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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준선생님의 아래 글은 금주부터 [전남타임스] 신문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나주를 사셨던 배경으로 나주시민의 공감을 풋풋하게 하실 이 옥고를 잠시 지웠다 다시 실을까 했는데, 김양순국장님의 덧글도 아래에 있고 하니 그만 두었습니다. 의견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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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 새절
산기슭 초가삼간에 묻혀 살던 선비들
내 고향 나주에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집이 셋인데, 대밭에 둘러싸인 박 처사의 집이 그 하나요, 부첫머리 산자락의 외조부께서 기거하시던 집이 그 둘이며, 나의 증조모와 종조부께서 사시던 금성산 새절이 그 마지막 하나이다.
우리의 옛 선비들은 벼슬을 마치면 낙향하여 산기슭에 초가삼간을 짓고 유유자적하였다. 그러나, 자의건 타의건 도회지로만 몰리는 현대인들은 설령 정년퇴직을 한다 해도 자연과 더불어 소요하는 생활을 꿈꾸기 어렵다.
박 처사나 외조부나 종조부께서는 특별히 부유했다거나 지체가 높았다거나 학문이 깊은 선비가 아니었지만 모두 시정의 소란함에서 한 걸음 물러난 곳에 터를 잡고 한거하셨다. 나는 거기에서 자연과 벗하고 자연에 귀의하는 옛 조상님네들의 정신을 발견한다. 그분들이 마지막이었다. 앞으로는 며칠씩 쉬어 가는 별장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산그늘이나 산 속에 묻혀서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까.
박 처사님 댁은 금성산 끝자락의 광활한 대밭 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민가를 빠져나와 논밭을 지나서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대밭이 나왔다. 거기서부터 또 비탈길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로 엮은 울타리를 끼고 한참 올라가면 대숲이 좌악 갈라지면서 대로 엮은 사립문이 보이고, 황토 흙이 벌겋게 드러난 음습한 길을 따라 사립문을 지나면 행랑채 마당이 나온다. 그 마당을 건너면 이기 낀 돌층계가 나오고, 층계를 밟아 올라가면 금붕어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연못과 넓은 안채 마당이 나타난다. 꽤 길쭉한 집인데 집 뒤꼍에는 소나무와 감나무, 상수리나무가 몇 그루 대밭 사이로 반공에 드높이 솟아 있다. 그 집에 들어서면 마치 동양화를 보는 듯한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되고 오밀조밀한 구성에 놀란다. 그 집은 지금도 건재하며 그분의 후손들이 거처하고 있다.
외조부님은 본래 청동리 마을 안에 사셨는데 노년에 슬하의 자녀들이 모두 외지로 나가자 부첫머리 산발치로 거처를 옮기셨다. 기와를 얹은 세 칸 집이었는데 주위에 별로 민가가 없는 독립가옥이었다. 울타리는 있는 둥 마는 둥 엉성하였고 가을이면 울타리 안팎으로 노란 국화가 소담스럽게 피어났다. 부엌 옆에는 우물과 연못이 있었고 연못에서는 금붕어들이 놀았다. 집 뒤꼍에는 대밭이 조금 둘러섰고 대밭 다음에는 끝없는 솔밭이었다. 외조부님께서 별세하시자 그 집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나무꾼 줄 있던 마을이 유원지로
1987년 9월 25일자 광주 일보를 받아 든 나는 한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에 시선이 멈추었다. 나주시 경현리 일대를 유원지로 개발할 계획이라는 기사였다.
경현리! 꿈에도 잊지 못할 산간 마을이었다. 새절에 오르내리면서 내 발이 닳고 닳은 동네였다. 거기에서는 주로 나무꾼들이 살았다. 집집마다 빨간 감이 나무에 대롱거렸고, 동네 앞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동네 입구에는 당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고, 길손들은 주막집에 앉아 목을 축였다. 논밭 뙈기도 조금 있었지만 워낙 산골짜기인지라 식량을 자급자족하기에도 바빴다. 경현리 골짜기에서는 날마다 땔나무를 가득 진 나무꾼들이 줄지어 성안(나주 읍내)으로 나왔다. 나무꾼들은 읍내 시장터 어귀에서 지게 작대기를 받쳤다. 너나없이 아궁이에 나무를 땔 때였다. 아낙네들은 땔나무를 쭉 사열한 다음 마음에 드는 지게를 골라 흥정을 했다. 흥정이 끝나면 나무꾼은 지게를 지고 아낙네를 따라가 부엌에 부려 놓고 돈을 받았다.
연탄이 등장했다. 나무꾼은 자취를 감추었다. 경현리도 많이 변했다. 자동차 길이 트이고 통닭집이 몇 군데 냇물을 끼고 들어섰다. 나는 지금도 기회가 생기면 친지들과 경현리로 간다. 소싯적에는 걸어 다녔지만 지금은 택시로 다닌다. 나는 경현리 통닭집 별채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머얼리 상산 (금성산 제일봉) 쪽을 쳐다본다. 산모퉁이에 가려 새절이 있던 곳은 보이지 않지만 손바닥만큼 보이는 새절 곁의 산비탈에는 소나무가 무성하다. 그 곳은 이삼십 년 전에 내가 시원한 솔바람을 쏘이며 책을 읽고 낮잠을 즐기던 곳이다.
이제 그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산간 마을을 유원지로 개발한다는 것이다. 통닭집 몇 군데가 들어선 것쯤은 저어할 바 아니지만 유원지로 탈바꿈해서 시멘트 냄새, 지폐 냄새에 섞여 화장품 냄새까지 물씬 풍길 일을 상상하면 아찔하다. 우악스런 문명의 발톱이 추억의 오솔길을 박박 할퀼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우리는 왜 자연 그대로를 순수하게 즐길 수 없을까.
나는 지금부터 박 처사나 외조부의 집보다 훨씬 멀리 속세에서 떨어진 종조부의 새절 이야기를 털어놓고자 한다. 새절은 광복 직후에 세워져 1966년까지 20년 동안 비바람에 부대끼다가 뜯겨졌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새절 이야기는 20 여년 저쪽에 묻혀 빛이 바래고 이끼가 돋아 전설이 되려 하고 있다.
요즘에는 깨끗한 물을 따로 사 먹어야 하고, 공기 오염도를 ppm으로 측정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는 사실 너무나 자연과 떨어져 살고 있다. 코앞의 극심한 생존 경쟁에 휘말린 나머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쪼록 변변치 않은 새절 이야기가 도회지 생활에 찌들린 현대인들에게 한 줌의 맑은 공기, 한 사발의 맑은 물과 같은 청량제 구실을 할 수 있기를 빈다.
새절 짓고 들어앉은 종조부와 증조모
금성산은 나주읍 서북쪽에 위치한 해발 452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평야 지대에 불쑥 솟아 있어 상당히 높아 보인다. 성안(읍내)에서 상산(上山--금성산 제일봉)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4km끔 되며 두어 시간이면 넉넉히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나의 종조부께서는 상산 5-6백 m 아래에 열 칸의 초가 (다섯 칸 겹집)를 짓고 증조모와 함께 부처님을 섬기며 살았다. 금성산 제이봉 아래 골짜기에는 예로부터 유서 깊은 다보사가 있었으므로 경현리 사람들은 종조부의 산가(山家)를 새절이라고 명명했다. 절이라 해 봤자 좀 큰 초가집에 불과했고, 불공을 드리러 오는 신도도 없이 증조모와 종조부께서 개인 자격으로 부처를 모셨으므로 여느 여염집과 다름이 없는 분위기였다.
