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다른 생각이 있어서요. ㅎㅎ 님의 의견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고요. 제 의견을 말씀드리면요.
한화가 1차지명 잔혹사라고 하면 솔직히 다른 팀이 비웃을 것 같습니다. 한화의 90년대 팜은 다른 팀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최강의 팜이라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왜냐? 당시 1차 지명 또는 연고지역내 고교 출신으로 상위지명을 받은 선수들은 고교나 대학시절의 기록을 보면 프로에서 통하지 않는게 이상한 선수들입니다.
지연규 구대성은 사실 정민태와 함께 국가대표 마운드를 선수에서 이끌던 선수들이죠.
이 선수들도 그렇고 그 후에 입단한 신재웅, 이성갑 등의 선수들은 대학시절 무리한 등판과 그에 따라 재활이나 휴식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체제 특히나 2군 구장이 없기에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문제가 가장 큰게 아닌가 합니다.
길배진의 경우는 원광대에서 투수로 전향한 케이스라 오히려 어깨가 싱싱하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투수들이 전반적으로 다 흉작이었습니다. 당시 상위순번지명 선수들은 한화에 같이 입단했던 북일고 출신의 김성한, 서울팀에 입단한 김민국, 태평양에 간 곽병찬 등이 있지만 모두 프로에서 성공하지 못했죠. 사실상 대단한 임팩트를 갖기엔 부족한 선수들이지만 그 학번이 유난히 뛰어난 투수가 없었기 때문에 생겼던 결과입니다. 인현배, 최상덕 선수만이 좀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학번은 위로 엄청났던 89학번 투수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밀린게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대표팀을 호령했던 구대성과 김홍집, 대표는 아니었지만 4학년 때 엄청난 회오리를 몰고 온 이상훈, 마산고에서 에이스를 하던 경성대 에이스 김경환 등 거물이 많았죠.
91학번의 경우는 충청팜으로는 천안북일의 심성보, 공주고의 신재웅, 대전고의 안희봉과 최명진이 선두권이었지만 이들 중 안희봉은 일찌감치 현대피닉스로 갔고, 심성보와 신재웅 중에 신재웅을 선택한 거죠.
심성보는 대학 1학년 때 국가대표 시절 불미한 일이 있어서 사실상 실력보다 인품문제로 저평가를 받았습니다.
92학번의 경우는 상위순번으로 공주고 시절 3루수였던 홍원기와 공주고에서 유격수를 했으나 방망이가 지나치게 좋아 유격수로 정착을 못한 오중석이(프로 올 때는 역시 3루수) 2차 1지명이었고 그 이후가 이영우, 송지만, 임수민 등이었죠.
홍원기가 고려대 시절 국가대표 단골멤버였고 3루수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정작 국가대표에서는 주전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연세대 재학중이던 강필선이나 심지어는 박재홍이 3루를 맡은 적도 있었습니다. 홍원기 선수는 알루미늄뱃으로는 잘 쳤지만 나무배트에 적응 못한 대표사례라고 보이고요. 이후로 오히려 수비전문으로 쏠쏠한 활약을 했지만 사실 홍원기 선수의 수비력은 어느 곳에서도 주전급은 못됐던게 사실입니다.
오히려 오중석 선수를 2군에서 다듬어 허준을 잇는 유격수로 쓰려 했는데요. 사실 이 선수가 좀 사연이 많습니다. 박찬호와 함께 한양대에 입학한 오중석은 사실 92학번 유격수 가운데 첫손가락에 뽑혔던 선수입니다. 그런데 당시 한양대 4학년에 유지현이 있었죠. 당시 유지현은 국가대표팀에서는 이종범과 키스톤을 이뤘는데 어깨가 약해서 유격수로 함량미달이라는 스카우트의 평가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지현은 이런 상황 때문에 유격수로 출장을 시켜 달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었고, 오중석은 한양대 펜스를 가볍게 넘기는 파워배팅으로 결국 지명타자, 좌익수, 3루수를 오가며 한양대 4번타자를 하게 됩니다.
