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광양군(光陽郡) 진상면(津上面) 어치동(於峙洞) 출신이다. 정확한 생년월일은 확인되지 않지만 판결문에 따르면 1910년 재판기록에 당시 나이가 41세라고 기재되어 있어 1870년생으로 추정된다. 1908년 전라남도 광양군(光陽郡) 일대에서 위세를 떨친 황병학(黃炳學, 이명 (永文)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광양 지역에서는 1906년 11월 백운산(白雲山)에 은거 중이던 백낙구(白樂九)가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구례(求禮)를 공격한 일로 붙잡힌 바 있다. 황병학은 백낙구 의병부대가 패퇴한 후 다시 백운산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광양의 백운산은 산세가 험하고 골짜기가 깊은 지형상의 이유로 의병들의 유격 활동 근거지로 활용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황병학은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끝에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는 내용의 격문을 사방에 붙여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울 것을 맹세하고 의병들을 모집하였다.
이에 많은 백성들이 호응하였는데, 이때 황병학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1908년 (음)7월 26일, 백운산 묵백(墨栢, 먹벵이)에서 황순모(黃珣模)를 선봉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의병부대의 체제를 갖추고, 백학선(白學善), 구례(求禮)의 한규순(韓圭順) 등과 함께 약 200명 규모의 의병부대를 출범시켰다. 의병부대 대부분은 인근 구례와 하동(河東) 등 농민으로 구성되었지만 백운산과 지리산에서 활동하는 산포수들도 다수 참여하였다. 이들은 산악지리에 밝고 사격술을 갖추었으므로 황병학 의병부대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 황병학 의병부대는 묵백의 임방골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인근 부호로부터 군량과 군자금을 지원받았다.
황병학 의병부대가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삼았던 것은 광양 망덕항(望德港)의 일본 어선과 일본인 어민들이었다. 이는 이 지역의 사회경제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었다. 당시 광양을 비롯해 여수(麗水)·순천(順天)·고흥(高興) 등 전남 남부 해안 지역은 일제의 조선 이주정책에 따라 건너 온 일본인 어민과 다수 일본 어선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진 곳이었다. 이 지역 우리 어민은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그에 따른 일본 어민과의 갈등과 충돌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이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부대는 다른 곳보다 일본 어민들을 공격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의 기록에도 “동 지방 일대에 있어서 우리 어민이 그 참화(慘禍)를 입게 되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1908년 (음)8월 5일 황병학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광양군 진하면(津下面) 망덕리(望德里, 현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거주하는 일본인 이시다(石田耕作) 및 카도노(角野仁平)의 집을 포위하고 기습 공격하는 작전에 참여하였다. 당시 공격에 참여한 의병부대는 양총 3자루, 화승총 25자루, 도(刀) 약 5진(振)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함께 참여한 의병은 50~150명 정도였다.
동료들과 함께 총을 발포하며 기습 공격하여 집 안에 있던 일본인을 놀라게 한 후 카도노(角野仁平)와 그의 처 구(久), 장남 추명(秋明)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난입하여 카도노 소유의 양총 1정 외에 잡품 수점과 이시다(石田) 소유의 무라타식(村田式) 총 1정, 상품, 의류, 가구 등 무기와 군수품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황병학의 지휘 아래 카도노의 집과 어선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소각하였다. 인근 일본인 어부 20명은 모두 도망쳐 흩어졌다. 공격 대상이 된 일본인들은 주로 어업을 목적으로 광양에 이주해 왔거나 잠시 상륙해 있던 자들이었다.
황병학 의병부대 소속으로 일본인 어부를 대상으로 한 기습 공격에 참여한 이후에는 주로 친일 부호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조달하는 활동에 치중하였다. 특히, 1908년 7~8월 사이에 송용문(宋龍文)과 함께 광양군 진하면(津下面) 진목정(眞木亭)에 거주하는 부호 안윤석(安潤錫)의 집에 들어가 엽전 6관문을 군자금으로 징수하였다.
