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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투 블루(호주 시드니. 한국 총영사관)-51
시드니 한국 총영사관 정보담당 영사는 가끔씩 전화로 강철에게 이런 말을 암호로 사용했다.
“강부장님! 빨리 오세요. 한국 본사 홍과장이 보낸 물건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이시각, 이 암호 전화를 받은 강철이 응웬을 차에태운 채로 차를 몰아 엘리자베스 스트리트 총 영사관 으로 급히 달려갔다.
강철은 곧바로 국정원과 직통선인 암호식 전화기에 들러붙었다.
암호식 전화란? 통신 주파수를 시시각각으로 바꾸어 엿듣지 못하게 만든 통화방식을 말한다. 설혹 누군가가 도청을했다 하더라도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도안되는 소음만 도청자의 귀에 가득 들렸을 것이다. 이 소음을 안테나가 잡아 대형 컴퓨터로 보낸다. 그러면 입력된 소음을 컴퓨터가 다시 언어로 재 조립하여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런 시스템을 암호식 전화 시스템이라 말한다.
저쪽 상대편, 전화기를 들고있는 사람은 국정원장이었다.
“강철 선생! 뉴스를 들어 보셨습니까? 여기 한국 상황 뉴스,”
강철은 응웬과 정신 없이 도망치기 바쁜 와중에 방금 차에서 들은 라디오 뉴스를 생각했다.
“예, 조금 전에 뉴스를 들었습니다. 자동차 안에서…… 그렇치 않아도……”
철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국정원장이 말을 잘랐다.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긴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강선생, 빨리 서울로 와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당장 가장 빠른 방법으로요.”
“아니? 원장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여기도 지금 비상사태입니다. 그 동안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했던 미국 여자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나는 그녀를 보호할 의무가 있고요. 그래서 도저히 움직일 수 없습니다.”
“강철 선생, 나도 첩보의 룰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해도 합니다. 그 룰이란 것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적 배신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것, 뭐 이런 말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정보원의 안전이 최 우선이 되어야겠지요. 하지만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국가 비상사태가 최우선이 되어야 하질 않겠습니까?”
“원장님의 말씀을 나도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이곳 역시 지금은 곤란한 상황에 빠져있습니다. 나역시 길게 설명 드릴 수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강철 선생, 나 또한 긴 얘기를 계속 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오.”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장이 날 것 같았다. 마침내 국정원장은 이런 방법이 사용되지 않기를 바랬지만 사태가 워낙 위급하다보니 교활한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라는 생각에 까지 도달했다.
국정원장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겠소? 나,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았지만, 미안하오. 그 미국 여자 정보원 스위스로 탈출하도록 한국 정부가 돕겠다라는 것, 나도 이젠 여기서 그만 손을 떼겠소. 나 역시 지금 상황에 그런 일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소. 미안하오.”
강철은 배신감과 함께 비로소 발목이 잡혔다라 생각했다.
짧은 순간 강철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강철은 감정을 억제하고 숨을 고른 다음 신중히 말했다.
“국정원장님, 조건이 있습니다. 그 미국 여자 에이전트와 둘이 함께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이 여자는 미국여권을 사용해 시드니 공항을 빠저 나갈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 하시겠지요?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서울로 갈 수 있도록 특별한 조치를 먼저 한국 정부가 취해 주십시오. 이것이 선결되어야 갈 수 있습니다.”
국정원장은 생각했다.
사실 국제 정보사회는 냉혹했다. 미국인 첩자 한 명 신원이 폭로된다라는 것쯤은, 그런 위험 따위는 지금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그녀가 아무리 한국에 도움을 주었을지언정 지금의 사태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강철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가 한국에 온다면 디스프리아호 사태를 진정 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그런 희망 마저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국정원장의 지금 심정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아야만 했다.
한국 청와대. 밤 11시
대통령 집무실에 국가 정보원장과 국가 안보실장, 국방장관, 합참의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전화기를 집어 든 국가 안보실장은 말끝마다 청와대의 권위를 내세우며 공군 제 10전투비행단장과 통화를 시도했다.
곧 비행단장과 전화가 연결 되자 안보실장은 수화기를 합참의장에게로 넘겼다. 합참의장은 쨍 하는 음성으로 비행단장에게 명령했다.
“아, 나요 장군! 내 말 잘 들으시오. 이건 대통령 각하의 명령이오. 지금 당장 서울에서 호주시드니로 직행하는 가장 빠른 공군기 한대를 띄울 준비를 하시오 지금 당장…
그 공군기에 민간인 2명을 탑승시킬 자리가 있어야 하오. 지금 태평양 횡단 비행 명령을 하달하되 일단은 먼저 비행기부터 이륙시킨 후, 항로와 비행목적은 추후 암호 통신으로 알려주는 방법을 취하시오. 이상이오.”
