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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워터 디바이너>는 갈리폴리 전투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졌습니다.
* 갈리폴리 반도 교두보의 연합군
[ 피로 물든 갈리폴리 전투 이야기 ]
* 오스만제국의 참전 배경
16세기 절정기 때의 오스만제국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대제국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접어들면서 유럽으로부터 ‘유럽의 병자’라고 모욕적으로 불릴 만큼 국력이 폭삭 찌브러 들었습니다.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오스만제국은 자신들의 외곽인 중근동으로 세력을 넓히는데 혈안이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그리고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얼마 안 있다가 동맹국에 가담했습니다.
오스만제국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주축으로 하는 동맹국 편에 줄을 선 것은 한마디로 그쪽 편에 붙으면 나중에 취할 수 있는 이익이 많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20세기 초 중근동으로 세력 확대를 노리던 독일은 베를린, 비잔티움(이스탄불),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철도를 구상(이른바 3B 정책)하면서 오스만제국과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써 왔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서유럽의 영국, 프랑스와 흑해를 거쳐 러시아를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한 오스만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더욱 커졌습니다. 따라서 연합국 측에서도 오스만 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 1차대전 참전을 결정한 엔베르 파샤(당시 터키 총리)
연합군 측은 여러가지 회유책은 물론 군함을 파견하는 등 압박을 가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였습니다. 전쟁 이전부터 외교적, 군사적으로 우호 관계를 다져 놓았던 독일도 이에 맞서서 당연히 영향력 확대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발맞추어 오스만제국 내부에서도 중립을 지킬 것인지 전쟁에 참전할 것인지, 만일 전쟁에 뛰어든다면 어느 편에 붙을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관망하자는 주장이 많아서 전쟁 초기에는 오스만 터키는 중립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참전파는 바로 이때 적극 참전하여 그동안 찔끔찔끔 잃어버린 땅을 되찾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 편에 붙을 가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저울질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에 뛰어든다면 가장 위협적인 상대를 제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림 전쟁(1) 이후 지중해로의 진출을 위하여 끊임없이 다다넬스 해협을 넘보는 러시아가 오스만제국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이렇게 러시아의 위협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오스만제국이 동맹국에 전격 가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독일의 역할이 컸습니다. 독일은 1871년에야 겨우 통일을 이루었기에 역사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직접적으로 이해타산이 부딪힐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뒤늦게 제국주의 팽창 대열에 동참한 독일은 3B 정책 등 전략적으로 오스만 터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오스만 터키 또한 그 동안 수시로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비해 독일과의 교류가 상대적으로 편했습니다.
* 이스탄불로 도망쳐 온 괴벤호와 브레슬라우호
이때 마침 1차 대전이 터진 바로 직후인 8월 10일, 지중해에서 작전을 벌이던 독일 전함 괴벤 호와 브레슬라우 호가 영국 함대에 쫓겨 다다넬스 해협을 통과해서 이스탄불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우연히 전함 두 척을 오스만 제국의 심장에 들여 놓은 독일 해군이 실질적으로 오스만 터키 해군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두 척의 전함이 오스만 터키를 1차 대전에 끌어들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1914년 10월 28일, 독일 수숀 제독이 이끄는 두 척의 전함이 터키 어뢰정을 대동하고 흑해로 살그머니 들어가 오데사, 세바스토폴, 페어도시아를 포격했습니다. 민간인 희생자를 포함해서 러시아 포함들을 격침시켜버렸습니다. 터키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전쟁 행위에 대해 러시아가 선전포고를 했고 이어서 영국, 프랑스가 자동적으로 터키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터키도 독일의 전함 궤벤의 함포가 바로 코앞에 있었고, 이미 독일의 영향력이 오스만제국을 깊숙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제국도 자의반 타의반 어쩔 수 없이 이들 나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로써 전쟁의 붉은 물결이 세계의 나머지 반을 뒤덮게 됩니다. 곧 이어 오스만제국과 러시아가 접한 카프카스에 새로운 전선이 생겨났습니다. 중동 일대에서도 식민지 쟁탈에 힘쓰던 영국, 프랑스와 오래 전부터 이곳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제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오스만제국은 동맹국 측에 가담하면서 제일 먼저 자기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다다넬스 해협을 봉쇄했습니다. 아나톨리아(터키 반도)와 갈리폴리반도 사이에 놓여 있는 다다넬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병목지점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이 막히자 러시아와 영국을 바다로 연결하여 주던 주요 통로 중 하나가 순식간에 차단되어 버렸습니다.