증조모께서는 열셋인가 되는 자녀를 생산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아마 빈곤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으로 남은 자녀는 장남인 나의 조부님과 차남인 종조부님 두 분 뿐이었다.
증조부 대에 평동면에서 살다 어찌어찌 성안으로 이사했지만 가세는 더욱 곤궁해졌다. 증조부께서 돌아가셨고, 조부께서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종조부께서는 일찍이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가셨다. 분명치는 않지만 중국 천지를 돌아다니며 무슨 장사를 하셨단다. 그분은 상당히 많은 돈을 벌어 가지고 광복 직전에 귀국하셨다. 나의 조부마저 돌아가셨으므로 이제 증조모의 자식은 종조부 한 분뿐이었다. 종조부가 증조모를 모셔야 했다. 세파에 시달린 증조모께서는 산 속에 절이나 하나 지어 주라고 하셨다. 종조부는 거액을 들여 새절을 짓고 당신의 어머니와 함께 입산했다. 종조모와 자녀들은 성안에 남겨 놓은 채.
내가 철이 들 무렵, 새절은 이미 새 절의 티를 벗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새절로 가려면 세 갈래 길이 있었다. 심향사를 지나는 길은 생각나면 한 번씩 이용했다. 성안으로까지 뻗어 내린 산줄기의 등성이를 타고 봉우리를 일곱 개나 넘는 길은 험난해서 힘이 들었다. 경현리를 지나 다보사 사는 길과 갈라져 산모롱이를 몇 번 휘감아 오르는 길이 가장 평탄했는데 보통은 그 길로 다녔다.
명절에 부모 손을 잡고 새절로 올라가면 볼이 움푹 파인 증조모께서 가장 반겨 주셨다. 당신께서는 속세에서 올라온 첫 증손주가 굉장히 귀여운 모양이었다.
국민학교 운동회 날이면 노구를 이끌고 햇밤을 쪄서 머리에 이고 오셨다. 응원석에서 살짝 빠져나와 증조모에게 달려가면 보자기를 끌러 윤이 나는 햇밤을 한 움큼 쥐어 주며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셨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이었다.
궁둥이에 걸쳐 대롱거리던 나뭇단
종조부께서는 새절 주위의 임야를 관리하셨다. 국유지가 대부분이었지만 사유지도 있었다. 관리인으로 정식 계약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가을이면 일정 금액을 받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일정 구역의 푸나무를 베어 갈 권리를 넘겨주었다.
물론 우리 집은 무상으로 베어 갈 수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을이면 새절 부근의 산비탈에서 아이들 키만큼 자란 푸나무를 베어 눕혔다. 해가 설핏 다보사 쪽 봉우리로 기울면 우리들은 며칠 전에 베어서 널어 말린 푸나무를 거두어 묶은 다음 지거나 이고 산을 내려왔다. 우리 어머니는 너무 욕심이 지나친 분이었다. 고개가 부러져 나가라고 엄청난 분량을 묶어 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오히려 더 작아 보이는 나무를 지고서도 지게질이 서툰 아버지의 걸음은 위태롭게 뒤뚱거렸다. 아마 그 때 나는 국민학교 3-4학년이었을 것이다. 새끼줄로 멜빵을 만들어서 푸나무를 걸머졌는데 궁둥이에 걸쳐 대롱거리는 나뭇단은 낯간지럽게 작고 초라했다.
골짜기로 내려오면 벌써 침침했다. 어떤 날에는 다보사 골짜기가 아직 멀었는데 까맣게 길이 안 보였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한두 번씩 넘어졌다.
그렇게 몇 날 며칠씩 고생을 해서 집안에 마른 푸나무를 수북이 쌓아 놓으면 한 겨울 내내 구들장이 따끈했다. 그런데, 그 푸나무 때문에 우리 집이 홀랑 다 타 버렸다.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그 날은 내 동생들 중 누군가의 생일이었다. 산에서 내려오신 증조모와 함께 저녁을 먹는데 부엌으로 숭늉을 뜨러 가신 어머니께서 다급하게 불이야, 하고 외쳤다. 할머니와 내가 부엌으로 달려갔을 때에는 아궁이에서 기어 나온 불꽃이 줄줄 흘린 푸나무를 타고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쌓인 나뭇단에 옮겨 붙고 있었다. 당황한 어머니는 나뭇단을 하나 쑥 빼 가지고 밖으로 나가 텃밭에 던져 버렸다. 할머니께서도 하나 빼 가지고 나가셨다. 나도 하나 빼었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 다시 부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벌써 나뭇단 전체로 얾은 불길은 맹렬한 기세로 천장을 핥고 있었다.
증조모께서는 쓰린 가슴을 안고 새절로 올라가셨을 것이다. 그 해에 우리 가족은 을씨년스런 집터를 바라보며 문간방에서 어느 해보다 더 추운 겨울을 떨며 지냈다. 아버지의 장사가 잘 되어 불난 터에 기와집을 지은 것은 몇 년 후의 일이었다.
여기서는 안개지만 저 아래선 구름
냇물 가까운 산허리를 깎아 내려 들어앉힌 새절은 정남향이었으므로 여름에는 아주 시원하고 겨울에는 포근했다. 새절 마루에는 볕이 잘 들었다. 마루에 앉으면 마당 아래로 대나무 잎사귀들이 언뜻 비치고, 댓잎 너머로는 산봉우리들이 내려다 보였다. 산봉우리들 너머로는 영산강과 나주평야와 야산들, 그리고 멀리 지평선을 희미하게 가로막아 선 산맥이 보였다.
새벽이면 절 아래 골짜기에서 안개가 일었다. 시간이 흐르면 그 안개는 대밭을 타고 올라와 마당을 건너 마루까지 밀려들었다.
“할아버지, 이것이 안개라요, 구름이라요?”
“응, 성안 사람들이 보면 구름이지만 우리가 보면 안개란다.”
신선이 따로 없었다. 구름이 오락가락 휘감아 도는 새절에서 사시는 증조모와 종조부가 바로 신선이었다. 그러나 신선치고는 아주 배고픈 신선이었다. 별로 벌이가 없는데다가 특별한 신도도 없었으므로 부처님에게 이렇다 할 공양 한 번 제대로 올릴 수 없었다. 부처님도 항상 배가 고팠다.
새절에서 자는 날에는 으레 독경 소리에 잠이 깼다. 증조모께서는 새벽마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예불을 드렸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증조모의 독경 소리는 너무도 청아하고 낭랑하여 어린 소년의 영혼을 높고 신성한 곳으로 이끌어 갔다.
새절의 살림살이는 매우 가난했다. 새절을 지을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 금의 환향한 종조부께서는 넉넉한 재물을 지니셨을 것이다. 그러나 들어만 가고 나오는 곳이 없었으므로 세월이 흐를수록 궁색해질 것은 불 보듯 빤한 이치였다. 내가 철이 들 무렵, 종조부께서는 이제 더 이상 처분할 만한 재산도 없었다.
