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이 지나치게 가느다란 사람이 맞는 팔찌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액세서리를 잘 착용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상하게도 팔찌만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어쩌다 마음에 드는 팔찌를 발견해도 나의 가는 손목에는 막상 어울리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간혹 내 손목을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힘을 주어 만져도 똑 소리를 내며 부러질 것 같다고. 하지만 내 손목은 한 번도 부러진 적 없이 오늘날까지 열심히 뭔가 쓰고, 악수를 하고, 가방을 들고, 바람도 쓰다듬고, 그리하여 지금 무사히 책상 위에 놓여 있다.
가끔 가브리엘라의 은팔찌가 떠오른다. 그녀의 손목에 가만히 얹혀 조용하게 빛나던 그 팔찌를 보는 순간 뭉클한 친밀감과 함께 알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뜨거운 바람에 모래가 날아와 내 몸을 쓸고 지나가는 듯한 서걱거리는 슬픔이. 나는 가브리엘라의 아무런 장식 없는 가느다란 팔찌를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쓰다듬듯 만져보았다. 한쪽 손목은 그녀의 손에 붙잡힌 채로.
베네치아에 사는 나이 많은 여인들은 모두 제각기 독자적인 분위기의 세련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이나 캄포에서 마주치는 여인들은 관광객들처럼 요란하지 않은, 소박한 옷차림과 낡은 장신구를 걸쳤지만 대개 우아했다. 나는 그들과 좁은 골목을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가끔 그들의 목걸이나 팔찌에 시선이 갔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진열장에 놓여 있으면 어울릴 것 같은, 그들의 할머니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을 듯한 장신구들은 적절한 아름다움으로 어떤 이야기를 간직한 채 고요히 빛났다.
베네치아의 여인들은 집에서 요리를 할 때도 팔찌를 차고 있는 것일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을 때 그녀는 옆에 앉아 이탈리아어로 무언가를 다정하게 말하며 내 팔을 계속 잡고 있었다. 나는 가브리엘라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두었는데 거기,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팔찌가 그녀의 손목에 있었다. 나도 그날 작은 나뭇잎 장식의 가느다란 줄이 두 겹으로 이어진 은팔찌를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긴소매에 가려진 내 팔찌를 보지 못했겠지. 가브리엘라처럼 노인이어도 팔찌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물건을 만나는 순간 아주 드물게 바로 ‘내 것이다’ 싶은 것이 있는데 그 겨울 내가 가브리엘라의 집에 갔을 때 끼고 있던 팔찌를 본 순간이 그랬다. 내 손목에 맞추느라 만든 사람의 손을 다시 거쳐 보름 이상을 기다려 내게 그 팔찌가 도착한 날, 나는 내 손목에 딱 맞는 팔찌를 처음으로 가지게 되었다. 지난여름에도 그 팔찌를 자주 하고 다녔다. 너무 많이 줄여야 했기에 팽팽해진 줄이 잘 구부러지지 않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낄 수 있는 서글픈 보라색 팔찌도 몇 차례 내 손목에 걸려 있었던가. 사물들은 기억의 힘으로 생명을 얻고 희미하게 빛이 난다.
팔목을 감싸는 장신구를 맨 처음 생각해낸 사람은 누구였을까. 옷에 따라 그렇기도 하지만 마음의 기류에 따라 착용하는 액세서리도 다르다. 건강 팔찌, 후원 팔찌, 아기들이 차는 이름 팔찌까지도 다 누군가의 손목에서 제각기 알맞게 아름답다. 그러고 보니 조카애가 만들어준, 주황색 한지를 끈으로 엮어 만든 앙증맞은 솔방울 팔찌와 한동안 잊고 있었던, 비구니 스님과 후배 K가 선물로 준 염주 팔찌도 애틋하다. 이 팔찌를 끼고 다니면 올겨울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데 조금 도움이 되려나.
손목이 굵은 사람들은 어떤 팔찌를 끼는 걸까. 어느 해 여름날 저녁, 행사가 끝나고 배정받은 방으로 가 있는데 전화가 왔다. 네가 내게 처음으로 한 전화였다. 얼굴을 씻다 말고 뛰어나와 전화를 받았다. 너였다. 절 마당으로 나가서 잠시 서 있었더니 네가 왔다. 너는 왜 손이 아닌 내 손목을 잡았을까. 이상한 인사였다. 네가 가져갔던 내 손목. 그때, 팔찌 같은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