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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72) 마르코 복음서
가장 먼저 쓰인 복음서, 예수님 행적 생생
마르코 복음서는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였고, 분량도 가장 적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원래 16장 8절까지고 이후 내용은 덧붙여졌습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Κατα Μαρκον Αγιον Ευαγγελιον’(까타 마르콘 아리온 에우안겔리온),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Marcus’,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마르코 복음서’라고 표기합니다.
헬라어 ‘Μαρκοs(마르코스)’는 우리말로 ‘마르스에게 봉헌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르스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이자 농사의 신입니다. 파종하는 3월을 ‘마르스의 달’이라 해서 라틴어로 ‘Martius’, 영어로 ‘March’라 하지요. 고대 로마인들은 자신을 마르스의 후예로 여겼습니다. 이처럼 마르코는 고대 로마 제국에서 흔한 이름이었지요.
신약 성경에는 ‘요한 마르코’라는 이름이 14번 등장합니다.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마르코’는 로마-그리스식 이름입니다. 요한 마르코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 살았으며 그의 집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종종 열렸습니다.(사도 12,12) 그는 바오로 사도의 1차 선교 여행에 사촌 바르나바와 동행했습니다. 그들은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했으나 요한 마르코는 도중에 그만두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사도 12,25-13,13) 바오로 사도는 이를 못마땅히 여겨 2차 선교 여행(50~52년께) 때는 그를 데려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요한 마르코는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 섬으로 가서 선교합니다.(사도 15,37-39) 그러나 요한 마르코는 바오로가 3차 선교 여행(53~58년께) 때 에페소 감옥에 갇히자 곁에서 그를 돕습니다.(필레 24; 콜로 4,10) 아울러 바오로는 로마에서 순교하기 직전 티모테오에게 마르코를 데려오라고 부탁합니다.(2티모 4,11) 70~100년께 로마에서 쓰인 베드로의 첫째 서간에서는 마르코가 베드로의 일행으로 로마에 있다고 소개합니다.(1베드 5,13) 이처럼 신약 성경은 요한 마르코가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임을 알려줍니다.
초대 교회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60년께~130년) 주교는 “마르코가 베드로 사도에게 전해 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말씀을 기록했다고 요한 사도에게 들었다”고 증언합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12,12) 2세기 리옹의 이레네오 성인은 “베드로 사도가 순교한 다음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215년) 성인은 “베드로 사도가 살아있을 때”에 마르코 복음서가 저술됐다고 합니다. 아울러 일부 교회 전승은 베드로 사도가 그의 통역자인 마르코를 이집트에 파견했고,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설립해 첫 번째 주교가 됐다고 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68년께 순교했고, 그 유해는 훗날 베네치아로 옮겨진 후 산 마르코 대성전을 지어 제대 아래 안치됐다고 합니다.