사실 새절은 별로 돈도 필요 없는 곳이었다. 부엌방 바깥 처마 밑에 놓여 있는 디딜방아가 자급자족의 경제 형태를 잘 보여 주었다. 성안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춘 원시 시대의 유물이 새절에서는 아직도 훌륭하게 제 구실을 해냈다. 보리를 비롯하여 웬만한 곡류는 모두 거기에다가 짓찧고 바수어 먹었다.
파란 유황불에 장죽 붙여 물고
드물게는 성안의 소풍객들이 새절 부근으로 놀러 오는 경우가 있었다. 증조모께서는 그들이 버린 나무도시락 빈 껍질을 주워 씻어 말려서 유황을 녹여 묻혔다. 그것을 가늘게 찢어 유황이 발라진 쪽을 화롯불에 꽂으면 퍼런 불길이 일었다. 증조모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성냥을 한 통도 사지 않으셨다.
집 뒤의 너른 텃밭에는 고구마, 호박, 무, 배추와 함께 담배를 가꾸었다. 담뱃잎이 넓적해지면 줄줄이 엮어서 처마 그늘에 널어 말렸다가 작두로 썰어 모자간에 장죽에 눌러 담아 피우셨다. 두 분께서는 한가하면 언제나 장죽을 물고 계셨다.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가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 보면 방안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침침한 석유 등잔을 사이에 두고 두 분께서는 장죽을 물고 석불처럼 우두커니 앉아 계셨다. 별로 얘기들도 없었다. 담배가 다 타면 땅땅, 재떨이에 재를 비우고 새 담배를 눌러 담았다. 유황 묻힌 성냥을 화로에 묻으면 파란 인광이 너울거렸는데 그걸로 담뱃불을 붙이셨다.
그분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세월을 불사르고 계셨다. 밤이 길어져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한 많은 세상이었다. 남들처럼 일가족이 오순도순 한 지붕 밑에서 지내 본 일이 드물었다. 배 불리 잘 살아 본 기억도 별로 없었다. 인생이 괴롭고 허망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그런 밤이면 마주 앉아 한정 없이 담배를 피웠다.
자욱한 담배 연기를 뒤로하고 마루로 나오면 오슬오슬 한기가 들었다. 댓돌의 신발을 꿰고 토방과 마당을 지나 마당가에 서서 대밭 쪽으로 오줌을 눈다. 손톱 같은 달이 다보사 쪽 봉우리 위에서 빛난다. 발밑에 웅크린 꺼먼 산봉우리들이 거대한 용처럼 꿈틀거린다. 어디에선가 밤새가 자지러지게 운다. 몸을 한바탕 부르르 떨고 소년은 잽싼 걸음으로 방에 들어간다. 여전히 담배를 피우기는 두 분을 등 뒤로 하고 자리에 눕는다. 다음 날 새벽이면 또 증조모께서는 어김없이 염불을 외웠고, 큰방으로는 미닫이를 통하여 법당의 향불 냄새가 스며 들어왔다.
폭포수 속에 고여 있는 무념무상의 경지
부엌문 곁에 물통이 있었다. 계곡에서 물통까지는 나무 홈통으로 연결했다. 계곡의 물은 홈통을 타고 졸졸 흘러 들어왔다.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홈통에는 푸른 이끼가 짙게 끼어 있었다. 그 물이 바로 식수였다. 수돗물이 아니니까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자연이 걸러 준 가장 깨끗하고 신선한 물이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마시면 배탈이 나기도 하였다. 종조부께서는 철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
마당에서 서른 발짝쯤 걸어 나가면 개울 징검다리가 나왔다. 상산 꼭대기에서 발원한 개울물은 새절을 지나 다보사 물과 합류하고, 진동(경현리) 골짜기 물과 만나서 한수동을 지나, 성안을 휘젓고 영산강으로 빠졌다. 징검다리 위에는 웅덩이가 있었다. 거기에서 빨래도 하고 세수도 했다. 웅덩이 위에서는 여름철이면 폭포수가 쏟아졌다. 소년은 새벽에 일어나 컴컴한 길을 더듬어 개울가에다 옷을 벗어 놓고 폭포수 아래로 들어가 앉았다. 한참 동안은 등줄기가 서늘하고 머리통이 부서질 듯 아프고 벼락치듯 시끄럽지만 그도 잠깐이었다. 이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무념무상의 경지가 찾아왔다. 아무리 욕심 많은 속인들도 저절로 성불할 지경이었다. 비록 성불까지는 못했지만 폭포에서 나오면 소년의 몸과 마음은 날아갈 듯 맑고 가벼웠다.
징검다리 아래쪽으로 쏟아진 물은 대밭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대밭 안에는 가시덤불 속에 꽤 넓은 웅덩이가 있었다. 거기에도 대낮이면 간간이 햇발이 비쳐 들었다. 그 곳은 참으로 아늑하고 조용한 세계였다. 투명한 물속에서 피라미들은 살랑살랑 꼬리를 저으며 한가로이 유영했다. 작은 새우들은 툭툭 튀어 다녔고, 긴 수염을 가진 징거미(왕새우)는 기다란 앞발을 고정시킨 채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가재는 바윗돌 밑에서 엉금엉금 기었다. 바위에 붙은 다슬기들은 가재보다 훨씬 느린 걸음걸이로 소요하면서 주어진 삶을 즐겼다. 웅덩이 곁에는 바위 틈새기에 굴이 뚫리고, 굴 근처에는 여기저기 토끼 똥이 널브러져 있었다. 산토끼가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종조부께서는 토끼가 농작물을 해친다고 눈살을 찌푸리셨다. 대밭에 설치한 덫에 토끼가 한 마리 걸렸다.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축 늘어져서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내 동생은 처음 보는 산토끼가 신기해서 어쩔 줄 몰랐다. 철사를 풀어 낸 토끼를 줘 보라고 졸랐다. 종조부께서는 동생 손에 토끼를 넘겨주셨다. 동생은 귀엽다며 몇 번 쓰다듬어 보고는 토방에 내려놓았다. 토끼는 조금 기운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봤다. 폴짝폴짝 몇 걸음 뛰었다. 어, 뛰네, 뛰네....... 동생은 좋아라고 고함을 질렀다. 뛰네, 뛰네 하는 사이에 토끼는 이제 정말 빠른 속도로 마당을 가로질러 대밭 속으로 숨어 버렸다. 동생은 시무룩해졌다.
설이나 추석에는 아침을 일찍 지어먹고 새절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반찬과 떡과 술을 보자기에 쌌다. 가난 때문에 불화가 잦으신 부모님도 그 날만은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며 걸으셨다. 싱그러운 자연이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 주는가 보았다. 다리가 아프니까 쉬어 가자느니, 좀 더 가서 쉬자느니, 나와 어머니는 실랑이를 벌였다. 쉬다가 걷다가 경현리를 지나 산모롱이를 네댓번 돌면 멀리 새절이 나타났다. 마당가에 서 있는 토담 굴뚝에서는 실연기가 흩날리고, 새절은 대밭에 가려 지붕밖에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이---, 나는 손나발을 하고 목청껏 외쳐 댄다. 내 고함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골짜기 이쪽저쪽을 부딪치며 새절로 올라간다. 그 날은 종조부께서 미리 마당에 나와 계셨다. 누구냐아, 산에서 오래 사셔서 쩌렁쩌렁 울리는 종조부의 목소리가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다. 나요오---, 나는 기쁨을 가누지 못하고 다시 외친다.
