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뉴스 269/1013]‘책 부자富者’가 된 서울 나들이
“오라버니, 어버지는 걱정말고 일주일쯤 새언니랑 같이 있다 와” 여동생들의 속 깊은 배려로 귀향 1년4개월만에, 상경하여 1주일을 있게 됐다. 참말로 고마운 일이다. 하여, 한글날에는 처음으로 아들네 집에서 잠을 자며 손자하고 꿈같은 하루를 보냈다. 쉐프가 된 아들이 해준 '거한 오찬'에 놀라며. 토요일엔 아내와 강릉해변과 커피골목 그리고 가평 잣향기푸른숲으로 가을소풍을 다녀왔다. 일요일 오후엔 남양주에 사는 친구가 만든 ‘친구들의 사랑방’에 예닐곱 명이 모인다기에 모처럼 친구들이 보고 싶어 달려갔다. 주인장은 불암산 자락에서 주워온 나무토막으로 솟대를 4개나 멋지게 만들어 세워놓았다. 손재주가 대단하다. 나는 추석연휴에 배운 <테스형>을 친구들앞에서 처음 선을 보이며 열창하는 치기를 부렸다. 아무리 박자치이자 음치이지만, 친구들은 나의 진심을 알기에 아낌없는 박수세례를 보내줬다.
월요일, 눈뜨자마자 놓쳐버린 일기인 ‘한글날 유감’ 졸문을 휘갈기고, 서울 외출 준비에 나섰다. 몇 곳 생각해놓은 일정의 동선動線이 벅차다. 용인에서 서울 가는 길이 만만찮다. 먼저 고기동에서 미금역까지 20분 간격으로 다니는 마을버스를 탄다. 신분당선 미금역에서 양재역까지 20여분, 양재역에서 3호선 환승하여 종로3가까지 20여분. 족히 1시간 반이 걸린다. 인사동에는 언제나 나를 반기는 85세 원로시인이 계시다. 반색을 한 선배님와 1시간여 한담을 나누고 국일관 고기집에서 갈비살로 점심을 하다. 이 선배의 믿기지 않는 정열을 보아라. 40여년동안 순우리말로 시집을 12권을 냈는데, 지난 봄에는 2100여편에서 550편을 골라 3권짜리 『김두환 精시선집』을 양장본으로 펴냈다. 지금은 누구라도 거의 쓰지 않는 순우리말, 국어사전에서만 잠자고 있는 토속어로만 된 시. 사전을 외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단어의 선택, 몇 번을 읽어도 뜻을 가름할 수 없는 우리말. 시선집을 펴내고도 시작詩作의 미련이 남았는지 그새 써놓은 시가 100편이 넘었단다. 내년초 13번째 시집을 내겠다며 기염을 토한다. ‘추석 보름달’ 연작시 3편을 보여주는데,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한데도 두어 번 읊조리니 약간 감은 온다. 한 구절만 감상해보자. <목화 하얗게 소복한데다/웃음 띈 눈빛 두루 뜨께질하는/우리 어머니 얼굴 참 웅심하구려!//추석 무렵/스님이 시주 받으러 나가면/제일 먼저 찾는 곳은 여부없이/누르익기 큰손 덕량德量 어머니!> 뜨께질하다(남의 속맘을 깊이 떠보다), 웅심하다, 누르익기, 덕량, 숫제 이런 식이다. 애쓰게 찾은 토속어들이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감이 오시는가.
아무튼 시인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종로2가의 알라딘 중고서점을 들러 내가 찾고 있는 책을 알아봤는데(생각의 나무에서 펴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라는 12만원짜리 큰 책이다), 역시 없기에 손자 선물로 ‘어쩌다 화가’라는 그림판을 샀다. 이 그림판이 재밌는 것은 실선 그림의 부분부분에 색칠할 번호가 쓰여 있다. 그대로 따라 물감을 칠하면 그대로 그림이 되는 것이다. 손자가 화가 됐으면 하는 마음의 선물이다.
