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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무심하게 떠오른 태양은 내 눈을 멀게 하고 싶은 욕망을 거침없이 내뿜었다. 손을 들어 태양을 가릴 힘이 없어 눈을 감았다. 어찌나 햇빛이 밝은지 감은 눈에 보이는 색은 검은 색이 아니라 검붉은 색이다.
"고집 그만 부리고 마차에 타."
흥. 도도하게 바겔의 시선을 외면한 것 까지는 마음에 들었지만 하필 고개를 돌린 방향이 태양이 있는 곳이라니. 난 한숨을 내쉬는 와중에도 바겔에게 들릴까 소리도 내지 않았다.
덜컥. 마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원위치 시켰다. 곁 눈으로 살피니 바겔이 마차에서 내려 그 긴다리로 성큼 성큼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 이제 될대로 되라지. 태양열에 익어 죽나 바겔의 저 큰 손에 끌려가 죽나 어쨌든 죽는… 아니, 왜 내가 죽는 생각만 하는 거야.
"세네스."
바겔이 험상궂은 얼굴과 낮은 목소리로 씹어내뱉듯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래, 갈 데까지 가보자. 난 아예 눈을 감아 그를 무시했다. 바겔이 한숨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숨결이 내 얼굴에 와 닿았다.
"알겠어, 알겠으니 일단 마차에 타. 너의 흰 피부가 다 타버리겠어."
눈을 뜨고 바겔을 향해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승자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바겔은 한 번 더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내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렸다.
"이것봐, 피부가 벌써 빨갛게 익었잖아."
"아프지는 않으니 걱정하지마. 그것보다 바겔, 나 힘이 하나도 없어."
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이상 도도한 척 연기할 필요도 없다. 난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바겔의 팔에 매달렸다. 바겔은 뭐 씹은 표정이 되면서도 날 안아들었다. 헤헤 웃으며 가만히 안겨있는 날 보고 바겔이 말했다.
"웃지마, 바보 같아."
온 힘을 실은 주먹으로 바겔의 가슴을 쓰다듬어주니 바겔이 헉하는 소리를 내며 기뻐했다.
"세네스! 얌전히 있지 않으면 손을 놓을 줄 알아."
바겔의 경고는 내 손을 가진런히 모아 배 위에 안착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살며시 미소짓는 나를 힐끔 본 바겔은 내 기습에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바겔의 긴 다리로 인해 마차 안으로 들어오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햇빛에서 벗어나니 살 것 같았다. 맞은편에 앉은 바겔은 팔짱을 끼고 그대로 의자에 누워버린 나를 응시했다.
"여자애가 조심성없기는."
아무렇게나 누우면서 흐트러진 치마자락이 조금 말려 올라가 종아리를 살짝 드러냈다. 바겔은 손수 치마끝을 잡아 피며 내 다리를 가려주었다.
"고마워."
한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눈을 감았다. 찌르는 태양에게서 벗어난 지금에서야 진정한 암흑의 색이 보였다. 마차를 끄는 말들의 말발굽 소리는 열린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와 아주 잘 들렸다. 말들은 천천히 걷고 있었다.
"천천히 가자."
사실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마차를 아예 세우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넌 어떻게 보면 운이 좋은 것 같아."
이마에 댄 손을 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 앉으며 바겔과 눈을 마주쳤다.
"너 지금 나 약올리니?"
기껏 도망나와 한 시간도 안 되어 잡힌 내게 하는 소리가 운이 좋다고? 화제를 돌릴거면 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 그랬어, 바겔. 눈 앞에 보이기 시작하는 또 다른 승리의 깃발이 어른거리며 잡아달라 재촉했다.
"그 자는 일이 생겨서 못 오게 되었어."
승리의 깃발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려했다. 하지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난 함박웃음을 지으며 바겔을 향해 몸을 숙였다.
"정말?"
"그래, 하지만 돌아가면 에글렌틴후작과 부인께 변명이든, 사과든 해야할 거야. 온 집안이 난리가 났어."
부모님께 야단 맞을 걱정은 잠시 뒤로 미루고 눈 앞에 놓인 기쁨을 만끽했다.
"가이슬러 공작이 그렇게 싫어?"
듣기만 해도 이제는 절로 인상이 찌푸리는 나를 아는 바겔은 내 앞에서는 되도록이면 그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뭐, 오기로 한 그 자가 오지 않는 다니 그 자의 이름 정도야 얼만든지 들어줄 수 있다.
"넌 가이슬러 공작과 만나 본 적도 없잖아."
그렇다. 난 아직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을 싫어하고 있었다. 사실 싫어한다기 보다는 피한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었다.