절을 올리고 나서 어머니는 보자기를 끌렀다. 증조모께서는 호박엿이나 고구마엿을 내어 오신다. 술상이 차려지고 종조부와 아버지는 잔을 기울이며 집안 이야기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신다. 화롯불 석쇠 위에서는 떡이 구수하게 익어 간다. 증조모께서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우고 증손주를 눈으로 더듬으신다. 너는 어찌 그리 이빨도 희냐, 어찌 그리 눈도 초롱초롱하냐. 어찌 그리 공부도 잘 하냐.
옛 이야기로 지새우던 여름밤
언젠가는 친구들과 한여름 대낮에 땀을 흠뻑 뒤집어쓰고 새절에 당도했다. 증조모께서는 급히 아궁이에 솔가지를 꺾어 넣고 물을 끓여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뚝뚝 떼어 넣어서 수제비 죽을 쑤었다. 뜨거운 죽을 훌훌 불어 가면서 우리들은 배고픈 김에 너댓 그릇씩 포식했다. 당신이 쑤어 준 음식을 너무도 맛나게 먹는 우리들이 그렇게 흐뭇하셨던 모양이다. 또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셨다.
이야기도 잘 해 주셨다. 새절에서는 저녁을 일찍 먹었다. 산그늘이 빨리 내려오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마치면 마루에 걸터앉았다. 여름이라도 밤이 되면 서늘했다. 모기도 거의 없었는데 그 까닭은 산중이라 기온이 낮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저기에서 고추밭을 매고 있었더란다. 증조모는 이야기 주머니를 끌러 놓으셨다. 한참 밭을 매고 있는데 무엇인지 휙 소리가 나면서 묵직한 것이 연거푸 머리 위로 올라앉았다. 무심코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에그머니나, 손에 무엇인가 물컹하게 꿈지럭거리는 촉감이 왔다. 엉겁결에 잡히는 것들을 내동댕이쳤다. 던져 놓고 보니 개구리와 뱀이었다. 쫓기던 개구리가 다급한 김에 머리 위로 뛰어오르자 추격하던 뱀도 내친 김에 뛰어올랐던 것이다. 낮에 들어도 무서울 이야기를 밤에 들으니 등골이 서늘했다.
좀 떨어진 곳에 앉아 장죽을 빠시던 종조부께서도 이야기를 거드셨다. 하루는 저녁 어스름한 무렵에 마당으로 구렁이가 기어갔다. 종조부는 구렁이를 막대기로 때려 죽였다. 날이 밝으면 다시 치울 요량으로 우선 마당가의 굴뚝 부근에 밀어 놓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굴뚝 곁에 있어야 할 구렁이가 거의 두 동강이 난 몸뚱이를 이끌고 마루 위에 올라와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마치 원수라도 갚으려는 듯이.
그만 하시요, 그만 해. 무서워 죽겄소. 나는 비명을 지르며 큰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허허허, 종조부께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셨다.
새절의 토방 주위로는 빙 둘러 고구마 이파리 비슷한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종조부께서 구해다가 심으셨다는데 냄새가 고약한 독초였다. 뱀이 그 냄새를 싫어한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집안에서는 한 번도 뱀을 본 일이 없었다.
댓잎이 받아 내던 소록소록 겨울 눈
산중에는 언제나 평지보다 더 많은 눈이 내렸다. 성안에 발목까지 차는 눈이 오면 새절 마당에는 무릎이 빠질 정도로 엄청난 눈이 쌓였다. 눈이 내린 아침에는 유난히 사위가 고요했다. 겨울인데도 포근한 느낌이 들고 큰방 창호지 문은 은은하게 흰빛을 반사했다. 방문을 열고 나서면 새로운 풍경이 전개되었다. 댓잎들도 제각기 자기들이 감당할 만큼의 눈을 싣고 있었고, 솔가지들은 수북한 눈 더미를 떠받들고 있었다. 간혹 눈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솔가지가 투두둑 부러지는 소리도 들렸다. 발아래 산봉우리들은 떠오르는 햇빛을 받고 은백색으로 찬연히 빛났다. 봉우리 너머로 펼쳐진 들과 강도 흰빛 일색이었다.
몽남이와 나는 대빗자루와 당그레로 마당의 눈을 치웠다. 대밭으로 눈 더미를 떠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무릎이 빠질 정도로 많이 온 날은 당그레가 서너 발짝도 못 가서 막히고 말았다.
눈이 온 날은 일거리가 없었으므로 아침부터 윷을 놀았다. 윷은 해변에서 주워 온 고동을 사용하였다. 편을 짜서 놀았지만 절간답게 내기로 걸린 것이 없었다.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이었다. 그래도 나는 재미있어 하며 계속 놀자고 졸랐다. 마지못해 서너 판 더 놀아 준 증조모께서는 하품을 하시며 장죽을 찾아 물었다. 그러면 끝이었다. 몽남이와 나는 마당으로 나와 대밭 곁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에서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눈에 앙증맞게 찍힌 토끼 발자국을 뒤쫓다가 발을 헛딛어 움푹 파인 구덩이 속으로 나동그라지기도 하였다.
새절에는 식모가 필요했다. 몇몇 아주머니들이 들어왔으나 얼마 안 가서 하산해 버렸다. 그 중에서도 몽남이를 데리고 올라온 몽남어메가 끝까지 새절을 지켰다. 사바세계에서 숱한 고생을 하여 한이 맺힌 눈치였다. 비록 몸은 고달파도 마음이 편한 새절이 지낼 만했던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궂은일을 도맡아 해냈다. 몽남어메는 종조부의 부인 역할까지 했다.
몽남이는 나보다 한 살 덜 먹은 순진무구한 소년이었다. 국민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으므로 글에는 어두웠지만 천성이 우직하고 착했다. 몽남이는 종조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종조부께서도 어느 정도는 아들 대접을 해 주었다. 저녁이면 종조부께서는 상을 펴게 하고 불을 밝혀 몽남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치셨다. 그 때가 몽남어메에게는 가장 행복하고 감격적인 시간이었다. 그러나 몽남이는 여러 번 되짚어 주어도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허허, 너는 학문으로 대성하기는 틀렸는갑다. 종조부께서는 탄식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리셨다.
사람 꼴 구경하기가 힘든 산골에서 쇠꼴이나 뜯기던 몽남이는 내가 올라가면 반색을 하며 반가워 어쩔 줄 몰랐다. 공부는 못해도 새절 주위의 사정에는 달통했으므로 나를 데리고 다니며 산딸기가 많은 곳을 가르쳐 주고, 머루도 따 주고, 물고기도 잡아 주었다. 한 번은 고기를 잡다가 소나기를 만났다. 죽어라고 뛰었으나 새절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속옷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우리들은 큰방에 딸린 골방에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홀랑 벌거벗고는 물기를 닦으며 킥킥거렸다.