고교시절 오중석은 1번타자로서 4할 타율에 홈런도 잘 쳤고 특히 발이 빨랐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가서 재간둥이 1번타자가 4번타자가 되는 일이 생겼죠. 결국 오중석이 국가대표에서 항상 제외된 것도 그놈의 방망이 때문에 유격수에 안착하지 못한 원인이 있었습니다. 프로에서 유격수로 다시 조련을 받던 중 당시 2군 경기에서 투수가 슬라이더 그립을 잡고 2루에 견제구를 던지는 바람에 한쪽 눈이 실명되어 결국 프로생활을 마치게 됩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죠.
92학번 때 만약 박찬호를 지명했으면 어땠을까요? ㅎㅎ
93 이후로도 연고 팜 내에 유망한 선수는 광주나 서울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당시 북일고 출신의 이성갑을 지명했고, 삼성은 공주고 출신의 경성대유격수 정회선을 지명했죠. 쌍방울은 역시 공주고 출신 원광대 2루수 송재익을 지명했습니다.
두 선수가 한화에 왔다면.... 그리고 고교졸업후 바로 입단했지만 노장진의 능력은... 사실 이대진과 최영필을 고교시절 초라한 투수로 만들 정도였죠... ㅡㅡ'
94학번의 박지상은 지방야구의 김재현으로 불렸고 신인시절 3할을 치기도 했지만 그만뒀죠.
95학번이 가장 아깝습니다. 당시 이승엽을 능가하는 지명도를 자랑하던 대전고의 유격수 김승권과, 그보다 더 많은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던 공주고 김영진을 기억하시는지요?
특히 김영진 선수는 시즌초4월 홈런왕에 오르기도 하면서 제 2의 장종훈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이후로도 김수연 등등 꽤 좋은 선수들이 한화에 입단했습니다. 조규수는 신인 10승을 했고요.
그런데도 이들 중에 눈에 띄는 선수가 없고 오히려 다른 팀에 간 공주고의 조동화, 조동찬 형제
대전고의 마일영 등을 볼 때 결국 문제는 지도력입니다.
조동화가 조규수와 동기였고, 조동찬은 신주영이 1차지명되던 해에 삼성에서 2차 1번 지명을 받았죠. 현재 한화에 지금 실력의 조동화와 조동찬이 있다면 어떨까요?
신재웅 선수가 한 때 LG김동수와 트레이드까지 거론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또한 신재웅 선수는 선수를 그만두고 고교코치로 있으면서 기아의 이범석 등을 발굴했고요. 선수 그만두고 나서 148km까지 구속을 회복해서 다른 팀으로 갈 준비를 하던중에 공주중에서 감독 제의가 들어와서 나이 등을 고려하여 감독이 된 케이스입니다.
모든 선수가 구대성, 이상군 같은 고무팔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결국 기다려 주지 못하고 키워주지 못한 팜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재웅 선수의 프로 통산 기록은 24승입니다. 생각보다 많나요? 적나요? ㅎㅎ
첫댓글 김영진... 아... 1루수 장종훈 벽을 넘지 못하고..ㅎㅎ
변화구에 약점이 있었는데, 결국 허리부상으로 공익근무 복무후 소리소문 없이... 현재 공주중동초 감독으로 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식이랄 것까지야... 저는 충청권의 팜이 안 좋다는 말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93학번은 저와 동갑내기이니 좀 더 말씀드리자면, 당시 고교 청소년대표(급) 선수가 무려 7-8명에 이르렀습니다.
공주고 노장진(투수), 김기중(중견수), 송재익(2루수), 정회선(유격수)
대전고 최만호(중견수)
북일고 이성갑(투수)
세광고 이정규(투수) 박성호(유격수)
이외에도 저학년도 있었지만, 대전고의 이종민, 장재호, 김병준, 오창선도 좋은 자원이었죠.
슬라이더 그립으로 2루 견제...안습이네요..ㅠㅠ
사실 저는 오중석 선수가 가장 안타까워요. ㅡㅡ'
한국의 데릭지터가 될 수 있는 선수였는데.. ㅜㅜ
아...이글도 명쾌한 해석이네여...군데...신재웅선수 자주 등판했었는데...통산승수가 안습이네여....기대많이했었던 선수라 자주 기억하게되네여....아쉽다는...
당시 신재웅 선수도 부상 회복중이었기 때문에 거의 매년 승수보다 패수가 많았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긴 경기는 거의 완투 아니면 완봉이고 진 경기에서 크게 패한 적이 많고, 후속투수가 상대팀에게 많이 친절(?)하셔서 통산방어율은 유원상과 비슷한 5점대죠.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