이처럼 교회는 베드로·바오로 사도와 연결된 요한 마르코가 마르코 복음서를 저술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 마르코 복음서에 바오로의 사상이 거의 없다 △ 수록된 예수님의 말씀이 50년대 편찬된 「예수님 어록」(Q)보다 많이 변질해 있어 베드로 사도가 전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기록했다고 보기 어렵다 △ 치유·구마 이적이나 논쟁 사화 역시 이를 목격한 베드로가 바로 전한 이야기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교회 전통상 마르코가 복음서 저자라고 할 뿐이지, 누가 마르코 복음서를 저술했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다만, 그가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알 뿐 아니라 헬라어로 집필했고, 유다인과 이방인들의 풍습까지도 잘 알고 있어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제1차 유다-로마 전쟁을 기준으로 50~70년께 로마에서 쓰인 것으로 봅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저술됐기에 역사의 실제에 가장 가까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복음서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1-9장), 예루살렘 상경기(10장), 예루살렘 활동기(11-16장)로 구성돼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16장 8절로 끝맺는데, 그 끝맺음이 매우 어색해 2세기에 긴 끝맺음(16,9-20) 또는 짧은 끝맺음을 덧붙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관심사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1,1)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기쁜 소식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나자렛 출신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로 이야기하고 복음으로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는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1,14-15; 4,26-32)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여는 인간 구원(9,43-45; 10,17-23)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고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는 현실적이며 최종적이고 현재며 미래이고 보편적인 인간 구원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아들과 같은 뜻으로 ‘그리스도’, 곧 히브리말로 ‘메시아’라고 선포합니다. 또 ‘사람의 아들’이라고도 부릅니다. 아울러 마르코 복음서는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합니다.(8,3; 9.31; 10,33-34) 또한, 실제로 그분은 죽으시고(15,33-41) 묻히셨으며(15,42-47) 부활하시고 나타나셨다고 증언합니다.(16,1-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20) 유리천장을 깨트렸던, 드보라 판관
미국 최초 여성 대통령을 꿈꿨던 힐러리 클린턴은 선거 유세 내내 유리천장을 깨뜨릴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대선에서 낙선한 후 “언젠가 누군가는 그 유리천장을 깨뜨릴 것이다”라며 의미 있는 메세지를 전했다. 유리천장(glass ceiling)은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직장 내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 등의 이유로 고위직을 맡지 못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경제학 용어이다.
유리천장이란 말은 우선 ‘성’(gender)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대신학교 1학년 학보사 기자 시절 학보인쇄를 위해 하루 종일 어느 작은 출판사와 인쇄소에서 머무른 적이 있었다. 여직원은 경리를 맡은 한 사람이 있었고 나머지는 남직원들이었다. 남직원들이 여직원을 대하는 것을 보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현재 법적 차원에서는 모두 성추행 등 위법행위가 될 말과 행동이 수없이 자연스럽게 행해졌다. 더 큰 문제는 여직원을 같은 동료가 아니고 다른 차원의 사람으로 차별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유리천장은 존재한다고 느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은 뒤 왕정시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판관시대를 맞게 된다. 판관이란 왕은 아니지만 민족을 지도하는 통치자로서 사법과 행정을 관할하는 직분을 맡은 사람이다. 판관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위급한 국가위기 상황에서 군인들의 총사령관 역할도 담당했다.
이스라엘의 판관 중 드보라는 유일한 여성이다. 여성이 사회적 불평등을 당하던 당시에 여자 판관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여자 예언자 드보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면서 재판을 주관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정세는 가나안 왕이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드보라는 만 명의 군인을 출동시키면서 자신도 함께 전선에 참여했다. 가나안 군이 상상할 수 없는 무기로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도 드보라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스라엘군에게도 계속 공격을 명령했다. 패배감에 젖어있는 이스라엘 군인에게 하느님께서 우리들 앞에서 전진하니 꼭 승리할 것이라 확신과 용기를 주었다.
결국 이스라엘 군인의 높은 기세에 눌려 적군은 도망쳤고 이스라엘은 승리를 쟁취한다.(판관기 4장 참조) 드보라는 지혜와 용기, 신앙을 겸비한 여성 정치가였다. 그녀는 용기 있는 결단으로 민족을 구한 이스라엘의 국모(國母)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능력이나 역할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성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다. 신앙인에게는 어떠한 인종, 문화, 사회적이나 성적 차별이 존재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생각과 의식이 변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별의 선입견이 존재하지는 않는지 늘 반성해야 한다.
[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하늘은 어디에, 어떻게… (묵시 4장)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역사적이었고 실제적이었다. 사람의 아들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삶 곳곳에 필요한 말씀을 남겼다. 그러나 묵시 4장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진다. 우리의 시선은 요한을 따라 하늘을 향한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어좌에 앉으신 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결합되어 정돈된다.
