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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반장 월례연수] 평화 <정의>
정의로운 세상을 위하여 -
인간은 누구나 정의로운 세상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정작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정의는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다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구에서 시행 중인 안락사, 마리화나, 낙태법에서 볼 수 있듯 법으로 허용된 일이라고 언제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며,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의 존엄과 권리를 희생시키는 것 역시 정의라 부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정의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교에서 정의는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가톨릭 교회 교리서」 1807항)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땅히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에게 마땅한 것은 사회가 허락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 존엄하며,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를 지닙니다. 따라서 정의로운 사회란 강한 사람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각자에게 마땅한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입니다.
1. 성찰 : 누구의 권리가 잊히고 있는가!
오늘날 세상에는 수많은 불의가 존재합니다. 전쟁과 폭력,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 노동 착취와 인신매매, 성적 학대와 차별, 강제 이주와 난민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혐오와 배제 역시 인간의 존엄을 훼손합니다. 이러한 불의가 개인들의 죄와 선택을 통해 사회의 제도와 관행 속에 자리 잡고 다시금 새로운 불의를 낳게 될 때, 교회는 이를 ‘죄의 구조’라고 부릅니다(『간추린 사회교리』, 119항 참조).
성경은 이러한 현실 앞에서 침묵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은 가난한 이의 권리를 왜곡하거나 죄 없는 이를 희생시키고, 뇌물을 통하여 정의를 뒤엎는 일을 명백히 거부합니다(탈출 23,6-8 참조). 특히 예언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와 권력 남용을 단순한 사회적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훼손하는 죄로 바라봅니다(아모 2,6-7 참조).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과 인간을 정의롭게 대한다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반복하여 가난한 이, 고아와 과부, 이방인과 억압받는 이들을 기억합니다. 이는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귀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땅한 권리가 가장 쉽게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정의는 모든 사람의 존엄을 인정하면서도 특별히 권리를 빼앗긴 사람의 목소리를 듣도록 요청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성찰한다는 것은 이러한 질문을 요구합니다. 우리 사회는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누군가의 고통이 쉽게 묻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누리는 편리함과 풍요 뒤에서 누군가의 존엄이 희생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증거 : 예수님의 정의를 살아가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정의는 단순히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외적인 행동을 넘어 마음을 바라보셨고,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결국 신약에서 정의는 율법의 외적인 준수를 넘어 하느님의 뜻에 대한 내적 순종과 이웃의 선을 돌보는 삶으로 완성됩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 정의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정의는 사랑을 동반하며 사랑은 정의를 완성합니다. 정의가 “당신에게 마땅한 것을 돌려주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사랑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정의에서 요구되는 것은 사랑에서도 요구되며,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이 없는 정의는 차가운 규칙이 되기 쉽고, 정의가 없는 사랑은 진리를 왜곡하는 동정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2027 서울 WYD는 영적 가치들 중 하나를 “정의”로 선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정의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 차별받는 이의 곁에 서는 것, 혐오와 조롱에 동조하지 않는 것, 다른 국적과 문화와 종교를 지닌 사람을 존중하는 것,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돌아보는 것에서 정의는 시작됩니다. 더 나아가 불의한 제도와 구조를 발견했을 때 무관심하지 않고 공동선을 위하여 목소리를 내며,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능력과 재화를 나누는 것 역시 정의의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3. 열매 : 정의에서 화해와 평화로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단순히 잘못한 사람을 찾아내어 처벌하고 세상을 정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으로 나누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곧 화해와 평화입니다. 정의가 없는 화해는 피해자에게 불의를 참으라고 요구하는 거짓 화해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화해를 향하지 않는 정의는 끝없는 보복과 적대의 논리로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정의를 평화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정의에 사랑의 정신이 함께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진리 안의 사랑』 6항 참조).