* 터키 포대
* 처칠의 오만이 낳은 갈리폴리 전투
당시 영국의 해군장관이던 처칠은 내각에서 서부전선의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부전선 이외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이른바 간접접근 전략을 계속 주장했습니다. 다다넬스를 확보하고 이어서 오스만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순식간에 점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스만제국을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만들어 동맹국들의 전쟁 전략 자체를 뒤흔들어놓자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국방장관인 키치너가 서부전선이 급박한 마당에 육군병력을 지원할 수 없다고 하자 처칠은 순전히 해군만으로도 오스만 제국을 제압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이는 참으로 오만의 극치였습니다. 처칠은 마치 제국주의 전성기에 함포 몇 발만 쏘아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버쩍 손들게 만들었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이 비록 '유럽의 병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을 깔보아도 너무 깔보았던 것입니다.
다다넬스 해협은 그 폭이 아주 좁은 해협인데다 급류이어서 해군 작전 수행이 매우 까다로운 곳입니다. 또한 감시가 무척 삼엄했습니다. 터키는 다다넬스 해협 양쪽 해안가에 독일의 지원을 받아 철통같은 요새들을 다닥다닥 구축해 놓았습니다. 총 65km에 걸친 다다넬스 해협에서 연합군의 함대가 터키 요새들로부터 포격을 당해 침몰하지 않을 만한 곳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 연합군 함대
드디어 1915년 2월 19일 영불연합함대의 전함들이 대대적인 포격을 개시하면서 역사적 전투의 막이 올랐습니다. 한편 오스만제국은 적함을 향해 화력을 퍼부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습니다. 지원 나온 독일 육군의 젠더스 장군의 지휘 하에 저항에 나선 오스만은 연합군 함대가 해안포 사정권 내로 진입하자 반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뜻밖의 반격에 연합국 함대는 당황했지만 포격을 주고받으면서도 해안포 사정권 밖으로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습니다.
연합군 함대는 육지의 해안포대와 마치 함대함 포격전 같은 방식으로 대결을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만용을 부렸습니다. 해안포대는 파괴되어도 쉽사리 복구할 수가 있지만 전함은 침몰하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일주일간의 포격전 끝에 양측의 손실은 커져갔다. 연합군 함대의 피해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다다르게 되어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 갈리폴리 반도 위치
* 갈리폴리 전투 지형도(붉은색은 연합군, 초록색은 터키군), 오른쪽은 다다넬스 해협
왼쪽 위에 안작(호주,뉴질랜드군)군과 아래 영국군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어서 3월 18일에 있었던 영국-프랑스 연합함대의 다다넬스 해협에 대한 두 번째 돌파작전도 대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연합함대는 3척의 전함을 잃고 여러 척이 대파되는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오스만 터키군은 연합함대가 장악하고 있던 해협 입구까지 몰래 접근해서 연합군의 무수히 많은 기뢰들을 깔아 놓았습니다. 이 기뢰들이 연합군 함대들을 격침시킨 것입니다.
