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렸다.
어제 이맘때즈음 적이 날 찾아와 한 달간 자기와 사귀어보지 않겠는가를 제안했었다.
현관문을 벌컥 열고 거침없이 들어오는 저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 후 아무리 어색하더라도 디나 케이에게 피해주는 일은 삼가하기."
다짜고짜 내뱉은 말이다.
적은 자신만만한 폼으로 내게 돌진하여 가볍게 입을 맞춘다.
당황하는 나.
"역시 프리스타일일 줄 알았다."
라 말하곤 덧붙이는 '적'.
"적어도 내가 어색하게굴일은 없을테니 걱정마."
.
"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
.
고막을 사정없이 때리는 스피커의 음악소리에 내 영혼을 맡기며.
저 끝으로 곤두박질쳐지는 놀이기구에 나의 몸을 맡기며.
소리를 지른다.
무를 잊겠다는 자체가 우스워 눈물이 흐른다.
얼마나 그를 좋아했다고.
언제부터 그를 좋아했다고.
'사랑한다'는 단어까지는 아닌것도 같아, 미처 꺼낼 생각도 하지 못하면서.
얕다...
얕으므로 그를 버릴 수 있다.
...
적이 렌트카를 끌고 내앞에 와 선다.
방금 탄 놀이기구의 후유증에 정신이 몽롱하여, 안에서 내 쪽의 차문을 열어 '타라' 고 말
하고있는 적을 겨우 알아본다.
차에 올라타 잠시 텀을 주던 난 그에게 천천히 말한다.
"...사랑한다고 해보지도 못할만큼의 관계에서 정리하려는게 이렇게... 생각보다 얕지않을
거라는 거... 몰랐어."
무와 서로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 있을만큼의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
미처 실현해볼 수 없었던 실현가능성에 대한 미련은,
꽤나 컸다.
"지금 알았으면 그렇게 지금부터 깨닫기 시작하면 되는거지."
붉은색 굵은 꽈배기 니트를 껴입은 건장한 그를 바라본다.
거친 구석이 있지만, 점점 그가 괜찮은 남자라는걸 느낀다.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살며시 입을 뗀다.
"미안-."
'적'이 시동을 걸며 짧게 말한다.
"드라이브나 하자."
천천히 출발하는 차 안에서 난 생각한다.
'무 때문에... 두 번째로 남자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뒤로, 뒤로, 죽을듯이 비껴가는 나무들이 끝이 없을 듯하다.
귓가에 잔잔한 팝송이 흐른다.
난 창 밖에서 눈을 거둬 가만히 적을 쳐다본다.
갑작스럽게 무척 그와 키스가 하고싶어서.
내 시선을 느낀 그가 "왜," 하는 찰나, 그에게 키스한다.
차는 삐뚤삐뚤 도로 한 켠에 서버렸고, 그는 날 살짝 밀쳐내며 말한다.
"위험하잖아. 다음부턴 세우라고 말해."
난 허파에 바람든듯 웃으며 그에게 미안하다 말했고,
우린 본격적으로 키스를 나누기 시작한다.
...
"적 사랑해?"
"..."
"사랑하냐구."
디의 물음에 무어라 대답할지를 생각하다 곧 그런 나를 스스로 비웃으며 답한다.
"한 달만. 이제 보름 남았어."
"한 달만 사랑하는게 어딨어."
"어차피 진짜로 사랑하는것도 아닌걸."
날 바라보는 디의 눈빛이 마치 길가의 부랑자를 보는듯해 잠시 섬짓한다.
"어차피... 아직 아무도 대신 들여놓고 싶진 않은데, 않은데... 그애가 다 알고 자기가
먼저 잠시 들어와 있겠다고 했는걸. 난 그냥 흐르는대로 했을뿐이야, 디."
"그애가 뭘 다 알고있는데? 너 그애가 무하고도 친구라는거, 알고있어? 아직 너의 그사람이
무라는거, 적은 모르는거, 적이 알고있어? 넌 알고있어?"
"뭐... 라는거야. 무슨소린지 못알아듣겠어."
"그러다가 적이 정말 널 사랑하기라도 하게되면, 너 어떡할거야. 적도 사람인데. 마음이
아파질 수도 있는 사람인데, '난 네 친구 무를 아직 잊지 못했어.' 라고 말할거야?"
케이와 친구이면 당연히 무와도 친구일 수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적이, 내가 아직 가슴에 담고있는 사람이 '무' 라는 걸 알든말든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그냥 우린 '한 달 뒤엔 깔끔함'을 전제로 잠시 함께있는 것이다, 라 생각했다.
내가 살짝 실수한 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이론대로 되지 않을수도 있다는 사실을 살짝 망각했지만, 그저 가능성일뿐이다.
'무의 친구 적과 어느새 정이 들 수도 있다' 라는 가능성.
간단하다.
아니, 조금은 복잡할지도 모르겠다.
적의 존재를... 깨워주려는 듯한 디이다.
"좀 일찍 귀띔해주지-."
"그러게말야. 두고보려했던게 '이제서야'가 되어버렸네. 잘 매듭 지으라구- 내말, 으흠?"
"응. 그런데... 우리 길 잃은 것 같아, 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던 디와 나는 무심코 엉뚱한 길로 빠져
버리고만다.
"못살아. 우리 몇 살이니."
...
<101호>에 케이와, 손님이 와있다.
"무, 오랜만이잖아~ 발길 너무 뜸한거 아니니?"
디가 인사를 했고, 묻혀서 눈인사를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잡아다 앉히는 내친구 디.
그래. 각자 애인도 있겠다, 마음이 한결 가볍다.
어느새 부산스럽게 움직거리던 케이와 디의 자취는 사라져버린지 오래, 나와 무만이 거실
한복판에 썰렁하게 앉아있다.
"왠일로 혼자네."
그의 그녀가 항상 그의 옆을 채우고 있었음을 난 새삼 깨달으며, 오늘 그녀의 빈자리에 사뭇
궁금증이 일어난다.
"...헤어졌어."
뭐.
지금 너 뭐라고 한거니.
난 네가 그여자랑 결혼이라도 할 줄 알고 커다란 공허감에 빠져서는, 처음 본 남자와 같이
밤을 보내고, 것도 모자른 듯 해서 네 친구랑 입이나 맞추고 있는데, 너, 뭐라고?
...
하긴. 내멋대로 생각해 놓고.
그저 혼자 하늘이 무너져내릴 것 같아하고, 혼자 '저들은 결혼도 할것이고 난 영영 안녕이
다', 라 생각해버려놓고는.
"왜. 너 또 여자 맘 몰라주고 막 그랬지 않았나 싶다."
"맘대로 생각하고, 나랑 술이나 마셔줘야겠는데, 나가자."
"내가 왜 너랑,"
"빨리와."
"...응."
순이 아줌마네 마트.
현후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던 바로 그자리에 앉는 무.
"우리- 다른 곳에서 마시면 안될까."
"현후자식도 여기 별로 안좋아하던데. 너도냐."
"아니다. 앉아."
그의 '현후' 발언이 거슬린 난, 옆의자에 검은색 원통형 가방을 내려놓고 그와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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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 1.
[ 중편 ]
퍼레이드 [17]
작가가된부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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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03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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