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사람은 온 몸속을 뜨겁게 맴도는 제 조상의 핏줄기는 속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기에 지금의 일본 아키히토(明仁, 1989년 즉위) 일왕도 지난 2001년 12월 23일, 도쿄의 왕궁에서 내 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공언했나 보다. 그 날 아키히토 일왕은 68번째의 생일을 맞으면서 기자회견을 갖고 다음처럼 말했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간무(桓武, 781∼806 재위)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 501∼523 재위)의 자손이라고 역사책 [속일본기]에 쓰여 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朝日新聞 2001년 12월 23일자 보도)
일왕이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더욱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입증할 만한 매우 중요한 행사가 2004년 8월 3일, 충청남도 공주의 무령왕릉에서 거행되었다. 이 날 일본 왕실의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 왕자가 백제 제25대 무령왕 왕릉(공주 송산리 제7호 고분)에 찾아와 제사를 지냈다. 아사카노 왕자는 한국에 건너오기 직전에 도쿄의 황거에서 지금의 아키히토 일왕의 윤허를 받고 공주에 왔다. 아사카노 왕자는 일본 왕실에서 직접 가지고 온 고대 일본 왕실의 향을 향로에다 피우며 제삿술과 제사용 음식물 등 제물을 진설하고 무령왕의 영전에 깊이 머리 숙여 절을 올렸다.
지금의 아키히토 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 왕자는 제사를 모시고 나자 공주 시내의 공주시청으로 오영희 공주시장을 시장실로 찾아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아사카노 왕자는 일본 왕실에서 가지고 온 향로와 향을 무령왕릉 제사 기념으로 오영희 공주시장에게 직접 기증했다. 그가 오영희 공주시장에게 기증한 향은 1300년 전에 일본 왕실에서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일본 왕실 제사용의 향이다.
고대 백제인들은 4세기 경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내해의 난바(難波) 나루터(難波津 지금의 오사카 난바)로 건너갔다. 그 무렵부터 난바는 백제인들의 새로운 개척지가 되기 시작했다. 영국인들이 영국의 요크(York) 지방으로부터 대서양의 험한 파도를 넘어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가서 새로운 항구를 개척하고 뉴욕(New York)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듯이, 백제인들은 영국인들보다 이미 1400년 전에 현해탄의 험한 파도를 건너가 고대 일본 내해의 새로운 나루터를 글자 그대로 난바(難波, 난파)로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의 오사카 중심지 난바는 이미 고대 백제인들의 터전 바로 그 자리다. 오늘의 오사카 중심 번화가다.
백제에서 일본 왕실로 천자문 책을 써가지고 건너간 백제인 학자 왕인(王仁, 5C)박사가 지은 일본 최초의 고대시인 와카(和歌)가 바로 그 난바 나루터 노래(難波津歌 나니와쓰노우다)였다. 그 무렵 난바의 백제인 왕족 오진왕(應神王, 4∼5C)의 왕실은 현재의 오사카부인 구다라스(百濟洲) 땅에 있었다.
고대 한국인들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일본에 먼저 와서 살고 있었던 일본 선주민들을 거느리면서 서로 혼혈하게 된 과정을 설득력 있게 지적한 저명한 학자가 있다.
일본의 아자후대학 수의학과 다나베 유이치(田名部雄一) 교수의 “개로부터 찾아내는 일본인의 수수께끼(犬から探る日本人の謎, 1985)”라는 논문을 보면 한반도로부터 고대 일본으로 개가 건너왔다고 쓰여 있다. 개는 저 혼자 한반도로부터 호기심을 갖고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먼 바다로 일부러 건너갈 수 없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왜섬 땅으로 건너갈 때 개도 함께 데리고 간 것이다.
다나베 유이치 교수는 잇대어 다음처럼 쓰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무렵, 한반도에서 야요이인(彌生人, BC 3∼AD 3C 시대 한국인)이며 고분인(古墳人, AD 4∼6C 시대 한국인) 등 도래인들이 일본열도로 건너오면서 새로운 개를 데리고 왔다. 그 이후로 인간은 혼혈하여 현재의 일본인들이 성립되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개도 혼혈하여 대다수의 일본 견종(犬種)도 성립되었다.”