이 전화에 앞서 대통령은 호주측의 협조를 얻기 위해 핫 라인으로 호주수상 하워드와 통화 했다.
한국 수원. 공군 제10 전투 비행단
F104 편대장인 이동호 대령은 잘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을 단장으로부터 직접 명령받았다.
F104는 정찰기다. 통상 정찰 임무수행을 위한 필수 탑승요원인 레이더 요원과 촬영요원, 항법사 등을 태우지 않은 채로 단독 비행을 명령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부 민간인 탑승원 2명이 착용 해야 할 A급 비행장비인 산소헬멧, 슈우트, 부츠 등을 정비사들이 미리 수령해서 비행기에 실어놓았기 때문에 대령은 직감적으로 외부인을 태우러 이륙한다라 생각했다. 그래서 대령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세계 최고임을 자랑하는 수십억 달러짜리 국가 소유 첨단 병기가 마치 택시처럼 민간인 승객이나 태우러 다닐 수는 없다라는 그런 생각에서였다.
그는 비행단장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F104을 띄워 태평양로 날아서 민간인을 태우러 가라니요? 이런 명령을 제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저의 근무장소는 대한민국 하늘을 지키는 한반도 상공입니다.”
“아니? 대령, 이건 명령이야. 그것도 대통령의 명령이란 말이야. 방금 귀관이 한 그 말, 나 못 들은 걸로 하겠네. 알겠나 대령?”
비행단장의 목소리는 칼날 같았다.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명령이란 말에 대령은 그만 기가 죽었다.
시드니. 새벽 2시 30분
호주의 봄이 깊어가는 새벽, 시드니의 새벽공기는 차가웠다.
응웬의 가냘픈 어깨가 추위에 떨었다. 강철은 윗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새벽 2시 30분 강철과 응웬은 주재 무관들에 의해 시드니 근교 공군 비행장 격납고로 안내되었다. 격납고에는 3시간 15분만에 태평양을 횡단해 날아온 괘조 F104 한국 공군 정찰기가 급유와 점검을 받고 있었다.
호주 공군 정비사들이 달라붙어 재차 이륙할 준비를 서두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부신 조명아래 호주공군 정비사들 역시 경이롭게 비행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동안 말로만 듣던 F104는 미 록키드사 최고 걸작품이었다.
홀쭉하고 갸름한 비행체, 날카롭게 노출된 노즈콘, 주익과 비익을 일체화시킨 삼각날개, 그 밑에 장치된 강력한 터보 제트 엔진, 엔진 폿트에 들어있는 플렛트, 엔진 포터 후단에 칼날처럼 직립한 방향타 역할의 수직 꼬리 날개, 수직날개 양편의 동그라미 안에 색깔도 선명한 태극마크,
강철과 응웬을 안내한 대사관소속 무관 한 명이 F104기를 조종해 날아온 대령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대령이 무관에게 말했다.
“상당히 중요한 임무인가 보군요 선배님.”
“내가 탑승자가 아니요. 여기 이 두 분을 서울로 모셔 가세요. 우선 서로들 인사나 나누시고요.”
“안녕하십니까? 강철 이라고 합니다. 여기 이 여자분은 미 국방성 소속 응웬 입니다.”
“안녕하세요. F104 기장입니다. 당신들을 세계 최고의 비행기에 태워주는 건, 이건 단순히 대통령의 명령 때문입니다.” 대령은 퉁명스런 목소리로 강철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훌륭한 비행기를 타게 돼 영광입니다. 대령님.”
강철이 대령의 마음을 이해하겠다는 뜻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곧 지상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강철과 응웬은 비행기의 좁은 뒷좌석에 올랐다. 몸이 슬며시 미끄러지듯 의자 깊숙이 가라앉았을 때는 동체 옆 벽이 귀밑까지 와 있었다.
머리위쪽 상부의 뚜껑을 닫으면 얼굴이 기체표면과 수평선을 이루었다. 저항을 없애기 위한 설계인 듯 했다. 전방의 시계는 제로에 가깝고, 보이는 것은 머리 위의 별들뿐이었다.
후부 좌석 콘솔에는 레이더 스크린과 전자 방어시스템, 카메라 제어기 등 의 장비들로 꽉 채워져 있는듯 했다.