이러한 요청은 특히 폭력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을 향해야 합니다. 납치와 착취, 조직범죄와 인신매매, 성적 학대와 정치적 억압, 극도의 빈곤으로 고통 받는 이들, 그리고 고향을 떠나 이민자와 난민이 된 이들은 단순한 통계 속 숫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꿈을 꾸고 사랑하며 자신의 미래를 희망하는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들과 동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빼앗긴 ‘마땅한 것’을 되찾아 주는 정의의 실천입니다.
2027 서울 WYD는 세계 곳곳에서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서로 다른 상처와 희망을 지닌 젊은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분께서 보여 주신 정의는 사람을 밀어내는 정의가 아니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정의이며, 죄를 외면하는 정의가 아니라 죄로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는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향한 우리의 갈망은 사랑으로 나아가고, 사랑은 화해를 이루며, 화해는 마침내 평화라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2027 서울 WYD를 통해 한국 사회가 바로 이러한 정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지 않고, 가장 약한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권리만큼 다른 사람의 권리를 소중히 여기고, 정의를 실천하면서도 미움과 보복이 아니라 사랑과 화해를 선택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세상이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통해 많은 이들이 복음의 가치에 감동하고, 우리 사회가 더욱 정의로운 공동체로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때 정의는 더 이상 우리가 외치는 하나의 구호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정의는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이 되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되며, 세상 안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의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을 되찾고,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자매가 되는 세상.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평화의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19) 「로빈슨 크루소」 : 개인적 경험과 공동체적 경험
무인도에 갇혀버린 신앙… 타인과의 관계 결여된 영성의 한계
18세기 계몽주의는 외적인 권위가 아니라,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 능력을 통해 진리를 발견할 가능성을 열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성의 한계를 대면하면서 낭만주의는 감정을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영향 아래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1768~1834)와 현대 종교심리학의 선구자인 윌리엄 제임스(1842~1910)는 교회의 권위나 엄격한 교리보다 개인의 내적 체험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각 개인이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앙이 전통과 제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주체적 양심, 자유, 그리고 삶의 구체적 경험 안에서 드러나는 측면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 경험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의 중요성을 부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무인도에서 표류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원 알렉산더 셀커크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대니얼 드포의 「로빈슨 크루소」(1719)는 최초의 영국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까지 연극과 영화 등의 다양한 형태로 사랑받고 있는 이 작품은 인간의 이성, 개인주의, 문명, 식민주의, 자본주의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무인도에서 홀로 생존한다는 모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소설의 전반부는 주인공의 종교적 회심이 핵심 내용이다. 문명과 공동체에서 고립된 상황에서 죄에 대한 인식, 회심 그리고 섭리를 경험하는 개인 차원의 그리스도교 영성을 그리고 있다.
소설의 시작에서 주인공은 그리스도교적 교육, 언어, 문화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의 부모님은 “일찍부터 내 마음속에 하느님에 대한 경건한 경외심과 나의 의무에 대한 의식, 그리고 내 존재의 본성과 목적이 나에게 요구하는 바에 대한 깨달음을 심어 주기 위해 결코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내면화되지 못하고, 교육받고 물려받은 외적인 차원에 머물렀다. 비록 그리스도교적 언어를 사용하고 기도, 의무, 하느님의 심판에 의해 형성된 도덕적 세계에 살고 있지만, 크루소는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였다.
신앙에 대한 주인공의 개인적 경험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거역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항상 ‘중간 계층의 삶’을 살아가도록 충고한다. 이 중간 신분의 생활이 자신의 분수에 맞는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바다로 모험을 떠나버린다.
바다는 문명과 대비되는 자연의 상태이다. 또한 주인공은 배가 난파되어 표류하다가 도착한 무인도를 문명과 사회의 보호를 벗어난 “원초적 자연 상태”라고 묘사한다. 존 로크가 말한 ‘백지상태(tabula rasa)’에 놓이게 된 것이다. 크루소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 개인이 문명과 떨어져서, 경험한 삶이다.
이러한 자연의 상태에서 크루소가 신앙을 내면화할 수 있었던 동기는 불안과 고통의 경험이다. 바다에서 처음으로 거친 폭풍우를 겪게 되었을 때,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것과 부모의 눈물을 떠올리며 깊은 죄책감에 빠진다.
