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해에, 그러니까 루스가 보스턴에 몸담고 있던 마지막 해에
칼 메이스라는 동료투수가 제멋대로 팀을 떠나버리자 루스는 다시
투수로 뛰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에 따라 웨이트 호이트라는 21세의
젊은 투수가 입단할 때까지 루스는 일시적으로 다시 마운드에 서야 했다.
그해 7월31일 루스는 16호 홈런을 터뜨려 아메리칸 리그 시즌 최다홈런 타이기록을 수립했다. 그러나 1884년에 시카고 콜츠의 네드 윌리엄슨이 기록한 메이저리그 최다 기록(27)이라는 공략 대상이 남아 있었다.
보스턴에서 '베이브 루스의 날'이라는 특별행사가 마련된 바로 그날 루스는 투수로 6이닝을 던지고 9회말 새까맣게 날아가는 끝내기 홈런을 터뜨리는 등 북치고 장구치며 시즌 27호홈런을 터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는 결국 1919년을 29홈런으로 마감, 전인미답의 신경지를 열었다.
이 무렵 루스는 보스턴에서 내로라 하는 명사(名士)로 우뚝한 위치를 굳히고 있었지만 해리 프레지 구단주는 돈에 쪼들리고 있었다. 그는 뉴욕 양키스와 장기간 협상 끝에 루스를 10만달러에 트레이드하고 이와 별도로 10만달러를 차용하는 조건으로 거래를 매듭지었다. 루스는 2년간 매년 2만달러의 연봉에다 계약보너스 1천달러를 받는 것으로 트레이드의 설움을 달랬다.
이듬해(1920년) 1월5일 루스의 트레이드 사실이 보도되자 보스턴과 뉴욕시민들 사이에는 비탄과 환희가 교차됐다. 상심한 보스턴 팬들은 프레지 구단주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자 프레지는 옹색한 변명이 나열된 성명서를 발표했다.
"루스는 인격 파탄자이며 보스턴 구단은 그의 상식 밖의 괴벽을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양키스가 그를 데려가는 것은 도박이라고 생각한다. 루스가 사상 최고의 타자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여지껏 유니폼을 입었던 사람 중에 그처럼 이기적이고 분별력이 없는 사람도 일찌기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양키스가 도박을 벌인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호박이 넝쿨째 떨어지는 듯한 대행운을 얻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