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민속박물관이 50년 만에 문을 닫는군요. 진성기(78) 관장과 제주대는 28일 협약을 맺고 유물 일체를 제주대에 무상으로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기증 유물은 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무신궁(당신상)’ 140여점과 ‘울쇠(무속악기)’ 등 1만여점이며 출판물과 사진·녹음자료를 포함하면 3만여점에 이릅니다. 50년 이상 제주 구석구석을 누벼 모아들인 뒤 자식처럼 보존해온 것들이죠. 제주 토박이인 그가 제주 유물들을 수집할 무렵에는 사람들이 눈길을 주기 이전이었습니다. 전시공간을 만들어 유물들이 제법 모양을 갖추자 콜렉션이 탐이 난 제주도에서 건물을 수용하여 유물 일체를 빼앗고 맨몸이다시피 쫓아냈습니다. 제가 알기론 그런 일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세상물정 모르고 오로지 유물수집에 몰입한 샌님같은 그분을 속여먹기는 쉬웠을 터입니다. 2006년 여름 제주시 삼양동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은 민속박물관을 찾았을 때 방마다 유물들로 가득차 있었지만 관람자들이 가물에 콩나듯 적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날은 비가 와서 많이 들른 게 그 정도이니 평소에는 거의 관람객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관광버스나 택시 기사들은 푼돈을 집어주는 장소에만 손님을 데러갈 뿐 주변머리 없는 진성기 선생의 박물관은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이제 일흔여덟이니 혼자서 박물관을 꾸려가기에 벅찼을 법합니다. 아들한테 물려주는 것도 가능했으나, 아버지와 아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사진을 대하니 수척하시군요. 늙은 몸을 의탁하듯이 유물을 자신처럼 관리해줄 뜻있는 기관을 찾았을 터입니다. 그게 자신의 모교 제주대학교가 아니었을까. 척지다시피해온 제주대와 얽히고 설킨 은원의 타래를 푸셨나 봅니다. 이제 분신처럼 매만져온 유물들을 모두 내놓으셨으니 무척 허탈하실 터입니다. 혹여 긴장의 끈을 놓아 건강이 급속히 악화될까 걱정됩니다. 한동안 유물인계로 바쁘실 터이지만, 그 일이 끝난 뒤에도 대학교에서 후학들이나 관람자들을 계속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이자리를 빌어 진 선생님께 사과말씀 하나 올립니다. `제주 올레길'이 한창 세간의 입에 오르내릴 때, 진 선생님은 원고지 두장 분량의 글을 보내오셨습니다. 한겨레신문에 실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내용은 `올레'는 큰길에서 집대문까지의 좁은 골목길을 의미하므로 `제주 올레길'은 정확한 쓰임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지면 관계로 싣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은 2006년 6월 28일치 한겨레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제주도학’ 일궈온 살아 있는 돌하르방‘한국 사설박물관 1호’ 제주민속박물관 진성기 관장 비오는 거리에 기자를 툭 떨구고 택시기사는 가버렸다. 건네준 지도를 따라 찾아와서는 이 어름일 거라고 하고. 토박이로 택시 16년째라는 김아무개(60)씨는 이곳이 관광코스에도 없고 가자는 사람도 처음이랬다. 제주시 삼양3동. 제주민속박물관(064-755-1976). 한국의 사설박물관 1호. 1964년 개관해 22일로 42돌이다. 진성기(70) 관장은 커다란 우산 두 개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남국의 민담〉(형설출판사, 1976년) 책날개에서 낯 익힌 마흔 살 젊은이가 수염을 길게 기른 일흔 살 노인으로 바뀐 채로. 마치 시간의 가면을 쓴 것처럼. 제주에서 나고, 제주에서 자라, 제주의 역사와 전통 보전을 위해 평생을 바친 진성기씨. 대학생 때인 58년 등사판으로 낸 〈제주도 민요〉 1~3집을 시작으로 올해 4월에 묶은 고희기념집 〈제주도학〉(제주민속연구소)에 이르기까지 그가 곱씹어 토해낸 제주에 관한 책은 줄잡아 30여권. 