개울 건너뛰듯 저승으로
요렇게 달 밝은 밤이었지.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면 증조모께서는 또 마루에 앉아 이야기보따리를 끌러 놓으셨다. 달은 노오랗고 부드러운 빛 가루를 골짜기 가득 부어 놓았다. 그런 밤이면 새절에서 내려다보이는 골짜기와 산봉우리들은 꿈꾸듯 요염한 자태로 엎드려 있었다.
증조모께는 이모님이 계셨다. 그 이모님은 살아생전에 입버릇처럼 화장을 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마침내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증조모께서는 화장을 하여 뼛가루를 영산강에 훌훌 뿌리셨다. 그렇게 죽음 뒤끝이 깨끗하고 개운할 수 없었다. 내가 죽으면 우리 이모님처럼 화장을 해서 영산강에 뿌려 주라. 마지막 말씀은 내가 아니라 종조부께 하시는 얘기 같았다. 이야기를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종조부께서는 묵묵부답으로 장죽만 빨고 계셨다.
내가 중학교 일학년 때였다. 가을 어느 새벽에 몽남어메가 산에서 내려왔다. 집안이 어수선해지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나는 졸린 눈을 부비며 할머님께 까닭을 물었다.
“너희 삼대할머님께서 돌아가셨단다.”
전날까지도 증조모는 말짱하셨다. 여느 때처럼 이른 저녁을 자시고 잠자리에 드셨는데 얼마 후 배가 아프다 하셨다. 종조부께서는 상비해 놓은 한약을 조제하여 끓여 드렸다. 증조모께서는 약을 받아 마시고 주무셨다. 그런데 새벽에 종조부께서 깨어 보니 주무시듯 그대로 돌아가셨더라는 것이다. 향년 75 세였다.
온 식구가 산으로 올라갔다. 종조모와 당숙들도 오셨다. 장례식이 준비되는 동안 나와 몽남이는 징검다리 부근에서 상복을 입고 동글동글한 상수리로 구슬치기를 했다.
나는 증조모의 별세가 다른 일상사와 똑같이 평범하게 생각되었다. 그분은 생전에도 항상 죽음을 가까이 두고 친밀하게 말씀하셨으므로 막상 돌아가셨을 적에도 그리 슬프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분은 별다른 고통도 없이 개울을 건너뛰듯 가볍게 저승으로 건너가 버리셨다. 나는 지금도 증조모의 죽음이 가장 행복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화장을 하라는 당신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화장터가 없어서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분은 상여도 없이 널 그대로 떠메어져 생전에 당신께서 구슬땀을 흘리시던 새절 뒤 산비탈의 밭머리에 누워 한 세월을 보내다가 금성산 줄기 대호리의 선산에 모셔졌다.
‘우상이다’---불상은 아궁이 속에
종조부의 입산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분들은 종조모와 당숙들이었다. 당숙들은 아버지가 가장 필요한 성장기에 종조부와 떨어져 살았으므로 (가끔 만나기는 했지만) 깊은 상처를 받았다. 고해에서 시달려 온 증조모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하여 입산하셨다지만 다른 쪽에서는 새로운 한이 잉태되었던 것이다.
증조모께서 별세하시자 새절은 경천동지할 변화를 겪었다. 이미 세 당숙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종조모께서는 하나 남은 따님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 가셨다. 몽남어메는 몽남이와 함께 얼마간의 위로금을 받고 눈물을 뿌리며 새절을 떠났다.
이제 부처님이 눈물을 뿌릴 차례였다. 불당이 헐렸다. 나무에 금물을 입힌 그 부처님은 풍족한 공양 한 번 받지 못하고 지내다가 우상이라는 죄명으로 종조모의 손에 끌려 아궁이 불더미 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 뒤로 새절에서는 조석으로 주 예수를 기리는 찬송가가 들렸다. 종조모께서는 만주 시절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종조부께서는 일체가 유심조 (一切唯心所造)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나보고는 유불선, 기독교, 유태교, 회교, 배화교를 두루 공부하여야 큰 학자가 될 수 있다고도 하셨다. 종조모께서 부처를 끌어내리고 법당 방을 보통 방으로 개조하여도 너털웃음을 웃고 마셨다. 특별히 기독교를 배척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십 수 년 동안 별거의 쓰라림을 겪은 종조모에게 많이 양보하시는 것도 같았다. 하기야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 아니던가. 아무튼 증조모가 돌아가시고 종조모가 입산하시면서 새절은 절이라는 이름만 붙은 채 완전히 보통 사람들이 사는 집으로 바뀌고 말았다.
종조부께서도 승복은 있었다. 그러나 승려로 치면 파계승쯤 되었다. 담배는 물론 술과 고기도 잘 자셨다. 그래서인지 곧잘 원효대사가 오밤중에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맛있게 마시던 이야기를 하셨다. 아마 그분이 소싯적부터 수도에 정진하셨더라면 현대판 원효대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시리 사람들은 나만큼도 당신의 무애(無碍) 사상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귀신이야 니 마음속에 있지’
당신께서는 사흘만 술을 못 자시면 치아가 모두 들떠 뻐근하다고 하셨다. 성안에 다녀오신 날이면 어김없이 한 되들이 소주병이 따라왔다. 그 병이 바닥을 보인 후에는 또 안절부절 못하다가 사흘을 못 참고 하산하셨다. 그런 날에는 만취하여 밤이 이슥해야 올라오셨다.
“할아버지, 귀신 안 무섭소?”
“귀신이야 니 마음속에 있지.”
“호랑이 안 무섭소?”
“짐승들은 사람을 피해 다니는 법이여.”
“그럼, 아무것도 안 무섭소?”
“밤길에는 사람 만나는 것이 제일 무섭지.”
술 자신 날은 진지를 더 잘 드셨다. 큰 냄비에 밥을 두어 그릇 털어 붓고 반찬도 몇 가지 부어 휘휘 저은 다음 숟가락 가득 가득 떠 자셨다.
새절에도 도둑이 들었다. 인근에 인가가 전혀 없는 독립가옥이므로 노략질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지닌 재물이 별로 없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도둑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새절을 방문하여 흉기로 종조부를 위협하고 뒤주에 담긴 쌀 됫박이나 옷가지 등속을 털어갔다. 아까울 것도 없지만 아까워하지도 않으셨다. 허허, 또 밤손님이 다녀갔다. 지나가는 투로 슬쩍 흘리고 너털웃음을 웃으셨다.
새절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은 짐안리(노안면 김안리)였다. 청명한 날이면 짐안리 총각들은 지게 발목에 도시락을 대룽거리고 육자배기를 구성지게 읊으며 새절 부근으로 올라왔다. 살짝 살짝 푸나무나 솔가리를 긁어 가면 좋은 텐데 드러내 놓고 요란하게 노래를 불러 가며 못 베개 되어 있는 솔가지를 낫으로 탁탁 찍었다. 종조부께서 달려가 말리면 퉁방울 같은 눈알을 부라리며 불손하게 대들었다.