섬에 고립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심한 발열과 오한을 동반한 열병에 걸려 거의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다. 그렇게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꿈을 꾼다. 불꽃 속의 한 남자가 검은 구름으로부터 내려와 창을 겨누며, “네가 이 모든 일을 겪고도 회개하지 않았으니 이제 죽으리라”고 호통을 친다.
마침내 자신의 과거를 신앙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부모에 대한 불순종을 자신의 ‘어리석음’이며 ‘원죄’로 인식한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며, 삶에서 처음으로 기도하게 된다. “주님, 저를 도우소서, 제가 큰 환난 중에 있나이다.” 그리고 내면 안에 오래 잠들어 있던 ‘양심’이 깨어나며,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크루소가 겪는 개인적 고통은 의미 없는 아픔이 아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과 인격적 만남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이기적 자유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고,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고 의존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물론 고통 그 자체가 선은 아니지만, 인간을 참 진리로 이끌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이 소설이 크루소와 하느님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한다고 해서 공동체적 그리스도교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공동체적 경험과 개인적 경험은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상호 관계성을 유지한다. 추상적인 신학적 교리는 개인의 회심과 고통 등의 개인적 경험을 통하여 구체적인 의미를 제시할 수 있다. 동시에 개인의 체험은 교회 공동체의 전통에 의해 형성되고 검증되며, 지속된다.
이런 문맥에서 개인적 체험에 기반을 둔 주인공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진실되지만 불안정하다. 교회 공동체와 신자들과의 관계가 제공하는 공동체적 지지, 안정성, 교정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해석과 두려움과 고립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크루소의 신앙은 자신의 생존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개인적인 필요가 주된 목적이 될 수 있는 취약성이 있다. 회개, 기도, 섭리에 대한 해석은 외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그의 영성은 공동체 안에서 봉사와 책임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자기 관리의 영성으로 퇴화될 가능성이 있다. 관계성이 결여된 자립의 개인주의 위험성이 있다.
고립된 신앙은 일상의 사건들을 초자연적인 상징으로 해석하게 된다. 회심을 통한 내면의 평화와 무인도 환경에 대한 적응과 더불어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던 어느 날,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긴장감 넘치는 순간으로 꼽히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발견한다. 순간 “번개 맞은” 것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그 발자국은 ‘악마’ 혹은 ‘매우 위험한 야만인’일 거라 상상하며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다.
그의 신앙은 섭리에 대한 신뢰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사이를 오고 간다. 경험을 함께 공유할 공동체가 없는 그의 종교적 상상력은 불안이라는 역동성에 끌려다닌다.
발자국 에피소드는 주인공이 고립된 삶에서 사회적 관계로 전환되는 중요한 순간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경각심이다. 익숙하고 통제 가능한 개인적 경험의 안전지대는 순식간에 예측 불가능한 공간으로 변한다. 하느님의 섭리를 의심하지만, 마침내 마음을 잡고 기도와 성경을 통해 평정을 찾는다. 그리고 야만인들의 공격에 대비하는 등, 사회적 존재로서 정체성을 찾아간다.
비록 나중에 프라이데이와 그의 아버지, 스페인 사람과 함께 지내게 되지만, 여전히 개인적 경험 중심의 신앙은 한계를 드러낸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영토 전역에서 양심의 자유를 허용했다.”
크루소의 종교적 회심은 타인에 대한 지배와 소유, 식민지적 의식과 공존한다. 프라이데이를 개종시키지만, 마치 그리스도교를 자신의 소유처럼 다른 이에게 전수한다. 신앙의 개인적 경험에 머무는 주인공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고 성실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등한 방식으로 소유권과 권력을 행사한다.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앙이 지식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분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두 사람이 매달려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이를 저주하고 있었다. 그 누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한 사람, 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자기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죽음을 수용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
우도는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오로지 사랑의 길만을 간,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끝내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나지 않음을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라고 말함으로써 자기 죽음에 대한 수용과 자신의 믿음을 드러냈고, 최종 결단으로서 자기 자신과 세상과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루었다.
