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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는 법/렘 7:1-11
출 처| 양인순목사
지난 주 저희 교회가 후원하고 있는 <미래목회 포럼>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을 위한 지침서’를 발간하는 일입니다. 목회자들과 신학자, 그리고 평신도들이 참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고백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의 실제적인 매뉴얼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사면 반드시 매뉴얼이 있습니다. 매뉴얼 속에는 자동차의 시동을 켜는 방법부터 최적의 상태로 자동차를 사용하기 위한 모든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자동차를 안전하고,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뉴얼을 숙지해야 합니다.
이미 한국 선교가 이루어진지 125년이 지났습니다. 한국교회는 여러 교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하나의 성경과 하나의 찬송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우리가 무엇을 고백하고, 무엇을 믿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의 구체적인 실천 매뉴얼이 없습니다. 이미 천주교에서는 ‘교회와 사회생활 지침서’가 나왔습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있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인지 구체적인 매뉴얼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로인 판사님이 동성연애가 왜 죄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대로 살면 되지만 그것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때로는 자의적인 해석이 따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감하고 실천해야 할 신앙과 삶의 지침서를 통해 한국교회가 새롭게 거듭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비윤리적인 모습과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세속주의의 경향에 대해서 세상은 쓴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는 세상 한 복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함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며,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성채를 높이 쌓고 안주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아닙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친교 과잉증에 빠진 교회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분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촉매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성전을 새롭게 회복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고, 생명을 살리는 믿음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봉독한 예레미야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된 모습을 잃어버린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회복할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예레미야 7장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성전 문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에 성전설교(Temple Sermon)라고 불립니다. 본문 2절 전반부에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성전설교를 두 번 했습니다. 예레미야 7장과 26장입니다. 26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 설교는 역사적으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즉위 초, 대략 주전 609년경이 이루어졌습니다. 요시야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종교개혁을 행하고 성전을 수리한 훌륭한 왕입니다. 그는 성전을 수리하던 중 신명기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요시야는 이 책을 읽다 유다에 임한 모든 재앙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긴 것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도 회개하고,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수리하며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39살의 나이에 애굽과의 전쟁에서 애굽왕 바로느고에게 죽임당하고 말았습니다.
요시야가 죽고 난후 그 아들 여호야김은 왕이 되자 아버지가 파괴했던 우상을 다시 세웠습니다. 이처럼 악한 왕이 세워지자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백성들은 피상적으로 요시야왕을 따라 종교개혁을 하다 다시 여호야김을 따라 우상숭배로 돌아섰습니다. 우상을 좋아하는 죄악이 도진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인 위기, 악화되는 영적전환기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성전 설교의 주제는 참된 믿음이 없는 종교행위의 문제입니다. 참된 믿음이 없는 종교생활은 어떤 것이며 그 위험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불신자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예배하러 오는 자들을 향해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성전으로 예배하러 오는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3절)
이 말씀은 예배하는 자들의 삶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들의 예배생활,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 그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에 거짓 선지자들은 성전 신학(Temple Theology)이라 불리는 거짓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시온산 곧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서있는 한 예루살렘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학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반복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세우게 하시고, 내가 영원토록 거기에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성전에서 하는 모든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을 거짓이라고 말씀하실까요?
