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은 1938년 1월 10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백붕제는 지방 관리로 있다가 해방 뒤 변호사로 일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종합 병원인 백병원의 설립자 백인제는 그의 큰아버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정주 일대의 유지이자 선덕을 베푼 가문으로 정평이 나 있다. 1944년 광주 서석국민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인 1945년 아버지를 제외한 식구들이 평북 정주군 남서면 향리로 이주하게 되어 그 곳의 부호국민학교로 전학한다.
그러나 곧 해방을 맞게 되면서 같은 해 10월에 삼팔선을 넘어 서울로 와서 아버지와 합류하고, 재동국민학교로 전학한다. 1950년 6·25가 터진 뒤 아버지는 납북되고, 그는 대구에서 피난연합중학을 거쳐 고등학교에 입학해 2학년까지 다닌다. 이어 서울로 올라온 그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에 미국 브라운대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브라운대에서 영문학과 독문학을 전공한 뒤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1960년에 석사 과정을 마친다.
미국 유학중 백낙청은 한국으로 돌아와 육군 제2훈련소에 입소하는데, 이 일을 두고 언론에서 “자진 입대 위해 귀국한 하바드 석사”라고 보도해 세간의 얘깃거리가 되기도 한다. 군 복무를 마친 백낙청은 1962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바드대 대학원 영문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이듬해 서울대학교에 자리가 나자 돌아와 스물다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서울대 전임 강사 생활을 시작한다.
1966년 백낙청은 리영희 등과 함께 『창작과 비평』을 창간한다. 리영희 교수는 백낙청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처럼 힘겹게 살아온 사람의 눈에는 처음 만난 그 편집인은 그 창간사의 필자일 수가 없어 보였다. 말하자면 귀공자풍의 백면서생이요,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대표적 부르주아적 계층에다, 내가 조금은 경멸하고 많이는 부정하는 소위 미국 대학 출신이라! 그의 집안 내력과 현재 상황 또한 그가 굳이 그런 깃발을 들고 나설 아무런 이유가 없는 터이었다.”
이처럼 외모나 배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도전성을 띠고 있는 그의 『창작과 비평』 창간호의 권두 논문을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학이 역사적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그 자신만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문학이 질적으로 우수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순수해야겠다는 말과는 매우 다르다. 후자가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통용될 수 있는 상식인 데 반해 앞의 것이야말로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며 삶에 대한 특정한 태도를 나타낸 것이다.
문학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며 기존의 순수 문학 이데올로기를 강력하게 비판한 이 글에 표명된 문학관은 백낙청 개인의 것인 동시에 이후로도 견지된 ‘창비’의 기본 노선이다. 이렇게 기존 문단에 파문을 던지며 나온 『창작과 비평』이 통권 14호 만에 1만 부를 돌파한 시점에서 백낙청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중간에 접은 공부를 마저 한다. 1972년 그는 D. H. 로렌스 연구로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다. 그는 이 무렵부터 창비를 거점으로 현실 참여 문학의 최전선에서 그것의 이론적 근거를 다지는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친다.
백낙청의 비평관은 창비의 노선에 거의 그대로 반영된다. 그가 창비를 통해 내세운 이론은 민족 문학론, 시민 문학론, 분단 체제론, 근대 극복론 등이다. 이 중에서도 ‘민족 문학론’은 백낙청의 가장 대표적인 이론으로 창비에 실린 「시민 문학론」(1969)에서 처음 제기된다. 여기서 그는 프랑스혁명을 일으킨 근대 시민 의식과 같은 민중 의식을 한국 문학의 전통에서 찾아 독립적인 시민 문학론의 틀을 세운다. 이후 민족 문학론은 우리 평단에서 커다란 쟁점으로 자리 잡게 된다.