"바겔, 난 이제 겨우 열 일곱이야. 결혼 하기에는 너무 창창하고 또, 난 생전 모르는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
"열 일곱이면 여자로서는 결혼 적령기야. 그리고 생전 모르던 사람이면 결혼하기 전에 알아가면 되잖아."
자꾸 옳은 말만 하는 바겔이 미워 그를 노려봤다. 그렇게 노려봐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겔은 날 쳐다봤다. 결국 먼저 눈을 돌린 건 나였다. 아, 승리의 깃발은 정녕 신기루였던 것인가. 답답한 마음에 한 숨과 말이 동시에 나왔다.
"너랑 결혼하는 게 더 마음 편하고 좋을 텐데."
바겔의 눈이 커지는 듯 하더니 장난스럽게 변했다.
"날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군."
마차 안은 잠시 맥빠진 내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바겔의 장난에 맞받아칠 기력은 이미 소진했기에 가만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런 내 상태를 알아챈 바겔은 얼굴에서 장난을 지웠다.
"나와 결혼하는 것보다 공작과 결혼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야."
"그 좋다는 기준은 어디서 내린 거야? 그래, 공작과 결혼하면 공작의 이름을 힘입어 내 명성이 높아지겠지. 그에 따라 더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공작의 힘이 있다는 전제조건하야. 그리고 난 사교계에서 남편 덕으로 산 귀금속을 자랑하러 나오는 그런 여자들이 되고 싶지 않아. 혹시 날 그런 여자로 봤다면 넌 다음부터 날 보러 오지 않아도 되."
말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치솟았다. 이런 일때문에 울고 싶지 않아 눈에 힘을 주어 애써 눈물을 삼켰다.
"미안해. 그런 뜻은 아니었어."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짜증나고 화나는 일이 생기면 바겔이 잘못을 했든, 하지 않았든 내 화를 받아주는 건 언제나 바겔이었다. 그가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제일 편하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핑계삼아 한 화풀이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바겔은 어김없이 그런 나를 받아주었다.
그 뒤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난 의자에 누워 이런 저런 생각에 빠졌고 바겔도 굳이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아 조용한 마차 안에는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만 들렸다. 저택안으로 들어서고 아버지가 아끼는 정원이 창 밖으로 보이자 미뤄놨던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나를 마중나와 있는 시녀들 사이에 초조한 얼굴로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자 처음으로 말도 없이 집을 나온 것에 대해 후회가 일었다.
"어머니…"
아무리 기어들어가는 소리여도 바로 앞에서 말했으니 못 들으셨을리는 없겠지만 어머니는 한동안 나를 지긋이 바라만 보셨다. 때로 눈빛은 백 마디의 말보다 더 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의 물기어린 눈동자에 스쳐간 감정들은 속속들이 나에게 스며들어 작은 울림을 만들었다.
"세네스, 너의 아버지께서 화가 많이 나셨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아버지께 하거라."
아버지를 만나 뵐 생각을 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어디 다친 곳은 없고?"
"네."
"오랜 시간동안 햇빛에 피부가 노출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괜찮은 것 같으나 혹시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옆에 가만히 서서 기울어져가는 태양빛을 막아주고 있던 바겔이 말했다. 나조차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시켜 준 바겔이 고마웠지만 조금 전 마차 안에서의 대화가 고맙다고 말하려는 내 입을 막았다. 타고난 흰 피부는 활발한 내게 큰 장애물이 되었다. 기사로서 여러 훈련을 하는 바겔의 구릿빛 피부가 부러워 나도 피부를 태우겠다며 저지른 바보같은 짓이 떠올랐다. 그날밤 나는 온 몸의 피부가 벗겨지는 끔찍한 일을 겪어야만 했다. 내가 가진 흰 피부는 태양열을 잘 적응하지 못해 햇빛을 받으면 붉어졌다.
"괜찮아요. 그리 오랜 시간도 아니었는 걸요."
바겔은 내 말은 무시하고 안나에게 감자팩을 준비하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바게른 경에게는 매번 고맙다는 말만 하게 되는 군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겔은 어머니께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다시 마차를 향했다.
"바겔!"
걸음을 멈춘 바겔이 뒤를 돌아 나와 눈을 마주했다.
"오늘은 여러모로 고마웠어."
멋들어지게 웃은 바겔은 내일보자는 인삿말을 남긴 채 마차로 들어갔다. 나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와는 달리 빠르게 걸어가는 말들이 이끄는 마차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 그럼 아버지를 뵈러 갈게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시녀들은 어머니를 따라 가고 내 전속 시녀인 안나만이 내 곁에 남았다.
"어디계셨던 거예요, 세네스님! 후작님과 후작 부인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몰라요."
"아버지 많이 화나셨어?"
"어휴, 말도 마세요. 세네스님 없어졌다는 소리 들으시고 직접 찾으러 가시겠다는 것 말리느라 플로렌트 경과 메이튼 집사께서 고생하셨죠."