쌓으면 그의 앉은키를 훌쩍 넘는 책들은 신화, 전설, 민담, 민요, 무가, 수수께끼, 금기어, 지명, 민속, 무속, 민속놀이, 향토음식 등 제주도 인문사회 전반을 아우른다.“이 모든 것의 바닥에는 화산섬, 즉 한라산과 바다라는 대자연이 깔려 있어요. 이를 인력으로는 극복하지 못하는 섬사람의 생활과 염원이 그대로 반영돼 있죠. 제주도와 결코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남들은 구비문학, 전통민속의 일부분으로 조사·연구할 터이지만 나의 작업은 제주도학을 위한 것입니다.” 그가 제주도 지킴이가 된 것은 대학을 들어가고부터. “방애 가랫놀래나 핫살 갈아줍서게”(방아 맷돌노래나 좀 말해주십시오) 하면서 이골저골 할아버지 할머니를 조르면 “살암시난 벨 소릴 다 들어졈쪄. 경한 소릴 작아당 미승 걸 할 케손?”(살다보니 별소리를 다 듣게 되는군. 그런 소리를 적어다가 무엇을 할 건가요?) 하는 지청구를 들었다. 4·3항쟁 직후, “학생이 공부나 하면 되지, 이런 시골까지 찾아와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주워 모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경찰관의 의혹 어린 신문도 견뎌야 했다. 그렇게 그가 채집해 문자로 고정시킨 신화, 그가 돈 안 되는 일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그의 아내 변순아씨 덕. 대학 2학년 때 결혼한 같은 마을 처녀다. “같이 놀지는 않았어도 물질 잘하는 상군 해녀라는 건 알았어요. 내 일을 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57년 진성기씨의 아내가 된 변씨는 새벽 바다에서 해조류를 건져내고 낮에는 밭일, 집안일로 고단하게 움직여야 했다. ‘쓰잘 데 없는 얘기’나 듣고 다니고, ‘엿장수도 버리는 잡동사니’를 모아들이는 무능한 학생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꾸리고 아이들을 건사해야 했기 때문. “마실트는 고냉이 귀 아니 아문다는 게, 게메 조고만이 나상 댕깁서.”(외방나는 고양이 귀 상처 나을 때가 없다는데, 글쎄 어지간히 나서서 다니세요) 밖으로 돌다 피부병을 옮아온 그한테 무던하기만 한 아내가 던졌던 말이다. 뿐인가. 꼬리를 물고 풀어내는 자비출판 책들. 거기에는 진성기씨의 땀보다 고단한 아내의 울음이 더 진하게 묻었다. “이젠 치매에 걸려 사람을 몰라봐요. 자꾸 치약 대신 비누를 묻혀 이를 닦아요. 나한테 와서 고생만 하다가 ….” 진씨의 말은 울먹임으로 변했다. 사무실에서의 인터뷰 내내 그의 눈길은 뜰로 향했다. 궂은 날씨가 관광자원이라는 비오는 날의 박물관. 관람객이 끊일 듯 끊일 듯 이어졌다. 그는 안내를 위해 자주 자리를 떴다. 대지 1000여평에 세워진 박물관은 3층. 1층은 주로 토기, 도기, 철기 등 특별전시실, 2~3층은 생활사 관련 유물로 꽉 차 있다. 어림잡아 3천점. 벽(癖)을 넘어 광(狂)에 이른 결과. “정리된 창고인 셈입니다. 상품 진열식으로 돼 있어 돌아서면 초점이 남지 않는다고도 해요.” 겸사 끝에 덧붙였다. “제대로 보여주려면 공간이 충분해야 하는데 ….” 어떤 이는 입장료가 있다니 뭐 볼 게 있느냐며 돌아나갔고, 학생과 함께 온 교수는 뜻있는 일을 한다며 관람 뒤 구입한 관장의 저서에 사인을 받아갔다. 안동에서 왔다는 일행 넷은 도립자연사박물관이 소독한다며 문을 닫아 여기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박물관은 본래 ‘일도 이동 996-1’ 지금의 도립자연사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79년 진성기씨의 민속박물관 자리를 탐낸 도에서 토지수용령을 발동해 진씨를 밀어내고 도립자연사박물관을 세운 것이다. 당시 시세로 3억3천만원의 땅을 단돈 1500만원에 강탈했다. 그것도 그렇거니와 “진성기 박물관에는 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는 유물은 한 점도 없다”던 당시 도청 문화관광 책임자의 비아냥은 뼈에 사무쳐 있다. 64년 450점으로 문을 연 이래 박물관은 수난의 연속이었다. 69년에는 당시까지 모아온 유물을 몽땅 뺏겼다. 건물을 지어주며 박물관을 끌어들인 땅주인이 땅을 다른 사람한테 팔면서 유물의 소유권까지 주장한 것이다. 