파를 탄핵시킬 명분으로 삼은 것이 '의리론', 그러니까 단종과 세종사이에서
'불사이군의 원칙'을 어긴 공신세력들은 의리를 저버린 사람, 사대부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린 사람이 됩니다.
이 이데올로기를 위해 영웅을 탄생시키는데요, 그가 바로 정몽주입니다.
그를 비롯해 사육신까지 '의리를 지킨 선비'들은 전부 복권되고, 반대의 경우는 모욕을 당합니다.
결국 '정몽주-길재-김종직-사림파'로 이어지는
새로운 세력이 정의로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림파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훈구파와 달랐습니다.
한정된 국토에서 우량한 토지를 힘으로 빼앗아감으로써 축재를 일삼고
, 매관매직을 통해 지방관리들까지 좌지우지하는 고도로 집중화되어버린 권력에 맞서는 방식으로
사림파는 작은 정부, 즉 여론에 의해 정치가 이끌어져가고,
지방자치(향약 등)를 통해 중앙정부의 전횡을 막는 행정조직을 지향합니다.
이런 지방분권적 정치는 농지의 개량과 지속적이고 전국적인 규모에서의 치수산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데요, 이런 경제적으로 진보된 사림파의 정책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거치면서 더욱 세련되어집니다.
이 시대의 도자기에는 이러한 사림파의 성리학적 이상이 담겨 있습니다. 선비정신을 담은
이시대의 도자기는 맑고 투명한 백자였습니다. 불투명한 분청사기가 사라진 것은 바로 이때입니다.
사림파가 나타난 이후로 분청사기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왜 백색에 집착했을까?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선비들은 청렴하고 결백한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백자는 그런 선비정신을 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한 점의 티끌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백자를 하얗게 만드는 것이 도공들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생산력이 낮았던 시대에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경쟁을 통해 승자만이
살아남게 하고 나머지는 도태시키는 상업적 자본주의적 문명이전에 '나누고 베푸는
공동체 문화'를 선택한 것이니까요.
퇴계이황과 율곡이이의 성리학 사상은 어렵고 난해한 것으로 치부되어버리는데요, 16세기 선비들을 사로잡았고, 조선의 정신을 낳았던 두 거장의 가치는 간단하게 말하면 당시의 '정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농장의 소유자이기도 한 선비는 농촌사회에서 구휼하고, 치수에 힘쓰고, 의료를 비롯한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를 가진 사람으로 규정함으로써 조선 성리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놓을 수 있게 합니다.
아직 모내기법이 보급되기엔 치수도 제대로 되지 못한 낙후한 시대였던 16세기는 천수답을 제외하고는 생산량이 지극히 낮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비옥한 토지를 독점해버리려는 중앙 권세가들에 맞선 사림파가 해결해야할 지상과제는 농촌사회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못한다면 훈구파와의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성리학적 이상을 기반으로 한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집권할 수 있었던 힘이기도 합니다.
지극히 단순하게 퇴계의 사상을 표현하면 '생산량이 낮은 가난한 사회에서 다함께 배곯기가 선비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생산력이 높아지지 않는 한 있는 것을 나누는 방법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퇴계의 정신은 농촌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이상사회를 꿈꿨는데요, 이후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남인 실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계승됩니다.
반면에 율곡의 사상은 역시 단순하게 말하면, '조금이라도 더 생산력을 높일 궁리'를 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곡의 정신을 이어받은 서인들은 현실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인조반정을 통해 권력을 잡은 뒤로 대동법을 실시하고 화폐를 만들때까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이 끝나버렸고, 그 이후로는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이후 율곡사상을 계승한 북학파 실학자들이 상공업에 눈을 돌렸습니다만 세상을 바꾸기엔 힘이 너무 약했습니다.