이제 지상군이 상륙해서 갈리폴리 반도 요소요소에 구축된 터키군의 방어 진지들을 깨끗이 청소해주지 않으면 영국-프랑스 연합함대만으로는 도저히 해협을 뚫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바로 오스만제국에게도 가장 커다란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연합군 함대의 피해도 컸지만 이들로부터 엄청난 포격을 당한 터키군도 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습니다 만일 이때 연합군이 일거에 상륙했다면 터키군의 방어는 완전히 무너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연합군은 안이한 생각으로 해군만의 단독작전으로 다다넬스 작전을 시도했습니다. 상륙작전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초전에 참담한 피해를 맞본 연합군은 3월 12일에서야 영국 중동원정군 사령관 해밀턴에게 부랴부랴 해군을 도와 갈리폴리에 포진한 터키군을 제압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육해군의 합동작전은 당연히 옳은 선택이었으나 때는 이미 늦어도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주변에 당장 동원할 병력이 없었고 시간이 갈수록 승리의 기회가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터키군
이렇게 6주의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 연합군의 지상군 공격은 탄약과 병력 부족으로 허덕이던 터키군에게 원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초전에 갈리폴리를 방어한 터키군은 즉시 10만의 병력과 장비를 충원 받아 요새를 재건하고 방어선을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강화했습니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침략자를 격퇴하겠다는 터키군의 의지는 실로 경탄스러웠습니다.
* 포격하는 터키 포대
영국은 전략을 원점에서 재검토 하여야 했으나 임기응변적인 처방으로 즉시 육상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영국이 상륙군으로 동원한 주력 부대는 저 멀리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파견된 안작군단(2)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집트 카이로에 집결하여 유럽전선으로 이동할 계획이었습니다. 병사들은 허겁지겁 상륙훈련을 몇 번 하고 갈리폴리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 굴욕적인 참패, 철수
안작군, 영국군, 프랑스 군으로 급하게 꾸려진 연합군은 해밀턴 장군의 지휘 하에 드디어 1915년 4월 25일, 상륙을 개시하기로 했다. 이 계획 역시 너무나 어설프고 엉성했습니다.
그들은 언덕 위의 진지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상륙한 후 해안가에 확실한 거점을 확보하면 그 이후는 일사천리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안이함은 이후 다다넬스 해안을 피로 물들이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오스만 터키군은 적의 상륙을 해안가에서 막을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가파른 고지 위에 자리 잡은 오스만 터키군은 연합군이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고지 위로 올라오면 그때서야 사그리 쓸어버리려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 돌격하는 안작부대
1915년 4월 25일 06시, 갈리폴리 반도 인근에 집결한 연합군 해군의 대대적인 포격이 개시되면서 터키군 요새주변은 곧 엄청난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 연합군은 탄막을 이용하여 능선의 부근까지 순식간에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또 어설픈 작전과 실수가 엄청난 비극을 낳았습니다.
상륙작전은 포격과 연이어 이어지는 보병의 돌격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곧바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포격의 효과가 사라질 만큼 충분한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 아군이 돌격한다면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그러려면 작전에 투입된 부대들 간의 철저한 준비와 통신망 확보가 필요하고 항상 시간이 엄수되어야 합니다. 웃기는 얘기지만 연합군은 작전 시작 전에 육군과 해군이 시계를 맞춰보는 기본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바다 위에서 화력을 지원할 해군과 돌격할 육군 지휘관의 시간이 차이를 보였다는 자체가 애시 당초 승리를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포격 직후에 들이닥칠 것 같았던 연합군이 보이지 않자 포격에 파괴되었던 터키군 진지는 신속히 보강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진지를 향하여 기어오르는 연합군 모습이 포착되었고 이들은 재정비한 터키군에게 무참하게 두들겨 맞고 말았습니다. 일선 장교들은 작전이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하였으나 후방의 지휘부는 책상에 앉아서 오로지 돌격명령만 남발했습니다. 결국 참호 밖으로 뛰어나간 수많은 병사들은 외마디도 지르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습니다. 이러한 1915년 4월 25일 새벽의 모습은 장장 8개월 간 계속될 갈리폴리에서 있었던 엄청난 피바다의 작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 연합군의 돌격
연합군은 비록 해안에 상륙은 하였지만 단지 그것으로서 끝이었습니다. 연합군은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반면 터키군은 영리하게 방어에만 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포격 하에서도 참호에서 웅크리고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지를 향해 기진맥진 기어 올라오는 연합군을 향하여 기관총탄을 갈겨댔습니다.
