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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심 전쟁>
- 17세기 경에 그려진 이반 3세의 초상 -
1462년. 맹인 바실리 2세가 죽고, 그의 아들 이반이 모스크바의 대공이 되었다. 모스크바 대공 자리를 둘러싼 내란으로 격동적인 유년기를 보냈던 그이지만, 대공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에게 도전한 자는 한명도 없었다. 그 자신감 때문일까. 이반 3세는 1467년, 그의 신하 카심이 정당한 카잔 칸국의 칸이라며, 카잔 칸국을 침공했다. 하지만 카잔 칸국으로 간 군대는 라스푸티차에 발목을 붙잡혔고, 결국 이브라힘 칸의 군대에게 패배했다. 이브라힘 칸의 군대는 곧 비트카를 공격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1469년, 모스크바 공국은 좀 더 강력한 공격을 가했다. 그 결과 두차례에 걸쳐 카잔을 포위할 수 있었고, 결국 카잔 칸국은 포로들을 석방시키는 조건으로 모스크바와 평화조약을 맺어야했다. 하지만 이브라힘은 칸의 자리를 유지했고, 카잔과 모스크바의 갈등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노브고로드의 멸망>
- 오스프리 삽화 중에 있는 '서부 러시아와 위대한 리투아니아'. 1번은 15세기 초의 중기병. 2번은 15세기 중엽의 노브고로드 귀족 기병. 3번은 15세기 후반의 보병이다. -
카심 전쟁의 승리로 자신감이 붙은 이반 3세는 본격적으로 통일 작업에 착수했다. 첫번째 대상은 노브고로드 공화국이었다. 자신들을 위대한 노브고로드로 부르고 있었던 이들 역시 모스크바 공국이 자신들을 합병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브고로드의 포사드니크(1)였던 이사크 보레츠키의 아내 마르타, 그리고 노브고로드 대주교 등을 중심으로 한 노브고로드 공국의 상류층 인사들은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어 이들에게 대항하고자 하였다. 마르타는 이반 3세의 친척이기도 했던 리투아니아의 귀족 미하일 올레코비치에게 청혼까지 하며, 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이반 3세에게 노브고로드를 공격할 좋은 명분이 되었다. 하필 1456년 모스크바 공국과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맺었던 야젤츠비키 조약은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모스크바 대공의 승인 없이 다른 국가와 동맹을 맺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리투아니아는 카톨릭국가였고, 거기에다가 노브고로드를 지원하던 미하일의 지지자들 중에는 당시 세력을 확장하던 러시아 정교회의 이단인 유대교파(2) 인사들이 많았다. 즉 모스크바 공국은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정교회를 배신하고 무시한 이단이자 약속을 위반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물론 노브고로드 공화국도 바보는 아니라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비밀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모스크바 공국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1471년 5천명의 모스크바 군대가 3만명의 노브고로드 공국 군대를 셀론 강에서 괴멸시켰는데, 전투 후 전리품 중에서 노브고로드와 리투아니아 대공이자 폴란드의 왕 카지미에슈 4세가 맺은 조약의 초안이 발견되었다. 모스크바는 포로로 잡힌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장군인 드미트리(3)를 처형하고, 군사적 우위와 노브고로드의 악행(?)을 증명할 증거품들을 가지고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압박했다. 결국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영토 상당수를 할양하고, 1만 5천 루블을 배상금으로 지불하며, 리투아니아와의 관계를 끊는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노브고로드는 모스크바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자연스럽게 다시 리투아니아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반 3세는 이를 묵과할 수 없다고 보고 1478년에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침공했다. 마침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정상이 아니었다. 안그래도 보야르들과 부자들이 과두정마냥 그들끼리 정치를 좌지우지하는데 신물이 나있던 평민들이, 리투아니아와의 동맹 이야기가 나오자 집단적으로 반발한 것이었다. 덕분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손쉽게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멸망시킬수 있었다.
