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관습
내생에 대한 신념 그리고 그로 인해 영혼이 산 자를 해코지하기 위해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은, 후기 구석기 시대같은 아주 오랜 시기에 나타난 게 확실하며, 어쩌면 그 이전 시기에도 있었을지 모른다.
로마인들에겐 뭐든 절대적인 의심이란 없었다-영의 생존은 간단하고 의문 없는 사실이었고 이는 조상 숭배 관습에서 표현되었다.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그의 자손들이나 지명 받은 이들은 망자가 남긴 것에 대한 경의와 예식을 거행하고, 그가 돌아와서 배상과 교정을 요구하지 않도록 망자의 영혼을 달래는 걸 유지할 책임을 졌다.
제국 초기 시절에는 화장이 시신 처리의 일상적 수단이었고 거기에는 분명한 이점이 있었다. 재는 보통 매장용 납용기에 담겼고, 아주 훌륭한 견본으로는 콜체스터의 캐슬 박물관에 있는 백인대장 마르쿠스 파보니우스 파실리스의 것이 있다.
어떤 경우-달램 유지의 증거-에서는 땅 위로 솟아오르도록 납 용기의 꼭대기에 관-Tube-하나를 돌출시켜서, 유해에 술을 직접 부을 수 있게 했다.
화장은 2세기에 매장 관습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분명치 않지만, 아마 종교적 이유로 매장법이 늘 쓰이고 있었던 중동에서부터 확산되었을 것이다.
중동의 민과 군이 모두 서방 속주에 그들 고유의 매장 관습을 전파시켰을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로마 당국은 그들의 습속에 대해서도 그랬듯, 질서와 규율에 저촉되지 않고 거주 지역 바깥을 매장지로 삼는 한 중동인들의 신념에 굳이 간섭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와 육신의 부활에 대한 교의가 융성하면서 4세기 즈음엔 매장이 통례가 되었다. 사실 이 새로운 종교가 전쟁에서의 힘과 무용을 옹호하는 교리 쪽을 선호했던 군대에,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여지고 있었는진 기독교를 국교로 궁극적으로는 선포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군사적 장비

아담클리시의 트라파이움 트라이아니의 메토페스-Metopes-참조.
**삽화 E2와 E3의 판갑을 참조. 뉴스테드형 동체 갑옷은 F3을 참조하라.
1세기 후반에 도입되고 있었던 '뉴스테드’형태의 동체 갑옷은 아마도 2세기 중반 쯤엔 널리 퍼졌던 것 같으며, 아니더라도 최소한 제국 서방 속주에선 그랬다. 동부 군단은 아마 1세기의 2사분기 초반에 얇은 박판 동체 갑옷이 처음 나타난 후에도 오랫동안 , 메일과 스케일 방어구*를 운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 형태의 동체 갑옷(**코어브리지-Corbridg e-A형 및 B형)은 뉴스테드형(유명한 로리카 세그먼타타를 말한다)의 도입 이후에도 꽤 오래도록 사용되었음이 확실한 것 같으며, 여기에는 이유가 둘 있다.
첫째, 동부 속주 외의 이십 여개 군단의 재장비는 벼락치기로 갑자기 하는 활동과는 꽤 거리가 멀었고, 여기엔 오늘날 우리가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 로마인들이 마주쳤던 많은 문제가 있었다-그중 좋은 예시로는 철판의 생산이 있겠다.
금속판을 만드는 건 롤러로 빠르게 만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로마의 판갑은 해머 작업으로 만들었으며 당연히 시간이 걸렸다.
가능한 시간 요소는 돈보다도 더욱 중요했다-제국은 노예에 기반을 두는 경제였고 육체노동자는 얻기가 그렇게 많이 힘들지 않았으며, 물론 그는 뭔가를 요구할 입장 또한 아니었다.
(단, 노예의 숙식은 반드시 해결해줘야 했기에 관리 및 경영 비용은 어느 정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쁜 처우에 시달리는 지성 있는 사람이, 요구되는 결과를 내지 못했던 것이 분명함 또한 확실했을 것이다.)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했고 무구 제작자와 그들의 조수 대부분이 자신의 능력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는 자유민 혹은 해방노예였음에는 의심이 없지만, 무기 공장에도 특정한 정도까진 적용되었을지 모른다. 불행히도 공장(패브리키아이-Fabriciae)의 수효와 거기서 일했던 종사원의 수효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으며, 때문에 로마인의 생산 시간(예컨대 뉴스테드형동체 갑옷 10만개를 생산할 때 얼마나 걸렸는지 등)을 가늠하기는 아직까지 불가능하다.
두 번째로 로마인들에게 군사 장비란, 여전히 쓸모 있다면 어느 시기의 것이든 계속 유용한 것이었다. 이것은 트라야누스 원주에 서부 군단들이 1차 다키아 전쟁 중, 보다 이전 시기의 동체 갑옷을 여전히 썼음을 보면 분명해진다. 동체 갑옷의 주류는 뉴스테드 형태로 묘사되지만, 이 사실은 넓은 어깨 방어 경첩과 가죽 씻개의 간단화된 묘사에서 보인다.
뉴스테드형과 같은 혹은 약간 늦은 시기 즈음에 개발되고 있었던, 금속 박판 동체 갑옷의 네 번째 형태가 조각 자료에서 나타난다. 증거가 혼란스럽고 어느 한 경우에서는 갑옷을 죄는 수단으로 보이는 게 없지만, 뉴스테드형과 다른 주요한 차이는 거들과 같은 방식으로 박판처리된 깊고 유연한 가슴과 등 뒤의 상부 판갑들 부분이다.
등 뒤의 상부 판갑은 앞서 말한 코어브리지 동체 갑옷과 같은 방식이었고, 이 방식이 마찬가지로 가슴 부분을 만들 때도 채택된 것으로 나타난다. 뉴스테드형 동체 갑옷의 개조 경험은, 그런 갑옷이 가능했을 거란 점과 또 만들기도 확실히 쉬웠을 것이란 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발견되는 것만 보면, 그런 유형의 갑옷이 존재했다는 확실한 증거론 아직 부족한 상황이다. 조각 자료는, 아마도 동체 갑옷 아래에 덧대서 입었을 상의-Doublet-에 부착했을, 상완 보호대 겸 킬트자락인 프테루게스의 존재도 보인다.
2세기의 보조군-아욱실리아-은 계속 메일 갑옷을 입었으며, 이런 성향은 더 이상 어깨 더블링이 갖춰지지 않았던 기병 보조군의 그것 외에는, 이전 시기의 호버크(미늘 갑옷)에서도 나타난다.
첫댓글 화장실부터 장례식 까지 재밌는거많이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