사실 터키만군도 연합군 못지않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보고 있었지만 인내심은 더 강해서, 갈리폴리 해안을 연합군의 묘지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더 이상 피해를 감당할 수 없던 영국은 패배를 인정하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무려 8개월 간 계속된 전투가 똑같은 모양으로 지속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터키군이 잘 싸웠다기보다는 연합군이 시종일관 무모하고 무능하였다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연합군 측은 애초부터 터키군을 깔보고 있었습니다. 터키인들은 게으르며, 겁쟁이들이고 전투가 벌어지면 바로 꽁무니를 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전투가 계속됨에 따라 점차 사라져 갔다. 터키 병사들의 강인한 투혼은 점차 연합군들을 감동시키기까지 했습니다.
* 벼랑에 강당간당 자리잡고 있는 안작군 진지
이제 영국에서 5천km나 떨어진 곳에서 연합군은 식량과 보급품이 바닥나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이 전투는 연합군 국민들에게서 잊혀져가고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관심은 온통 유럽의 서부전선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영국의 전쟁성 관료들은 작전 상황에 관하여 내가 옳으니 네가 틀리니 하며 서로 삿대질하며 옥신각신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갈리폴리 작전 기획자인 처칠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갈리폴리 전투로 끔찍한 수모를 겪은 처칠은 그 후 30년이 지난 1945년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다음에야 이 치욕을 딛고 최고의 영웅으로 등극할 터였습니다.
1916년 1월, 연합군은 굴욕적인 패배를 감수하고 병력을 철수시켰습니다. 이제야 갈리폴리 반도를 적시던 피의 행진이 멈추었습니다. 결과는 너무 참혹해서 작전에 투입 된 총 40만 연합군중 무려 25만의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이는 그 때(1차대전 초반)까지 영국군이 입은 최대의 피해였습니다. 만일 이런 피해를 대가로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위안을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합군 병사들은 승리는커녕 갈리폴리 해안 일대에서 끔찍한 피범벅이 되면서 사라져 간 꼴이 되었습니다.
* 갈리폴리 반도 스핑크스 고지, 저기를 기어오르다...
영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다는 자만심에 육군과 공조(共助)도 없이 너무나 쉽게 전투를 시작했습니. 하지만 쓰디쓴 참패를 맛보고 나서야 겨우 육군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전의 잘못을 반성하거나 개선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작전 시간이나 통신처럼 가장 기초적인 협력도 하지 않고 각자가 따로 놀았습니다. 그리고는 무지막지한 돌격만 줄기차게 고집하면서 갈리폴리 해안을 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 퇴각
그래도 연합군이 하나 제대로 한 것이 딱 하나 있었는데, 완벽한 철수작전이 그것입니다. 1915년 12월 19일과 1916년 1월 8일 밤, 연합군은 단 한명의 희생자도 없이 모두 철수에 성공했습니다. 터키군은 바로 코앞에서 연합군이 대규모 철수작전을 벌이고 있는데도 이를 깜쪽 같이 몰랐습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가장 훌륭하게 실행된 작전이었습니다.
반면 승리를 거둔 오스만 터키군의 출혈도 만만치 않아 연합국과 비슷한 25만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갈리폴리 지역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을 만큼 엄청난 피해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터키군은 갈리폴리를 방어하는데 있어서 최고 지휘관부터 말단의 병사까지 일치단결했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투혼을 보여 주었습니다.
특히 지휘관 중 무스타파 케말(3) 장군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습니다. 그는 전투 초기에 터키군 19사단에서 중령 계급의 무명이었는데 독일 고문 산더스 장군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수백명의 동기들과 상급자를 제쳐놓고 단박에 그를 사단장에 임명했습니다. 갈리폴리 전투 내내 최고의 지략과 용맹을 떨쳤습니다.