강철은 F104가 고공 첩보기이므로 대부분의 미사일이 미치지 못하는 초 고공을 비행하면서 지상을 촬영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그런 장비들이 두루 잘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계속해 지상요원들의 손길이 철과 응웬의 G슈트에 붙어 있는 각종 튜브와 전선들을 기체 시스템에 연결시켜나갔다. 무선 통화코드, 산소, 엔티, G여압 등, 앞 좌석의 이동호 대령 역시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묻은 후 익숙한 솜씨로 라이프 써포트 시스템에 자신을 연결 시켜나가기 시작했다.
곧 무선이 접속됨에 따라 대령의 목소리가 헬멧 안에서 철과 응웬의 귀를 울렸다.
“좌석이 편안하십니까 두분 선생님?”
“아주 좋습니다 대령.” 강철이 헬멧 속에서 대답했다.
“저는 이런 비행기 처음 타 봅니다. 조금은 무서워요.” 응웬의 얼굴이 헬멧 속에서 불안해 했다.
“숙녀님. 저도 역시 여자분을 처음 태웠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참으십시오. 3시간이면 됩니다.”
대령이 응웬에게 말했다. 처음으로 웃음짓는 대령의 얼굴이 헬멧을 통해 반사 되었다.
머리 위에 씌워진 커다란 비행기의 덮개는 초고공의 강력한 기압변화에 견딜 수 있는 특수 유리막 이었다. 그런 바람막이가 머리위로 내려왔다. 씨익하고 유리판 움직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 후, 조종실 안으로 적당한 공기압력이 밀려 들었다.
F104는 곧 트랙에 이끌려 격납고에서 어둠 속으로 이동됐다. 밖에 있는 지상요원들이 엄중한 귀마개를 하고도 비행기가 뿜어내는 굉음에 얼굴들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이 전등 불빛아래 비춰졌다. 그러나 조종실 안은 낮은 휘파람 소리 같은 비행 엔진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대령은 바삐 이륙 전 체크를 하면서 콘트롤 타워의 이륙 지시를 받았다.
헬멧 속에서 대령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자 선생님들, 이륙합니다. 눈을 꼭 감고 가능한 마음을 편안히 가지세요.”
순간 에버랜드의 폭주열차가 갑자기 충돌하는 듯한 강력한 충격이 두 사람의 몸을 엄습했다.
비행기 좌석이 사람 몸에 단단히 밀착되도록 설계되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충격은 잘 흡수되고 있었다.
F104는 기체를 거의 수직으로 호주 대륙을 등뒤로 하여 하늘위로 솟구쳐 올랐다. 이 괴물은 새벽 별이 뜬 검은 하늘을 향해 총알처럼 상승했다.
대기를 찢어 가르며 치솟아 올라가는 비행기체 안에 탄 두 사람은 위를 쳐다보고 벌렁 누운 자세로 온몸에 가해지는 강력한 압력만을 의식하고 있을 뿐 정신이 없었다.
다만 기체가 상승함에 따라 바깥 대기의 색깔이 점점 암갈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조종석의 대령은 스스로 항법사 역할까지 감당하고 있었다.
기내에 탑재된 컴퓨터는 고도, 속도, 상승률, 항로와 방향, 내외의 기온, 엔진상태, 산소공급, 음속비행 가능 여부 등등의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제공했다.
아득한 저 아래쪽, 세계적인 항구도시 시드니의 불빛이 순식간에 뒤로 사라졌다.
기체는 계속 상승해 남태평양 코랄해 상공에서 드디어 음속돌파 비행에 돌입했다. 이윽고 대령은 기체를 수평으로 유지했다. 주위 하늘들은 모든 빛의 미립자가 사라지고 검은 어둠의 적막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태평양 고공에서 F104는 마하3(음속 3배)를 유지했다. 강철은 마그네 티타늄강으로된 기체의 표면이 외계의 저항으로 빨갛게 달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조종실 내부는 쾌적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울까지 비행시간이 얼마나 걸리지요. 대령님?” 강철이 앞자리의 대령에게 물었다.
“비행시간은 2시간 40분여 정도입니다. 시드니에서 서울 공항까지..”
“지금 위치는 어디쯤인가요?”
“남태평양 피지섬 부근 상공입니다.”
“자꾸 말을 시켜 미안합니다. 대령.”
“천만에요. 얼마든지”
“이렇게 빠른 속도로 비행하다 보면 혹시 무엇이 비행기에 부딪히는 것, 그런 위험 같은 것은 없나요?”
“예. 비행고도가 워낙 높은 성층권이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설혹, 태양계의 운석이 날아 다닐 확률은 몇 만분지 일 정도니까 염려 없습니다.”
이 대화를 하는 동안 F104는 벌써 태평양 상공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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