요한이 바라본 하늘은 어떤가. 애초 하늘은 땅과 맞닿아 있지 않는, 그야말로 하늘은 땅과 철저히 구분된 ‘넘사벽’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요한이 바라본 하늘은 특별한 데가 있다. 먼저 하늘을 볼 수 있는 요한의 면모부터 남다르다. 요한에겐 어떠한 노력도, 특별한 재능도 보이지 않는다. 대개 묵시문학들의 주인공은 의인이거나 깨끗하거나 초월적 능력을 소유한 이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요한은 그저 보는 것을 제 역할로 삼아 하늘의 소리와 장면을 듣고 보았다. 요한에게는 선민적 특권이 보이질 않는다.
하늘을 바라보는 요한의 시선 역시 특별하다. 하늘이 땅으로 열리는 게 아니라 땅에서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요한은 본다. 땅에서 하늘을 향하는 시선은 넘사벽 하늘의 경계를 쓰러뜨린다. 유다의 묵시문학들은 하늘을 두고 땅보다 우월하고 특별한 곳으로 묘사하기 바쁘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은 그런 공간적 차별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어 땅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공간적 통합을 이룬다.
하늘에서 요한이 보게 될 것은 ‘이후에 나타날 것들’이다.(4,1) 묵시 1,9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네가 본 것을 책에 기록하여라.” 책에 기록된 것은 요한이 본 것과 다른 무엇이다. ‘이후에 나타날 것들’도 마찬가지다. 요한의 시선을 통해 나타날 그 무엇들은 실재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될 수 없다. 묵시 4장에 자주 등장하는 ‘~처럼, ~같이’라는 표현만 봐도 그렇다. 요한의 시선은 실재 존재하는 것을 해석한다. 하늘은 더이상 가까이 하지 못하는 실재가 아니라 요한의 시선 안에서 새로운 공간으로 창조된다. 하늘의 어좌와 그 둘레의 스물 넷 원로와 네 생물이 불가능의 공간을 만들고 불가능의 공간에 모든 가능태의 독자들을 초대해 무궁한 해석의 시간들을 희망케 한다. 요한 묵시록의 하늘은 그래서 문학이고 예술이 된다.
묵시 4장이 빚어내는 예술 작품의 중심엔 어좌가 있다. 어좌가 모든 있다는 것들의 기준이다. 어좌에 앉으신 분을 하느님으로 이해하는 경우, 요한이 빚어내는 하늘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되는 세상이다. 다분히 영성적인 관점이다. 이를테면 하느님이 어디 계시는지 묻는 객체적 질문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주체적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라는 질문은 하느님이시라면, 으로 바뀌어야 한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은 벽옥과 홍옥으로 묘사된다. 어좌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 묻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빗대어 다른 상징으로 소개된다. 값비싼 보석이 하느님일 수는 없다. 그러나 값비싼 만큼 하느님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해석이 벽옥이고 홍옥으로 재현된다.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은 형언하는 순간에 하느님이 아니게 된다. 요한 묵시록 역시 구약의 전통적 표현으로 감히 규정하고 다가설 수 없는 신적 현현을 서술한다. 번개와 요란한 소리, 그리고 천둥이 그것이다.(탈출 19,16-19; 시편 18,8-16) 일곱 횃불과 유리 바다 역시 그러하다. 신적 현존과 중요한 인물을 묘사할 때, 일곱 횃불과 유리바다는 자주 사용되었다.(즈카 4,2) 일곱 횃불은 하느님의 일곱 영이라고 다시 해석된다. ‘타오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세라핌이라는 천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는 사제로 일곱 영을 또다시 해석하기도 한다.