이건 내 예상을 빗나가도 한참을 빗나갔다. 세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많은 수의 서류에 쌓여 내가 없어진 것도 플로렌트 경을 시켜 찾아오게 하실 줄 알았건만. 어쩐지 플로렌트 경이 아니라 바겔이 날 찾으러 온 게 이상하다 했더니 플로렌트 경은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계신다는 서재 방 문 앞에 서서 아무리 그래도 집을 나가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후회를 거듭했지만 이미 지나간 마차며 엎질러진 포도주였다. 내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안나가 나 대신 문을 두드렸다. 안나가 눈치를 주며 손짓으로 서재를 가르켰다.
"아버지, 저 세네스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너라."
한숨을 내쉬는 동안 안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버지는 내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창 밖을 내다보고 계셨다. 이곳 서재에서 내다보면 저택 앞 정원과 정문이 그대로 보였다. 아버지가 계속 창 밖을 보고 계셨다면 내가 돌아온 것도 다 알고 계실 터였다. 나는 끝나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하며 아버지의 불호령을 기다렸다. 내가 방에 들어와서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아버지는 뒤를 돌아서서 나를 바라봤다.
"가이슬러 공작께서는 일이 생겨 오늘 있을 만남을 미루셨다."
"바겔이 그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의외로 아버지는 화를 내거나 하시지는 않아 애써 한 마음의 준비가 소용없게 되었지만 이러는 편이 훨씬 나았다.
"세네스."
"네, 아버지."
"네 나이 열일곱이다. 더이상은 원치 않는다 해서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론 원하든, 원치 않든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투정 부릴 수 있는 나이는 오래전에 지나갔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다. 잘나가는 백작 가문에 태어나서 부족함 없이 살아와 더욱 더 내가 원하고자 하는 일만 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사에 관한 일이라면 내 딴에는 억울하기도 했다. 가이슬러 공작과의 혼인은 원래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통보로 두 달 전에 정해진 혼사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졌고 나는 그 결정에 따라야만 했다. 그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
"일단 공작을 만나보고 나서 이야기 해도 늦지 않는다."
더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아버지의 뜻을 알아챈 나는 아주 작게 한 숨을 쉬었다. 오늘 일로 혼이 나지 않은 것만해도 다행이다 싶어 나도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혼이 나지 않은 이유 중에 가이슬러 공작이 오지 않게 된 것이 큰 한 몫을 한 것 같긴 했지만 결과는 좋게 끝이 났으니 이것으로 되었다. 이것이 정말 좋은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피곤할테니 이만 가서 쉬거라."
언뜻 아버지 나름의 고뇌가 한 숨을 통해 삐져나왔지만 나는 그것을 위로해 줄 기운도 없고 아버지도 그것을 바라고 계시지 않은 것 같아 그대로 방을 나왔다.
방에 들어오자 가출 아닌 가출로 인해 살짝 더러워진 내 치마를 살펴본 안나가 호들갑을 떨면서 목욕을 시켰다. 따뜻한 욕조에 들어가니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과 고민들이 잠깐이나마 물에 씻겨 내려가는 듯해 기분이 좋았다. 천정에 새겨진 무늬를 보다 차가워진 얼굴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얼굴을 물 속에 담궜다. 내 등을 씻겨주고 있던 세네스가 깜짝 놀라 내 어깨를 잡으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숨이 찰 때까지 얼굴을 들지 않았다.
"푸하!"
"세네스님!"
"왜, 안나? 내가 죽기라도 할 까봐?"
"세네스님!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히죽히죽 웃으며, 안나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목욕을 끝낸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겔이 부탁한 감자팩이었다. 피부에 무언가 붙어있으면 갑갑해서 팩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얼굴을 찡그림으로 싫다는 의사를 거리낌없이 드러냈지만 내가 갓난 아기였을 때부터 나를 키워왔다시피 한 안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특별히 바겔님이 부탁하셨습니다."
"알고있어. 하지만 뜨거운 물에 닿았는 데도 전혀 아프지 않았어."
"그럼 세네스님의 예민한 피부를 위해 예방한다 생각하세요."
바겔, 너가 없는 곳에서마저 나를 이리 괴롭힐 수 있다니, 내일 너를 만나면 대단하다 박수라도 쳐줘야 되겠어. 강경한 안나의 태도에 어쩔 수없이 침대에 누워 그녀가 얇게 썰은 감자를 내 얼굴과 양 팔에 붙이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방금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해서인지 감자를 차게 해 놓은 것인지 피부에 붙은 감자가 시원해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역시 답답하다.
"조금만 참으세요."
"아무렴, 누구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나의 비꼼을 알아들은 안나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되도록이면 일주일에 두 번정도 연재하려고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