현재 박물관 전시물은 알몸으로 쫓겨난 진씨가 반년 동안 미친듯이 모아들인 것들이 근간이다. 자그만 체구에 선량한 표정의 진씨가 물렁해 보였는지, 사람들은 그한테서 민요 채집 성과를 가로채려 하고, 모아들인 유물과 박물관 터를 빼앗아갔다. 이 밖에 20여년 동안 여러 번 횡액을 당하면서 그의 열정은 집착이라고 할 만큼 집요해졌고 더불어 제주도학은 단단하게 여물었다. “당신의 일을 하느라 집안일은 뒷전이셨어요. 어려서는 참 야속했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어요.” 큰아들 진영욱(48)씨는 담배를 거듭 갈아피웠다. 2남4녀 자녀들은 모두 ‘자칫 아버지의 열정을 부추길까’ 박물관 일에 애써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3층 베란다를 돌아 거미가 줄을 친 문을 거치는 그의 연구실은 50여년 고단한 세월이 고였고, 1층 모퉁이를 돌아 뒤켠 어두운 수장고에서는 빗물이 뚝뚝 들었다.“유물에서 끈기와 열정의 자취가 느껴져요.”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의 ‘지역박물관 소장유물정리 및 관리지원’ 프로그램에 따라 이곳에서 일행 둘과 함께 두달째 유물 등재작업을 하는 조현숙 연구사의 말이다. “생김새, 이름, 쓰임새 등 다른 지역과 다른 것들이 많아요.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재미가 각별해요.” 뜰 한쪽 임시건물에서 이들이 하는 작업은 유물 명칭, 건수, 재질, 용도, 크기, 상태, 특징과 위치 등의 정보를 전산화하는 일. 작업을 마치면 유물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어 전시방식 개선 혹은 보존처리를 위한 기초자료가 된다. 지금까지 2층에 있는 유물 500여건의 등재를 마쳤고, 예정된 8월 중순까지는 1천건은 넘길 것으로 본다. 이를 위해서는 먼지 제거와 사진 촬영은 필수. 최소한의 보존조처를 함께 한다. 옷 종류는 중성지로 개별포장하고, 나무유물은 그늘에서 바람을 쐰다. “사설 박물관이 대부분 그렇듯이 유물 상태가 좋다고 할 수 없어요.” 조 연구사는 녹, 습기, 곰팡이 제거 등 뒤처리가 필요하다며 유물등재 프로그램이 보존 처리 작업과 맞물려야 한다고 말했다. 습기에 나빠 융으로 된 전시함 깔개를 걷어냈다는 조 연구사는 햇볕을 차단할 버티컬 설치, 조명시설의 교체 등을 권장했다. “입장료는 박물관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경비예요. 2천원이 비싸다거나 뭐 볼 게 있느냐며 돌아서는 사람을 보면 속상하더라구요.” 최미연 연구사는 사립박물관은 국공립 박물관이 못하는 분야를 맡고 있다면서 마치 이곳 직원인 양 거들었다. 전날 박물관 마흔세 돌 잔치는 호젓했다. 뭍에서 온 연구사들이 작은 케이크에 불을 켰다. 진성기 관장과 연구원 셋뿐. 돈푼이나 집어주는 데로만 손님을 데려가는 택시기사들, 생색나는 데나 뻔질나게 다니는 단체장들의 제주도가 보여주는 단편이다. 비오는 뜰, 나무그늘 아래 검은 143기의 무신상이 흥흥 웃었다. 미신 타파 광풍이 불 때 무작스럽게 파괴된 신당과 함께 사라졌던 것들. 버려진 것을 수습한 것도 있고 토박이 노인들의 기억과 고증을 거쳐 재현한 것도 있다. 신상을 타고 오른 댕댕이덩굴을 뜯어내던 진 관장은 한 석상 앞에서 멈췄다. 눈이 크고 코도 우뚝한 게 기자를 닮았다면서 …. 머물수록 정 들고 끈끈해지기 마련. 진 관장의 손이 따뜻했다. “육지의 한 군수가 멋지게 박물관 지어줄테니 오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곰보딱지일망정 어머니는 어머니입니다. 여기서 거지생활을 할지라도 이곳을 지킬 겁니다.” 유무형 유물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야 제대로 빛을 내듯이 제주민속박물관과 진성기는 제주도에 있어 한라산의 바람과 돌, 그 앞바다와 어우러져 있어야 하는 것. 저만치 버스가 오고 진 관장은 두고 온 우산을 들고 달려왔다. 돌하르방이 달려오는 환각. 다섯 시간 남짓 함께 보낸 사람이 진성기인지 돌하르방인지 헷갈렸다.
출처; http://blog.hani.co.kr/dreamingmoon/66452?_fr=sr5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