어좌를 꾸미는 여러 상징들을 두고 초월적이어서 배타적인 하느님만을 위한 전통적 공간이 어좌라고 성서학자들은 해석한다. 그러나…번개든 천둥이든 또한 일곱 횃불이든 그것들의 배타성(?)은 스물 넷 원로의 등장으로 속절없이 허물어진다. 스물 넷 원로는 천상의 영광을 나타내는 흰옷, 왕권을 가리키는 금관을 쓰고 있다. 원로를 가리키는 그리스말 ‘프레스뷔테로스’는 ‘나이 든 사람, 조상’이라는 뜻을 지닌다. 인간의 근원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관습적으로 천상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가 아니다. 천상의 자리는 스물 넷 원로가 함께함으로 인간의 근원, 인간의 본디 자리와 뒤엉킨다. 전통적 공간의 혼돈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좌 한가운데 그리고 그 둘레에 있는 네 생물 역시 구별되고 배타적인 공간 개념을 무용하게 만든다. 그리스말로 ‘자오’, 곧 ‘살아있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조온’은 대게 에제키엘 1장의 네 생물을 옮겨 온 것이라 여긴다. 유배의 시간,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진 듯 절망에 지쳐 있을 때, 에제키엘은 네 생물을 통해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는 희망을 선사한다. 네 생물은 어느 곳에 콕 박혀 있는 배타적 상징체가 아니다. 어느 곳이든 하느님이 계신다는 열림 그 자체다. 숫자 ‘4’의 묵시문학적 의미도 그렇다. 세상 전체를 가리키는 숫자 ‘4’(묵시 7,1;20,8)는 네 생물이 외치는 ‘전능하신 주 하느님’에서 제 가치의 극단을 드러낸다. ‘전능하신’이라고 번역된 그리스말 ‘판토크라토르’는 ‘모든 권능을 가진 이’라는 뜻을 지니는데, 어떠한 한계나 모자람을 용인하지 않는 그야말로 감당하기 힘든 ‘모든 그 무엇’이다. 세상 모든 곳에 모든 것으로 계시는 하느님이 네 생물을 통해 독자와 소통한다. 네 생물을 또렷이 읽고 보는 순간, 시공간의 한계 속에 숨막힐 듯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들, 하느님을 찾아 헤매며 삶의 아픔과 슬픔을 호소하는 모든 신앙인들은 아직 결론 내지 못해 의문과 고뇌로 흘러가는 제 삶의 우주를 목도한다. 그 삶이 무엇이든, 그 삶이 어떻든, 하느님은 거기에 모든 것으로 계실 것이라는 사실. 찾아 나설 하느님이 계시는 게 아니라 이미 모든 곳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우리는 끝끝내 살아 내는 제 삶의 현실 안에서 놀라고 반갑게 만나 뵙는다.
요한의 시선을 따라 올라온 하늘은 실은 우리 모든 인간이 살고 있는, 혹은 살아 내는 삶 자체의 공간이 되어 버린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느님과 더불어 우리 삶은 그 자체가 하늘이 된다. 더이상 바라볼 하늘은 없다. 더이상 허투루 포기하고 절망할 인생은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고뇌와 혼돈 앞에 묵시 4장은 지금 우리 삶 자체를 정확히 겨눈다. 어쨌든 살아가는 이 삶이 참으로 하늘이어서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가. 이 땅의 우리가 살아 내는 그만큼 하늘은 딱 그만큼 세상 안에 훤히 드러나고 스며든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엘리사
성경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주님 곁으로 간 사람은 둘입니다. 창세 5,24에 나오는 에녹과 2열왕 2,1-18에 나오는 엘리야입니다. 이 가운데 엘리야는 자신의 예언직을 엘리사에게 물려주고 승천합니다. 당시 전문 예언자들이 많았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의 후계자로 예언자도 아니었던 엘리사를 택하셨습니다. 그 시대의 예언 소명은 최고 권력자와의 대립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어서 웬만한 사람은 맡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이를 견딜만한 근성과 결단력을 지닌 사나이였습니다. 엘리야는 승천 전에 자기를 따라오지 말라며 엘리사에게 몇 번이나 말하지만(2열왕 2,2.4.6), 엘리사는 스승을 떠나지 않겠다며 베텔에서 예리코로, 또 요르단강까지 따라갑니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흔들림 없이 예언자의 길을 갈 거란 점을 증명합니다. 이때 엘리사가 소망한 것도 부나 영예가 아닌 ‘엘리야가 가진 영의 두 몫’이었습니다(9-10절). 결국 엘리사는 스승의 승천도 목격하고 원하는 바도 얻게 됩니다. 엘리야의 승천 이후 동료 예언자들은 엘리사에게 스승의 영이 내린 것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15절).