“이 사람아, 이래서 쓰겄는가. 이 나무가 우거지면 십 년 이십 년 후에 덕 볼 사람은 자네들이여.”
“앗다, 나도 나무 좀 해서 먹고 삽시다. 이 산이 당신 산이요? 비켜요, 비켜.”
뱀이 개구리 잡아먹는 것도 하늘의 이치
옥신각신하다가 한 번은 나무꾼이 종조부를 밀어 버렸다. 종조부께서는 넘어지면서 나무 등걸에 가슴을 받혀 몇 달 동안이나 고생하셨다. 스무 해가 더 지난 지금 그 솔밭은 사람 들어가기가 힘들 만큼 칙칙하게 우거져 있다.
어느 해 여름에는 잠에서 깨어나 보니 종조부 내외분이 신음하고 계셨다. 그 전날 성묘객이 가져온 돼지고기를 먹었는데 나만 말짱하고 두 분은 설사를 하셨다. 나는 산을 내려갔다. 아버지께서는 약을 지어 주시고 수박도 한 덩이 사 주셨다. 금성산 줄기를 타고 봉우리를 세 갠가 넘는데 깜빡 날이 저물었다. 부엉이의 음산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절에 당도했을 때에는 깜깜했다. 수박은 어둠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기저기 바윗돌에 부딪쳐 흠집투성이였다. 노인네들은 그 사이 벌써 기운을 회복하셔서 따로 약을 먹을 필요조차 없었다. 우리는 깨진 수박이지만 맛나게 먹었다. 종조부께서 또 얘기를 꺼내셨다.
“스님과 동자가 수박을 먹었더란다. 스님이 동자한테 물었지. ‘동자야, 수박이 다냐, 네 입맛이 다냐?’ 동자가 뭐라고 대답했겠냐?”
“잘 모르겄소. 뭐라고 했더라우?”
“수박과 입이 만나서 달다고 했더란다.”
나는 개울에서 놀다가 개구리를 물고 있는 뱀을 발견했다. 뱀은 아가리를 힘껏 벌려 개구리를 삼키는 중이었다. 절반 입속에 들어간 개구리는 두 발을 맥없이 허공으로 저으며 버르적거렸다. 나는 개구리가 불쌍했다. 회초리를 꺾어 가지고 뱀을 때렸다. 안 내놓으려고 앙탈을 부리던 뱀은 매를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뱉어 놓고 사라졌다. 개구리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고 멍청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그 이야기를 자랑삼아 늘어놓자 종조부께서는 혀를 끌끌 차셨다.
“뭘라고 그런 짓 했냐? 뱀이 개구리 잡아먹는 것은 하늘의 이치여. 그리고 그 개구리는 살지도 못한다. 다시는 그런 짓 말아라.”
할아버지께서는 잔인한 면도 있으셨다. 한 번은 내 머리가 온통 짓물러 고름이 흐르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당신께서는 개울로 데리고 가시더니 이발소에서 쓰는 면도칼로 인정사정없이 내 머리통을 중머리처럼 박박 밀어 버렸다. 머리카락과 뒤엉킨 피고름이 개울물에 뚝뚝 떨어졌다. 다 밀고 나자 상처에 소금을 찍어 눌러 주셨다. 어찌나 쓰리고 아프던지 울고불고 야단이 났지만 며칠이 지나자 머리통은 거짓말처럼 말짱해졌다.
고시 공부하는 청년들 자주 찾아
방학 철만 되면 나는 공부를 한답시고 새절로 올라갈 채비를 차렸다. 새절에 가면 학과 공부 말고도 종조부께 배울 것이 많았다. 그리고 또 자연이라는 대 스승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있으면 동생들이 주렁주렁한 장남으로서 장삿일에 바쁘신 부모님의 일손을 덜어 드릴 일도 많았다. 그러나 무던히도 속이 없었던 나는 그런 일거리들을 애써 외면하고 공부한다는 핑계로 보따리를 쌌다. 조용한 절에서 공부하겠다니까 말릴 수는 없었지만 부모님들은 내심 나의 산행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너 중 되고 싶냐? 중 될래?”
어머니께서는 드러내 놓고 역정을 내기도 하셨지만 나는 마이동풍이었다.
새절은 식량이 넉넉지 않았으므로 나는 내가 먹을 쌀을 자루에 넣어 책 보따리와 함께 걸머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산으로 갔다.
법당 방은 아주 넓었지만 그 옆의 두 방도 꽤 넓었다. 그 중 한 칸을 내가 차지했다. 겹집으로 지은 데다가 흙담이기 때문에 그 방은 여름에도 서늘하게 한기가 돌았다. 나중에는 흐지부지했지만 처음 며칠은 시간표를 짜 놓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새벽에는 네 시에 일어났다.
한 번은 자명종을 가져다가 네 시에 맞춰 놓았다. 종은 어김없이 네 시에 요란하게 때르릉거렸다. 그 일로 해서 나는 종조부께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바로 옆방에 기거하는 구레나룻이 텁수룩한 중년의 아저씨가 심장병 환자였다. 조용히 요양하려고 산으로 찾아왔는데 종소리로 꼭두새벽부터 놀라게 해서 쓰겠는가. 듣고 보니 과연 지당한 말씀이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쳇, 그런 일이라면 미리 좀 귀띔을 해 주실 일이지.
그 아저씨와 나는 금방 친해졌다. 처자를 떠나 산 속에 들어앉으니까 퍽 외로운 모양이었다. 개울가에서 영어 책을 읽고 있으면 슬며시 곁에 와서 앉았다. 우리들은 당신 몸에 좋다는 독사를 찾아 나서기도 하였다. 아저씨는 독사의 생김새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독사는 한 마리도 발견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성안에 가시더니 약으로 쓴다면서 잔털이 수북한 털게를 구해 오셨다. 우리들은 잘못하여 방에다 풀어놓았다가 번개같이 날쌘 그 녀석들을 다시 주워 담느라고 애를 먹기도 하였다. 우리는 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새절에서 비탈을 내려와 손바닥만한 논뙈기를 지나서 동쪽으로 난 솔밭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가면 산등성이에 이르렀다. 거기에서는 하늘에 솟구친 뭉게구름과 백암산 무등산 월출산 그리고 나주평야 영산강 철도와 야산들이 아주 잘 보였다. 그러나 심장이 약한 아저씨는 산 아래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벼랑에 이르면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분 말고도 새절에는 가끔 손님이 들었다. 개중에는 고시 공부를 하는 청년들도 더러 있었다.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책상에 달라붙은 청년들의 방 앞을 지나갈 적에는 저절로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그 청년이 잠깐 성안으로 내려가 자리를 비우자 종조부께서는,
“저 녀석 합격하기는 다 틀렸다.”
“어째서라우?”
“전번에 여자가 찾아왔다. 오늘도 여자 만나러 갔을 것이다. 자고로 여자 찡게 갖고는 공부 못하는 법이여.”
청년들이 미련했던지 모두 여자들이 끼었던지는 모르지만 불행하게도 새절은 한 단 명의 고시 합격자도 배출하지 못하고 말았다.