한편, 황병학 의병부대는 1909년 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날로 가중되면서 부대원들을 각자의 뜻에 따라 피신하도록 하였다. 이후 남은 부대원을 이끌고 전남 여천군 삼일면 앞바다에 있는 묘도로 이동하여 그곳을 의병부대의 거점으로 삼고 재기를 도모할 때 함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묘도로 이동 중에 있었던 치열한 전투 끝에 많은 의병들이 희생당하면서 사실상 부대가 해체되었다. 그러자 독자적으로 소규모 투쟁을 이어가고자 강치선(姜致善)·고운서(高云西) 등과 함께 소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지속하였다. 1909년 12월부터 1910년 1월까지 광양군 진상면(津上面) 비촌(飛村)의 부호 황병욱(黃炳郁)에게서 엽전 2관 5백문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군자금 모집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던 중 1910년 4월 12일 하동읍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혔다. 체포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는데, 적괴(賊魁)·의병장(義兵將)·의장(義將) 등으로 표현되었던 것으로 보아 의병부대 내에서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10년 10월 26일 진주지부에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재심에서도 형법대전 제478조 등의 조항에 근거하여 이른바 강도 살인 및 방화로 그 해 11월 22일 대구공소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1년 1월 16일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응백은 전라남도 광양 출신으로 한말 후기의병기에 황병학 의병진에 참여하여 활약한 의병장이다. 그는 1908년 7월 황병학 의병장이 뜻을 같이하는 의병들과 포수 1백여 명을 모아 의병부대를 결성하자 이에 가담하여 전라남도 광양 일대에서 일본인들을 습격하여 사살하고 군자금을 모으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0년 초 군자금을 모으다 체포된 김응백은 1911년 1월 12일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망덕만의 일본 선박을 응징하다
김응백(金應伯)은 전라남도 광양군 진상면 어치동 출신으로 한말 후기의병기에 황병학(黃炳學) 의병진에 참여하여 활약한 의병장이다. 그는 1908년 7월 황병학 의병장이 뜻을 같이하는 의병들과 포수 1백여 명을 모아 의병부대를 결성하자 이에 가담하여 전라남도 광양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김응백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말 후기의병에 참여한 김응백
김응백은 한말 후기의병에 참여하였는데, 후기의병은 1907년 일제가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면서 거세게 일어났다. 1905년 일제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이어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간섭정책을 강화했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거세게 반발하였고, 고종황제는 각국에 특사를 파견하고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도 특사를 파견하는 등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황제를 즉위시킨 후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여 우리나라의 자주국방권을 없앴다. 이처럼 국권이 풍전등화에 이르자 전기의병기부터 항일투쟁을 이끌었던 유생들에 더해 해산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일제의 국권침탈에 저항하는 의병들의 세력은 더욱 거세어졌다.
광양에서 일본인을 응징하다
김응백이 참여한 황병학 의병부대 역시 1908년 백운산(白雲山)에서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의병항쟁을 시작하였다. 김응백은 1908년 8월 5일 일본 선박들이 광양군 진하면 망덕만(望德灣)에 집결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황병학 의병장의 지휘 아래 의병 150여 명과 함께 총칼로 무장하고 망덕리를 습격하였다. 의병들은 일본 선박을 침몰시키고 그 마을에 거주하는 일본인 이시다 코오사쿠[石田耕作]와 카도노 진페이[角野仁平]의 집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카도노와 그의 처 히사시이[久], 장남 아키아키라[秋明], 동거인 다카하시 오키타로우[高撟沖太郞] 등 4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의병들은 카도노가 가지고 있던 양총 1정 등 무기류와 군수물자 및 이시다가 가지고 있던 총 1정과 군수물자를 탈취하고 그들의 가옥은 불태웠다.
의병항쟁을 위한 군자금 마련
이후 김응백은 의병항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의병들을 이끌고 진하면의 진목정(眞木亭)에 사는 안윤석에게서 엽전 6관문을 군자금으로 징수하였다. 그리고 1908년 9월 초순에는 광양군 옥곡면 옥곡원(玉谷院)에 매복하여 있다가 백운산으로 가던 일본군을 기습하여 격전을 펼쳤다. 또 김응백은 강치선(姜致善)·고운서(高雲西) 등의 의병들과 함께 광양군 진상면 비촌(飛村)의 황병욱에게서 군자금 2관 5백문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김응백은 1910년 초까지 광양 일대를 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하다 1910년 4월 12일 경상남도 하동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910년 10월 26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1월 22일 대구공소원에서 확정되어 1911년 1월 12일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
김응백 체포 보도(『대한매일신보』 1910. 4. 24) [판형1] |