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손녀의 여우짓
지난주 토요일인 2018년 5월 5일의 일이다.
어린이날인 이날, 우리 가족은 일찌감치 반포대교 남단의 한강 둔치 공원에서 함께 하기로 작정을 했었다.
날씨까지 화창해서 가족들 어울리기에는 금상첨화의 날이었다.
다들 기뻐했겠지만,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희비(喜悲)가 교차되는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 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함께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외되는 슬픔이 있었다.
일흔 나이를 넘어선 나로서, 기쁘다고 나서서 덩실덩실 춤을 출 수도 없었고, 슬프다고 그 슬픔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춤추는 나를 보고는 눈꼴사납다 할 것이고, 슬픈 나를 보고는 늙어 꼴값한다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저 기쁜 척 해야 했다.
그 척을 하는 것이 싫다고 해서, 가족들 모이는 그 자리에 안 갈 수도 없었다.
이제는 뭔가로 삐쳤다는 소리를 듣기 딱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날 아침부터 내 마음속으로 딱 작정하기를, 어찌 되었든 간에 내 사랑하는 손녀 같은 어린이들이 왕대접 받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진실로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해야지.’라고 했다.
나를 뺀 나머지 가족들은 오전에 일찌감치 손녀와 함께 한강의 새 명물인 ‘세빛 둥둥섬’이 떠 있는 한강둔치로 나갔다.
나는 오후 2시에 있는 친구 결혼식을 들렀다가, 뒤늦게 가족들이 미리 가있는 그 현장으로 달려갔다.
정작 현장에 도착하니, 내 마음에 슬픔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가족이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이제는 내게 있어 가족이라고 해봐야, 아내와 두 아들과 큰며느리와 하나 있는 손녀가 그 전부다.
전 같으면, 사촌에 오촌에 육촌까지 해서 집안 온통 수십 명이 가족이라고 명분으로 모이고는 했었다.
그 많다싶었던 가족들이 어느 샌가 다 떠나고 말았다.
다들 각자 나름의 살 길을 찾아 떠난 것이다.
소위 ‘대빵’이라고 해서 집안의 어른인 나로서, 떠나는 그들을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해봤다.
잡혀지지를 않았다.
누구에게도 간섭 안 받고, 각자 자기중심으로 살고 싶고 하는 그 개인적 사고방식을 주저앉힐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그렇게 간섭 받고 싶지 않아하는 데다가, 도무지 감사해 할 줄도 모르는 가족들은 더 이상 챙겨갈 수도 없었다.
양심적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였다.
결국은 내키지 않아도 감당하는 희생이 필요했는데, 내 희생은 차치하고서라도, 아내와 내 두 아들의 희생까지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그 선택의 순간에 나는 내 아내와 두 아들을 선택했다.
그 결과, 그 많던 가족들이 끝내 다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렇게 나까지 해서 여섯 한 가족이 전부라는 것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나마 좀 넓은 가족 개념이다.
손녀의 기준에 의하면 저와 저 엄마 아빠해서, 한 가족 딱 셋이다.
그 좁은 가족 개념에 시비를 걸고 나설 수도 없다.
나서본들 이렇게 퉁만 얻어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뭘 몰라! 선생님이 그랬어. 가족은 나를 중심으로 해서 엄마 아빠만 가족이라고 말이야.’
이 시대 교육의 안타까운 허실이다.
가족들이 모여 있는 그 현장을 곧바로 찾아갈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강 둔치의 그 잔디밭에 텐트를 쳐놓고 있어서, 도대체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내 나이로 되어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또 나를 슬프게 했다.
온통이 아이들이었고, 그 엄마 아빠였다.
결국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소외감이 나를 슬프게 한 것이다.
더 슬픈 것이 있었다.
맏이의 하는 짓이 그랬다.
“서래나루 앞에 텐트를 쳐놨어요.”
맏이가 그렇게 길 안내를 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 서래나루가 어딘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한참을 헤매서 찾기는 했지만, 내 마음속에는 나이 든 애비인 나를 왜 좀 더 챙겨줄 줄 모르는가 하는 아쉬움이 밀려들었고, 그 생각 끝에 괜한 슬픔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또 있었다.
내가 그 현장에 갈 때, 특별히 들고 간 것이 하나 있었다.
연(鳶)이었다.
내 중학교 동기동창으로 전국 연 연합회 회장인 박상철 내 친구가 내게 선물해준 바로 그 연이었다.
이번 어린이날을 맞아 내 사랑하는 손녀 서현이에게 선물해주고 싶어서, 그 친구에게 일찌감치 부탁을 했었고, 그 친구가 내 그 부탁을 선선하게 받아들여서 일전에 같은 중학교 동기동창으로 양평동 전철 9호선 선유도역 인근에서 ‘김명래 치과’라는 이름으로 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김명래 친구가 중학교 동기동창 친구들을 두루 초대해서 저녁을 같이 하는 그 자리까지 그 연을 들고 와줬었다.
언뜻 보기에는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방패연 정도였겠으나, 그 연에는 그렇게 친구의 우정이 담긴 것으로, 내게는 너무나 귀한 의미가 있는 연이었다.