가끔 신혼 여행지도 되고
새절의 손님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들은 신혼여행 온 부부였다. 나주군 다시면인가 문평면인가에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신랑의 아버지가 추천한 곳이 새절이었다. 추천이라기보다는 명령이었다. 산세 좋고 풍광명미하고 조용하고 주인이 무던해서 신혼여행 장소로는 안성맞춤이라 했단다. 아닌게아니라 그 신혼부부는 새절에서 일주일 정도 평생을 두고도 잊지 못할 행복한 시간을 만끽했다. 우연히 내가 올라간 시기와 그들이 머문 시기가 일치해서 나는 부럽디 부러운 눈으로 그들의 행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밤이면 바로 곁방에서 쉴 새 없이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 신나고 즐거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꺄르륵거리는 여자의 웃음소리에 섞여 허허, 굵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남자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밤이 깊도록 한정 없이 웃고만 있었다. 아예 이 세상을 웃으려고만 태어난 사람들 같았다. 낮에도 웃었다. 마루에서, 밥상머리에서, 폭포수 쏟아지는 바위 위에서, 오솔길에서, 솔밭 그늘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웃음을 흘리고 다녔다.
신부는 전형적인 시골 여인으로 뼈마디가 굵고 건강해 보였는데 그러잖아도 큰 입을 한껏 벌리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시원스럽게 웃어댔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때라 신선하고 순수한 아름다움과 기쁨이 온몸에서 발산되었다. 신랑은 막 군대를 제대했다는데 아주 건장하고 미남이었다. 알통이 툭툭 불거진 팔에는 문신이 박혀 있었다. 두 손바닥을 모아 입에다 대고 교묘하게 움직여 노랫소리를 냈는데 손바닥을 움직일 때마다 알통에 박힌 문신이 꿈틀거렸다. 솔밭 속에서 손바닥 노랫소리가 들리면 신부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금방 뒤를 이었다. 중매결혼이라는데 어찌 그리 금슬이 좋았을까.
신랑 신부는 아침 이슬의 영롱함과 대낮의 풋풋한 풀 내음과 저녁 안개와 솔바람 소리와 무심히 떠오르는 흰 구름에도 싫증이 나자 성안으로 내려가 영화 구경을 하고 왔다. 석양이 되자 나는 그들을 마중한답시고 꽤 먼 곳까지 내려가 기다렸다. 턱을 괴고 앉아 생각에 묻혀 있자니까 이윽고 한 쌍의 깨 쏟아지는 웃음소리가 솔밭을 거슬러 올라왔다. 신부의 손에는 복숭아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 밤에 새절에서는 복숭아 잔치가 벌어졌다. 그들이 자기들의 안식처로 돌아가자 나는 잃은 것이 없으면서도 괜히 가슴에 휑하니 구멍이 뚫려 한 동안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하루에 한 판만 두는 바둑--인생도 한 판뿐
어느덧 나도 얼추 청년이었다. 자그만 체구였지만 종아리가 통통해지고 조금씩 팔에 알통이 나오고 젖가슴께의 발그레한 근육이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올랐다. 나는 부쩍 달라지는 몸매가 하도 신기해서 거의 매일 한 번씩 새절 부엌 방에 걸린 거울 앞에 서서 웃통을 벗고 육체미 선수처럼 심호흡을 하고 팔을 꺾어 보았다. 금성산의 정기를 들여 마셔서인지 힘이 펄펄 솟구쳤다. 나는 창을 들고 오솔길을 냅다 뛰어 산등성이에 올랐다.
종조부께서 만드신 창이었다. 긴 장대 끝에 속이 빈 원추형의 쇠를 뾰족하게 끼워 박았다. 산짐승의 출현에 대비하여 만드셨다는데 금성산에는 이렇다 할 맹수가 별로 없었다. 결국 그 창은 내가 망가뜨리고 말았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처럼 거창하고 엄숙하게 자세를 갖추었다가 아무데나 힘껏 내던졌다. 창은 흙에도 꽂히고 바위에도 부딪쳤다. 마지막에는 볼품없이 깨어져서 못 쓰게 되어 버렸다.
이제 고등학생은 성안으로 뻗은 산봉우리 위에 턱을 괴고 앉아 사바세계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늘어갔다. 누가 그 나이를 희망찬 봄을 생각하는 사춘기라 했던가. 물방게 같은 자동차와 게딱지같은 민가와 실오라기처럼 피어오르는 연기를 지켜보며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저 눈물겹도록 다닥다닥 붙은 지붕들 밑에서 이어지는 숨 가쁜 삶---인생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허무의 늪---몸서리쳐지도록 두렵고 싫은 죽음. 왜 우리의 육신은 영생을 획득하지 못하였는가. 사춘기의 눈에는 짙은 잿빛 안개가 드리워졌다. 그것은 누구나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 할 통과 의례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종조부께서는 바둑을 가르쳐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신께서도 그저 그렇고 그런 실력이셨지만 나는 축이나 옥집도 몰랐으므로 새까맣게 열 점 이상을 깔고 두었다. 물론 배워가는 동안 까는 돌 수가 차츰 줄기는 줄었다.
종조부께서는 하루에 딱 한 번밖에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 자연히 대국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두세 시간씩 소비하였다. 시원한 법당 방이었는데 일단 대국이 시작되면 무아지경에 빠져 어떤 때에는 약탕관 물이 마르고 약이 타는 줄도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그 때 종조부께서 한 판만 두어 주시는 데에 무척 불만이 많았지만 지금은 이해할 것도 같다. 아마 종조부께서는 인생을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모양이다. 명심해라. 인생은 한 판뿐이니라. 전심전력으로 한 수 한 수 살얼음 밟듯 두어 가야 하느니라.
고구마 순, 풋고추, 파래.... 온통 파란 반찬들
산에는 밤 반찬이 귀했다. 여기저기 산밭을 일구어 채소를 가꾸었지만 자급자족에도 한계가 있었다. 산중 생활에서 모든 것이 때맞추어 생산될 리 만무했다. 고구마 순을 꺾어 국을 끓이면 특유의 알싸한 냄새가 났다. 여름에는 다른 채소들이 귀했으므로 그 국을 실컷 먹었다. 언젠가는 고춧가루가 떨어져 풋고추를 갈아 김치를 담아 놓으니 국물이 파랬다. 그래도 우리는 파란 김치를 매우 맛있게 먹었다.
한 번은 성안에 가셨던 종조부께서 커다란 자루를 메고 오셨다. 말린 파래였다. 나는 파래를 한 주먹 꺼내서 먹어 보았다. 간간하고 고소한 맛이 먹을 만했다. 나는 또 한 움큼 쥐었다. 종조부께서도 나를 따라 한 움큼 꺼내셨다. 밥에다 먹었더라면 새절 반찬 한 달 분은 넉넉했을 그 파래 자루가 반으로 줄어 들 때까지 우리 손은 꾸준히 자루 속을 들락거렸다.
“진도에 원님이 새로 부임했더란다.”
“그래서요?”