이렇게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만 터키군은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중동전역에서 참패하고 이어서 동맹국이 항복함에 따라 오스만 터키 제국은 와해되었습니다. 결국은 동맹국에 가담한 것은 큰 패착이었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 케말 파샤
[ 영화, 워터 디바이너 ]
영화 제목 <워터 디바이너(Water Diviner)>란 ‘수맥(水脈)을 찾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영화의 배경 중 하나인 호주 내륙은 척박하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목장을 관리하려면 반드시 워터 디바이너가 필요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코너(러셀 크로우 분)도 바로 워터 디바이너입니다.
<글래디에이터>부터 <레미제라블>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제각기 다른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해내며 세계적인 배우로 우뚝 선 러셀 크로우가 자신의 감독 데뷔작으로 <워터 디바이너>를 선택했습니다. 아마도 그가 호주 출신이라는 점이 이 작품을 선택하는데 큰 요인이 됐을 것 같습니다.
* 수맥을 발견하고 환호하는 코너
영화 <워터 디바이너>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유해 수습을 담당하던 <대영 전쟁묘지 위원회> 소속 시릴 휴즈 중령의 묘지에서 발견된 한 장의 편지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영화는 아들들의 시신을 찾아 나선 한 남자의 모험담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보다 넓은 시각으로는 전쟁과 그 여파까지 담아내고 있으며, 갈리폴리 전투를 '타인과 자신에 대한 용서'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러셀 크로우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어느 한 쪽을 피해자이거나 악역으로 표현하지 않고 모두가 희생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영국,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의 연합군이 아닌 터키군의 시점에서 출발하는 이 영화는 연합군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터키군 병사들도 겁에 질린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전쟁은 양쪽 군인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긴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양편의 젊은이들이 어떤 심정으로 전쟁에 참전했는지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 아들을 찾으러...
이 영화는 연기파 배우들의 완벽한 연기 호흡으로 최적의 캐스팅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현재 헐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호평 받는 배우 러셀 크로우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007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치명적 매력의 본드 걸로 이름을 알렸고, <오블리비언>, <노벰버 맨> 등의 대작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로 주목 받은 우크라이나 출신 여배우 올가 쿠릴렌코가 나옵니다. 그들은 각각 세 아들의 시신을 찾아 나선 '코너'역과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미망인 '아이셰'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습니다.
러셀 크로우는 아들의 시신을 찾아 나선 아버지의 비통함과 간절함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올가 쿠릴렌코는 전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을 공유하며 점차 코너를 신뢰하게 되는 여인 아이셰의 섬세한 감정선을 훌륭하게 연기해냈습니다.
여기에 코너를 돕고자 함께 전쟁터로 향하는 터키군 소령 핫산은 <코뿔소의 계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인 일마즈 에르도안이 출연합니다. 또한 희생 군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갈리폴리로 찾아 온 냉철한 연합군 중령 시릴 휴즈는 <잭 리처>,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 <다이버전트> 등의 대작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새롭게 떠오르던 제이 코트니가 맡아 활약했습니다.
* 아이셰 역의 올가 쿠릴렌코
이들은 생김새도 국적도 다르지만 참혹했던 전투를 겪은 이들의 아픈 심정을 하나로 공유하는 모습을 보이며 제1차 세계대전의 실화에서 탄생한 가슴 아픈 스토리의 감동을 던져 주었습니다. 2013년 12월, 이 영화는 이스탄불의 호텔을 재현한 시드니의 스튜디오와 시드니의 구시가지에서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1,2월에는 약 5주에 걸쳐 남부 호주에서 촬영을 이어갔는데, 호주의 목장 풍경과 갈리폴리 남부 해안 장면, 터키 중부 지역의 사막에 가까운 풍경 등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들이 이곳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남부 호주 촬영은 뜨거운 여름 날씨와 예측할 수 없는 기상 변화로 배우들과 제작진에게 가장 험난했던 작업이었습니다. 제작진은 외진 전원 지역에서 기차 전투 장면을 촬영할 때는 세트장의 기온이 섭씨 49.5도까지 올랐었다고 전했습니다.