고대 오사카 땅을 백제주(百濟洲, 구다라스)라고 불렀는데, 주(洲)라는 글자는 대륙 또는 국가의 터전 등을 뜻하는 한자어다. 그렇다면 어째서 오사카 지역을 백제 나라로 불렀던가. 오사카 시내에서 백제 즉 구다라(한자어의 百濟, 또는 久太郞) 지명들이 여기 저기 수없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부터 1천 5백년 전인 서기 4세기 경부터의 일이다. 왜냐하면 4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수많은 백제인들이 백제로부터 일본 규슈며 오사카 땅으로 건너가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제주의 셋쓰국(攝津國) 구다라 고우리(百濟郡, 백제군)를 구다라(久太郞,くたら)라고 읽었으며, 그 고장은 삼향(三鄕)으로 나누었다는 역사의 기사가 화명초(和名抄, 934년 경 성립)에 밝혀져 있다. 여기서 삼향이란 동, 서, 남 세 곳의 지역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지금의 오사카 시내 중심지 일대는 이미 7세기 중엽인 서기 646년부터 백제군(百濟郡)이라는 행정구역이 설치되었다고 사학자 기무라 가매지로(木村龜次郞) 씨는 지적했다. 그 뒤 다시 120년만인 서기 765년의 일본 왕실 문서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에도 백제군이라는 기사가 나타났고, 일본 왕실 편찬 역사책 속일본기(續日本紀, 797년 일본 왕실에서 성립)에도 서기 791년조에 백제군이 보인다.
속일본기에는 수많은 백제 왕족들이 백제인 간무왕(桓武, 781∼806 재위)에 의해 항상 조정의 고위 조신으로서 승진하는 기사들로 넘치고 있을 정도로 백제가 망한 뒤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왕족들에 대한 특대, 특전 사항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눈길을 모으기에 족하다. 그런 기사 가운데 간무왕이 백제 왕족 난파공주(難波姬)에게 정6위상(正六位上)에서 종5위하(從五位下) 품계의 벼슬을 주었다는 기사도 보인다(791년 1월 9일). 이 대목이야말로 그 당시 백제주의 난파가 전통적인 백제군이며 난파궁(難波宮)은 백제 왕족들의 왕궁이었음을 실감시킨다.
더구나 주목되는 사실은 현재의 일본 도치기현(木)의 지사(知事)격인 당시의 시모쓰케 태수였던 백제 왕족 준철(俊哲)의 승진 내용이다. 즉 시모쓰케수(下野守)인 백제 왕족 준철을 무쓰 진수장군(陸奧鎭守將軍)으로 겸임하여 임명했다(791년 9월 22일)는 기사다. 여기서 ‘무쓰’는 일본 동북 지방(지금의 아오모리현, 미야기현 등 여섯 현이 속한 광대한 지역)이며, 그 당시 북해도 지방 등 북쪽의 아이누족과 일본 선주민들이 결속하여 백제계의 간무왕 정권에 침략 위협을 가했기 때문에 군사적 방위는 매우 중대한 과제였다.
그 뿐 아니라 간무왕이 백제 왕족들과 더불어 백제음악 연주를 듣고, 백제 왕족들(乙叡, 玄風, 善貞, 淨子, 貞孫)에게 각기 벼슬을 올려주었다는 기사(791년 10월 12일)도 주목하기에 족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 후 9백 50년 정도가 지난 16세기 말엽에 이르자, 백제주의 바탕인 백제군이라는 오사카의 행정 지명이 느닷없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누가 갑자기 백제군이라는 행정 지명을 없애 버린 것인가. 그는 1592년 4월에 우리나라 부산 땅을 침범하며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 침략을 저지른 왜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라는 것이 추찰된다. 왜냐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인 1617(元和 3)년의 고문서에도 백제군이 결군(缺郡) 되어 그 이름 자체가 행정 지명에서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행이랄까, 그 후에 백제군이라는 본래의 군 행정 지명은 다시 등장했다. 그 경위는 아직 역사 자료가 없어서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그러던 것이 1889년부터 백제군을 없애 버렸다. 그 후 백제군 지역에 새롭게 만들어진 행정지명은 남백제촌(南村)과 북백제촌(北村)이 남과 북 양쪽으로 나뉘어 오사카 중심 지역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군국 치하에 이르자 남백제와 북백제라는 행정지명도 사라지게 되었다.
남백제와 북백제 지역이라는 행정지명이 일제에 의해 없어지게 되었다고 하여 백제(구다라)라고 하는 지명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고대로부터 오사카 각 지역에 뿌리박혔던 백제는 오늘에도 끈질기게 그 자취가 살아있지 않은가. 공공 기관으로서 대표적인 공립학교 명칭인 ‘남백제초등학교’는 오랜 일제 군국 치하를 거쳐 오늘에도 엄연하게 교명을 지키고 있는 게 어쩐지 자랑스럽게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