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 속에 갇힌 작곡가, 김민기
우리 사회에서 '김민기'라는 단어는 더 이상 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됐고, 그 단어와 함께 한 시대가 흘러갔다. 그런 면에서 그는 어떤 작곡가보다도 행복한 작곡가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어떤 작곡가보다도 불행한 작곡가였다. 그는 2004년을 사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70년대 인물'이라는 상징에 갇혀있다. 그가 뮤지컬을 해도, 연극을 해도, 그는 여전히 '아침이슬의 김민기'일 뿐이다. 김민기를 둘러싼 그 수많은 '상징'들 속에서 진짜 김민기를 만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가 7.80년대부터 집요하게 추구해온 것이 바로 '노래굿' 형식이라는 점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김민기의 또 다른 면모다. 그의 최초의 노래굿이었던 '공장의 불빛'이 재녹음되고 있는 2004년, 다시 만나는 김민기는 분명 우리가 알던 '아침이슬'만의 김민기는 아니다. 그가 추구했던 노래는 슬픔을 고백하거나 위로를 주거나 추상적인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노래는 시대와 겨루는 무기였고, 김민기의 그런 노래 철학의 정점에 '공장의 불빛'이 있다.
'공장의 불빛', 현장에서 완성된 최초의 노동 뮤지컬
2004년 10월,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이 복각되어 나왔다. 꼭 26년만에 젊은 작곡가 정재일에 의해 재 편곡된 '공장의 불빛'. 흔히 개별적인 노래들로 더 많이 알려졌지만, '공장의 불빛'은 하나의 '극'이었다. 70년대 노동자들의 일상과 그들이 노조를 건설해 가는 과정, 그리고 다시 좌절하고 희망을 다져 가는 과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노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말 그대로 노래극(노래굿)이며, 동시에 소규모 뮤지컬인 셈이다. 물론 노래만 있었지 무대가 상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테이프를 통해 노래를 익힌 노동자들이 스스로 현장에서 무대를 만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공장의 불빛'은 현장에서 스스로 완성되는 기이한 기록을 남긴다. '공장의 불빛'이 그런 생명력을 갖게 된 힘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70년대 노동자들은 대체 '공장의 불빛'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인가. 그 과정을 추적하다 보면 '공장의 불빛'이 곧 70년대 노동 현실에 대한 가장 충실한 서사적 보고서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장의 불빛'은 '뮤지컬 연출가 김민기'의 출발점
'공장의 불빛'은 김민기의 작곡사에 하나의 기점을 이루는 곡이었다. 이 노래굿을 만든 이후 김민기는 더 이상은 개별적인 노래를 만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친구'나 '아침이슬' '상록수' 같은 노래들은 모두 그 이전에 만들어진 노래들이었다. '공장의 불빛'이후 김민기는 지속적으로 서사적인 형식의 '극'을 지향하게 된다. '개똥이'나 '아빠 얼굴 예쁘네요' 같은 일련의 노래극들이 그것이다. 90년대 김민기가 갑자기 뮤지컬 연출가로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낯설어 했지만, 사실 뮤지컬 연출가로서의 김민기는 이미 '공장의 불빛'에서 준비되고 시작된 셈이다. 이 모든 것을 김민기는 한국의 '굿'에 대한 확신과 믿음에서 찾는다.
'친구'의 슬픔을 넘어, '공장의 불빛' 속으로
김민기의 '친구'가 발표된 게 1971년. 모두 알고 있듯이 이 한 장의 음반으로 김민기는 저항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정작 김민기 자신은 그런 현상을 두고 '지옥 같았다'고 말한다. 자신은 그저 현실에 과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거나 절망할 뿐이었고, 그 과정에서 나온 '개인의 일기'같은 노래들이 저항의 상징으로 상승된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이후 김민기는 공장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공장의 불빛'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고뇌하는 지식인에서 노동자의 현실에 뿌리내리는 과정이었다. 김민기는 그것을 '오랜 짝사랑에서 벗어나 비로소 하나되는 과정'이었다고 표현한다.
김민기, 김민기를 말하다
그 동안 김민기는 자기 자신의 노래에 대해서 철저히 침묵했다. 그것은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자신이 '과장되었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이제 김민기는 그 부담감을 털어 버리려 한다. 여전히 '아침이슬의 작곡가' '70년대의 상징'에 갇혀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사실 그 동안 김민기를 말하는 것은 모두 주변인들이었다. 본인은 침묵하는 가운데, 주변에서 김민기의 상징성에 대한 헌사들만이 줄을 이었다. 본 프로그램에서는 그런 주변인들의 헌사를 일체 제외시키고, 오직 김민기 자신의 말과 김민기의 노래만을 출현시킨다. 김민기 스스로 말하는 김민기. 그리고 김민기가 말하는 김민기의 노래들만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이것은 김민기를 둘러싼 그간의 모든 '상징성'을 걷어내고, 오직 김민기 그 자체를 만나는 과정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