그들의 성전의 의미를 왜곡시켰습니다. 시온산에 성전이 있으면 그 성전이 자신들의 모든 삶을 지켜주시고, 책임져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그들의 신앙 안에 엄청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편 132편을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이렇게 노래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시편132:13-16)
그들은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그 성전을 하나님의 거처로 삼아 주셨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성전에서 영원히 거하시며, 성전 안에 있는 자기들에게도 풍족한 복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못된 성전신학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 있는 성전이 세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표상이지 본질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원하셨습니다. 예배의 행위가 아닌 예배의 내용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에 나와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외쳤지만 그것은 속빈 강정과 같은 것입니다. 물이 없는 오아시스처럼 형식만 있지 그 속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7장 10절을 보십시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그들은 성전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만 그것은 가증한 일을 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하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가증한 일들은 무엇일까요? 9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삶 속에서는 여전히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숭배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 예배드리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고 있음을 책망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성전을 정화하실 때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짐승을 사고 팔고, 돈을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집으셨습니다. 그리고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분노하십니다(마21:12-17).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분노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성전의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 속에 처해 있는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 구원을 보증하거나 우리의 안전과 부귀영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우리들이 바른 예배를 드리고, 바른 성전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살 때 우리는 주님의 보호와 축복아래 살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처럼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 성전 자체가 우리를 보호하거나 구원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거짓 신학에 속고 있었습니다. 시온산에 성전이 세워져 있고, 성전 안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해 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전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태도입니다. 행위보다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나 예배가 아닙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번영을 가져다 줄 종교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들은 성전을 여호와의 집이라고 말하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장소로 둔갑하고 말았습니다.
건물이 성전이 아닙니다. 건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하는 장소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태도입니다. 우리들이 이 성전에서 어떤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예배드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창조와 구속의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우리 각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처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누가 자기 부모를 선택했고, 누가 자신의 외모와 자신의 환경을 택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알 수도 정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하나님의 작품으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라고 우리를 창조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가를 알아야 우리는 의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입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나 같은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주신 은총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를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고, 천국을 선물로 주신 것보다 값진 은혜가 어디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만개의 입이 있어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다 말할 수 도 없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기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와 구속의 은총을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여 감사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행복 전도사로 유명했던 최윤희 씨 부부의 동반자살 소식을 들었습니다.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입지전적인 자신의 삶을 긍정의 언어로 울트라 행복을 전하던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희망과 행복을 전해주던 분입니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된다며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해서 공감을 일으켰던 분입니다.
그런데 700가지가 넘는 자신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결국은 남편의 손에 먼저 죽고, 남편도 그 뒤를 따라 죽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성공하고, 희망과 행복을 말해도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면 그 모든 것은 결국 허망하게 끝나고 맙니다. 솔로몬의 고백처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부귀영화는 바람을 잡는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오늘 칼럼에도 썼는데요, 인간은 그 어떤 이유로도 자신의 생명이 끝났다고 타임아웃을 선언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작품으로 지으셔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살도록 사명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예배하는 자는 결코 생명의 고귀함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예배자는 창조의 소중함과 생명의 고귀함을 날마다 깨닫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먼저 나를 창조하시고, 나의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보다 감사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천하를 다 얻어도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도 내게 생명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도록 부르신 사명을 깨닫고 사는 자가 바로 참된 예배자요, 하나님의 성전을 회복하는 삶임을 믿습니다.
둘째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본문 5절 말씀에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정의란 무엇입니까?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약한 자를 돕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서 결국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진정한 정의가 이 땅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개인의 행복과 자유라는 관점과 공동체나 국가의 집단의 이익은 항상 상충되기 때문에 결국은 어느 한 쪽이 희생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무리 우리가 공정한 사회를 부르짖고, 정의로운 사회를 외쳐도 결국은 갈등과 혼란이 상존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이 자기 이기심이라는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간의 힘으로 정의를 이루는 것은 어렵습니다.
진정한 정의는 십자가의 사랑 안에 존재합니다. 자신을 비워 종이 되는 희생과 섬김, 사랑이 없는 정의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부자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십니다. 약한 자,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섬김이 없는 삶은 영생의 삶으로 나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장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새롭게 회복하는 것은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을 돌보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이요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욕망의 노예로 살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입니다. 예배의 승리가 바로 인생의 승리입니다. 예배를 귀하게 여기시고, 예배의 자리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가 아니라 성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일뿐만 아니라 나머지 6일도 모두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약한 자를 돕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임을 기억하고 섬기는 자의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내 마음의 성전이 아름답게 세워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참된 예배자가 되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여 우리 자신을 아름다운 성전으로 새롭게 지어가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