어찌되었든 모두가 가난한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소비는 죄악이고 청렴결백이 미덕일 수밖에 없었던 성리학의 선비정신은 그런 시대를 살아가려는 지배자 양반사대부들의 자기 희생정신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더욱 '눈처럼 시리도록 하얀 백자'에 집착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처럼 질 좋은 백토가 나와 버린다면 좋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백토는 완전한 하얀색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하얀색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어쩌면 오히려 그렇게 조금 모자라는 흙으로 최고의 백자를 만들어낸 것이 조선백자의 위대함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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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수고로움의 결과
백토는 불순물이 많습니다. 그래서 순수한 하얀색을 내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 구덩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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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은 암석이 잘게 부서져 만들어진 것입니다. 암석에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느냐에 따라 흙의 성질이 정해집니다. 철분이 들어 있으면 무겁고 그렇지 않으면 가볍습니다.
백자는 이 철분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철분은 색채의 마법사여서 1%만 넘기면 자기가 들어있다는 것을 결코 감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성분이 철분이라는 것을 알지는 못했지만 무거운 알갱이를 걸러내고 또 걸러낼 수록 백자는 더 하얗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철분이 든 알갱이를 빼내기 위해 물에 가라앉는 속도가 무게에 따라 다르다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 '수비'과정입니다. 수비는 '물속에서 나는 흙'을 찾아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분이 들어있지 않은 흙은 물속에서 '날아다닌다'고 믿은 것이지요.
그래서 우물처럼 깊은 웅덩이를 팠는데 이것을 '땅두멍'이라고 합니다. 물론 고급 청자를 만들 때나 삼국시대 도기를 만들 때도 이런 구덩이를 씁니다. 입자가 고르면 고를수록 청자와 도기의 품질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이 기술을 물려받은 백자도공은 이 구덩이를 크게 만들면 만들수록 좋은 백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고 '수비'과정을 더욱 개발했습니다. 구덩이에 물을 가득 채우고 흙을 풀어 흙탕물을 만들기 위해 기다란 막대기로 저어줍니다. 이때 아래로 가라앉는 것은 진흙이고 위의 흙탕물은 '톳물'이라고 부릅니다. 이 톳물이 '흙이 날아다니는 물'입니다.
이 톳물을 체로 받쳐내길 수도 없이 반복하면 알갱이가 고르고 철분이 들어있지 않은 '백자를 만드는 흙'이 탄생합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질 좋은 고령토를 주지 않았지만 대신 뛰어난 머리와 부지런함을 주었던 것이지요. 순백색의 백자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톳물을 일일이 받아내는 수고의 대가로 말이지요.
찻잔 대신에 술잔을
사림파가 백성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들은 철두철미한 주자학자였습니다. 주자학의 원리에 따라 우리 민족의 입맛마저도 변화시켰습니다. 불교와 함께 유행했던 차문화가 사라졌습니다.
차를 대신하여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술입니다. 제사에도 차대신 술이 쓰였고 나들이를 가더라도 차를 끓여 마시며 시를 짓는 풍류객 대신에 술을 나눠마시게 됩니다. 조선시대 풍속화에는 술을 마시는 모습만 등장합니다.
밥을 먹고 난 뒤 차를 마시는 일을 수백년 가까이 해왔던 우리 민족이 순식간에 차를 끊었던 것은 놀랄만합니다. 차는 중독성이 강한 편인데 말입니다. 사림파의 위력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도 밥을 먹고 난 허전함을 견디지 못하고 숭늉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차와 같이 자극적인 맛이 없는 숭늉으로는 만족하기 어려웠습니다. 막걸리가 백성들 속으로 파고들어 자리 잡습니다. 찻잔으로 쓰이던 도자기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대신에 술병과 술잔이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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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보면 술병은 도기이고 술잔은 백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술병의 색이 회색인 것으로 보아 유약을 바르지 않은 질그릇처럼 보입니다.