- 베체를 파괴하는 이반 3세의 병사들. 중간에 자주색 옷을 입고 하얀 천을 손으로 잡으며 서있는 여인이 미르타이다.-
이반 3세는 노브고로드에 입성한 후 베체를 없애고, 베체를 소집할 때 쓰던 종을 모스크바로 가져갔다. 그리고 마르타를 그녀의 손자와 함께 모스크바로 압송했다. 이때 그는 "민회 따위는 필요없다. 포사드니크도 필요없다. 자신이 온 나라를 통치한다."고 선언했다. 아직 프스코프 공화국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프스코프 공화국은 너무나도 작고 약했다. 진작에 민중들의 정치 참여를 배제해왔던(4) 모스크바 공국이 러시아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이제 이렇게 러시아 역사에서 민중들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일은 한동안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노브고로드는 세차례 반 모스크바 폭동을 일으키는 등 강력하게 모스크바에 저항했고, 결국 1489년에 일어난 세번째 폭동을 천명이나 죽여가며 강경하게 진압하고 나서야 노브고로드에 대한 통치권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게 되었다.
<멍에를 벗어던지다.>
- "그러니까... 이렇게 생긴 여자가 내 새 마누라가 된다고?" -
이반 3세는 아직 자신의 아버지 바실리 2세가 살아있을 무렵 트베르의 마리아와 결혼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1467년에 아들 하나만 남겨둔 채 요절했다. 그러다 2년 후인 1469년 교황 바오로 2세가 베사리온 추기경을 통해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딸인 조에(5)와의 혼담을 제의한 것이었다.
- "잠깐만. 이게 아닌데..." -
당시 조에는 모레아 공국의 공작이었던 아버지 토마스를 따라 로마로 망명해,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소피아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로마 교황청은 이 결혼을 통해 이반 3세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고 동서교회를 통합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효과가 나고 말았다. 결혼은 쉽게 승낙받았지만, 소피아는 결혼하자마자 다시 동방정교회로 개종하고 조에라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돌아갔다. 더군다나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가, 팔레이올로구스 가문과 혼인했다는 점을 이유로 이반 3세는 슬그머니 황제를 의미하는 차르를 칭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러시아가 비잔틴 제국의 뒤를 이었다는 주장을 할 근거만 주고 만 셈이었다. 실제로 모스크바는 쌍두독수리를 국장으로 활용하는 등 비잔틴 제국의 뒤를 이었다는 주장을 노골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 "킵차크 칸국에 대한 조공? 인정할 수 없다!" -
이런 상황이었으니 이반 3세는 슬슬 킵차크 칸국에 대한 조공도 거부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안그래도 킵차크 칸국은 너무나도 쇠약해져서 각 지역들이 이미 독자적으로 독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476년 이반 3세는 조공을 요구하는 킵차크 칸국의 사절단을 쫓아냈다. 그리고는 크림 칸국과 동맹을 맺었다. 킵차크 칸국은 분노하여 1480년에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모스크바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했다. 모스크바 역시 이들을 막아내기 위해 진격했고, 양 측은 우그라 강에서 대치했다.
- "자. 이 쪽으로 건너오시죠." "그쪽이야 말로 먼저 오세요." -
대치는 약 15~20일 가량 지속되었다가 크림 칸국이 사라이로 진격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킵차크 칸국의 아흐마드 칸이 회군을 결정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모스크바 공국 군대는 이들을 추격하지 않고 되돌아갔다. 하지만 적어도 이 일로 인해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제 사라이에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다. 타타르의 멍에를 완전히 벗어던진 것이었다.
<확장은 계속된다.>
이반 3세는 노브고로드도 합병하고, 타타르의 멍에도 벗어던지면서 슬슬 집안 정리에 들어갔다. 자기 동생들이 받은 영지를 회수하고, 주변 자잘한 공국들을 다시 흡수하기로 한 것이었다. 주변의 작은 공국들은 대체적으로 순순히 러시아에 합병되었지만 이반 3세의 동생들과 트베르 공국은 반항하기 시작했다.
이반 3세는 먼저 버릇 없는 동생들을 손봐주고, 강제적으로 흡수하거나 혹은 그들이 죽으면 자식들이 있던 없던 자기에게 영지가 회수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이후 1482년에 트베르가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었다며, 트베르를 공격하였다. 트베르 공 미하일은 리투아니아와의 관계를 파기하겠다며 싹싹 빌었고, 겨우 독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곧 미하일은 다시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고 모스크바에 대항하고자 하였고, 결국 1485년 트베르 역시 모스크바에 합병되었다. 미하일은 감옥에 갇혀있다가 폴란드로 추방되었다.