핫산 소령으로 분한 터키 배우 일마즈 에르도안 역시 "오스트레일리아의 촬영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루에 사계절 기후가 모두 찾아왔고 더위와 태풍, 모래바람까지 몰아 닥쳤다"고 밝혔습니다. 제작자 앤드류 메이슨은 "험난한 날씨 때문에 촬영이 중단되는 상황은 반갑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며 촬영 현장의 여러가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했습니다.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은 러셀 크로우는 "모두가 날씨에 굴하지 않고 촬영 의지를 불태웠다"고 회상하며 영화의 높은 완성도를 위해 모두가 의기투합했던 현장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험난했던 호주에서의 촬영을 끝마친 후 <워터 디바이너>의 주요 제작진과 배우들은 터키로 이동, 약 3주간의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이스탄불의 명소들과 지중해 인근 유적지를 배경으로 진행된 이 촬영을 위해 터키 현지의 실력파 제작진과 많은 배우들이 힘을 보탰으며, 인상적인 장면을 탄생시키려는 열정으로 모두가 한 뜻이 되어 순조로운 촬영을 이어갔습니다.
터키 정부에서도 <워터 디바이너>를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톱카프 궁전(4)'과 이스탄불의 혼잡한 '발라트 거리'에서의 촬영은 물론 유명한 '블루 모스크(6)'의 촬영도 기꺼이 허가해 주었다고 합니다.
[ 영화 줄거리 ]
호주 빅토리아 주의 척박한 대지에서 우물을 찾아내는 직업을 가진 워터 디바이너이자 목장주인 조슈어 코너(러셀 크로우 분)는 4년 전 갈리폴리 전투에 자신의 세 아들을 참전시키는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아들들로부터 전쟁이 끝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척박한 대지에 남겨진 두 부부, 아내는 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남편을 원망하고, 돌아오지 않는 아들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실의에 빠져 하루하루를 절망 속에 가까스로 버팁니다. 그러나 결국 스스로가 만든 커다란 상실감의 망상으로 목장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합니다.
전쟁터에 묻은 아들들, 이로 인해 자신의 가슴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아내의 죽음, 이윽고 물의 기운을 쫓아 땅을 파내 척박한 땅덩어리에 물줄기를 선사하던 듬직한 아버지 코너의 가슴에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의 멍울이 서서히 번져나갑니다.
물의 기운을 찾아내듯, 죽은 아들들 즉 자신의 또 다른 혈맥이 내는 비통함의 소리를 따라 무작정 터키로 향하는 아버지 코너. 140,000km의 길고 긴 여정이지만 망설일 이유는 없었습니다. 코너의 아들들도 목숨을 걸고 그 길을 떠났으니까...
* 전장에서의 세 형제
코너는 귀여운 아들을 둔 아름다운 전쟁 미망인 아이셰가 운영하는 터키 이스탄불의 아담한 호텔에 머무르며 갈리폴리 전투에서 잃은 그의 세 아들의 시신을 찾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적군이었으나 아버지로서의 코너에게 강한 인간미를 느낀 터키군 핫산 소령(일마즈 에라도안 분)의 도움을 받아 세 아들의 잔해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세 아들 중 두 아들의 유해는 찾았으나 첫째 아들 아서의 잔해는 못찾았습니다. 쉽사리 길을 떠나지 못하는 코너. 드디어 코너는 갖은 난관 끝에 터키군과 그리스군 사이에서 전투가 한창인 터키 중앙 지역에서 첫째 아들 아서를 되찾습니다. 물론 이슬람 문화권에서 ‘달콤한 커피로 남자에 대한 애정을 점치는 커피점(6)’을 통해 아이셰와의 사랑도 이루어집니다.