산이나 강이나 사람들이 모이면 고려시대에는 차를 끓여 마셨지만 조선시대에는 술판을 벌였습니다. 사림파에 의해 불교는 철저하게 탄압받았습니다만 차를 마시는 것마저 없애버린 것이 지나쳐 보입니다. 술판을 벌이는 것보다는 차를 마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도자기 전쟁
오랫동안 잠자던 유럽세계를 깨운 것은 징기스 칸이었지만 그들이 동양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마르코 폴로의 기행문인 < 동방견문록 > 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원나라는 다른 민족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호의에 힘입어 마르코 폴로는 원나라에서 머물다 돌아가 기행문을 썼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동양에서 나오는 향료, 비단 그리고 도자기를 구하기 위해 사막을 건너오는 아라비아 상인이나 이탈리아 상인을 기다리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잘 만하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이 무역을 위해 바닷길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519년에 마젤란은 최초로 세계 일주를 했습니다. 무역 길을 찾기 위해 시작된 대항해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지요. 배를 이용하여 동양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바다엔 온통 모험가들로 가득 차 있을 무렵 우연한 기회에 포르투칼 난파선은 일본으로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일본에겐 서구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주었습니다. 화약을 만드는 방법, 대포를 만드는 방법, 조총을 만드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농사짓기 어려운 땅에 사는 일본에게 이일은 욕심을 부리기에 충분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바다를 통해 무역을 할 수 있다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일본은 강력한 왕이 세금을 거두고 군대를 다스리는 중앙집권국가가 아니라 지방의 영주가 힘을 가진 나라입니다. 영주들에게 무역은 재물을 모아 힘을 기를 좋은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앞 다투어 서양으로 무역 길을 텄습니다.
일본이 서양에 팔 만한 물건이 무엇이었을까요? 서양 상인들은 비단이나 후추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런 게 일본에 있을 리 없었습니다. 서양에서 인기 있는 상품 중에 일본이 가진 것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서양인들이 도자기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때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의 전쟁을 발표합니다. 오랫동안 조선과 무역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난 영주들은 환영했습니다. 그 중에는 조총을 만들었고 침략전쟁의 최전선에 섰던 사쓰마 영주도 있었고 아리타 지방의 영주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1592년, 일본은 대한해협을 넘어 부산에 상륙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도자기산업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일본의 관심은 금은보화보다 도공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자기 가마가 있는 곳으로 들이닥쳐 도공과 도자기를 굽는 백토를 닥치는 대로 훔쳐갔습니다. 그리고 영주들은 도공들에게 도자기를 굽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은 사쓰마와 아리타지방에 조선인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단군을 모셔놓고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고 마침내 일본도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조선 도공들의 노력과 눈물, 그리고 일본영주들이 도자기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은 세계 도자기 지도를 바꾸었습니다. 일본 도자기는 곧 유럽인들을 사로잡았으며 네덜란드로 가는 무역선을 가득 메웠습니다. 이후 일본은 오늘날까지 세계 도자기 강국이 되었습니다.
조선 도공 이삼평이 도자기를 만든 아리타 지방은 도자기의 고향으로 여겨지며 아리타자기는 일본자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실크로드가 비단을 사고파는 상인들이 건너던 사막길이라면 일본에서 유럽으로 가는 뱃길은 도자기의 길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아리타자기는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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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발, 서민들의 도자기
아무리 여건이 좋지 않았다 해도 우리 민족은 도자기를 구웠습니다. 흙이 있다면 말이죠. 최고의 백토나 비싼 코발트나 충분한 땔감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못되었지요.
사옹원이 분원을 만들어 왕실자기를 만들면서 지방에 있던 가마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아야했습니다. 시골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발이나 팔아서는 먹고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백성들에겐 그들만의 그릇이 필요합니다. 마을의 도공들은 그들 형편에 맞는 그릇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질이 좋지 않은 백토로 가마에서 구우면 밑에 깔아둔 모래가 붙고 흙속에 있는 불순물이 깨알 같은 무늬를 만듭니다. 고급도자기가 아니다보니 갑발도 씌우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가마를 만들 형편이 아니다 보니 불은 용솟음치면서 그릇에 닿아 그 부분만 흙의 색을 변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막사발입니다.