엘리야의 뒤를 이어 하느님의 사람이 된 엘리사는 예리코에서 첫 기적을 일으킵니다. 예리코 샘의 수질이 나빠 생산력이 떨어진다고 주민들이 불평하자, 엘리사는 소금을 뿌려 물을 좋게 만듭니다(18절). 다만 그 뒤에 이해하기 어려운 일화가 이어지는데요, 베텔로 가던 길에 어린 아이들이 따라와 그를 대머리라고 놀려 대자, 엘리사는 애들 장난이라고 웃어 넘기지 않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저주합니다. 그랬더니 암곰 두 마리가 나타나 아이들을 찢어 죽였습니다.
언뜻 오해를 일으킬 만한 이 일화에는 사실 행간에 뜻이 숨어 있습니다. 일단 이야기 속의 아이들은 엘리사가 예언자임을 알아본 듯합니다. 당시의 예언자들은 복장에서 표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말 성경에는 “아이들”로 나오지만, 히브리어 [나아르]는 청소년부터 청년까지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일화 속의 아이들은 나이 적은 어린이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23절) 한 것은 엘리야의 승천을 조롱한 말로 보입니다. 곧 ‘네 스승인 엘리야가 승천했다는데 너도 한 번 올라가 보시지.’ 하고 비아냥댄 것입니다. ‘엘리야의 승천은 순 거짓말이다.’라는 뜻이 내포되었던 거죠. 엘리야의 승천을 조롱한 건 하느님을 조롱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열왕기에서는 이 일화를 예리코 기적 사건과 나란히 배치하여 하느님은 생명을 주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는 분임을(신명 32,39; 1사무 2,6 등),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분의 대리인 역할을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가 하게 될 거란 사실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오늘, 생명을 주기도 거두기도 하시는 창조주의 섭리를 떠올리며 구약 시대에 ‘하늘로 오른’ 엘리야와 그 뒤를 이어 예언자의 삶을 산 엘리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마르코와 함께 떠나는 복음 여행] 예수님과 만남을 방해하는 장애물(마트 6,1-6)
마을 어귀에 큰 나무가 보입니다. 고향 나자렛입니다. 산악 마을 특유의 따사로운 햇볕과 살포시 뺨을 스치며 떠나가는 바람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잘 왔다.’라며 인사를 건넵니다. 일전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오기도 했었지만,(마르 3,31-35 참조)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는 중에 고향에 오신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음을 알아차린 마을 사람들은 반가운 인사를 건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은 나자렛에 머물며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던 중,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회당으로 향합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회당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께서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십니다. 친구들과 율법 교육을 받고 유다인으로 살아가면서 지녀야 할 정체성과 삶의 지혜를 배우던 회당. 제자들과 함께 회당에 들어서시자, 회당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오랜만에 들르셨으니 좋은 가르침을 달라고 청합니다. 율법서 낭독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을 사람들은 다른 이스라엘의 스승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권위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습니다. 가르침 안에 담긴 내용에 집중하기보다, 어떻게 예수님이 저런 놀라운 가르침을 줄 수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아니, 예수는 우리가 잘 아는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아닌가? 그의 형제와 누이들도 우리가 잘 아는데, 도대체 쟤는 어디서 저런 놀라운 지혜를 얻게 된 거지? 듣자니 놀라운 기적도 일으킨다는데, 이런 능력을 어떻게 받게 된 걸까?”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보이거나 못마땅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또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에,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 안에 뿌리뽑기 힘든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예수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도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몇몇 병자의 병을 고치는 것 말고는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셨다고 마르코는 증언합니다.
때론 우리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치 예수님을 잘 안다고, 아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아는 척하며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말씀을 올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 우리의 기준으로, 우리의 선입견만으로 예수님을 만나려 한다면, 그 만남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을 결코 체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늘 새로운 마음, 열린 마음으로 그분 앞에 나설 때, 진정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