민족 문학이란 그 어느 시기에건 민족 구성원의 대다수를 이루는 민중을 외면할 수 없지만 아직 우리나라의 경우 항일 민족 운동의 시발점이 종래 지도 계급의 이념적 · 실천적 파산기와 겹치면서 민족 문학이 민중에 바탕을 두어야 할 필요성이 더욱 가중되었다. 즉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해 민족 주권을 수호하는 일을 양반에서 기대할 수 없음이 너무나 명백해진 결과 그 대안으로서는 민중 스스로가 이 과업을 떠맡는 길밖에 없었고, 이러한 역사적 사명이 안겨진 민중 의식을 표현하고 일깨우는 문학만이 참다운 민족 문학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한국의 근대 문학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백낙청은 민족 문학이 진정한 전위로서 세계 문학에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백낙청에 의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민족 문학론은 1970년대에 이르러 그 개념이 정립되고, 1980년대에는 민중적 지향이 뚜렷해지면서 내적 분화 양상을 띠게 된다. 1990년대 들어서 민족 문학의 위기가 거론되기도 하지만, 이미 민족 문학론이 우리 문학사를 살피는 하나의 시각으로 자리잡은 것은 분명하다.
백낙청은 진보적 문인들의 결사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창립에 깊이 관여한다. 그는 1974년 1월에 유신 헌법에 반대하는 ‘개원 청원 지지 문인 61인 선언’에 가담하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는다. 같은 해 11월에 그는 ‘민주 회복 국민 선언’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학교측으로부터 사표 제출을 종용받고 거절하나, 12월에 들어 문교부의 징계 조치로 서울대 교수직을 잃는다. 그는 이에 대한 소청 및 행정 소송을 이듬해에 제기한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의 긴급 조치 9호로 『창작과 비평』이 회수되고, 그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출판한 『신동엽 전집』을 문제 삼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된다. 11월에는 염무웅이 복사한 이용악 시집 등을 소지한 혐의로 다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다. 1977년 그는 리영희 편역 『8억 인과의 대화』의 발행인 자격으로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붙들려 간 뒤 반공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된다. 같은 해 말에 그는 창작과비평사 대표직에서 물러나 편집 위원으로 남는다.
이처럼 창비의 수난을 몸으로 함께 겪으며 여러 차례 정권의 폭력 기관에 끌려가는 등 백낙청의 진보적이고 실천적인 자세는 적잖은 시련을 몰고 온다. 이 과정에서 그를 비롯한 창비 관계자들은 당국으로부터 불온 집단으로 낙인이 찍히는 한편, 1980년대의 급진적 운동가들로부터는 노동 해방이나 민족 해방 등을 내세우지 않는 소시민적 민족 문학에 머물고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양쪽의 협공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보면 그 동안 창비가 주장해온 민족 문학론이 옳은 것으로 검증되었다.
백낙청은 문학만이 아니라 사회 과학 쪽으로도 해박한 지식을 갖춘 비평가다. 이것은 창비가 여느 문예지들과 달리 사회 과학 분야도 수준 높게 다루어 학술 사상 문예지로서 자리 잡는 데 밑바탕이 된다. 그는 비평 작업에 임할 때도 문학 이론에만 치우치지 않고 사회 과학을 접목시켜 훨씬 폭넓고 유연한 분석과 전망을 제시하는데, 그 대표적인 보기가 ‘분단 체제론’이다.
분단 체제론이란, 분단 현실을 분단 시대라는 역사 인식이나 민족 모순의 틀로 해소하려 드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한국 사회는 분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기보다 세계 체제의 일부로서 분단 체제와 이에 의해 조성된 다양한 세력 관계 및 매개 변수들에 의해 복합적으로 규정된다는 논리다.
한편 백낙청은 교육자로서 주체적인 영문학 교육에 힘쓴다. 그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외국 문학인 영문학을 저희가 속한 공동체의 사회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사유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이는 외국 문학을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와 떼어놓은 채 가르치던 풍토에 비춰보면 퍽 앞선 교육관이라고 할 수 있다.
백낙청은 1978년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 Ⅰ』을 선보인 이래 1979년 『인간 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1985년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 Ⅱ』, 1990년 『민족 문학의 새 단계』 등을 내놓는다. 그 동안 펴낸 책들의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실제 비평보다 이념의 탐구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창비를 앞세워 한국 비평계의 중심부에서 활동한 그는 1987년 제2회 심산상, 1993년 제1회 대산 문학상, 1997년 제14회 요산 문학상을 받는다. 여전히 현역인 그는 때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비평가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이런 지적은 창비를 비난하는 목소리와 겹친다. 이는 앞서 밝힌 대로 개인의 이념적 궤적이 곧바로 잡지의 노선으로 이어지는 백낙청과 창비의 특별한 관계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