막사발은 막 쓰는 그릇이라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청자를 만들기엔 좋지 않은 흙이 분청사기를 만들었듯이 백자를 만들기엔 좋지 않은 흙은 막사발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분청사기가 백토라는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이라면 막사발은 도자기를 만드는 기본 재료인 물,불,흙이 제멋대로 어우러져 가마 속에서 한바탕 춤판을 벌인 후 토해내는 자연의 언어 그자체입니다.
막사발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국보가 되었고 격찬을 받은 것은 모든 것이 자로 잰 듯이 반듯해야 하는 일본인들에게 이 자유로움이 너무도 고귀한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 무역사절들이 막사발을 구해달라고 아우성을 쳤던 것도 이런 자유로움을 일본에선 만들어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던 우리 민족만의 만들어낼 수 있는 도자기이고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적 가치가 그 속에 담겨있습니다.
막사발은 청화백자처럼 권력이나 재물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도자기가 아닙니다. 밥을 먹고 국을 먹고 숭늉을 담아 먹었습니다. 조금은 주둥이가 깨져도 버려지지 않았고 정 못쓰게 되면 강아지 밥그릇으로라도 썼습니다. 마치 숨 쉬는 공기처럼 사람과 함께 했던 것입니다. 맨 처음 토기를 만들었던 사람들에게 토기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돌처럼 나무처럼 자연의 일부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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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그 영이 재임을 반복하는 지구
우주의 도구 몸 인간DNA는
빛이 있으므로 자연에 신성 할 때 지성체(사람) 입니다.
우리 몸 세포 하나하나는
태어나면서 부터 착각의 굴래 인위의 대물림
곳 종교의 내면 입나다.
그렇게 안주하는 마음이 되어 있지요.
착각의 시간은 본성을 잃어버리도록 세뇌 시켜져서
본성 그 평온함을 잊은체 거짓 성공을 꿈으로
불안과 고통이 끈이지 않지만...
결국 나이 먹으면서 몸이 참고 견디고서
내 마음 외부기능이 영이 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가슴 그 육체가 전자기능 주파수 파동의 도움을 받아
삶의 재지각이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빛 때문에 였다는 것,
내 몸이 빛의 살점이라는 것,
죽음 자체까지도 한결같이 살아있다는 것,
영은 복사하기위해 있는 살점의 실재
나는 핵 원자 에너지의 힘 빛의 수호자,
지극히 한정된 삶을 사는 우리는
내 몸속 자기 부정적 경험을 통해
진화의 목적에 이끌려 살다보니
힘든 것을 좋와서 일부러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경조억겹에 매인 우주평창의 영생을 격습니다.
때문에 빛은 지성체라 불리우는 어버이를 만들고
그 인격으로 자신의 본성을 찾습니다.
그 영을 섬기도록 진화의 정신은 신성함입니다.
우주먼지가 태양에 반복하는 '몸' 나는
움직임을 먹음는 빛의 찰나에 실체라는 것,
나는 우주이기에 격는 평창이다.
나는 전자며 반복하는 핵에너지 000000000.1
현미경으로도 잘 나타낼 수없는 에너지 실재다.
빛이 있어 실체로 나타나 찰나에 있다.
따라서 몸이 지성체로 지워져 있다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몸은 우주의 도구인 것입니다.
,
항성과 행성이 없어지고 나타나는 이유의 관계
빛 까지도 다스리는 암흑 물질 에너지라는 것,
불랙홀은 다중우주의 복사 과정이라는 것,
우리도 달도 지구도 찰나로 재임되는 원자에 하나입니다.
그렇게 평창하기위해 복사되는 우주의 실체 나는
우주 어느 곳에나 있겠금 있는 실재(영) 입니다.
따라서 없는 것을 보고 느끼게 실체로 진화를 격습니다.