이러한 우도의 마음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죽음을 수용하고 하느님을 굳게 신뢰한 인간이 절대로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언하셨다.
바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다. 그분은 죽음을 거부한, 세상과 자신 그리고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한 좌도에게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이 죄수의 죽음을 내리덮은 어두움과 적막은 죽음이 영원한 죽음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에게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인간에게는 영원한 멸망과 생물학적인 죽음만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인간은 믿음으로써 고통과 죽음 너머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 생각함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말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게 아니라 파스칼의 말대로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redo ergo sum)”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보다는 믿는다는 것이 더 근원적인 차원이고 지식보다는 신앙이 더 근본적인 차원인 것이다. 지식이 아니라 신앙이 고통과 죽음을 넘어가게 해주고 새로운 차원의 삶을 시작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게 해준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이성은 침묵할 뿐이지만, 신앙은 우도처럼 절망의 순간에도 하느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낙원을 신뢰하게 하는 초월적 힘이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의 참된 완성은 유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무한한 하느님 자비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신앙의 차원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법이다. 이렇듯 생각하는 지식을 넘어서는 온전한 신앙만이 인간을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는 가장 온전하고도 근원적인 구원의 길이다.
[프란치스코의 향기] (18)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 이방인이 없는 열린 세상
이방인도 ‘우리’가 되는 형제애
프란치스칸 영성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중심 기둥은 온 우주에 걸친 ‘형제성(Fraternitas)’이라 하겠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와 편지에서 늘 “형제들이여”, “모든 형제들이여”라고 청자를 부르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공동체 안의 그 어떤 형제도 다른 이의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되며, 오직 자발적인 순종과 겸손으로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작은 형제들’로 살아갈 것을 당부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타인은 지배욕을 채우거나 이윤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무런 대가 없이 건네주신 가장 거룩한 ‘선물’이었습니다. 실제로 성인은 유언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형제들을 주셨다”고 적었습니다. 즉 자신이 직접 형제들을 골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의 광기가 세상을 덮친 1219년 프란치스코는 칼과 방패가 아닌 평화의 인사를 품고 적진인 이집트의 술탄 알 카밀을 형제로서 찾아갔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비신자들에게 파견되는 형제들에게 “말다툼이나 논쟁을 하지 말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인간 피조물에게 아랫사람이 돼라”는 선교 지침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성인은 술탄 앞에서도 기꺼이 작은 형제로서 자신을 낮추었고, 종교와 이념을 넘어선 형제애의 모범을 인류 역사에 새겼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온 지구를 덮치던 2020년, 아시시 성인의 권고 6번 첫 문구를 그대로 제목으로 삼은 사회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을 반포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인류가 그 어느 때보다 촘촘히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얼마나 깊이 파편화되어 있는지,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 얼마나 외롭게 고립되어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교황은 가난한 이들과 노인, 장애인,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까지 소모품이나 폐기물처럼 취급하며 밀어내는 ‘닫힌 세상’의 그늘을 통탄했습니다. 그리고 국경과 신분, 인종과 종교의 장벽을 허무는 ‘열린 형제애’만이 문명적 위기의 해답임을 선언했습니다.