* 갈리폴리의 전쟁 기념탑
(1) 크림 전쟁
1853∼1856년 러시아와 오스만터키,·영국·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이 크림반도·흑해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봉쇄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야전병원에서 활동하여 간호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여성들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장을 열었다.
(2) 안작군단(ANZAC,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창설된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 군단을 말한다. 1914년 12월 이집트에서 창설되어 갈리폴리 전투 및 서부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ANZAC은 고지대 및 절벽에 주둔한 오스만 투르크 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자, 안전해질 때까지 땅을 계속 파라는 사령관 해밀턴의 지시에 따라 참호를 계속 팠고, 그 결과 '광부(Digger)'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후 ANZAC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에 다시 편성되어 그리스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 각지의 전투에 참전했다. 2006년 동티모르 사태 때에도 호주와 뉴질랜드가 합동작전 수행을 위해 ANZAC을 편성했다.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매년 4월 25일, 'ANZAC 데이'라는 이름의 국경일 행사를 벌인다. 양국은 이날 갈리폴리 전투,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에 참전한 ANZAC 군인들을 기린다.
(3) 무스타파 케말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터키의 국부(國父)라는 의미로 ‘케말 아타튀르크’라고 불린다. 원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 파샤였다. 파샤는 군사령관이나 고급 관료에게 붙이는 칭호이다. 갈리폴리 전투 중에는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1차 대전후 수도 이스탄불 등이 연합군에게 점령당하자 조국의 구원에 나섰다.
앙카라에서 대국민회의를 개설하고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술탄 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세브르 조약을 강요당하고 그리스군이 터키 깊숙이 침입해오자 민족 독립 전쟁을 일으켜 그리스군을 쫓아냈다. 그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 문자의 통일, 민족 산업의 육성 등 과감한 근대화 정책을 실시했다.
케말은 갈리폴리 전투에 임하면서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우리에게는 노예가 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죽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의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들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을 것이다.”
(4) 톱카프 궁전
톱카프 궁전은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거주한 궁전이다. 이스탄불 구시가지가 있는 반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금각만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총 면적은 70만 평이며, 벽 길이만도 5km나 된다. 톱카프 궁전은 유럽의 다른 궁전과는 달리 별로 화려한 편은 아니다.
(5) 블루 모스크
블루 모스크는 오스만 제국이 세운 가장 장려한 건축물 중 하나이다. 이 건물은 내부의 모자이크의 색채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고 알려지게 되었지만, 사실 정식 이름은 '술탄 아메드 모스크'이다. 이는 당시 건축을 명한 술탄 아메드 1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스탄불에 있으며 수백 명의 무슬림들이 여전히 이 장소에서 하루 다섯 차례씩 매일 기도를 올리고 있다. 관광객들은 북쪽 현관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서쪽 현관이 가장 눈부시게 장식되어 있다.
(6) 커피점
커피를 마신 다음에 커피 잔에 남은 찌꺼기 모양으로 점을 치는 터키의 관습을 말한다. 예를 들면, 새는 좋은 소식, 반지는 결혼, 깃발은 가정이나 사업의 문제, 칼은 친구와의 불화 산은 장애물, 개는 진정한 우정, 삼각형은 인생의 변화, 원은 성공, 사각형은 안락, 평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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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리스가 터키한테 지배당햇다는것 터키를 미워한다는것
현지가이드에게 들었어요
터키 한국전쟁 참전배경도
상당한 정치적 이유가 있더군요
ㅇ
명우 러셀 크로우가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영화 <워터 디바이너>는 비교적
잘 만들었다는 평이었습니다. 재미도 있고 거기다가 감동적이기까지...그러나
갈리폴리 전투를 모르면 이 영화도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렵고, 재미도 그만큼
반감될 수 있지요. 그래서 제가 준비하고 있는 책자 <영화와 함께 읽어보는 역
사와 인물>도 그런 취지에서...
그리스와 터키와의 관계 및 터키군 한국참전에 대한 상보도 준비중에 있습니다. 기대
하세요. 건투를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