몸은 죽기도하고 영은 다시 태어나기도 하는
씨앗이며 뿌리인 것입니다.
우주파장에 맞춰진 광자대 입니다.
힘든 날은 없습니다.
고로 죽음도 없습니다.
다 그런 날이 있도록
반복하는 힘 더 큰 에너지의 끄러당김 입니다.
그 엄청난 우주근원의 역사 발견은 그렇습니다.
다 마련으로 차려진 것 입니다.
000000000000000000.1수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의 생각은 각기 다른 주장으로 여러 문재를 겪 습니다.
거듭하는 빈 공간의 개념.
사라짐을 반복하면 커지는 힘
우리 몸 속에도 있고
지구에도 태양에도 우리 일상에도 있습니다.
빛이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일상에 목적이 되어 발견으로 살도록 합니다.
"죽음이 반복하여 창초되는 진화,
신을 위해 선량해 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성체인 나 자신을 위해 선량해지면
신들이 내 속에 있기 때문에
나는 저절로 선량해 집니다.
한번 배우고 또 다시 재 지각을 반복하도록 격는 순간들
숨쉬는 시너지 주파수 파동의 공간들....
숨쉬는 움직임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도록 반복하는 생명입니다.
몸은 배풀기위해 있는 영의 도구입니다.
고로 두려움이 없도록 홀로그램 인생입니다.
몸이 컴퓨터 본체라면
영은 기억장치 해드디스크 입니다.
덕은 인위적인 덕이 아닙니다.
최상의 덕은
덕을 의심하지 않음으로 덕이 있는 것이고
정도가 낮은 덕은 덕에 매여있기에 덕이 없는 것이다.
최상의 덕은 무위여서 자연스럽고
정도가 낮은 덕은 유위로서 부자연 스럽다.
인은 유위로 자연스럽고
의는 무위며 부자연 스럽습니다.
사회의 예는 유위이고 그 예는 반응이 없으면
팔을 걷어 붙이라고도 예을 든다.
무위자연의 도가 사라지면 무위자연의 덕이 나타나고
무위자연의 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의의 도덕이 나타나게 되는데...
인위적인 의의 도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예의 도덕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의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참다운 마음이 엷어진 것이며
세상이 어지럽게 되는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미리 내어보려는
예와 지, 그 지식은
도의 알맹 없는 겉치레와 같은 것,
나 존재를 어지럽고 못나게 만들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사람은
예와 지를 버리고 도을 택하는 것입니다.
"도'의 길
도의 길은 하루하루를 게으르지않게 일하며
움직임으로 오는 복 그 돈을
나를 없애는 데 씁니다.
나눔의 경험이 채워질 때 "도"가옵니다.
없애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 수치심도 이기고 또 이기면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 입니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결핍 덩어리였던 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어머니, 아버지, 아내, 동생, 더많은 여자,여자,여자,
결핍자아 수치심을 견디고 참는 과정이였습니다.
그토록 그렇게 고맙게
나를 아프도록 했던 것이 있었기에
나는 신성을 찾았고 진리를 맛보는 의미로
삶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 에게
이런 말도 전하게 되는 것 입니다.
각성을 이용하여 내 인연의 모든 분들과
진정한 인격의 가치를 세우는
가족이 되어 가겠습니다.
무위경조
평생이 담긴 그 하루
노동이 없는 돈 때문에
정신은 파멸되어 갑니다.
늘 움직임을 여의는...
자기 기능을 찾는...
그 습관만이
늙음을 막는 가장 훌륭한 처방이 됩니다.
맘껏 나아가고 싶을 때
한 걸음 물러서는 것,
그리고
나아가기 두려울 때
단호히 한 걸음 내딛는 것.
그것이 마음으로 하는 검도의 요체입니다.
생명이 담긴 하루 그평생이 있건만
노동이 없는 돈 때문에 정신은 파멸됩니다.
(돈이 있어도 가난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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