교황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우리의 무딘 양심을 두드리고 호소합니다. 우리는 강도를 만나 길바닥에 쓰러진 형제를 번거롭다는 이유로 지나칠 것인가, 아니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상처를 감싸안을 것인가? 참된 형제성을 살아가는 이에게 인위적인 장벽과 울타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 지구에 밀어내야 할 ‘이방인’과 ‘그들’은 없으며,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인 ‘우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두 프란치스코의 모범과 가르침에 따라 삶의 구체적인 순간마다 따뜻한 ‘만남의 문화’를 일구기를 희망하고 기도합니다. 어떤 문화도, 어떤 개인도 홀로 고립되어서는 충만한 삶에 이를 수 없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나와 다른 이들의 고유함을 배척하는 대신 여러 면을 지닌 ‘다면체’처럼 품어 안을 때 비로소 참된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십자군의 칼날 앞에 무기 없이 평화로 형제로서 섰던 성 프란치스코처럼 오늘 우리도 갈등과 불신의 장벽을 허물고 형제적 사랑이라는 최고의 보편법을 세상에서 구체적이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실천해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의 향기] (19) 형제적 무상성과 시민 경제의 부활
대가 없는 나눔이 공동체를 살린다
우리가 일구어야 할 소중하고 거룩한 형제애를 지탱하는 가장 튼튼한 반석은 하느님에게서 거저 주어진 ‘무상성(Gratuitas)’입니다. 우주의 최고선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경제적 보답이나 이윤도 기대하지 않으시고, 충만한 사랑을 아무런 대가 없이 내어주시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빚어진 인간 역시 영혼 깊은 곳에 대가 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신비로운 무상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참된 사랑에 관하여 “형제가 건강하여 보답해 줄 수 있을 때 그 형제를 사랑하는 만큼, 형제가 앓고 있어 보답을 받을 수 없을 때도 그만큼 형제를 사랑하는 종은 복됩니다”라고 권고합니다. 이 말씀은 자칫 주고받는 거래 관계에 갇히기 쉬운 인간관계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곳이 바로 무상성임을 일깨웁니다.
초기 프란치스칸 형제들은 이러한 가난과 무상성의 원리를 현실의 경제구조 안에도 구체적으로 적용했습니다. 재화가 소수에게 고여 공동체의 생명력을 잃게 하지 않고, 사회 전체의 정의로운 공동선(Common Good)을 위해 끊임없이 흐르도록 경제를 쇄신하고자 했습니다. 참된 형제애는 이처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무상성의 가치가 스며들게 합니다. 그리하여 시장마저 단순한 이윤 경쟁의 공간을 넘어 인간 존엄성을 촉진하고 공동체를 살리는 호혜와 나눔의 장으로 변화시킵니다.
이러한 프란치스칸 영성은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몬테스 피에타티스(Montes Pietatis)’라는 서민을 위한 저리 금융기관의 설립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당시 40%에서 80%에 이르는 고리대금으로 서민 가정이 무너지고 공동체가 파괴되는 현실에 맞서, 프란치스칸들은 가난한 이들의 생계와 공동선을 위한 경제활동에 4%에서 12% 정도의 낮은 이자로 자금을 빌려주는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부유한 이들의 여유 자원이 공동체 안에서 다시 순환하도록 함으로써 분배의 정의를 증진하고 공동체 전체의 경제적 활력을 되살리려는 형제적 상생의 해법이었습니다.
이는 일부 구성원의 소외와 희생을 감수하면서 전체의 경제적 성과만을 합산하는 냉혹한 ‘덧셈의 경제’, 곧 ‘전체선’의 논리를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그 대신 단 한 사람이라도 완전히 배제되어 ‘0’이 된다면 공동체 전체의 가치 또한 훼손된다는 ‘곱셈의 경제’, 곧 ‘시민 경제(Civic Economy)’의 윤리적 토대를 마련한 것은 경제 체계 안에 구체화한 기념비적 도약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낳은 기술지배주의적 맹신과 이른바 부의 낙수 효과(Trickle-down)에 대한 무비판적 신뢰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경제·사회 체제가 단 한 사람도 희생시키거나 저버리지 않을 때 비로소 인류의 보편적 형제애를 함께 경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중세 프란치스칸 학파는 사유재산권을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자연법으로 여기지 않고 인간 사회가 마련한 제도로 이해하면서, 지상 재화의 궁극적 목적을 공동선에서 찾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사유재산권은 지상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라는 으뜸 원칙에 종속되어 있으며, 모든 소유에는 사회적 기능과 책임이 따른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타인의 고귀한 존엄성은 이윤 창출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상성의 원리를 개인적 선행의 영역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시장과 국가, 사회 제도와 구조 안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경제는 형제애를 파괴하는 경쟁의 장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고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시민 경제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며, 우리는 참다운 영적·물질적 진보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