- 스키를 타고 이동하는 모스크바 공국의 군대 -
이 무렵 카잔 칸국에서는 내전이 발생했다. 칸의 자리를 두고 형제들끼리 다툰 것이었다. 이 내전에서 패배한 무하마드 아민은 모스크바로 망명을 했고, 모스크바 공국은 1487년 카잔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무하마드 아민을 카잔의 칸으로 앉혔다. 카잔 칸국은 그 대가로 모스크바의 속국이 되었다.
<이반 3세의 말년>
1491년 당시 조지아에 있던 카헤티 왕국의 사절단이 모스크바로 찾아왔다. 이들은 모스크바 대공국이 오스만 제국 등으로부터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청원했다. 이 청원은 거리가 너무 멀어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기는 하지만 향후 러시아가 카프카스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었다.
뭐. 유감스럽게도 당시 모스크바 대공국은 오스만제국 및 크림칸국과 우호적인 관계였다. 이반 3세는 리투아니아를 견제하기 위해 이 두 국가와 친분을 쌓았다. 1495년부터 시작된 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서 크림 칸국과 오스만은 모스크바를 지원했다. 모스크바는 1500년 데보르사 전투에서 리투아니아 군을 패배시켰고, 1503년에 리투아니아가 체르니코프와 노보고로드 세레스키 및 16개의 마을들을 모스크바에게 할양하는 것으로 전쟁을 종결시켰다.
- 모스크바 공국의 요새를 공격하는 스웨덴군. 1번은 스웨덴 포병. 2번은 핀란드인 석궁병. 3번은 스웨덴 군인 -
이외에도 이반 3세는 헝가리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덴마크와도 동맹을 맺었다. 이반 3세는 덴마크와의 동맹 관계 등을 이유로 1495년에 스웨덴이 건설했던 비보르그 요새를 공격하기도 했다. 비보르그 요새 함락은 실패하였지만 덴마크 왕 한스가 1497년에 스웨덴 왕위도 차지하고, 칼미르 연합을 재건하면서 결과적으로 전쟁은 모스크바의 승리로 끝났다. 거기에 더해 이반 3세는 1500년 라쟌 공국을 협박해 영토 절반을 할양받고, 나머지 절반도 어린 라잔 공작의 후견자가 되는 조건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라쟌 공국도 종속시켜 버린 것이다.
다만 말년에도 이렇게 행운만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1501년 모스크바 공국과 프스코프 공화국의 연합군이 시르트사 강 전투에서 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받은 튜튼 기사단 리보니아 지부의 군대에게 패배하였다. 더군다나 말년에는 후계 문제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 "순순히 후계자 지위를 인정하시죠. 아버지! 안 그러면 유혈사태가 벌어질 겁니다!" "내가 힘이 없다는게 원통하다!" -
후계 문제의 발단은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아들 이반이 1491년에 요절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반 3세의 손자 드미트리와 조에와의 사이에서 낳은 바실리를 두고 후계 분쟁이 벌어졌다. 이반 3세가 후계자를 따로 정하지 않으면서 문제는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1497년 드미트리가 후계자가 되었다. 조에가 반발하여 봉기했지만 진압되고 쫓겨났다. 그러나 1500년 바실리가 리투아니아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1502년 이반 3세는 바실리를 후계자로 삼고 자기의 손자 드미트리를 감옥에 가두어야 했다. (6) 어떻게 보면 나름 불운한 말년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포사드니크는 일종의 시장과 같은 직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 유대교파는 15세기 중후반 노브고로드의 유대인 2명이 자신들의 사상을 전파하면서 생겨난 종파로, 구약성경을 중시하고 신약성경을 무시했으며, 예수의 신성을 부인했다고 한다.
(3) 그는 마르타의 아들이었다.
(4) 모스크바도 포사드니크란 직책은 존재했지만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에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5) 그녀는 뚱뚱하고 못 생겼다고 전해진다.
(6) 당시 탄압받던 유대교파들 중 일부는 드미트리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드미트리가 감옥에 갇히면서 이들 역시 보호자를 잃고 탄압받다가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