“내 친구가 서현이에게 주라고 선물한 거야.”
내 그렇게 말하면서, 그 연을 맏이에게 넘겨줬었다.
그러면서 내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 연을 손수 만든 박상철 내 친구에게 감사해 하는 말이라도 한마디 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내 그 바람은, 헛꿈이 되고 말았다.
그저 그 연 날리기에만 몰두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 친구의 그 선물에 대한 의미에 무심한 맏이의 그 모습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렇다고 해서 고맙다는 말을 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었다.
자칫 이런 되받는 말을 들을 수 있어서였다.
‘제가 선물해달라고 한 게 아니잖아요.’
말이야 맞다.
혹 그 말을 들었다고 했을 때, 내 응대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응대를 해서는 안 된다.
말이 말을 낳는다고 해서, 자꾸만 까칠한 대화로 이어질 위험성이 없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로서는 작은 아쉬움으로 남는 순간이었다.
이날의 나를 마지막으로 슬프게 한 사건이 있었다.
한강 둔치에서의 놀이를 끝내고, 서초동 우리 집 인근의 단골 중국집인 ‘이향’에서 우리 한 가족이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의 일이었다.
나와 아내와 두 아들과 큰며느리와 손녀 서현이가 앉을 자리 배치의 순간에 그 일이 터졌다.
“자리 배치는 서현이에게 맡깁시다.”
아내가 그렇게 말을 했을 때, 나는 일반적으로 말석이라고 여겨지는 문간자리가 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손녀가 앉을 자리가 안쪽 가운데 자리이고, 그 자리를 중심을 해서 오른쪽이 저 엄마, 왼쪽이 저 삼촌, 그리고 맞은편 가운데가 저 애비, 그 오른쪽이 저 할머니, 그래서 딱 하나 남는 자리가 그 왼쪽인 문간자리인데, 바로 그 자리가 내 차지가 될 것 같았다.
평소에는 저 할머니인 아내가 손녀의 왼쪽자리가 될 것이었으나, 이날은 모처럼 일본에서 귀국한 저 삼촌이 그 자리차지가 되고, 아내는 그 앞자리로 밀릴 것으로 본 것이다.
내 그렇게 짚고 있는데, 맏이가 먼저 그 문간자리에 앉고 있었다.
“아니다. 내가 그 자리다. 내가 다른 자리에 먼저 앉았다가 그 자리로 밀리면 기분이 진짜로 나쁘게 될 것이니까, 나중엔 어찌 될지라도, 우선은 내가 그 자리에 앉는 것으로 하자.”
그리 말하면서, 내 그 문간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뒤에 손녀가 저 엄마와 함께 그 식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디 앉을까?”
들어서는 손녀에게 내 그렇게 물어봤다.
내 그 말을 들은 손녀가 손가락으로 여기 저기 자리를 하나하나 짚어가더니, 마지막으로 바로 그 문간자리를 짚으면서 하는 말이 이랬다.
“할아버지는 저기 앉아.”
예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슬펐다.
그러는 손녀를 말리는 가족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그렇게 되는 상황을 예상치 않은 것이 아니다.
다 예상을 했다.
그래서 내 미리 준비해간 것이 하나 있었다.
선물이었다.
저 지난주에 손녀가 저 어미 아비와 함께 서초동 우리 집으로 놀러왔을 때 그때, 손녀가 내게 다가오는 어린이날에 선물해달라고 한 것이 있었다.
바로 ‘비밀학교 탈출’이라는 보드게임판이었다.
손녀의 그 말을 듣고, 그 날로 5만원짜리 그 보드게임판을 인터넷으로 구매를 해서 일찌감치 받아놓고 있었다.
그것을 미끼로 던졌다.
“서현아, 할아버지가 네게 선물할 게 있는데. ‘비밀학교 탈출’ 그거.”
내 그 말을 들은 서현이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있었다.
그 휘둥그레진 눈을 깜빡깜빡 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랬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그렇다면, 할아버지 자리, 여기.”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지목하는 자리가 있었다.
바로 손녀 맞은편 자리였다.
선물 하나가 그렇게 내 자리를 바꾼 것이다.
곧, 손녀의 여우짓이었다.
나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두 아들도 그렇고, 큰며느리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박장대소를 했다.
비록 여우같은 손녀의 짓이었지만, 그때까지 슬펐던 내 기분을 순식간에 기쁨으로 반전시킨 기막힌 해프닝이었다.
첫댓글 사람이 사람을 떠나는것은 사람간에 무슨문제가 있는거
그문제의 가장큰 원인은 서로의 양보가 부족했음이 제일크다고 어느 선지자께서 말씀 하셨지러
스스로 내가 무조껀적인 카리스마가 아닌지 다시한번 뒤 돌아 봅시다
생일날,명절,부모기일 등 그런날에 형제자매가 같이 몬하면 뭔가? 텅그러니 빈공간에 허전해짐은 ,.....
내가 많이알고 많이 가졌고 많이 베푼다는것 만으로 내주장의 정당성을 일으키지말라고....부처님말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