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기분이 우중충할 때는 내 상태보다 훨씬 더 우중충한 글, 가령 구약의 전도서나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같은 글을 읽어야 기분이 풀어진다. 말하자면 이우제우(以憂制憂)인 셈인데, 고려가요 청산별곡(靑山別曲)도 그 중 하나다. 내가 청산별곡을 다 외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인생도 상당히 우울했던 모양이다.
청산에서 살고 싶다 청산에서 살고 싶다. 머루 다래나 따먹으면서 청산에서 살고 싶다. 청산별곡은 이처럼 청산에서의 삶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청산이 어떤 세상이며 거기서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때야 천지사방이 다 청산이라 마음만 먹으면 청산 가는 길이 멀지도 않았고 어렵지도 않았다. 동경할만한 대상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청산은 지리적 청산도 아니요 구체적으로 설계된 세상도 아니다. 여기가 아닌 어떤 곳일 뿐이다. 그러므로 청산에서 살고 싶다는 것은 지금의 인생살이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날아가는 새를 보라. 물속을 날아가는 저 새를 보라. 이끼 낀 쟁기를 입에 물고 물속을 날아가는 저 새를 보라. 나는 청산별곡 3연과 2연을 바꿔 읽는다. 2연에는 울음이 나오고 3연에는 우는 사연이 나오는데, 나같이 독해력이 단순한 사람에게는 먼저 사연을 밝히고 우는 편이 가지런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속을 날아가는 새와 같은 존재다. 맨 몸으로도 날 수 없는 물속인데 그 작은 부리에 쟁기까지 물려 있고 그 쟁기마저도 이끼가 끼어 미끈거린단다. 불교식 과장법이기는 하나 고려시대 민초들의 삶이 그랬다. 문벌귀족들이 백성의 농토를 빼앗아 산과 강으로 자기 땅의 경계를 삼으니, 백성들에게는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땅을 빼앗긴 농민이 물속의 새와 무엇이 다르랴. 농사를 지어봤자 고율지대와 온갖 가렴주구로 남는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손에서 쟁기를 놓을 수는 없었다.
울어라, 울어라 새여. 자다 깨면 울어라 새여. 너보다 시름 깊은 나도 자다 깨어 울고 있다. 청산별곡 전문가들은 ‘우러라’를 ‘우는구나’로 올바르게 옮기지만 나는 비전문가니까 그냥 내 마음대로 옮긴다. 창밖에서 새가 재잘대는 소리는 울음일 수도 있고 노래일 수도 있다.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라면 당연히 울음이다. 이른 아침 새소리에 잠을 깬 사내는 오늘 하루는 또 얼마나 고단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시름에 잠긴다. 새도 울고 자신도 운다고 했으나, 새들에게 ‘그래 울어라 울어’라고 한 것을 보면 새들은 소리 내어 울고 그는 소리 없이 울었을 것이다.
이럭저럭 그럭저럭 낮은 지내왔지만 올 이도 갈 이도 없는 밤은 또 어쩌란 말이냐. 새가 물속을 날듯이 고단하게 보낸 하루가 ‘이링공 뎌링공’으로 가볍게 처리되고 인생의 또 다른 국면인 밤의 외로움이 부각된다. 낮은 힘겹고 밤은 외롭다. 낮에는 몸이 무거웠으나 밤에는 마음이 무겁다. 외로움은 임을 여읜 고려 여인네나 고향과 가족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고려 유민(流民)만이 느끼는 것은 아니다. 세상천지에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외로움은 허망함과 두려움을 거느리고 인생의 등뼈를 이룬다. 외로움이 빠진 인생론은 인생론이 아닌 것이다.
어디를 향해서 던진 돌이냐, 누구를 맞추려고 던진 돌이더냐.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이 그 돌에 맞아 내가 우노라. 이 대목을 읽으면 내 속의 신파(新派)가 일어나 쪼(調)를 빼고 어깨를 들썩인다. 부르지 않은 곳에서 사람을 만나 없었던 마음의 그리움이 되듯이, 내력 없이 꽃은 불현듯 피고 발밑에 풀잎은 뜻 없이 죽는다. 맞아야 할 돌에 맞는 것은 필연이며 작위(作爲)다. 그건 피해갈 수가 있다. 그러나 보라, 우리에게 날아와 상처를 남기는 돌들의 대부분은 우연이며 구조(構造)가 아니던가. 그물을 벗어난 고기 바다에 갇히듯이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우리는 날아오는 돌들을 피할 수 없다.
내 청산별곡은 여기서 끝난다. 뒤로 세 개의 연이 더 있으나 내용이나 호흡이 앞의 다섯 연과 잘 이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구태여 덧붙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청산별곡은 고려가요로는 드물게 보는 염세적인 노래다. 만전춘이나 동동과 같은 남녀상열지사와는 정반대로 청산별곡은 고해(苦海)로서의 인생을 노래하고 있다. 작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세상에 환멸을 느낀 지식인, 임을 여읜 여인, 고향을 등진 유민 중의 하나일 거라고 한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이다지도 아름답게 울어준 천년 전의 가인(歌人)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한다.
참고 : 청산별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