“저녁상을 걸게 받았지.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렸는디 이상한 것은 반찬 색깔이 한결같이 파랗더란 거야. 이게 뭔고? 하면 예, 파래 지짐이옵니다. 이건? 예, 파래 국이옵니다. 이건? 예, 파래볶음이옵니다. 이건? 예, 파래 튀김이옵니다. 온통 파래 일색이었더란다. 원님은 부아가 치밀어서, 예끼, 니기미 0도 파래냐?”
나는 배를 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당신께서는 손자 앞이라는 것도 잊고 걸쭉한 욕설을 늘어놓으시며 손은 계속 자루 속으로 들어갔다.
군사 시설 들어서며 새절 떠나
기억에 남는 것으로 그분을 새절에서 마지막 뵈온 것은 친구들과 함께였다. 대학을 다니던 우리들은 정월 대보름을 문평면 산골에 있는 친구 집에서 쇠고 산길을 따라 상산으로 올라갔다. 종조부께서는 손수 친구들에게 소주를 따라 주셨다. 대학생이니까 술을 배울 때도 되었다는 거였다. 친구들의 회상에 의하자면 일체가 유심조라는 말씀도 하셨다 한다. 허허, 여기 살 날도 얼마 안 남았다. 당신께서는 탄식하셨다.
금성산 꼭대기에 미사일 기지를 만든다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 후에는 산을 깎아 길을 닦는 불도저 소리가 김안리 쪽에서 들려 왔다.
금성산에는 옛날에 산성이 있었다. 금성산성은 삼국 시대부터 남방의 중요한 요새였으며, 견훤의 본거지였고, 왕건의 군사상 요지였다. 다보사 쪽 봉우리(금성산 제 이봉)로는 종조부네 밤나무 밭 위에서부터 길이 나 있었다. 조상님네들은 상산 꼭대기에 이르는 길을 이미 닦았었다. 반반한 돌을 꿰어 맞추어서 평평하게 깔았는데 도로 폭은 일차선 도로의 절반쯤 되었다. 돌에는 이끼가 돋고 잡초가 우거졌으며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끊긴 곳도 있었다. 돌길은 다보사 쪽 봉우리의 9부 능선을 감고 돌다가 상산 꼭대기에 도달했다.
상산 꼭대기 50 미터쯤 아래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금성천(錦城川)의 발원지였다. 샘물 곁에는 초라한 초가에서 무당이 살고 있었다. 그 무당이 조선 시대에는 팔도 무당을 호령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은 훨씬 뒤에야 알았다.
미사일 기지로 향하는 도로는 신통하게도 조상님네들의 돌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날 즈음 세워졌던 새절은 스무 살 먹었을 때 철거 명령을 받았다. 약간의 철거 보상비를 받아 든 종조부께서는 새로운 낙원을 찾아 논산 계룡산 부근으로 이사하셨다.
이사 가신 지 서너 해나 되었을까. 마지막 뵈온 것은 우리 집에서였다. 당뇨병에 걸려 많이 초췌해지셨다. 내가 살 날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는갑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쓸쓸하게 말씀하셨다. 너무 걱정하지 마이시요. 요즘은 좋은 약 많이 나온다 안 헙디여. 나는 바랑을 메고 떠나시는 당신께 신탄진 한 갑을 쥐어 드렸다. 그 담배가 위대한 스승에게 바치는 나의 첫 공양이자 마지막 공양이었다.
1970년 11월 6일, 나는 벽지의 국민학교에서 그분의 부음을 받았다. 나의 어린 영혼을 풍성하게 적셔 주었던 당신께서는 70 세를 일기로 표연히 떠나셨다.
저 묏봉우리 내 돌아갈 고향일세
언젠가는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땅에 평화가 가득하고 군사 시설이 철거되면 나는 새절 터에 다시 초가집을 세울 것이다. 그 때에는 나도 꽤 늙었으리라. 나는 거기에서 장죽을 빨며 지나온 삶을 고마워하고 귀적(歸寂)을 예비해야겠다.
산을 생각함
빛 처음 열리던 날 금성산 솟아올라
발아래 나주평야 영산강 굽어보며
몇 억 겁 유구한 세월 한 뜻으로 섰도다.
동산에 해 떠오고 상상봉 달 기울 제
안개 치마 두르고 백설 솜옷 해 입어
저 아래 속세 일일랑 까마득히 잊어라
산기슭 정남향 양지 바른 數間茅屋
향 맑은 법당 안에 웃고 계신 저 부처님
오호라 인생살이가 구름자락 같아라
일체를 흘러내려 뭇 중생 목축이고
모두를 거둬들여 품 안에 잠재우는
장할싸 저 묏봉우리 내 돌아갈 고향일세
(끝)
첫댓글 비 내리는 월요일 아침,
지난주까지 마무리했어야 할 일을 갈무리 못하고 밤배 꿈속에서 씨름하다 일어나 보니 기진맥진한 아침, 오늘과 내일은 또 죽어라 기사를 써대야 겠구나 하는 부담백배의 심정으로 집을 나서는데, 누군가 발목에 내 몸무게만한 차꼬를 채웠다 보다.
질질 끌며 나오는데 바람 한 점 없는 가을비와 비에 젖은 채 도로가에 도열해 있는 낙엽들은 마치 나를 마중하러 보낸 누군가의 초대 같다.
확 따라 가버릴까...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구독료 내고 신문 기다리는 독자들이 계실 것인지라, 사무실을 지나치지 못하고 엉거주춤 들어선다.
같이 일 하는 조 국장은 찾아온 후배들과 오전 내내 노닥거리다 밥 먹으로 가자는 말도 없이 저 혼자 휑 나가버린다.
오냐,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러던 차에 목포에 사는 조명준 선생님이 유년시절 나주 금성산 자락에 살았던 추억을 담아 기고문을 보내오셨다.
거기에 나온 시 한 편이 오늘 내 점심이 됐다.
환장하겠다
이봉환(1961~ )
한 머스마가 달려오더니 급히 말했다
선생님 ‘끼’로 시작하는 말이 뭐가 있어요?
끼? 쫌만 기다려
나는 사전을 뒤졌다 ‘끼니’가 얼른 나왔다‘
녀석은 단어를 찾는 동안 신이 나서 지껄인다
서연이하고 끝말잇기를 했는데요 걔가 ’새끼‘라고 하잖아요
곧 내가 말했다 응, ’끼니‘라고 그래라
녀석이 환해져서 달려갔다가 껌껌한 얼굴로 금방 다시 왔다
선생님, 그 새끼가요 ’니미씨팔‘이라는데요?
*웃음을 주신 조명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연재 첫 글을 보았어요. 한 신문에 내 원고와 늘 가까운 분의 글을 함께 읽으니 눈가에 흐뭇한 잔주름이 하나 늘었어요. 연재원고인지 모르고 올렸다가 그러면 다시 내려놓을까 싶었죠. 시키시는대로 할테니 말씀만 하세요~~~!
아뇨, 그냥 여기서 보는 것도 좋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글 속의 장소를 찾아가 보고 싶은 생각도 들고요.
나중에 금성산 들꽃탐사 할 때 조명준 선생님을 모시고 가면 진짜 재밌는 스토리 텔링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조명준선생님의 옛 고향과 그 꽃길? 나야 양순씨 보고 조명준선생님 만나는 일이니 좋기만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