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국 발해 2대왕 대무예의 산동 등주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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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6년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발해를 거치지 않고 직접 당에 조공을 했다. 이어 당 현종이 흑수말갈 지역을 흑수주(黑水州)로 삼아 장사(長史)를 두고, 사신을 파견하여 진무케 하였다. 발해국왕 대무예(武王)는 당이 흑수말갈과 공모하여 발해를 협격할 것이라 판단하고 동생 대문예(大文藝)를 시켜 흑수말갈에 대한 공격을 서둘렀다.
그러나 대문예는 흑수주에 대한 공격은 당을 자극하는 일이라며 만류하다가 대무예의 진노를 일으켜 소환령을 받자 당나라에 망명했다. 당 현종은 대문예의 망명을 반기며 그에게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의 벼슬을 주었다. 대무예는 당에 사신을 보내 동생의 처벌을 끈질기게 요구했으나 당은 대문예를 보호해주었다.
728년 당 현종은 흑수말갈의 추장에게 이헌성(李獻誠)이라는 중국식 성명을 하사했고, 흑수경략사(黑水經略使)를 제수하였다. 같은 해 4월 당에서 숙위 중이던 발해 왕자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망했다. 흑수말갈에 대한 당의 조치는 발해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발해의 차기 왕위계승자 대도리행이 갑자기 사망한 사건은 대무예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대문예는 형의 장자 대도리행의 사망으로 차자인 대흠무(大欽茂)와 똑같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발해의 차기 왕위계승에 당의 개입 가능성이 커졌다.
발해국왕에게 있어서 망명한 동생 대문예의 문제는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730년 정월에 입당한 발해사신 대낭아는 당 현종이 대문예를 영남(양자강 이남 지역)으로 유배보냈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본국에 보고했다. 대무예는 강력하게 당에 항의했고, 정보누설을 알아챈 당 조정은 책임자를 파면하는 동시에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다.
731년 8∼9월경 칙서를 지참한 당의 사신이 발해를 향해 출발했다. 칙서의 내용에서 당 현종은 발해국왕 대무예의 행실에 흠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동생 대문예를 보호했다고 했다. 이어 발해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 대문예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당을 배반하는 행위이며, 이에 대해서 당이 조치를 취할 것임을 시사했다. 이러한 칙서 내용에 대한 강경한 대답으로 발해는 732년 9월 당의 등주를 기습 공격하게 되었다.
경과
732년 9월 발해 해군이 당나라 등주의 치소(治所)에 상륙했다. 발해의 장군 장문휴(張文休)는 등주를 약탈하고 기반시설을 철저히 파괴했다. 그곳은 과거 수·당이 고구려를 해상으로 공격할 때 전함과 보급선이 집결했던 해군기지였다. 상륙한 발해군을 저지하기 위해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이 병력을 이끌고 출동했다. 장문휴가 이끈 발해군은 위준을 전사시키고 휘하 병력을 거의 섬멸하였다.
당 현종은 발해군의 급습으로 등주자사 위준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갈복순(葛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하지만 여기에 관한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갈복순이 병력을 이끌고 등주 현장에 도착했을 무렵 발해군은 철수해버린 듯하다.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군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 전선을 타고 귀환한 것으로 여겨진다.
결과
발해가 당의 등주를 기습공격한 이후 당은 대문예에게 유주(幽州)의 병사를 주어 발해를 공격하게 했다. 733년 동시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 남쪽 국경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과 신라의 발해 협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직후 발해국왕 대무예는 낙양에 사자를 보내 자객을 고용한 후 동생 대문예를 제거하려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발해의 등주공격은 발해가 당을 언제든지 침공할 수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당이 발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등주공격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고 활발한 문화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이라는 발해의 이칭은 당시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탄생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