이제 발걸음이 경복궁에서 삼청동으로 진입하는 초입에 있는 출판사이자 북카페인 ‘서울셀렉션’으로 향했다. 이곳은 나와 오랜 인연이 있다. 2005년 추석 무렵, 나의 첫 수필집 『백수의 월요병』을 펴낸 곳이다.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김형근 대표를 오랜만에 보고 싶기도 했지만, 만나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에 전화 한 통 하지 않고 찾았다. 마침 다행히 대표가 사무실에 있었다.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여러 이슈에 대한 밀린 회포를 1시간여 풀었다. 최근에 펴낸 책이라며 두툼한 책을 방문선물로 주겠단다. 상, 중, 하로 된 『김일성:1912-1945』이라는 거질巨帙의 책이다. 한 권이 무려 748쪽, 각각 4만8000원이다. 안될 말이다. 이런 귀하고 비싼 책을 그대로 받을 수 없기에 악착같이 계산을 하다. 어디 그뿐인가. 『뉴욕좀비』라는 소설책과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가 펴낸 『조선 레벌루션』이라는 책(부제 ‘북한 2029 4차 산업혁명시대의 통일’이 호기심을 바짝 당긴다), 거기에다 한 권 더 얹어 문영숙씨가 쓴 『나의 할아버지, 인민군 소년병』을 덤으로 준다. 아니, 책장사하는 분이 이런 선심을 쓰면 안될 일이고, 내 손이 부끄러운 일이다. 극구 사양하는데 가방에 괜찮다며 쑤셔 넣어준다. 고맙다. 행복하다. 엄청 재밌다는 『‘뉴욕좀비』를 빨리 읽고 작은 네트워크지만, 우리 블로그에 졸문의 북리뷰라도 써드려야겠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사직공원 근처에 있는 ‘시간여행’이라는 사무실이다. 회사이름이 시간여행時間旅行? 재밌지 않은가. 이곳에만 오면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 100년 전으로 여행을 다니는 느낌이 든다. 김영준 대표는 대학 9년 선배이시다. 전화 한 통 없이 들어서는 한참 후배인 나를 화들짝 반긴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근현대사 자료 콜렉터collector. ‘TV 진품명품’ 감정위원으로 출연하는 방송인이라고도 하겠다. 그 사무실을 보지 않으면 전혀 감이 오지 않을 것이다. 서류, 도서, 사진, 각종 생필품 등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온갖 것들everything이 다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예를 하나 들자. 해방직후부터 한국전쟁 즈음에 남북한 산천에 뿌려진 남북한의 무수한 삐라를 모두 수집해 단행본으로도 엮었다. 조선일보도 갖고 있지 않은 1920년 3월 5일자 창간호도 어렵게 구해, 돈을 달라는 대로 줄 조선일보에 무료로 기증도 했다. 의미있는 일이고, 이런 것들은 개인이 아니고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백범선생의 『백범일지』 초간본을 찾는가. 그분을 찾으면 된다. 학술기자들이 기사꺼리가 궁하면 찾아와 한 건만 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60년대 다방풍경을 당시의 설비가 없으면 어떻게 재현할 수 있겠는가. 광주항쟁때 수습위원인 신부의 법복까지 수집해 놓았다. 일본 등 해외까지 수집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 북한 포스터 하나 구하려고 일본을 수십 번 들랑날랑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콜렉터의 사명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 일제강점기 간송 전형필선생이 문화재 수집을 한 정신과 일맥상통할 터이다.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보여주며 설명을 하던 중 "이것은 최형이 꼭 읽어야 한다"며 주시는 책이 『박정희‧김일성』 사진책(1999년 서전문고 발간)이다. 살래야 살 수 없는, 나오자마자 판매금지된, 희귀한 사진으로만 구성된 소중한 책을 두말없이 선물로 주시는 이 선배님은 또 누구신가. 아아, 한 달 전쯤 유튜브에 오른 나의 동영상 강의를 보고 곧바로 후원금을 50만원을 보내주셔, 나를 경악시켰다. ‘이럴 수가’ 시리즈의 연속.
어느새 그 큰 가방이 책 다섯 권으로 빵빵해져 짊어져도 부담스럽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14살 나이에 대하소설 등 15권을 혼자힘으로 십리길을 걸어 집으로 가져온 놈이 아닌가. 졸지에 ‘책 부자富者’가 되었다. 이런 선배님들을 만나고, 지인인 출판사 대표를 만나면 정신적으로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약간의 지식과 정보 그리고 흥미가 몽땅 버물려져 '나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9시반부터 시작한 일정의 마지막 순서다. 6시 충무로역 근처 ‘통오징어찌개’ 식당에서 막역한 후배와 저녁을 먹기로 한 것이다. 인쇄골목에서 ‘낮은문화사’를 10년이 넘게 운영하는 고교 10년 후배. 늘 봐도 반가운데, 귀향 관계로 뜸하니,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만나랴. 아버지 구순‧부모님 결혼 70주년 기념한 가족문집 『총생들아, 잘 살거라』를 펴내준 고마운 친구이다. 별명이 ‘대한민국 호적계장’. 어제는 ‘안동역’으로 이름을 날리는 가수 진성에 대한 신상털이가 화제였다. 고향이 어디이고, 핵교는 어디를 다녔고 가족사항은 어떻고? 어떤 것은 거짓말이고 어떤 것은 과장된 것이고? 그것 참, 언제 들어도 놀라운 총기의 소유자. 후배에게 배우는 것이 많다. 최근에는 ‘찬샘통신 1, 2부』를 책자로 엮어주었다. 그것도 완전 실비實費로. 식당까지 합치면 동선이 6곳이었다.
이렇게 몰아쳐 움직이지 않으면, 모처럼 서울 며칠이 후회가 될 듯하다. 그 와중에 전화로 민원民願 두 건도 해결했으니, 많은 일을 한 듯하고, 많은 사람을 만난 듯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뿌듯한 하루였다. 이제 책 읽을 일만 남았다. 내일은 새벽에 뒷산만 다녀오고 하루종일 책을 읽어야겠다. 북리뷰도 써야 할 터이고, 어느 경제신문에서 1주일 1회 칼럼을 써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요즘 세상에 원고지 7장에 10만원이란다. 한달이면 40만원. 인문학 특강을 돌림병으로 못하니 이런 대안이 생기다니, 역시 나는 행운아인가. 칼럼의 문패를 무엇으로 한다? 첫 회의 컨셉은 무엇으로 한다? 즐거운 고민은 내일로 미루고 자자. 그러잖아도 초저녁 '잠귀신'이 무리를 했다. 흐흐.
첫댓글 상대방을 애태워 그리워하다 사랑에 굶주린 사람은 사랑병에 걸린다는데
특효약은 서로 만나게하는것이라고
친구는 책속에 묻혀살다가 혼자서만이 걸린
책병에 걸린듯하다.
치료받으러 서울에 잘 다녀온 기분이네
의사인 저자도 만나고 약인 책도 받아오고
훌륭한 병원놀이 잘 다녀오셨네
더 높은 기공을 쌓아왔으니
만나면 감히 책 이야기를 무서워 어찌 꺼내랴
무술로 따지면 무림의 고수를 태권도 백색띠를
맨 나를 상대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